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은 것이 있다면 잃은 것도 있다.
창민의 제안은 판돈을 더 높이자는 것이었다.
초밥에 더해 현금 10만원 추가하자고 세게 나왔다.
'이기면 그만이야 이기면…….'
진심으로 하면 절대 질 리가 없다.
배인밖에 못하는 녀석이 뭐가 무섭다고.
장환은 자신도 모르게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일반 유저가 게임을 졌을 때.
십중팔구 자기가 못해서라고는 생각 안 한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한다는 게 굉장히 어려운 거거든.'
프로게이머들도 못하는 선수가 많을 정도다.
그래서 있는 게 코치라는 직업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분석해줄 존재.
그리고 사람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자신한테는 관대하고, 남한테는 엄격하고.
이중성이라고 하기엔 롤유저 대부분이 해당한다.
물론 그러지 않은 유저도 있다.
스스로 피드백을 하며 성장해간다.
자신의 실수를 바로 잡고 실력을 향상시킨다.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는 유저라면 애초에 대리도 받지 않았겠지만.'
하루이틀 먹어온 프로 짬밥이 아니다.
코치로 있었던 만큼 평가에는 자신이 있다.
장환이의 플레이는 잘 쳐줘도 플래티넘이다.
다이아조차 아닌 장환과 라인전을 반반 간 이유.
그렇게 거창한 사정이 있는 건 아니다.
조금 계기를 주었을 뿐이다.
영화나 만화에서도 종종 나온다.
도박 고수가 호구를 만났을 때.
일부러 져주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혹은 아주 아슬아슬하게 이긴다.
상대에게 의도적으로 승산을 보여준다.
그러면 정말로 자기가 할 만한 줄 안다.
'못하는 연기도 은근히 힘들어.'
일부러 라인전을 비등비등하게 가줬다.
나로서는 이기는 것보다 어려웠다.
허점이 많아도 보통 많아야지.
홧김에 모가지를 따버리려던 걸 열 번 넘게 참았다.
그렇게 참고, 참고 또 참아온 이유.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더블 킬!
v지존배인v님이 학살 중입니다!
저놈의 지존배인 겁나게 신경 쓰인다.
아무래도 10년 전의 나는 급식충.
감성이 한창 파릇파릇하던 시기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부로 끝이다.
나의 두둑한 예비 지갑.
장환이는 슬슬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테니까.
'겨우 5분도 안돼서 학살이라.'
나름대로 진지하게 임했던 첫 번째 판.
그때도 이렇게 초반에 학살을 띄우진 못했다.
6레벨을 찍고 궁극기를 배운 이후부터 게임이 풀렸다.
어째서 이번 판은 이렇게 쉽게 게임이 풀릴까?
적지 않은 돈이 내기로 걸려있기 때문에.
그것도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다.
"야, 상우아. 슈퍼 세이브 좋았다."
"내가 보기엔 그냥 니가 미친 거 같은데……?"
브론즈의 윗단계 실버 2티어의 친구다.
브론즈인 윤혁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브론즈 서포터랑 하다 실버랑 하니 눈물 나올 지경이다.
'랄라로 버프만 줘도 내가 가볍게 캐리하지.'
정말 착하지만 조금 모자란 친구 윤혁아.
롤은 적당히 즐기는 게 인생에 유익해 보이는구나.
봇라인을 터트리자 게임의 승기는 자연스럽게 굳는다.
그도 그럴게 당연하다.
팀 차이로 게임을 패배했다?
그 소리 듣고 안 빡칠 게이머가 없다.
─아군이 학살 중입니다!
바텀 라인뿐만 아니라 상체 라인도 터졌다.
모든 라인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사코 승부에 열을 올린다?
하는 건 마음대로겠지만 승패에는 변함이 없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처절함과 굴욕감만 팽배해진다.
터엉!
과연 저 녀석은 몇 번이나 당했을까?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당해줄까?
그 해답을 알았다면 애초에 대리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무방비하게 라인에 복귀하는 헤이클린.
