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를 받았다는 자각은 의외로 잘 못한다.
다리우트(1/7/5) : 캐리요.
이런 짓을 장난삼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진심으로 하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내 눈앞에 있는 급식충은 높은 확률로 후자다.
그러니까 내뱉을 수 있는 소리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무심코.
'대화가 통할 나이대가 아니지.'
원래 중·고등학교가 한창 그럴 시기다.
친구들끼리 모이면 더더욱 개념이 이탈한다.
웬만한 어른들도 말리기가 힘들 정도로 막무가내다.
하지만 옛말에 이이제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를 실행할 수 있는 나이대다.
예로부터 급식충의 천적은 더 나이 많은 급식충.
"니들 형 말이 말 같지가 않냐?"
"아뇨, 왜요 갑자기……."
"닥치고 요점이 뭔데. 상금 나누자고?"
"아, 아뇨 그게 그……."
"형이 같이 게임 해주니까 친구처럼 보이지?"
목소리를 깔자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다.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나이.
내심 불만이 있었는데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는 구석도 있었다.
"형이랑 진솔한 대화 좀 해볼까? 일단 눈부터 깔고."
진솔한 대화.
마음을 툭 터놓고 이야기하자 어렵지 않게 이해해주었다.
퍼플펍PC 대회.
생각대로 무난한 우승이었다.
결승전이 끝나고 사소한 트러블이 있기는 했는데.
'오해가 있을 때는 대화로 푸는 게 가장 좋아.'
진솔한 대화의 시간은 효과가 있었다.
어른이 말하면 귓등으로도 안 들을 급식충들이 몇 살 많은 형의 말은 무지하게 잘 듣더라?
처음부터 다그치지 않은 게 아쉬웠을 정도다.
10만원의 상금과 최신 기종의 마우스.
첫 번째 소득 치고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마우스는 그대로 쓰고 10만원은 생활비로 사용할 생각이다.
'문제는 앞으로지.'
어제는 살짝 맛만 본다는 느낌이었다.
앞으로 내가 하려는 짓이 가능성이 있는지.
대회의 규모는 작았지만 알아보기엔 더할 나위 없었다.
맛보기의 결과는 가히 성공적이다.
확신을 얻은 이상 과감하게 움직인다.
보다 짭짤한 상금이 매겨진 대회를 이미 물색했다.
「LOL 우리 동네 최강자전!」
우승 상금
1등팀: 20만원
2등팀: 10만원
3등팀: 문화상품권 1만원권 5매
참가자 전원: 아이스티 or 커피♡
상세 정보: QR코드 확인해주세요♪
아기자기하게 만들어진 포스터.
분당 수내역에 위치한 PC방 대회다.
인터넷 검색으로 어렵지 않게 찾았다.
2014년은 한창 LOL의 주가가 폭등하던 시기.
그래서인지 자잘한 대회들이 많이 열려있다.
마침 날짜도 딱 다음날로 빠듯하게 알맞다.
'오히려 바쁘게 움직이는 편이 마음이 편해.'
대회 상금 하나하나가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실제로 상당한 수입원이기도 하다.
현재의 최저임금은 5천원을 겨우 넘는 수준이다.
수십만원의 상금은 그 가치가 더욱 크다.
물론 그것도 우승을 했을 때의 이야기다.
도착하자 정문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혹시 인터넷으로 사전 접수하고 오셨나요?"
스물 초반 정도로 앳돼 보이는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방긋 웃으며 물어온다.
사람이 많다 보니 교통정리도 미리미리 하나 보다.
"아니, 안 하고 왔는데."
"……네?"
안 하고 그냥 왔다고.
한국말이 알아듣기 어렵나?
알바생이 똥 씹은 얼굴로 쳐다본다.
'아니, 설마.'
설마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 내 행색.
딱히 비루한 건 아니지만 문제는 원판이다.
아무리 코디로 가려봐도 어린 티가 난다.
현재 나이로 따지면 연상에 해당된다.
표정이 구겨진 이유가 짐작이 간다.
그런데 뭐 어쩔 수 없지.
자연스럽게 대답이 나와버렸다.
무시하자 등을 휙 돌리더니 다른 손님에게 간다.
'인생이 원래 그래.'
예상치 않은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인생의 고난에 굴하지 않았으면 싶다.
당장 나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처지니까.
PC방 내부에 산재해있는 수많은 참가자들.
그중에서 팀이 될 만한 그룹을 물색해야 한다.
