소설리스트

재벌의 품격-300화 (300/303)

300화 선택은 네 몫이다

파리에서 안나와 데이빗이 넘어왔다.

오후 2시 인천 국제공항.

정엽이는 몇 달 만에 만나는 아내와 아들을 직접 마중 나왔다.

의전을 위해 며칠 전 파리로 떠났던 수행원들이 카트를 하나씩 끌고 먼저 나왔고, 그 뒤로 데이빗의 손을 잡고 안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국제 화물을 부쳤음에도 안나가 챙겨 온 짐들의 양은 실로 대단했다.

못 본 지난 몇 달 사이 훌쩍 커 버린 듯한 아들.

“대디!”

얼굴에 번져 있는 아들의 장난기를 보아하니, 그간 안나가 혼자 고생이 많았겠단 생각이 든다.

정엽이는 데이빗을 얼른 들어 안고 아들의 볼에 자신의 입술을 붙였다.

그리고 남은 손으로는 안내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첫 포옹 정도는 인정을 했지만, 아빠 품에 안겨 있는 시간이 너무 길다는 생각에 안나는 특유의 엄한 눈빛으로 데이빗을 쳐다봤다.

“데이빗. 내려와. 걸어.”

“놉!”

안나는 아빠 품에서 다시 아기가 되려 하는 데이빗에게 엄한 눈빛으로 말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아빠를 만난 데이빗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내려와.”

그런 안나를 말리며 정엽이가 말했다.

“천천히. 내가 안고 싶어서 그래.”

안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놉! 데이빗. 아빠 만나러 오기 전에 엄마랑 약속했지?”

이번엔 정엽이도 양보를 하지 않았다.

“여기 파리 아니야. 데이빗 나이엔 충분히 아직 이렇게 아기처럼 굴어도 돼.”

“데미안.”

“노, 노. 지금부터는 당신도 한국이란 나라에 적응을 해야 돼. 배우다 만 한국말도 다시 제대로 배워야 하고. 보자마자 잔소리 들으니까 피곤하지? 그러니까 오늘만큼은 서로한테 익스큐즈해 주는 걸로 해.”

다시 한번 아내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해 놓고, 정엽이는 데이빗을 품에 안은 채 공항 청사를 빠져나왔다.

오늘은 작은아버지 댁에서 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이다.

집에 도착한 정엽이는 안나에게 산처럼 쌓아서 가져온 많은 짐들 중, 지금 당장 필요한 것들, 그리고 작은아버지 댁에 가져갈 선물 정도만 챙기라고 하고 거실에서 데이빗과 몸으로 놀아주고 있었다.

수출이 되지 않고 있는 알자스 지역의 화이트 와인 두 병을 따로 챙겨서 나온 안나가 그걸 거실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오늘 하늘이도 온다고 했지?”

“응.”

소파 위에서 데이빗을 자기 배 위로 올려놓고 들었다 내려놓길 반복하며 정엽이가 대답했다.

“분위기 괜찮은 거야?”

“뭐가?”

“혜란, 당신 숙모가 하늘이를 꺼린다고 했잖아.”

“아, 그거?”

어느새 한국 사람이 다 됐다.

정엽이는 그런 안나의 괜한 걱정에 웃음이 나오고 있었다.

“오기 전에 하늘이하고 통화 안 해 봤어?”

“한국에서 보자는 이야기 정도만 나눴지 통화를 길게 하지는 않았어.”

“그랬어?”

“난 혜란, 그녀가 아직도 솔직히 좀 불편해.”

“억지로 친해질 필요는 없어. 그녀 때문에 한국에 온 게 아니잖아. 그냥 잠시 식사 정도 같이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해. 그러다 가끔씩 오늘처럼 초대를 해 주면 찾아가서 만나고, 인사하고…. 오늘 같은 자리는 정말 가끔씩 있는 이벤트라고만 생각하면 돼. 거기에 부담을 느낄 필요도 의미를 붙일 필요도 없는 거야.”

