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출세하겠네
“네, 이사님!”
금요일 오후 근무 시간.
재경모직 인사부 부장 김원호는 식품의 고성표 이사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네. 네. 아…. 상무님께서 직접 그렇게 요청을 하신 내용인 겁니까?”
난처한 요청이 들어오고 있었다.
말이 요청이지 김원호 부장 본인 선에서는 고민을 해 볼 선택권조차 없는 내용.
생각이 많아진다.
다른 인력을 보내 달라고 하면 무슨 고민이 필요할까.
다른 사람도 아닌 손정훈 상무의 요청인데….
하지만 지금 식품의 손정훈 상무는 모직 인사부로서는 대체 불가능한 인력을 자신 쪽으로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다.
“네, 알겠습니다. 우선 본인 의사가 무엇보다 중요한 거니까요. 제가 한번 물어는 보겠습니다.”
―본인 의사? 무슨 그런 대답이 있어?
“…….”
―지금까지 상무님이 어디 모직 쪽에서 자기 사람 삼자고 사람 빼 가고 그러신 적이 있었어?
“에이, 그건 아니죠, 이사님. 따지고 보면 이사님도 그렇고, 강인성 차장도 다 모직에서 상무님하고 같이 넘어간 거 아닙니까. 조동희 전무님도 그렇고.”
―어허, 그 사람 참. 조 전무님하고 나를 왜 거기에 포함을 시키나? 그리고 강 차장이 어디 인사부 직원이었어?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제가 어디 다른 인력이라면 이렇게 말을 길게 가져가기나 하겠습니까? 곧 상반기 공채 준비 해야 되는 시점에서 핵심 인력 트랜스퍼를 말씀하시니까 그러는 거죠. 여기 사정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면서….”
―지금 바로 보내 달라고 하시는 게 아니잖아. 상무님 항공으로 넘어가기까지 아직 한 달 넘게 시간이 있어. 공채는 그 전에 다 끝날 거 아냐.
“그야 그렇지만….”
―다른 자리도 아니고 항공의 부사장으로 넘어가시는 거다. 아직 재경 생활 기간이 부족해서 말이 부사장으로 넘어가시는 거지 결국은 재경의 지주사를 총괄하는 자리야.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다가 갑자기 그러시니까 저도 당황을 할 수밖에요.”
통화를 끊은 김 부장은 파티션 너머로 박종근 차장과 정현수 과장을 수차례 번갈아 가며 쳐다본 뒤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박 차장.”
“네, 부장님.”
“담배 한 대 피우러 가자.”
박종근 차장은 김원호 부장을 따라 흡연 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식품의 손정훈 상무가 정현수 과장을 요청해 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아놔, 씨X…. 꼭 하필이면 바쁠 때 이 지랄을 해.”
다소 과한 김 부장의 리액션.
생각이 많아지기는 박종근 차장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자신이 가장 믿고 있고 또 의지를 하고 있는 부하 직원은 단연 정현수 과장이다.
사실상 현 재경모직 인사부의 에이스라고 봐야 한다.
HRM뿐 아니라 해외 지사 인력 관리에서도 가장 많은 업무 분담을 해 주고 있는 게 바로 정현수 과장.
인사부라는 조직의 특성상 바로 직속 부하가 빠지게 되면 그 부하 직원이 담당하고 있던 업무는 아래로 내려가는 게 아니라 위로 올라와 자신이 감당을 해야 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이건 지금 업무를 더 하고, 덜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2년째 업계 1위 자리를 지켜 내고 있는 현 재경모직.
국내 시장뿐 아니라, 해외 시장 개척까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 회사로부터 가장 많은 압박을 받아 오고 있는 게 현 인사부라는 부분이 문제였다.
실력 있는 인재들을 더 많이 충원받아도 모자랄 판에 에이스를 데려가겠다고?
그것도 항공으로?
손정훈 상무의 눈이 귀신보다 정확하다는 건 박종근 차장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모직 생활만 해 본 정현수 과장을 아직 아무런 경험도 해 보지 않은 항공으로 데려가서 뭘 어쩌겠다는 걸까?
항공은 재경의 지주사다.
매출 규모는 두말하면 잔소리고 조직의 규모, 인사의 규모 자체가 모직과는 비교가 안 된다.
그런 핵심 사업군에 정현수 과장만 한 실력자가 없겠냐는 거지.
분명 쟁쟁한 실력자들이 인사 쪽으로도 대거 포진을 하고 있을 텐데, 왜 모직에서 인정받고 없어선 안 되는, 대체 불가능한 포지션을 잡고 있는 정현수 과장을 그쪽으로 데리고 가겠다는 걸까?
