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201)

물론 절실하다고 반드시 성공하진 않는다.

절실함은 최소한 가져야 할 필수 조건일 뿐이다.

때문에 선수를 마주할 때 나는 항상 동기부터 부여한다.

그게 딱히 거창할 필요는 없다.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어머님이 짜장면이라면 질색을 하셨고.

그런 스케일까진 안 갖춰도 된다는 소리다.

"연습의 필요성이 느껴지나?"

"아, 이게 하…… 진짜 네."

"…….네."

입술을 질끈 깨무는 모습이 캐치된다.

나는 언어가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사소통에 많은 부분을 기여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진심이다.

'학창 시절에도 엄마한테는 맨날 공부한다고 말하지 사실은 안 하잖아.'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거지.

그래야 용돈도 주고, 컴퓨터도 해금 시켜주고.

그렇게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은 단 하나의 의미도 없다.

프로게이머는 아가리를 터는 직업이 아니다.

실력으로 보여주는 직업이다.

구구절절한 각오보단 한 마디의 진심을 원했다.

물론 그걸 깨달았다고 현실이 변하는 건 아니다.

수능 전날에 이제부턴 정말 공부 뿐이야!

외치고서 밤을 샌다고 수능 점수가 달라질까?

경기 치르기 직전에 깨달아봤자 엎질러진 물이다.

그 감정을, 절실함을 알게 된 것만으로 족하다.

Keg는 앞으로 여정의 발판에 지나지 않다.

"쓰렉귀 잘라."

"쓰렉귀부터요?"

대회에서 밴픽은 코치가 가장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부분이다.

그렇기에 흔히 착각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밴픽은 코치 혼자 다 하는 거 아닌가?

선수의 의사.

선수의 실력.

선수의 챔피언 폭.

감독의 꼬장.

기타 등등 다 감안하다 보면 할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별로 없다.

'팀 게임이랑 마찬가지야.'

개인이 아무리 잘한다고 한들.

판도를 바꾸는데도 한계가 있다.

실력 차이가 웬만큼 나지 않는 이상 캐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는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력 차이가 웬만큼 나면 이길 수 있다.

상대보다 썩은 카드를 가지고도 충분히.

"리심 잘라."

"아……, 네. 했어요!."

"근데 이러면 OP 다 열리지 않아요?"

"다 열어 그냥. 인생 뭐 별 거 있나."

밴픽의 요지는 상대방이 가져가면 곤란할 픽을 미리 자르는 것이다.

그렇게 주고 받는 것이 신사적인 밴픽 양상이다.

하지만 이렇듯 장난질을 쳐버리면.

'준비해온 상황과 다르니까 생각이 엄청 꼬이거든.'

소위 열린 밴픽, 오픈마인드 밴픽이라 불린다

즉석으로 지은 거지만 의미는 대충 통할 것이다.

이 경우, 이른바 킹우의 수가 기하급수 불어난다

실제 프로팀들도 진짜 실수 많이 나온다.

마치 바둑이나 장기와 같다고 보면 된다.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무르는 게 불가능하다.

'임기응변에 능한 쪽이 이득을 보는 구도가 되지.'

선수를 대하는 코칭 방식.

내가 절실함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코치에 대한 신뢰다.

단순히 믿고 따르겠읍니다 점점점.

이런 가식적인 거 말고 마음에서 우러나야 한다.

이 사람 말이라면 지옥 끝까지는 아니더라도 삼도천까지는 따라갈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 계기를 닦아낼 좋은 자리다.

수많은 관심이 집중된 무대.

두 번째 세트는 밴픽부터 주목 받았다.

그도 그럴게 첫 번째 세트가 워낙 Hot Potato였다.

〈지금 저희가 사실 까놓고 말해서 빅토리 열리냐, 안 열리냐. 그것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잖아요?〉

〈뚫어져라 크하?!〉

-저걸 대놓고ㅋㅋㅋㅋㅋ

-밴되는 순간 최소 1만킬 예정이었지ㄹㅇ

-클끼리 찐텐 오지네

-롤챔스 아니라고 아무말 대잔치ㅋㅋㅋㅋ

김서준 해설이 쪼개는 이유가 있다.

사실 LOL을 심도 있게 즐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스포츠 보는데 누가 머리 아프게 전략 계산하고 앉았어.

우리나라 골 넣었냐, 안 넣었냐?

누구 나왔냐, 저 새끼 왜 나오냐?