“하지만 다행이란 생각은 하고 있어.”

“뭐가?”

“당신에 대한 감정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는 거 같다고 했잖아.”

“그걸 우리가 다행이라고 생각을 할 이유까지는 없는 거고. 그녀도 그녀 스스로 편해지는 현명한 선택을 한 거뿐이야. 자신을 위한 변화인 거지, 그게 우릴 위한 변화는 아냐. 그리고 그녀가 계속해서 나에 대한, 우리 가족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서,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에 변화가 생기지는 않아.”

전체 창 앞으로 자기 팔짱을 낀 채 선 안나가 혼잣말을 하듯 낮게 말했다.

“정훈. 참 대단한 사람이야. 정말 많은 걸 바꿔 놨어.”

“그건 나도 동의.”

“정태. 그 역시 무척 용기가 있는 사람인 거 같고.”

“고맙지. 그래서 앞으로 내가 신경을 많이 써 줘야 하는 사람이기도 해.”

“확실히 이번엔 느낌이 좀 다르다.”

“어떻게?”

“한국에 올 때마다 내게 이 공간은 집이 아니라 호텔 같다는 느낌이 강했거든. 잠시 머물다 가는. 하지만 한국에 올 때마다 쓰는 공간이라 호텔보다는 좀 더 익숙한. 그런데 이번엔 우리 집 같다는 느낌이 들어올 때부터 들었어. 이거 봐. 나 지금 신발도 안 신고 맨발로 있어.”

그에 정엽이는 싱긋이 웃으며 자신 역시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 상태라는 걸 발을 뻗어 보여 주었다.

“데이빗. 그만 놀고 씻어. 오늘 가족들 다 같이 모여서 식사하는 날이라고 엄마가 말했지? 근사하게 해서 자리에 나가야 할 거 아냐.”

“내가 씻길게.”

“아냐. 이제 혼자서 씻어.”

“벌써?”

“데이빗 나이가 몇 살인데. 데이빗. 데이빗? 얼른 일어나서 씻으러 가.”

하지만 안나의 편을 들어 줄 정엽이 아니었다.

정엽이는 얼른 데이빗을 들쳐 업고는 오랜만에 같이 욕조에서 데이빗과 함께 씻겠다고 했다.

안나는 너무 부드럽기만 한 아빠 역할의 남편을 보며 잠시 인상을 찡그렸지만 이내 충분히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는 것으로 허락을 했다.

* * *

재경 본가는 아주 오랜만에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손여정, 남필우 사장 부부까지 자식들을 데리고 참석을 한 자리였기에 거실 소파만으로는 자리가 부족할 정도였다.

식사까지는 아직 어느 정도 시간이 남은 상태에서 손홍준 회장이 정태와 정훈이, 그리고 정엽이와 동생 부부를 자신의 서재로 불렀다.

손여정은 자신까지 부른 오빠의 모습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못 이긴 척 안으로 들어섰다.

“여정아.”

“네, 오빠.”

“남 서방.”

“네.”

“지금 두 사람, 갤러리하고 또 따로 보유하고 있는 것들 어느 정도 정리하면 정태하고 정훈이가 가지고 있는 모직 지분 다 엎을 수 있나?”

그 말에 손여정과 남필우 사장은 빠르게 서로의 표정을 훑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회장님?”

“모직에 하늘이가 가지고 있는 지분, 그리고 수경이한테 내가 따로 조금 빼 준 지분까지는 내가 손을 못 대.”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났다는 듯, 정태와 정훈이는 말없이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근데 여기 정태, 정훈이가 가지고 있는 모직 지분만 합쳐도 11.4퍼센트가 되거든. 거기에 내가 또 내 지분 10퍼센트 정도를 붙여 줄 거야.”

“오빠….”