이것보다 멍청하고, 앞뒤가 안 맞는 인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건 꼭 인사 쪽 전문가가 필요해서 정 과장을 보내라고 하는 게 아니겠구나.
이건…. 손정훈 상무가 정현수 과장을 자기 사람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이겠구나.
그래서 반드시 항공 쪽 인사 관련된 내용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쭉 정현수 과장을 자신의 곁에 두겠다는 뜻이겠구나…. 하고 말이다.
“정 과장… 씨…. 출세하겠네.”
자신이 했던 걱정보다 담백한 입장을 보이고 있는 박 차장의 모습에 김 부장은 속으로 잠시나마 안심을 했다.
어차피 위에서 보내라고 못을 박아 놓고 연락을 해 왔다.
김 부장 입장에선 그걸 거부할 아무런 힘이 없는 존재.
그럼에도 자신의 바로 직속인 박종근 차장의 입장만큼은 공감으로 보듬어 줄 책임이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 과장이 빠지고 나면 박 차장 입장에서 얼마나 골치가 아프고 일할 의욕이 떨어질까.
하지만 정말 다행히도 박 차장은 걱정스러운 모습은 다소 비치고 있었으나, 정 과장 트랜스퍼 요청을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뭐 어쩔 수 없잖아요. 위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면 보내야죠.”
“괜찮겠어?”
“우리 인사가 언제는 괜찮은 일만 해 왔습니까? 안 괜찮은 상황을 어떻게든 괜찮게 바꿔 놓는 게 우리가 하는 일인데. 이게 뭐 어디 좌천이면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꽃길로 보내라는 소리잖아요. 당장 보내야 되는 겁니까?”
“아냐, 그런 거 같지는 않아. 내가 공채 이야기를 꺼내 봤는데, 그거 다 끝내 놓고 보내면 되지 않냐는 식으로 말씀을 하시더라고.”
”아이, 씨X. 이럴 줄 알았음 망 과장 시절 때 내가 옆에 딱 달라붙어서 똥꼬 좀 빠는 거였는데.”
“퍽이나. 이렇게 될 줄 알았어도 넌 못 그랬어. 내가 네 성격을 모르냐?”
“정 과장한테도 말해 주셔야죠?”
“해야지. 아, 근데 진짜 타이밍 X같다.”
“뭐가요?”
“너 같으면 곧 항공으로 간다는데,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손에 잡히기나 하겠냐?”
“그러니 더 빨리 말을 해 줘야죠. 지금 HRM이 정 과장 없이 제대로 돌아갑니까? 그나마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밑에 애들한테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업무들 제대로 인수인계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죠. 이번 공채는 제가 평소보다 더 신경을 쓰겠습니다. 지금 그거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거잖아요.”
“진짜 이거 하나 해결해 놓으면, 딴 데서 이게 터지고. 또 터진 거 대충 수습되어 간다 싶으면 엄한 데서 뭐가 또 터지고….”
“에이, 적당히 하세요. 저 괜찮아요.”
“…….”
“잘된 일이잖아요. 축하해 줄 일이지, 배 아파 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전 괜찮으니까 부장님도 저 때문에 괜히 언짢은 연기 그만하시고, 정 과장한테 말해 주세요. 아니다, 아니다. 부장님.”
“왜?”
“괜찮으시면 제가 직접 정 과장한테 말해 줘도 될까요?”
눈을 가늘게 뜨며 김 부장이 물었다.
“왜?”
“정 과장 원래 제 부사수였잖아요.”
“…그랬지.”
“지금까지 제가 뭐 하나 정 과장한테 제대로 챙겨 준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 HRM에서 같이 일할 땐 저도 고작 주임밖에 안 됐으면서 마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고, 또 HRD로 넘어갔을 땐 교육 자료를 무기로 정 과장을 너무 많이 괴롭혔던 거 같아요.”
“그래도 지금은 두 사람 좋지 않아?”
“그러니까 더 못했던 일들만 생각이 나네요. 항상 정 과장 상대로 선배 대접만 받으려고 했지, 선배가 되어서 후배를 끌어 주는 역할은 제대로 못 했던 거 같아요. 정 과장 성격에 이런 좋은 기회 앞에서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겠어요? 당연히 가더라도 남아 있는 사람들한테 미안한 마음을 분명 가질 거예요. 제가 말해 줘도 될까요?”
“그렇게 해, 그럼.”
* * *
태산이의 치매 증세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집 안에서 길을 잃어 화장실을 못 찾는다거나, 신발을 신고 있는 상태에서 신을 신발을 찾는 따위는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금방 식사를 하고도 왜 밥을 안 주느냐며 어린애처럼 떼를 쓰는 경우는 허다하다.