부쉬에 들어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선고를 박고 순식간에 찢어발긴다.
그래도 점멸과 투망이 있다.
스턴이 풀리자마자 허겁지겁 도망간다.
힐까지 쓰며 혼신의 도주를 꾀했지만.
─적을 처치했습니다!
v지존배인v님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마지막 구르기 평타 한 방에 마무리된다.
꽤나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맞기 전에 잡았다는 확신이 섰다.
딜계산에는 당연히 자신이 있다.
아무리 그래도 아슬아슬한 경우였다.
다른 한 가지 보험이 들었기 때문이다.
'배인이 딜버그가 있거든.'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확실하다.
지금 이 시기의 배인은 버그가 있다.
구르기 평타 데미지 증폭 버그가.
그 수치가 엄청난 정도까진 아니다.
하지만 방금처럼 막타를 치는 상황.
한 끗 차이의 킬각에 확신을 더해준다.
방금의 솔킬로 게임은 끝났다.
정말 끝난 건 아니고 사실상이다.
내기가 걸려있으니 쉽게 포기하진 않는다.
'근데 어차피 피해보는 건 한 명 뿐이야.'
장환이는 앞으로 곤란해질지도 모른다.
평소 잘난 척 해온 업보를 톡톡히 받겠지.
대리로 얻어낸 티어니 결자해지도 쉽지 않을 것이다.
딱히 내가 걱정해줄 건 없는 일이다.
그보다 중요한 건 당장의 승리.
내기 게임이 끝나자 역시나의 태도를 취해온다.
"창민아, 이거 솔직히 게임이……."
잔뜩 주눅 든 듯 불쌍한 척을 해온다.
측은한 감정이 약간은 든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돈 문제는 깔끔하게 해결하는 편이다.
원하던 대로 삼세판, 이겨주지 않았는가?
구질구질하게 나올 줄 알고 생각해두었다.
"애들아! 장환이 멘탈 깨진 거 같은데 초밥은 나중에 얻어먹자. 그래도 될까?"
대부분의 사람은 남을 도우는데 인색하다.
사정이 딱한 사람이 있다면 도와줘야지.
생각만 하지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굳이 무언가 하지 않아도 된다면?
적어도 반대까지는 하지 않는다.
왜?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는 건 싫으니까.
"난 진짜 장환이가 롤 제일 잘하는 줄 알았는데……."
"하긴 장환이도 충격이 크겠다."
"그럼 초밥은 나중에 먹고 중국집 엔빵으로 가즈아!"
저놈의 가즈아충 친구.
급식체는 거슬리지만 맞장구를 잘 쳐줘서 좋다.
열 명의 친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PC방 밖으로 나간다.
"힘드니, 친구야?"
"아니, 그게 그 돈 말이야…….'
가장 뒤에서 쭈구리가 되어있는 친구.
장환이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는다.
내가 실드를 쳐주니 착각한 모양이다.
"설마 초밥도 나중에 사는데 돈이 없다는 건 아니지?"
일부러 목소리를 조금 키운다.
앞에 있는 친구들에게 들릴 정도.
하지만 구태여 반응을 하진 않을 정도.
딱 이 정도가 적당하다.
돈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건네주는 게 자존심에 걸리겠지.
그 자존심을 조금만 띄워주면 간단하다.
"다, 당연하지. 날 뭘로 보고!"
"역시 장환이야! 친구끼리의 약속은 칼 같이 지키거든."
가오 잡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라 다루기가 쉽다.
속으로는 분명 초밥은 나중에 떡볶이로 때우자.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어차피 오늘 이후로 만날 일도 없다.
만나줄 이유도 없다.
장환이의 지갑에서 쓱 꺼내든 신사임당 두 장.
혹시 없으면 어떻게 뜯어내야 할까?
고민했는데 역시 좀 사는 녀석이다.
지갑도 꽤나 좋은 걸 쓰고 있다.