“내가 주겠다는 10퍼센트는 말 그대로 그동안 남 서방이 내 옆에서 우리 재경 지켜 주느라 고생했단 의미로 그냥 주는 거고, 정태, 정훈이 지분은 값을 제대로 치뤄야 되지 않겠어?”

그간 그에 관련된 내용에 대해선 약간의 힌트도 받지 못했었기에 남필우 사장은 혼란할 뿐이었다.

“정태, 정훈이가 가지고 있는 11.4퍼센트에 내가 주겠다는 지분 10퍼센트. 거기에 여정이, 남 서방 자네가 각각 들고 있는 지분이면 최대 주주 자리가 바뀔 거야.”

“회장님.”

“끝까지 들어.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딱딱한 말투와는 달리 손 회장의 얼굴 표정은 편안했다.

“사실 내가 이런 식으로 교통정리를 해도 진작에 했어야 해. 근데 이 사람 욕심이라는 게 끝이 없거든. 항공, 모직, 식품. 이것만 가지고 있었을 땐 마음은 항상 가지고 있었지만 용기를 낼 엄두를 못 냈던 게 사실이기도 하고. 남 서방.”

“…네, 회장님.”

“방금 말한 11.4퍼센트에 내가 주겠다는 10퍼센트. 거기에 여정이하고 자네 지분 합치면 30퍼센트는 넘어가잖아. 모직은 우리 재경의 시작이야. 잘 좀 맡아서 나가 봐.”

“…….”

“지금 당장 내가 현금이 좀 필요하기도 하고. 부경물산이 나왔다. 이거 잡아야 될 거 아냐.”

그제야 남필우 사장과 손여정은 손홍준 회장의 계산을 눈치챌 수 있었다.

“미래금융 쪽에서 물산에까지 숟가락을 올리겠다고 한다. 자기들이 현금을 만들어 주겠다 이거지. 못 받을 이유는 없지만, 얼마든지 우리 자체적으로 현금을 굴릴 수 있다면 그게 아무리 사돈네 투자라도 안 받는 게 유리해. 나중에 가서 계산도 깔끔하고. 부경물산 이거 지금 나왔을 때 안 잡으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모른다. 여정이하고 남 서방 자네가 부담스럽고 무리가 되더라도 현금을 좀 만들어 봐. 할 수 있겠어?”

남 사장이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손여정 갤러리 대표가 두 눈에 빛을 내며 입을 열었다.

“진작에 이런 내용이 있었음 귀띔이라도 해 줄 거 아니에요. 얼마나 필요하신데?”

“내일쯤 내가 조 전무 편으로 모직에 사람을 보낼 테니까, 계산기는 그때 같이 두들겨 봐.”

이미 테이블 아래에선 손여정 대표의 손이 남필우 사장의 허벅지를 강하게 쥐며 압박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은 아무 말 하지 말고, 오빠가 주겠다는 거 감사히 받을 준비만 하라는 식으로….

“모직이 우리 재경의 출발이었다면, 식품과 물산은 우리 재경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린 신호탄이었다. 다들 알겠지만 건설도 사실은 물산에서 출발했던 거야. 그걸 바탕으로 항공을 준비할 수 있었던 거고. 정엽이.”

“네, 작은아버지.”

“부경물산. 감당할 수 있겠어?”

“…네?”

“물산은 지금 네가 준비하고 있는 거기도 하잖아.”

형식적인, 예의상 보이고 있는 반응이 아니었다.

실제로 정엽이는 조금 전 작은아버지의 입에서 튀어나온, 감당할 수 있겠냐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사람한테는 나이, 경험에 맞는 적정 용량이라는 게 반드시 존재한다. 정태가 스너프 운영하면서 지금 통신까지 같이 살피고 있어. 거기에 물산까지 같이 챙기는 건 힘들어. 정훈이 역시 조만간 항공으로 보낼 생각이고.”

재경의 경영 구도가 크게 바뀌고 있었다.