사람을 못 알아보는 것도 점점 심해지고 있다.
하늘이한테 “아가씨는 누요? 눈데 내 집에 있는교?” 하는 식의 오래전 합당포 시절 입에 붙어 있던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를 내뱉을 때도 있었고, 자기 아들 영석이를 자기보다 연배가 많다고 생각하는지 “그런데 사장님은 누구세요?”라며 눈을 끔뻑거리기도 했다.
이럴 때 가족들이나 주위 사람들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처 방법은 그에 맞는 상황극을 해 주는 거뿐이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태산이 이 친구가 나는 알아본다.
손중길이의 얼굴이 아님에도, 손정훈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날 손중길로 생각한다는 게 정말 놀라울 뿐이다.
언제는 내게 “회장님.”이라고도 했다가 또 어떨 땐 “사장님.”, “손 사장.”, “중길아.”….
나와 함께 있는 태산이의 시간은 그 안에서 뒤죽박죽되어 흐르는 거 같은데, 그럼에도 태산이에게 난 여전히 손중길이었다.
오늘 나의 역할은 손 사장이었다.
내게 사장님이라고 하지 않고 손 사장이라고 하는 걸로 봐선 지금 태산이는 진문 대교를 사이에 두고 하루 세 번 합당포와 진문을 다녔던 버스 회사를 인수할 당시 어디 즈음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때 손중길이라는 자아의 나이가 딱 서른이었다.
미군 부대로 식자재를 납품하는 사업에 손을 얹어 지금의 재경 그룹을 있게 만든 재경상회(재경식품) 시절 때까지 태산이는 내게 손 사장이라고 불렀다.
그냥 말 그대로 그때까지는 친구였던 거지, 회사에서나 밖에서나.
그러다 내가 강력하게 주장을 해서 버스 회사를 인수하고, 그렇게 인수를 한 버스 회사가 그 이듬해에 도로 공사 확장으로 주위 상권이 들어서면서 급속도로 성장을 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태산이는 최소한 회사 안에서만큼은 날 손 사장이 아닌 사장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다른 직원들, 거래처 사람들 앞에선 철저하게 존대를 하기 시작했다.
“야, 손 사장.”
태산이의 방에서 장기를 두고 있을 때였다.
언제나처럼 하늘이는 나와 태산이 사이에 방석을 깔고 앉은 상태로 채 장기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태산이의 입에서 “야, 손 사장.”이라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하늘이는 싱긋이 웃으며 날 쳐다봤고, 나 역시 그런 하늘이에게 함께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장기판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던 태산이가 물었다.
“버스 회사를 살 게 아니라, 그 돈이면 아싸리 우리 그때 같이 봤던 비료 공장 그걸 넘겨받는 게 더 낫지 않나?”
가끔씩 옛 시절에 묶여 있는 태산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도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지난 세월의 자잘했던 사업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랬다.
그랬을 때가 있었다.
내가 비료 사업에도 관심을 가졌을 때가 있었다.
비료 사업, 설탕 사업.
워낙에 미군 부대로 식자재를 납품했던 사업이 큰돈이 되었기에, 이걸 중간에서 마진 떼기 유통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직접 생산까지 해 버리면 어떨까라는 생각.
그런 생각으로 여러 사업들을 고민하고 조사를 하다가 식자재 사업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하지만 당시 우리 쪽으로 부식을 대어 주던 농민들, 사장님들 쪽으로 영업을 할 수 있는 비료 생산을 우리가 직접 해 보는 게 어떨까란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지.
그런데 지금의 난 알고 있다.
당시 태산이가 어째서 버스 회사가 아닌 비료 공장을 인수하자고 했었는지.
이 친구가 비료 공장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만큼 내가 인수를 하겠다고 한 버스 회사에 확신이 없었던 거다.
버스 회사를 인수할 바에야 차라리 처음 하겠다고 했던 비료 공장이나 인수하자…. 딱 그런 마인드로 내게 비료 공장을 밀었던 거지, 거기에서 뚜렷한 미래를 발견했던 게 결코 아니었다.
당시에는 나도 몰랐지.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버스 회사 인수가 신의 한 수였다는 게 결과물로 나온 뒤에야 당시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었고, 그런 생각으로 비료 공장을 밀었다는 고백을 해서, 그때야 나도 알았던 거다.
“비료 공장 그거 인수하면 자네가 책임지고 키울 수 있어?”
난 태산이 몰래 하늘이에게 윙크를 보내 놓고 중간에 끼어들지 말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늘이 역시 내가 자기 할아버지의 오랜 벗이었던 손중길 연기를 할 때엔 입을 틀어막고 킥킥거릴 정도로 재미있어 한다.
