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결승전 상대는 어려울 게 없다
문제는 결승전 상대가 클랜이었다는 것.
나름의 워밍업이 될 승부가 될 거라고 봤는데.
'그 클랜이 악재를 만났더라고.'
정말 운이 좋게도 괜찮아졌다.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가 탈락을 했다.
PC방 대회는 결승전을 제외하면 다 단판이다.
그러니까 1패만 해도 칼같이 탈락.
킬리만자로 뭐시기를 제외하면 클랜은 없다.
수작을 부린 게 들키면 다소 귀찮아 질 수는 있어도.
'구경꾼이랑 잡담한 건 본인 잘못이잖아?'
선수가 구경꾼 말에 대답해줄 의무는 없다.
내가 뭐 욕을 한 것도 아니고.
큰 소리로 방해한 것도 아니고.
잡담하다 말리는 건 100% 선수 과실이다.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는 말을 했을 뿐이지.'
결승전까지의 과정은 무난하다.
8강에 이어 준결승전도 당연한 승리.
반대쪽 대진에서도 유쾌한 소식이 들려온다.
"형! 킬리만자로의 표범 광탈했다는데요?"
"무슨 광탈이야. 준결승전까지 왔으면 잘한 거지."
"아니, 그 클랜 진짜 유명해서 무조건 결승 올 줄 알았거든요."
그렇다고 한다.
오늘은 조금 고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쉽게 풀린다.
가장 유력했던 우승 후보팀을 제거, 아니 탈락한 덕분이다.
'의외로 유명한 클랜이었나 보네.'
나도 어디선가 들어본 기분도 든다.
클랜으로서가 아닌 노래 이름으로서지만.
가수 조용필이 부른 명곡으로 듣다 보면 중독성이 있다.
"선구야, 이번 기회에 알아둬. 세상에 무조건은 없어."
"하긴 저도 제가 이런 대회에 결승전에 올 줄을 몰랐는데……. 저희들을 데리고 여기까지 오시다니, 역시 형님이십니다!"
이번 대회의 팀원들은 싹수가 있다.
사회 생활을 참 잘할 것 같은 친구다.
나이가 아직 어린데 눈치가 빠르고 싹싹하다.
'사실 동갑이긴 한데.'
신체 나이를 따진다면 진짜로 친구가 맞다.
형이라는 위치가 편해서 늘 형을 하고 있다.
정신 나이는 확실히 위니 딱히 찔리진 않는다.
"킬로만 뭐시기 꺾고 올라온 상대는 어때? 선구 니가 보기엔."
"준결승전 상대랑 비슷한 정도 같던데요?
"그럼 뭐 낙승이네."
규모가 있는 대회다 보니 결승전은 3전 2선승제다.
상금이 35만원인 만큼 용납할 수 있는 수고다.
그 과정 또한 보다 편하니 환영하는 바다.
'미드라서 살짝 불안했는데 잘 풀렸어.'
하고 싶은 라인만 갈 수가 없다.
남는 자리에 끼어서 하는 처지다.
애석하게도 비어있는 포지션이 미드더라?
아직 연습이 충분하게 되어있지 않다.
그도 그럴게 주포지션과 거리가 있다.
선수 시절에는 미드도 괜찮게 소화했지만.
'하도 옛날 일이라.'
은퇴한지가 벌써 5년 전이라 문제지.
코치로 전향한 이후 탑과 정글을 위주로 했다.
원딜은 몰라도 미드는 살짝 애매한 감이 있다.
물론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다.
그럴 수 있는 피지컬도, 지식도 있으니까.
당장은 OP챔피언으로 미지한 연습을 메꾼다.
파앗!
퍼엉!
표식을 던지고 박아서 터트린다.
르풀랑은 내가 잘 다루는 몇 안되는 미드픽이다.
워낙 고전적인 챔피언이다 보니 숙련도 문제가 없다.
'근데 오래 가는 챔피언들은 이유가 있어.'
그만큼 기본 스킬 구성이 출중하다는 방증이다.
특히 현재 시점의 르풀랑은 유별나다.
표식을 터트리면 상대가 죽는다.
사앗……!
속박의 사슬이 적 아링의 발목에 휘감긴다.
상대는 일말의 반항조차 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게 침묵에 걸려있으니까.
─적을 처치했습니다!
잘하는사람님이 학살 중입니다!
침묵은 스킬을 쓸 수 없는 상태 이상이다.
일방적인 공격이 가능한 르풀랑 같은 챔피언이 가지면 큰일 나는 CC기다.
현재의 르풀랑은 그 침묵을 가지고 있다.
? Q - 파괴의 표식
스킬 이름: 침묵의 표식 ⇒ 파괴의 표식
〔삭제〕 침묵 효과: 이제 적용되지 않습니다.