급식충 4인조와 같은 실수를 두 번 저지를 수는 없다.
조금만 신경 쓴다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문제가 되는 건 오히려 다른데 있다.
보다 높은 상금, 교통이 편한 입지.
"우리 정도 전력이면 최소 순위권은 하겠지?"
"민혁이 너만 믿는다! 플래티넘이잖아!"
대회의 수준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굳이 경기까지 해보지 않아도 입감이 간다.
주변 사람들의 대화 내용에 자신감이 차있다.
대화 뿐만 아니라 표정도 마찬가지다.
긴장한 기색은 커녕 여유가 엿보인다.
개중에는 아예 무시하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다.
"아나~ 이런데 와도 되나? 너무 양학 하는 거 아니냐?"
"양심 털리긴 했어. 근데 이런 PC방 대회는 원래 치트키 치고 재밌게 노는 거지."
얼마나 잘나신 분들인지 우승을 확신하고 있다.
두 번째 사냥감은 제법 감칠맛이 있어 보인다.
* * *
세계 최고의 e스포츠로 자리 잡은 LOL.
한국에서도 국민 게임이 된지 한참 오래다.
스타크래프트의 아성을 뛰어넘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이는 PC방 점주들에게 특히 더 가시적으로 와 닿는다.
부동의 게임 1위, 점유율은 40%에 육박한다.
신경을 쓰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전국 이곳저곳에서 PC방 대회가 즐비하게 열리는 이유다.
분당 수내역에 위치한 사이버파크 PC방.
이곳도 한창 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아니, PC방 대회인데 뭐 이렇게 빡세?"
"진짜 8강도 못 갈 줄은 몰랐네…… 무슨 다이아를 만나냐."
당연하게도 대회 별로 수준이 천차만별.
상금의 규모에 걸맞게 참가자가 대인원이다.
총 열 여섯팀으로, 대회 참가 인원만 80명에 달한다.
어중이떠중이들은 괜히 왔다가 쓴맛만 본다.
나름대로 자신감을 불태우고 왔는데 이게 웬 걸?
플래티넘, 다이아 고티어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있다.
쪽도 못 쓰고 양학 당하며 밑바닥을 깔아주는 신세다.
그렇게 탈락한 팀들로 PC방 내부는 한창 붐빈다.
대회의 결과를 마지막까지 구경하고 가겠다.
"확실히 다이아는 다이아더라."
"우리 꺾은 팀이 우승했으면 좋겠다. 정신승리라도 하게!"
그냥 가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고티어 유저를 실물로 볼 수 있는 기회다.
인터넷에서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다르다.
다이아 5티어조차 친구 중에 한 명 있으면 화제가 된다.
그런 보기 드문 고수들이 경쟁을 하고 있다.
관심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는 장이다.
"우승하러왔다…… 아마 쟤네가 우승하겠지?"
"티어 엄청 높더라. 게임도 존나 잘해."
"닉값하려고 작정하고 온 것 같아."
탈락한 구경꾼들의 이목이 모아진 한 팀.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결승전에 직행했다.
엄밀히 따지면 경기력이라기 보다는 양학에 가깝다.
"이 정도야 껌이지. 빨리 우승하고 밥이나 먹자~."
"난 벌써 배고파 뒤지겠다. 핫바나 하나씩 사먹을래?"
"니가 쏘는 거면."
"우승 상금에서 미리 빼면 되잖아."
"하긴 그도 그렇네."
우승하러왔다팀의 선수들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들의 대화는 얼핏 들어도 오만 그 자체.
속사정을 안다면 사실 그렇지도 않다.
팀 구성원 전부가 다이아 티어다.
참가한 여타 팀들과 기본 스펙부터가 다르다.
이미 우승했다는 확신에 찬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런데 저쪽 라인에도 괜찮게 하는 애 있더라. 나름 다이아던데?"
물론 다이아 티어가 그들만 있는 건 아니다.
대진이 좁혀질수록 잘하는 팀만 남게 된다.
준결승전 상대팀에도 다이아 유저가 있었다.
하지만 숫자에서 차이가 난다.
힘의 격차를 보여주며 깔끔하게 격파했다.
그런 그들의 눈에도 단 한 명, 걸리적거렸다.
"아~ 누구 말하는지 알겠다!"
"티어 다이아5던데? 우리가 개털지."
그래봤자 겨우 한 명이다.
심지어 그 한 명이 위협적인 것도 아니다.