“말이 왜 그렇게 튀노? 비료 공장 그거도 손 사장 니가 하자고 했던 거 아이가.”
“비료 쪽보다 앞으로는 버스 이쪽이 훨씬 더 나을 거 같으니까 작전을 바꾸자는 거지.”
“그러니까 무슨 근거로? 야, 손 사장아. 지금 합당포에서 진문까지 하루 버스 세 대 다닌다. 그게 매번 만차라고 해도 노선에 한계가 있는데 그 돈 들이가는 버스 회사 인수해서 본전이나 뽑겠나?”
“노선이야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늘리면 되는 거다.”
“거참 답답한 소리 한다, 진짜. 탈 사람이 없는데, 노선을 우째 늘리노?”
“방금 자네가 말했잖아. 매번 만차라고.”
“그거하고 이거하고 같나?”
“같지, 이 사람아. 노선이 늘어나면 이용객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진짜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고 있다.”
“이용객이 늘어나면 진문, 합당포 사이에 상권이라는 게 생길 수밖에 없고, 그렇게 상권이 생길 조짐이 보이면, 알아서 도로 확장 공사가 될 수밖에 없다.”
“어느 천년에?”
“천년이 아니라 만년이 걸린다고 해도 필요하면 기다려야지. 돈을 쓸어 담을 수 있는 노다지가 바로 우리 눈앞에 있는데, 지금 당장 돈이 안 된다고 이걸 안 하겠단 말이야?”
“돈이 된다는 보장이 있나?”
“당연히 있지. 언제 내가 하자고 한 게 안된 적이 있었나?”
“손 사장 니도 사람이다. 한 번쯤 자빠질 때 됐다고. 그라고 나는 만약에 손 사장 니가 자빠진다면 버스 회사 이거 인수하는 걸로 자빠진다고 본다. 우째 사람이 니 맹키로 맨날천날 성공만 할끼고. 운도 한계라는 게 있지.”
옆에서 하늘이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재미있어 죽겠다는 식으로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태산이는 장기판에서 아예 눈조차 떼지 못한 상태로 계속 나와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래서 이번엔 절대 내 뜻에 같이해 줄 수 없다는 뜻이야?”
“내가 언제 그래 말했는데? 생각을 조금만 더 깊게 해 보자는 말이지.”
“돼.”
“되나?”
“된다니까?”
“진짜 되는 거 맞나?”
“당연히 되지. 될 때까지 할 거니까.”
“진짜 고집 드릅게 쎄다. 내가 손 사장 니 고집을 우째 이기겠노? 근데 돈 다 태우면 안 된다. 알제?”
“왜?”
“왜는 이 친구야. 지금 제수씨가 홍명이 동생 배고 있다 아이가. 어느 정도는 쟁가 놓고 시작하자. 버스 세 대가 고작인데, 그거 인수하는 데 얼마나 더 들라고? 하는 건 하는데, 위험하게 들어가는 건 절대 안 된다. 내 분명히 말했다.”
태산이는 내게 이런 친구였다.
식품의 출발이었던 재경상회를 열 때엔 자기 집 집문서까지 가져와서 같이 팔아 보자고 했던 친구가 정작 사장 자리는 내게 양보를 하고 자기 본전보다는 내 집안을 더 챙겼던 친구.
그랬던 친구가 지금 내 앞에서 여전히 그 시절에 묶여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와 자신 사이에 방석을 깔고 앉은 하늘이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아가씨는 누군데?”
그래서 내가 다시 물어봤다.
“왜? 모르겠어?”
그 말에 태산이는 잠시 인상을 찡그렸고, 하늘이가 싱긋이 웃으며 물었다.
“저 모르시겠어요?”
“…누군데요?”
“섭섭하다. 저 정말 기억 안 나세요?”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때의 징조가 있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두 눈을 몇 차례 끔뻑거리는….
그러다 한참 동안 눈을 감고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짧게 흔든다.
“장기판이 어쩌다 이렇게 됐어?”
수세에 몰려 있는 자신의 진형이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그보다는 장기를 두는 동안 나와 자신의 손녀딸 앞에서 다른 세월 속 인격이 되어 있었다는 게 민망한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태산이가 말했다.
“할아버지, 이제 낮잠 좀 주무세요. 제가 오미자차 준비해 드릴게요.”
“그렇게 해라. 좀 피곤하네. 지금 몇 시야?”
“한 시 반. 낮잠 주무실 때 지났어요. 나는 할아버지 오미자차까지만 준비해 드리고, 정훈이 오빠랑 데이트하러 나갈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