침묵을 터트리면 상대는 궁극기는 커녕 점멸도 쓸 수 없다.
그때 여유롭게 사슬을 적중시키면 킬각이다.
매우 간단하게 라인전을 즈려밟는다.
"상대 미드 마스터던데…… 그냥 패버리시네요."
"이 정도야 껌이지. 너희만 잘하면 돼."
킬리만자로 뭐시기를 격파하고 올라온 팀이다.
아무리 실수가 있었다고 해도 기본 실력이 받쳐줘야 요행도 잡을 수 있는 법이다.
그럭저럭 봐줄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봤자 늦고 빠르고의 차이다.
어차피 뭘 했어도 이길 수밖에 없는 실력 격차다.
르풀랑은 미드 주도권을 가졌을 때 굴리기 가장 좋은 챔피언이다.
파앗!
터억!
정글링을 돌고 있던 탈리반 3세.
와드로 깃창을 사용한 걸 확인했다.
벽을 넘어가 표식을 박고 사슬을 잇는다.
사슬이 이어진 시점에서 반항이 불가능하다.
침묵 때문에 점멸조차 쓸 수가 없는 상태다.
그 상태 그대로 궁극기로 복제한 사슬을 하나 더.
─적을 처치했습니다!
잘하는사람님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탱커도 사슬 박히면 꼼짝 못한다!
빠른 기동성과 침묵에 의한 강제 킬각.
초반 운영의 중심인 미드&정글을 무너뜨린다.
─아군이 적을 처치했습니다!
더블 킬!
아군이 학살 중입니다!
그리고 이는 다른 라인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군 정글러가 놀랍게도 봇라인 갱킹을 성공시켰다.
타이밍을 잘 잡아서도 있겠지만 자멸했다는 부분이 더 크다.
상대팀은 상체 위주의 운영밖에 할 줄 모른다.
그 하나의 색깔밖에 소화할 줄 모르는 팀이다.
미드&정글이 무너지자 갈피를 못 잡는다.
'팀마다 고유의 성향이라는 게 있어.'
원딜이 중심이 되는 팀.
사이드에 힘 주고 스플릿 돌리는 팀.
자신들의 강점을 보다 살릴 수 있는 방향성 말이다.
프로팀들은 패턴을 읽히지 않기 위해 여러가지 다룬다.
아마추어팀들은 단 하나도 소화하기 벅차다.
훈수를 둘 때 상대의 운영 패턴을 살폈다.
'역산을 해서 공략하면 파훼법도 간단하게 나오거든.'
팩트 폭행도 알아야 할 수 있는 법이다.
뭣 모르고 지껄이는 건 듣는 입장에서도 무시한다.
이래 봬도 게임의 상황을 다 알고서 합리적인 조언을 해준 거다.
최대한 신경이 거슬리게 말했을 뿐이지.
아무튼 결승전은 무난하게 압도하는 그림이다.
별 변수 없이 게임을 굳히고 우승에 종지부를 찍는다.
"말했던 대로 상금은 내가 다 가진다. 불만 있으면 지금 말해."
"불만은요 무슨! 저희는 기념품만으로도 충분해요!"
상금이 무려 35만원에 달한다.
그러다보니 나름대로 수상식도 한다.
구경꾼들의 박수를 받으며 상금을 받고 나왔다.
'기념품까지 내가 다 챙길 필요는 없겠지.'
생각 이상으로 팀원들이 잘해줬다.
기념품 가지고 일일이 인색하지는 않다.
마우스 패드와 부채, 챔피언 스킨 등 되팔렘 하기도 애매한 것들이다.
'그리고 돈은 컴퓨터 살 정도면 족해.'
PC방 대회의 우승 상금.
하루하루 쌓으면 상당히 쏠쏠하기는 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다음 관문을 위한 발판에 불과하다.
겸사겸사 컴퓨터 업그레이드할 돈도 모으고.
일을 컴퓨터로 하는 만큼 반드시 사둬야 하는 물품이다.
앞으로 한두 번 더 우승하면 조립식으로 괜찮은 사양으로 맞출 수 있다.
"살펴 가십시오 형님!"
"덕분에 재밌는 경험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마지막까지 깍듯한 녀석들이었다.
좋은 분위기로 화기애애하게 헤어졌다.
처음에는 말썽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최근에 들어서는 그런 일이 없다.
"야, 이 새끼야! 너 내가 나중에 보자고 했지?!"
말이 씨가 된다고 상정 외의 사태가 바로 생겼다.
한 남자가 잔뜩 성이 나서 뛰어온다.
혹시 착각인가 싶었지만.
'그 녀석이네.'
시발시발 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이제야 기억난다.
시발이랑 닥쳐밖에 할 줄 모르는 어휘 부족한 남자.
컴퓨터값은 의외로 쉽게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 *
처음에는 정말 잘못 본 줄 알았다.
