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써먹으면 진짜로 괜찮은 버그긴 해.'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쓰임새에 따라서는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다.
이를 테면 프로 레벨의 용싸움에서 사기가 될지도 모른다.
배인이 포지셔닝 잡기가 엄청 수월해질 테니까.
벽 근처에 있으면 상대팀은 어떻게 물 수가 없다.
수준 높은 게임에서는 분명 변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건 풍덕고 내전.
─적을 처치했습니다!
v지존배인v님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두드리면 열리는 오픈마인드의 친구들과 함께 한다.
순수한 피지컬 격차.
그 하나만으로도 차고 넘치게 즈려밟는다.
적당히 힘 빼고 해도 쉬울 게임.
잡기술과 버그까지 써가며 박살냈다.
잔인한 방법으로 승리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그냥 정신적인 데미지 좀 주려고.'
잡을 수 있는 건데 어이 없이 못 잡으면 빡치잖아.
멘탈 갈리잖아?
약이 바짝 올라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을 것이다.
버그 때문에 아쉽게 졌다고 착각하기 마련이다.
허영심이 많은 장환이라면 반드시.
판돈을 올릴 시간이다.
추환아 장하다……."
"너 다이아는 대체 어떻게 찍었냐?"
"나 돈 없다고 말했잖아! 어쩔 거야 진짜!"
내기 게임의 승리.
벽 건너에서 목청을 높이며 싸워 댄다.
특히 돈이 없다던 친구가 적반하장으로 성화다.
'돈이 없는데 왜 내기에 참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친구가 그룹마다 꼭 한 명씩은 있다.
그 속을 뜯어봐도 딱히 답이 나오진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장환이의 멘탈이 승천 직전이라는 사실.
"이상한 버그만 아니었어도 이길 수 있었다고!"
"응, 그전에 더블 킬 당했어."
"삐슝빠슝! 골드한테 털리는 다이아가 있다!?"
믿고 있던 도끼에 발등을 제대로 찍혔다.
패배의 주역으로 장환이 몰매를 맞고 있다.
노렸던 대로 다이아가 맞냐는 의심을 산다.
'딱 그 정도로 처량하게 해줬으니까.'
호언장담했던 밸런스 붕괴를 보여줬다.
문제는 그 방향이 반대가 됐다는 부분이지.
누가 봐도 원딜 차이로 게임이 터져버렸다.
다이아라고 으스대더니 별 거 아니네?
평소 잘난 척을 한 대가를 톡톡히 받는다.
본인으로서는 나름대로 변명이 있는 모양이지만.
"첫 판이라 그렇다고! 내가 지금까지 창민이 쟤한테 진 적 있냐고!"
설마설마 했는데 나를 걸고 넘어지네.
목소리를 듣다 보니 예전 기억이 난다.
상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졌던 건 맞다.
하지만 가끔 한 방 제대로 먹이곤 했다.
그때마다 정글 탓, 미드 차이 기타 등등…….
핑계를 대며 자기 탓이 아니라고 우겨 댔다.
'다 옛날 이야기이긴 하지.'
가물가물한 옛날 일로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런다고 나한테 뭐 떡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까놓고 말해 장환이가 다이아든 아니든 알 바 아니다.
'대리충을 정의구현 한다고 나한테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잖아?'
돈 때문에 굉장히 고달픈 입장이다.
그런데 그 돈.
들어올 구석이 이제는 생겼다.
장환이가 한껏 부들부들 해준 덕분이다.
"다음 판에 보여줄게, 다음 판에……."
"아니, 당장 내가 돈이 없는데 어떡해!"
"지금 배고픈 것도 아니잖아? 첫 판은 킵하고 삼세판으로 가면 되지."
'누구 마음대로?'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괜찮은 제안이다.
친구들은 몰라도 내 안에서는 이미 받아들였다.
물론 라면+음료수에 추가로 얹을 웃돈은 협상이 필요하다.
"쟤네 삼세판 하재?"
"아, 고민되는데~."
우리쪽 친구들이 고민 중이다.
소위 말하는 선택 장애가 왔다.
중국집에 가면 꼭 하는 그것 말이다.
'짜장면 먹을지, 짬뽕 먹을지. 100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을 미스테리야.'
물론 짬짜면을 시키면 되는 문제긴 하다.
하지만 완벽한 해결책이라곤 볼 수 없다.
가격도 더 나가고, 비율도 무조건 반반이다.
그보다 더 확실한 해결책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 돈 쓰지 않는 것.
