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201)

[모쪼록 납기일까지 순조로운 상환을 기원합니다. -(주)천사은행-]

'주식 회사였어?'

상황이 워낙 어이가 없다.

액수가 천문학적이라 도리어 웃음밖에 안 나온다.

뜬금없는 부분에 눈길이 팔린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 금액이 뜬금없지는 않아.'

내가 바란 대로 설정되었다.

부정하고 싶지만 바랬던 게 사실이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몇십, 몇백억이라도 아깝지 않아.

'근데 몇백억이라는 게 200억이나 300억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

애초에 몇십억으로 설정해도 많은데.

상한치를 너무 최대한으로 잡은 거 아닌가?

야속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평범한 사람이 일생 동안 벌 수 있는 돈이 10~20억이라고 한다.

1000억원은 아예 사이즈조차 안 나오는 액수다.

심지어 대출 마냥 납기일까지 있다면.

[납기일: 2024년 11월 21일.]

볼을 타고 흐르던 식은땀이 간신히 멎는다.

다행히 시간은 넉넉하다.

아니, 넉넉한 건 아니어도 당장은 아니다.

2024년의 11월 21일.

바로 내가 어젯밤까지 있었던 시간이다.

도저히 영문 모를 상황이지만 회귀가 사실인 이상 일련의 정보도 사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10년이라면 못해볼 것도 없기는 해.'

10년 하고도 약 반년.

나라고 바보같이 떠올린 생각이 아니다.

새벽 갬성에 취해 있었어도 정신은 나름 진지했다.

탑프로게이머로 성공을 한다?

몇십억은 물론이고 몇백억도 안될 것 없다.

단순히 금전적인 이야기만이 아니기에 감수할 만하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말이야.'

투자금의 액수가 심각하게 과하긴 하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둘도 없는 기회다.

돈을 쏟아붓는다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모든 것을 알고 다시 시작한다.

그것만으로도 성공의 보증 수표다.

하물며 나는 일반 스포츠 선수가 아닌 프로게이머다.

'e스포츠는 일반 스포츠와 달라.'

만약 스포츠 선수가 과거로 돌아간다.

생길 수 있는 이점에는 한계가 명확하다.

경력을 활용하는 것 빼면 결국 재능으로 귀결된다.

기본적인 규칙과 전략이 정형화돼있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선점 효과를 누릴 수가 없다.

그런데 e스포츠에서는 매 시즌 그게 가능하다.

'옛날 일은 거진 다 기억하고 있어.'

과거에 있었던 온갖 사건들.

머릿속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

코치 생활을 하며 지식적으로도 알게 됐다.

이를 백분 활용한다?

누구도 걸어본 적이 없을 길.

누구도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 일.

'쓸어 담는 것도 가능할지 몰라.'

향후 e스포츠판의 성장은 상상을 초월한다.

굴러가는 돈의 액수가 차원이 달라진다.

그 거대한 시장의 중심에 설 수 있다.

이를 해낼 수 있는 방법.

구상해내는 건 불가능할 것도 없다.

다년간의 선수, 코치 생활은 폼이 아니다.

「그렇게 둘이 걷던 그 골목길을 쓸쓸히…….」

프로판이 굴러가는 사정은 누구보다 빠삭하게 꿰고 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그 직전에 한 가지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고려하지 못했을 뿐 필연이었다.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말해준다.

무려 10년 전의 과거다.

당연히 수많은 변화가 있다.

다시 프로에 도전할 수 있게 된 것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좋은 변화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다지 달갑지 않은 전화였다.

그도 그럴게.

"나 요즘 폼 미쳤다니까?"

"그래?"

"팀운만 아니면 골드 인정? 어 인정~."

실력은 골드지만 팀운 때문에 브론즈라는 친구와 대화 중이다.

사정상 어쩔 수 없이 상대해주고 있다.

'내가 급식충이라니……'

걸려온 전화.

다름 아닌 학교였다.