가만히 앉아 곰곰이 떠올려봤다.
혹시 자신의 기억이 혼선된 건 아닐까?
그??그럴게 워낙 바빴던 게임 도중이다.
목소리는 많이 들었어도 얼굴과 인상 착의는 글쎄.
멱살을 잡았을 때 한 번 보기는 했으나 정확하진 않다.
그래서 끈기 있게 주위에 서성이며 지켜보았다.
결승전이 끝나고, 팀원들과 하는 대화.
낯익은 목소리에서 확신을 얻었는데.
"아까 게임 진다고 저한테 화풀이 하신 분?"
상대의 반응이 너무 평이하다.
당황하기는 커녕 뻔뻔하게 낯짝을 들이민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최명태는 얼굴이 벌게져서 소리쳤다.
"이 자식 일부러지? 일부러……."
"일부러 뭐요?"
"주둥아리 안 닥쳐? 시발 니가 일부러 방해한 거잖아!"
하도 어이가 없는 경험이다.
살다살다 저런 또라이짓을 하는 놈이 다 있나?
팀원들에게도 민망하고, 어그로가 끌린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계획된 짓이다.
유력한 우승팀인 자신들을 떨어뜨리기 위함이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경기를 방해하기 위해 야부리를 털었다.
"혹시 제 우승을 질투하는 거라면 추합니다. 당신 지금 추하다고요."
"닥쳐! 결승전만 올라갔어도 니 같은 새끼는……."
"말씀 중에 죄송한데 닥쳐랑 시발 이 두 단어는 빼고 해주세요.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아서."
훈수질을 할 때도 그랬지만 어지간히 빡치게 만드는 녀석이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의 신경을 긁어 댄다.
말로만 하니까 자신이 우습게 보이나.
'그래도 일단…… 자중해야겠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목청을 높여버렸다.
주위가 웅성웅성, 눈길을 돌리자 아차 싶다.
PC방 손님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
일이 커진다면 오히려 나쁠 게 없다.
번뜩인 생각에 최명태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럼 한 번 따져보자고. 너희 팀의 우승이 정당한 건지."
하나하나 따진다면 과연 누가 더 불리할까?
PC방에 온 손님들 중 분명 증인이 있을 것이다.
멱살을 잡을 정도로 소동이 있었으니 없을 리가 없다.
방금 떠오른 생각이지만 굉장한 묘안이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흘러간다.
상대가 너무 순순하게 인정해온다.
"아~ 제가 뒤에서 떠든 바람에 경기에 지장이 있으셨군요."
"그, 그래!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찔리는 바가 있으니 이실직고 해오는 거겠지.
머리 좀 굴리는 녀석인가 싶었는데 입 털 줄 아는 건 게임 뿐이었던 모양이다.
최명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 야유 때문에 준결승전에서 져버렸어. 그러니까 책임을 져야지? 이를 테면 뭐…… 재경기라던가."
이야기가 원하는 대로 술술 흘러간다.
최고의 스토리는 저 자식의 실격패.
하지만 거기까지는 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원하는 건 재경기다.
붙는다면 개박살을 내줄 자신이 있다.
공론화 시키면 난감할 테니 받아들이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그것 참 신박한 견해네요."
"뭐……?"
"공론화든 공룡화든 알아서 하세요. 야유 좀 한 게 뭐 대수라고."
뻔뻔한 대꾸에 최명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커지면 불리해야 할 건 저 자식이다.
오히려 당당하게 떠들어대고 있다니.
'대체…… 왜?'
잃을 게 많은 건 녀석이 아닌가?
최명태 스스로는 해답을 찾지 못했다.
의문이 풀리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야유? 뒤에서 떠드는 거?"
"그거야 뭐 다 듣지 않았나."
"아니……, 유치하게 그런 걸로 저렇게 싸우고 있던 거야?"
PC방 시끄러운 게 어디 하루이틀 일일까.
특히 대회를 진행한 당일은 말할 것도 없다.
참가자 모두가 소음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
야유와 훈수질도 마찬가지다.
롤이라는 게임에서 빼놓을 수가 없다.
참가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 만큼 여론은 금세 조성된다.
"제가 혹시 당신한테 욕했나요?"
"아니, 욕은 안 했지만……"
"질문만 대답해주세요. 큰 소리로 옆에서 방해를 했나요?"
"큰 소리는 지르지 않았어도……"
"IQ가 돌고래랑 경쟁하시나? 질문만 대답하라고요 질문만."
에이, 별 것도 아닌 일로 시비 건 거였네.
킬리만자로 클랜이 또 킬리만자로 클랜했네.
지켜보는 구경꾼들이 혀를 차자 최명태는 초조해진다.
아주 잠깐 관심을 가졌던 사장님도 귀찮은 듯 되돌아간다.
이대로 끝내면 죽도 밥도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