원래라면 6월에 정훈이가 통신으로 넘어가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손홍준 회장은 정훈이를 통신이 아닌 항공으로 보내겠단 뜻을 보이고 있다.

그 말은 곧 통신을 항공에서 분리시키겠다는 뜻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항공.

재경의 지주사 항공으로 정훈이를 보낸다?

항공에서 정훈이가 맡게 될 타이틀이 뭐냐에 따라 현재 정태와 정훈이가 펼치고 있는 후계 경쟁의 기울기가 결정된다는 소리다.

무거워진 침묵을 깨뜨리며 손홍준 회장이 재차 물었다.

“왜? 자신 없어?”

“자신이요?”

“사장 자리 앉힐 사람은 많다. 그런데 나는 그 자리에 널 앉혀 보고 싶다. 그리고 내가 그런 생각을 먼저 말하기도 전에 여기 정태가 먼저 그런 이야기를 꺼내더라.”

정엽이는 가늘어진 눈으로 정태를 쳐다봤다.

하지만 정태의 단단한 눈빛은 오로지 아버지, 손홍준 회장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당분간 기업 이름은 부경물산으로 계속 가져가야 될 거다. 통신 때처럼 바로 이름을 바꾸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어. 지난 몇 년간 부경의 이름을 우리 재경의 것으로 너무 많이, 그것도 빨리 갈아 치웠다. 이게 그렇게 좋은 현상은 아니야. 그렇다고 부경의 이름을 언제까지고 계속 가져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재경의 이름으로 바뀌는 게 자연스러울 수 있도록, 그리고 억지가 아닌 당연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게 그렇게 쉬운 작업은 아닐 거야. 할 수 있겠어?”

“지금 제가 준비 중인 물산을 흡수시켜야 되는 거겠지요?”

“그래야 네가 그곳 사장 자리로 올라가는 데 명분이 다져지지 않겠어? 물산만큼은 호텔처럼 새로운 이름이 아닌 반드시 재경의 이름을 다시 달고 싶은 게 내 욕심이다. 할 수 있겠어?”

“작은아버지.”

“그래.”

“지금 저한테 기회를 주시는 겁니까, 아님 선을 그으시는 겁니까?”

정엽이가 조심스럽게 꺼낸 한마디로 정태와 남필우 사장, 손여정의 눈에 조금씩의 떨림이 생겨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손정훈만큼은 약간의 흐트러짐도 없이 손홍준 회장의 반응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떤 선을 말하는 거냐?”

“호텔까지가 제가 욕심을 내 볼 수 있는 영역이다, 하는 선을 그어 주신 거냐고 여쭙는 겁니다.”

“그걸 넘고, 안 넘고는 네 자유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눈치 싸움은 앞으로 나와 할 게 아니라, 여기 정태, 정훈이 네 사촌 동생들과 하면 되는 거다.”

“……?”

“나는 그렇게 지금의 재경을 지켜 왔다. 항상 움츠리고, 눈치 보고, 내 욕심을 숨겨 가며….”

“…….”

“그냥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왔어. 그랬더니 어느덧 30년 세월이 훌쩍 지나 버렸다. 너의 30년 뒤에도 내가 살아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다 한들, 지금 그은 이 선을 내가 지킬 수나 있을까.”

가슴이 올라갔다 내려올 정도로 크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장조카의 모습에 손홍준 회장은 처가인 부경을 상대로 한껏 움츠려 있어야만 했던 자신의 지난 세월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선택은 네 몫이다. 세상은 언제나 너한테 보기를 던져 줄 뿐, 그 보기들 안에서 뭘 선택하든 그건 네 자유고 네 몫이야. 그리고 꼭 그 보기들 안에서만 뭔가를 선택할 이유도 없지. 세상은, 그 보기들은 널 위해 대신 책임이라는 걸 져 주지 않으니까.”

“물산. 기회를 주신다면 제가 거기에 다시 재경의 이름이 어울릴 수 있도록 만들어 보겠습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