어째서 1교시가 지났는데 등교를 하지 않았니?

그랬다.

난 고등학생이었던 것이다.

나의 연령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다.

18살 최창민.

풍덕고등학교 2학년생.

본래의 처지대로 라면 고등학교에 가야 한다.

'물론 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프로게이머에게 학력 만큼 의미 없는 것도 없다.

게임 하는데 학교가 무슨 의미가 있어?

바로 자퇴 수속을 밟을 생각이다.

e스포츠판에서는 의외로 별 일이 아니다.

유명 프로게이머들 상당수가 자퇴를 선택한다.

학업과 병행할 수 있을 만큼 연습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자퇴 수속을 밟은 후 귀가하려 했다.

한 가지 사정이 있어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럭저럭 친했던 기억이 있는 윤혁이가 잔뜩 들떠 소리친다.

"오늘 단축 수업 개꿀띠 인정?!"

"……그래, 인정."

학부모 총회로 단축 수업이 되었다고 한다.

이미 수업은 끝났고, 정문에서 기다리는 중이다.

다른 반 친구들과 합류하여 PC방에 갈 예정이다.

'이런 날에는 PC방 가는 게 관례이긴 해.'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그랬던 거 같다.

물론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랬다는 소리다.

지금의 나하고는 하등 상관이 없다.

하지만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는 목적이 내기 게임이라고.

"첫 판 라면빵 콜?"

"받고 음료수까지."

"점심 가볍게 때리고 저녁빵 세게 가즈아!"

알아서 나의 점심, 저녁 메뉴를 정해주고 있다.

고분고분 PC방에 따라온 이유다.

내기 게임을 하면 100% 이긴다.

십중팔구도 아니고 100%.

종목이 내 분야인 만큼 당연하다.

어린 아이 팔 비트는 수준이라 약간 찔리긴 하는데.

'원래 세상은 약육강식이야.'

밥값을 굳힌다.

겸사겸사 손도 푼다.

현재 2014년의 느낌도 대강 알아갈 수 있다.

밥값 정도로는 아쉽지만 판돈은 높이면 그만.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다.

그런 생각을 나만 한 게 아니었다.

"장환아 캐리해줄 거지?"

"진짜 너만 믿는다…… 나 이번 달 완전 거지야."

"아, 형만 믿어~. 밸런스 붕괴가 뭔지 보여준다니까."

벽 건너편이 유난히 시끄럽다.

상대팀을 이루고 있는 친구들이다.

장환이라는 녀석이 실력에 자신이 있나 보다.

'근데 걔가 누구였더라.'

들어본 것도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너무 옛날 일이라 생각이 잘 안 난다.

궁금증에 차있던 그때.

"창민아 너 들었어? 장환이 다이아 찍었대!"

"아, 그래? 대단하네."

윤혁이가 알아서 귀뜸을 해준다.

그러고 보면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로드 오브 로드를 늦게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잘했던 녀석은 장환이.

하도 잘난 척을 많이 해서 기억에 조금은 남아있다.

'급식충 시절에 다이아였으면 엄청난 건 맞아.'

지금 내 시점에서 보면 아, 그래?

그 이상의 반응이 안 나오지만 친구들에게는 다르다.

과장 약간 포함하면 학교에서 거의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매일매일 무수히 많은 악수 요청이 빗발치겠지.

건너편 친구들이 기대감에 부푼 것도 이해된다.

반대로 우리쪽 친구들은 반쯤 초상집 분위기다.

"창민아, 제발 죽지만 마라."

"이 새끼 배인충이잖아~. 라인전 무조건 3데스 꼬라박을 걸?"

"……."

그 이유가 나 때문이었네!

과거의 나는 존재감이 톡톡 튀는 친구였던 모양이다.

아이디- v지존배인v

전적- 118승 113패

티어- GOLD III 71LP

배인(3/5/0) 패배 2일 전

배인(2/7/1) 패배 2일 전

배인(8/3/2) 승리 2일 전

.