다이아 티어 중에서 가장 낮은 다이아 5티어.
우승하러왔다팀에는 다이아 2티어 유저도 있다.
제법 실력이 있다고 해봤자 자신들 아래다.
전체적인 전력 격차가 이미 명백하다.
상대가 못해서 캐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승전에 오기도 전에 떨어질 확률이 높다.
예상했던 바가 뒤틀리자 조금 신경 쓰인다.
"뭐야, 이기고 있잖아?"
"오~ 꼴에 다이아값은 하나 보네."
먼저 준결승전 매치업을 끝냈다.
반대쪽 라인에 구경을 가자 흥미롭다.
눈 여겨 보고 있던 유저가 이끄는 팀이 이기고 있다.
물론 가볍게 흥미가 이는 정도다.
자신들이 우승한다는 결과가 변할 리 없다.
따끈하게 데운 핫바를 다 먹을 시점에 경기는 끝났다.
과연 결승전 상대로 누가 오게 될지.
이윽고 두 번째 결승 진출팀이 발표됐다.
은근하게 주시하고 있던 팀이 결국 상대가 되고 말았다.
"어차피 저기 한 명 빼고는 다 심해지?"
"가볍게 밟으면 되겠네. 너무 쉽게 우승하니까 김 샌다."
"PC방 대회 수준이 다 그거지 뭘 바래."
먼저 경기를 끝내고 핫바까지 든든하게 챙겨 먹었다.
만반의 상태에서 경기를 치르는데 변수가 있을까?
질 가능성은 눈곱 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이상하다.
시작해버린 결승전 첫 번째 세트.
이변의 징조가 나타난 건 탑라인이었다.
─퍼스트 블러드!
적에게 당했습니다.
상대팀이 선취점을 가져가 버렸다.
무언가 변수가 있었던 게 아니다.
순수한 솔킬.
탑을 맡고 있는 호진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아~ 방심했다. 이게 킬각이 나오네."
"쯔쯧, 쪽팔리게 솔킬 따였냐? 어디 가서 아는 척하지 마라."
만만히 본 상대에게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대화에는 일말의 긴장감도 묻어있지 않다.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의 사소한 사고가 생겼을 뿐이다.
어차피 최종적으로 이기는 건 자신들이다.
한두 번 죽는 정도로는 게임이 기울어질 턱이 없다.
그런데 그 한두 번이 세네 번, 너댓 번…… 점점 많아진다.
"어, 어?!"
"야! 정신 차려. 아래에서 이기고 있는데 사려야지."
전체 스코어는 분명 이기고 있다.
아래 라인은 우승하러왔다팀이 훨씬 더 유리하다.
탑 라인 하나 진다고 원래라면 문제 생길 일이 없다.
원래라면.
상황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후였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 봐야 할지 사이즈가 안 나온다.
콰직!
터엉-!
애꾸사자가 발톱이 내려 찍힌다.
그 자리에 있던 이블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갱호응을 하려던 네네톤까지 다진 고기가 돼버린다.
"갱킹을 그따구로 오면 어떡해! 나 또 죽었잖아."
"이렇게 센 줄 몰랐지…… 벌써 1코어 반이나 떴네."
말린 탑을 풀어주기 위해 정글러가 탑에 갔다.
그런데 너무 세다.
너무 잘한다.
풀어주긴 커녕 갱승이 돼버렸다.
─적 더블 킬!
잘하는사람님이 전장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적팀이 포탑을 파괴했습니다!
탑과 정글이 쌍으로 죽었다
탑라인 1차 포탑까지 나갔다.
심지어 나머지 적들도 놀고 있는 게 아니다.
"아니, 이러면 용 못 막는데 니들 대체 뭐하냐?"
"미안, 진짜 미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지금부터라도 빡집중해. 이러다 진짜 지는 수가 있어."
한낱 다이아5 나부랭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상대에게 완전히 휘둘리고 있다.
게임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상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게임이 이 정도로 말릴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설마라는 생각 뿐이다.
다이아 다섯이 작정하고 준비해서 왔다.
지금부터라도 역전하지 못할 것이 없다.
철썩 같이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래봤자 고작 다이아.
자신들이 누구를 상대하는지 정녕 깨닫지 못했다.
콰직!
터엉-!
발톱이 찍히며 티아매트가 울린다.
안 그래도 미친 폭딜이 두 배로 들어간다.
나름대로 잘 큰 이블퀸이 찍소리도 못하고 찢긴다.
─트리플 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