'고등학생 치고는 말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
신사임당 두 장을 고이 접어 내 낡은 지갑에 넣는다.
동시에 오늘 있었던 일을 곱씹는다.
게임 도중 불현듯 머릿속을 스쳤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
활용 방안은 무궁무진하게 널려있다.
* * *
과거로 돌아온지 이틀째.
어제는 의외로 뜻 깊은 시간이었다.
현재의 나 자신을 알아보는 시간에 더해.
딸칵!
컴퓨터의 전원을 켠다.
몇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
롤 커뮤니티에 들어가 보니 확실하다.
[PBE 서버 패치 내역]
? 배인
R- 심판의 시간
이런!: 심판의 시간을 활성화하면 구르기 공격력 계수가 증가하는 버그가 확인되었습니다. 버그를 수정해 피해량이 정상적으로 적용되도록 했습니다.
풍덕고 내전에서 장난삼아 사용한 버그다.
테스트 서버에서는 이미 픽스가 된 모양이다.
곧 본서버에도 적용이 되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버그는 실전에서도 충분히 써먹을 수 있어.'
스타크래프트의 뮤짤, 스탑 럴커 기타 등등.
시작은 버그였지만 하나의 전술로 인정 받았다.
마찬가지로 롤도 일부 버그는 암묵적으로 용인된다.
정도가 심한 축만 아니면 실전 사용이 가능하다.
조금 심해도 철판 깔고 악용하는 수가 있다.
원래 세상사 모든 일이 안 들키면 장땡이다.
물론 정식 대회에서는 쓰기 곤란한 부류도 있다.
그 정도로 악랄한 버그가 현재는 존재한다.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건 그런 것이다.
「LOL 퍼플펍PC 대회 안내」
1등팀: 10만원+ 부상
2등팀: 5만원
일시: 2014년 6월 20일 오후 1시
장소: 화성시 동탄지성로 108 (반송동), 6층
.
.
.
어제 윤혁이네와 갔던 PC방.
내부에 이런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어느 PC방에서 대회를 한다는 알림이다.
당연하게도 비공식 대회다.
규칙이 세세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앞으로의 취지를 실험해보기엔 안성맞춤이다.
'혼자 캐리하고, 혼자 상금을 쓸어 담는다라.'
축구, 야구, 농구, 롤……, 스포츠든 e스포츠든 팀게임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에이스 한 명이 두 명, 세 명분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롤에서는 이를 '캐리' 라고 부른다.
프로게이머로서의 실력.
코치로서 갈고 닦은 지도력.
백분 활용한다면 캐리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게 가능하다.
'……그렇다고 5인분을 하려는 건 에바참치겠지.'
누군가가 새벽 갬성으로 외친 수백억처럼 말이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시도하다가는 힘들어진다.
뒷감당이 얼마나 매서울 수 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때문에 어제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활용할 수 있는 건 실력과 선점 정도가 아니다.
사기성이 매우 짙은 버그와 잡기술까지 더해진다면.
'캐리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는 게 가능해.'
회귀의 대가로 책정된 금액이 1000억원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상환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비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하면 된다.
그 시발점으로서 더없이 적절하다.
PC방 대회부터 모조리 쓸어 담는다.
내가 가진 캐리력을 시험해볼 좋은 기회다.
실전 연습과 더불어 상금.
두 마리의 토끼도 덤으로 잡을 수 있다.
본래라면 고돼야 할 우승의 과정도 간단하다.
간단하게 만들어버리면 그만인 일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딱히 어렵지도 않다.
무엇을 할지도 이미 생각해두었다.
'버그 하면 역시 그거지.'
역시 그거밖에 없다.
PC방 대회.
홀로 참가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명함이 필요하다.
나 자신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 받을 지표 말이다.
'한 마디로 티어지.'
그래서 님 티어가?
LOL의 케케묵은 명언이다.
일련의 질문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자기가 못한다고 생각하는 롤 유저는 없다.
윤혁이만 해도 브론즈가 골드 실력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안타깝게도 전적 검색 사이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