남이 사주는 음식은 뭐가 됐든 맛이 있다.
"삼세판 나쁘진 않은데 우리도 의견이 갈리고, 너희도 돈이 없는 애가 있다고 하니까……"
"맞아, 나 돈 없어!"
좀 닥쳐!
존나 뻔뻔하네 진짜.
돈이 없다던 친구가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아무튼 지금 상황만 이용해 먹으면 돼.'
과반수의 동의를 얻기 위함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상황을 이끈다.
요약하자면 강 건너 불구경으로 만든다.
"너랑 나, 총대 메자. 쫄리면 뒈지시던가."
다른 친구들은 이견이 갈릴 수가 없다.
하지만 장환이 입장에서는 고민이 될 것이다.
지는 순간 최소 몇 만원은 생으로 나갈 테니까.
"창민이 캐리 한 판 했다고 가오 잡는데?"
"솔직히 원딜 차이 개쩔긴 했어~."
"이런 도발 좋잖아? 장환아 가즈아!"
저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가즈아충 친구.
살짝 거슬리긴 하는데 맞장구는 좋다.
순식간에 의견이 하나로 좁혀진다.
모든 시선이 장환이에게로 집중된다.
망설이는 듯하지만 어차피 정해져 있다.
전 판의 상황과, 장환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과시욕. 사람 인생 제대로 거꾸러뜨리는 그것이지.'
여기서 한 번 밑천을 드러내 준다.
장기적으로 보면 저 녀석한테도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지 모른다.
뭐, 아님 말고.
남의 사정에 그리 관심을 두고 싶진 않다.
대리충이 아니더라도 애초에 눈곱만큼도 정이 안 가던 녀석이다.
털어 먹어주는 게 가장 깔끔하다.
"……이기는 쪽이 중국집 쏘는 걸로?"
"그것도 괜찮지. 괜찮긴 한데 중국집은 내가 살짝 안 좋아해서."
많이는 아니고 살짝 좋아한다.
사실 좋아하는데 너무 약하다.
곧이곧대로 말해줄 이유는 없다.
"나는 지금 초밥이 땡기는데 너는?"
"……나도 마침 먹고 싶었는데 잘됐네."
한참이나 어린 녀석을 조종하는 느낌.
썩 좋지는 않지만 딱히 나쁘지도 않다.
어차피 오늘 이후로 볼 일도 없는 녀석이다.
"창민아 정말 괜찮겠어?"
내기의 조건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켰다.
자리에 앉자 윤혁이가 걱정스러운 듯 묻는다.
아무래도 윤혁이와는 사이가 꽤나 가까웠다.
"괜찮아. 어차피 이길 거니까."
"지면 어떡하려고……. 너 여유 별로 없잖아."
소근소근 눈치를 보는 게 내 사정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반나절 같이 지내다 보니 기억이 났다.
윤혁이는 우리집에도 제법 찾아왔다.
'가정 형편이 좋다고는 말하기 힘들지.'
어렸을 적 부모님이 이혼.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만 돌아가셨고, 이후 아버지가 최저한의 생활비만 간간히 보내주었다.
그런 만큼 윤혁이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지갑에는 만원 짜리 한 장 달랑이다.
그런데 난 지갑이 하나만 있지 않다.
"괜찮아. 오늘 지갑 두 개 갖고 왔거든."
"뭐? 너 지갑 새로 샀어? 알바라도 시작했어?"
이 시절의 내가 아르바이트를 했던가.
가물가물한 기억에 의하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졸업한 이후부터 하자고 마음 먹었고 실제로 그랬으니까.
'결국 지금의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네.'
하지만 딱히 문제가 된다는 소리는 아니다.
나의 아주 두터운 예비 지갑.
벽 건너편에서 뜨거운 열의가 느껴지지 않는가?
"저기 있잖아 내 지갑."
장환이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의자에 앉아있다.
* * *
─더블 킬!
트리플 킬!
상당수 롤유저들이 멘탈이 좋은 척을 한다.
점잖은 척, 팀탓 안 하는 척 말이다.
작심삼일 허구헌날 깨지는 맹세다.
그러면 그 다짐이 보통 언제 깨질까?
바로 자신이 피해 입기 시작했을 때다.
라인전을 터트린 창민의 배인이 한타를 파괴한다.
─쿼드라 킬!
v지존배인v님이 전장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마무리……!
학살도 아니고 전장의 지배자.
이쯤 되면 슬슬 상황이 입감된다.