.

.

누구나 흑역사 하나나 둘쯤은 있는 법이다.

무려 10년 전의 과거이니 없는 게 더 이상하다.

그렇다고 해도 약간은 충격이다.

아이디의 상태가 범상치 않다.

아니나 다를까 전적도 배인 천지.

세간에서 지탄 받는 배인충의 표본이다.

'……원래 배인이 잘되는 판은 잘되는데 안되는 판은 심각하게 안돼.'

내 기억에 의하면 캐리하는 판은 캐리했다.

그런데 캐리하지 못한 판은 많이 아쉬웠나 보다.

친구들의 진심 어린 걱정을 들으며 게임을 시작하기 직전.

아이디- 풍덕고원딜

전적- 712승 674패

티어- DIAMOND Ⅴ 0LP

굉장히 신경 쓰이는 전적을 보게 되었다.

장환이의 아이디다.

다이아 티어라길래 모스트를 검색해보니.

「S4 랭크 게임」

? 헤이클린- 49%

? 치비르- 52%

? 부시안- 50%

.

.

.

? 리심- 94%

? 카직트- 92%

얼핏 봐도 의아한 점이 눈에 잡힌다.

주로 다루는 원딜 챔피언은 승률 50% 전후.

그런데 뜬금없이 정글 챔피언만 90%가 넘어간다.

'대리…… 거의 빼박이라고 봐도 되겠네.'

아무래도 순위 제도가 있는 게임이다.

돈을 받고 순위를 올려주는 놈들이 있다.

속칭 대리 행위는 LOL의 뿌리 깊은 문제다.

친구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손을 댄 걸로 보인다.

프로게이머로서 정의감을 불타오른다.

딱히 그런 마음까지 들진 않는다.

그냥 기가 찰 뿐이다.

이때의 나였으면 절대로 몰랐을 사실이다.

실력 치고 높았던 티어의 비결을 이제 와서 알게 됐다.

'장환이가 원래 그런 녀석이긴 했어.'

대놓고 질이 나쁜 녀석은 아니다.

그냥 딱 친구로 지내기 싫은 정도.

말을 섞을수록 정이 떨어지는 타입이다.

허영심이 워낙 강해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런 주제에 친구들 선동하는 능력은 제법이다.

고등학교 당시 나와도 이런저런 트러블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봤자 다 옛날 일이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일로 트집 잡고 싶진 않다.

중요한 건 지금.

장환이를 이용해 먹을 구석이 있다는 부분이다.

"창민아 괜찮겠어? 장환이 다이아라잖아."

"쟤 헤이클린 꺼낼 텐데……."

"제발 배인만은 하지 말자!"

밴픽창에 들어가자 친구들의 걱정이 심화된다.

장환이의 주챔피언인 헤이클린.

현재의 내가 주로 다루는 배인의 천적이다.

게임을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잘 몰랐다.

매번 불리한 상성으로 내기에 임했던 듯하다.

장환이 상대로 전적이 좋지 않을 만도 했다.

'다른 챔피언을 하면 되는 문제긴 하지만.'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

오히려 맞상대를 해주는 편이 옳다.

저 녀석이 정말로 다이아가 맞는지.

사람을 함부로 의심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러니까 직접 확인하려고 한다.

모든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검증의 시간이다.

* * *

'에휴, 배인충 새끼.'

장환은 코웃음을 치며 히죽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배인을 칼픽.

스스로 셀프 카운터에 걸려준 꼴이다.

저런 바보 같은 짓거리를 할 만도 하다.

얼마나 극심한 카운터인지 모르고 있다.

창민은 LOL을 시작한지 얼마 안됐으니까.

'피지컬만 좋지 게임은 모르는 멍청이야.'

같은 반 친구 사이.

1학년부터 놀던 그룹.

하지만 그 내에서도 서열이란 게 갈린다.

남자들 사이에서는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다.

장환은 집안이 잘 살고, 성격이 드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