아무리 바보라도 모를 수가 없다.
"배인 너무 키웠는데? 저걸 뭐 어떻게 잡아!"
"나 세 방 맞고 터진 거 실화냐……?"
허구헌날 상대에게 디나이 당한다.
타워에 쳐박힌 채 벌레처럼 짓밟힌다.
배인에게 배인충이라는 멸칭이 붙은 이유다.
그럼에도 많은 유저들이 플레이한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한 번 탄력을 받아 잘 커버리면 혼자 무쌍을 찍는다.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물어볼 사이즈가 안 나온다.
3타를 맞는 순간 탱커고 딜러고 사정없이 찢긴다.
이미 잘 커버린 시점에서 해결책이 전무하다.
"장환아 이거 아무리 봐도."
"……끝까지 해보자."
어금니를 꽉 깨물고 해볼 수밖에 없다.
게임을 지는 순간 최소 10만원이 깨진다.
초밥이라는 메뉴를 선택한 이상 싼 곳에 가도 그 정도다.
사실 돈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장환은 돈 걱정을 해본 적이 없다.
진짜로 문제가 되는 건 내기 게임에서 졌을 때 뭉개질 자존심.
'어떻게든 역전의 발판을…….'
장환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역전하려면 역시 한타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레드다.
레드 버프를 챙기기 위해 정글로 들어간 순간.
터엉!
갑작스레 부쉬에서 배인이 튀어 나왔다.
은신 구르기를 해온 탓에 점멸 반응도 못했다.
벽에 쳐박힌 장환은 다섯 번째 죽음을 맞이한다.
"장환아 또 죽었냐?"
"아니, 레드만 빨리 먹으려고 했는데……."
정글몹에는 버프 몬스터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마나 회복력과 관련된 블루 버프.
다른 하나는 평타를 강화시켜주는 레드다.
미드라이너가 블루에 환장하듯, 원딜러는 레드에 목숨을 건다.
그러다가 정말 목숨을 잃었다.
이유야 어찌 됐건 또 죽었다.
팀원으로서는 한심한 노릇.
아무리 친구라지만 짜증이 난다.
심지어 죽은 타이밍도 나빠 추가 손해로 이어진다.
─적팀이 바론 백작을 처치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오브젝트인 바론 백작을 먹혔다.
장환의 헤이클린이 죽어 공백이 생긴 탓이다.
바론까지 먹힌 이상 게임의 승패는 명백하다.
"장환아, 서렌 치는 게 어때?"
"그러자~. 이건 죽었다 깨어나도 역전 못하겠다."
방금 전 배인이 한타를 쓸어 담았을 때.
팀원들은 마음속에서 이미 패배를 받아들였다.
그래도 내기 게임이니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때 이상으로 스노우볼이 굴러갔다.
바론 백작이 쓰러지며 울부짖은 단말마.
지고 있는 입장에서 들으면 힘이 쪽 빠진다.
그나마 있던 사기도 증발한다.
최저한의 반항도 할 기력이 안 난다.
오픈마인드가 돼버린 성채가 손쉽게 허물어진다.
"원딜 차이 인정? 어 인정~."
"장환아, 미안한데 이건 원딜 차이 맞는 거 같다."
친구들의 비아냥에도 장환은 할 말이 없다.
결과만 놓고 보면 완벽한 원딜 차이.
그렇게 비쳐지는 것이 사실이다.
'팀만 바뀌었어도 내가 무조건 이겼을 텐데.'
하지만 자신이 못한 게 아니다.
초반만 해도 라인전이 분명 유리했다.
서포터와 정글러가 스노우볼을 못 굴린 탓이다.
만약 팀을 바꾼다면 이길 자신이 있다.
목구멍으로 차마 내뱉기 힘든 말이다.
팀원들이 친구들인 만큼 당연하다.
"삼세판 몰라? 다음 판은 팀 바꿔서 하자."
"아~ 방금 진 건 팀 때문이다?"
"내 말은 그냥…… 공정을 기하자는 취지지."
그럼에도 장환은 억지를 부려보기로 했다.
눈치가 보이니까 돌려서 말한다.
이대로 지고 끝낼 수는 없다.
어떻게 해야 팀을 바꿀 수 있을지.
궁리하던 장환을 향해 미소 짓는다.
창민은 의외로 흔쾌하게 수락해줬다.
"좋아. 그렇게 하자."
"무르기 없기다?"
"당연하지. 근데 계산은 확실히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