축구에서도 그렇듯 가장 자극적인 부분부터 눈이 가기 마련이다.

〈일단 다행스럽게도 열리긴 열렸어요. 근데 이게 지금 광주팀도 준비해온 밴픽은 아닌 거 같거든요?〉

흥행적인 의미에서는 다행이다.

하지만 그것이 서로 합의에 의한 것인지.

우발적인 사고에 의한 것인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

-눈 땡그랗게 뜬 거 봐ㅋㅋ

-방금 '이 새끼들'

-재슥쿤 여기서 욕하면 안돼!

-님들 저거 일본어임 오해ㄴㄴ

방송 사고 말고.

선수들 화면은 나오지만 보이스는 안 나온다.

비슷한 발음의 일본어를 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방금 입 모양이 살짝 이상하긴 했지만 아무튼 마음은 전해졌습니다.〉

〈지역 단위 대회이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은 방언이 나온 걸 수도 있는 거에요!〉

의심되는 입모양을 했다고 반드시 욕은 아니다.

씨발 아저씨가 정말로 씨발을 하지는 않지 않은가?

한 가지 확실한 건 광주팀이 그만큼 당황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세트의 밴픽 구도.

도라이븐을 포함해 저격밴을 완성시켰다.

마왕의 활약이 예상 외였던 거지, 실효 자체는 충분히 보았다.

─PD님덜 밴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우리 팟수들의 땀과 열정

꼭 쥐어 짜서 좀 이기십쇼ㅅㅂ

└ㅅㅂㅋㅋㅋㅋㅋ

└5252 믿고 있다구!

└와 근데 정리 잘해 놨다

└팟수들의 집단지성.txt

그만큼 많은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다.

본인들이 한 건 아니고, 시청자들이 도와줬다.

팟수넷이라 불리는 까메오팟TV 사이트에 글이 올라왔다.

집단지성의 힘이다.

약간 컨닝페이퍼 느낌으로 요긴하게 활용했다.

하지만 수만 명의 팟수들도 지금 이 상황은 예견하지 못했다.

〈밴이 결국 어떻게 된 거냐면요. S급은 다 살고 A급만 다 잘린 그런 느낌입니다.〉

-갓렌도 S급?

-그건 폐급

-가붕이는 살아도 산 게 아니야……

상대의 일반적이지 않은 밴에 당황하고 말았다.

팟수들의 예견해준 경우의 수에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고깃집에 가서 된장찌개부터 싹 비워버린 상황이다.

오우, 이 새끼 된장찌개 좀 먹을 줄 아는 놈인가?

바닥나기 전에 어쩔 수 없이 숟가락을 옮기게 된다.

광주팀 입장에서도 저격밴만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허겁지겁 파사딘은 잘랐는데, 소위 소나무라 불리는 광우스타와 나무카이, 심지어 필리언까지 살아버려서…….〉

대회 무대에서는 절대 살 일이 없는 4인방이다.

혹은 살더라도 서로 하나씩 나눠 가지는 구도가 된다.

밴픽 구도에서 그렇게 암묵적인 합의를 하는 게 보통이다.

보통에서 한참은 벗어난 현 상황.

결코 방송을 위해 빅토리를 살려준 게 아니다.

그런 변수를 생각할 만큼 여유가 있지 않았을 뿐이다.

-빅토리 언제 나옴?

-OP부터 가져가야지ㅋㅋ

-이 와중에 갓렌 올려둔 것 무엇?

-제발 갓렌만은 하지 마……

백화점 바겐세일처럼 먼저 집는 사람이 임자다.

흡사 그런 구도의 밴픽 양상이 펼쳐져 버린다.

하지만 광주팀도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와아아아아-!

관중석이 갑작스레 요란해지는 이유가 있다.

현장 관중의 과반수는 광주팀의 팬들.

즉, 일련의 반응은 한 가지를 의미한다.

〈조커 카드를 서울팀만 준비해온 게 아니잖아요?〉

〈맞습니다. 실제로 솔로랭크에서 비주류 챔피언 장인으로 굉장히 유명한 유저에요.〉

이른바 똥믈리에.

똥챔 장인으로 유명한 김재슥이다.

그 위상에 걸맞게 가지각색의 똥들을 음미할 줄 안다.

70억분의 1이라는 불리는 갓렌도 그 중 하나.

하지만 가장 유명한 것을 꼽자면 그거다.

이것만 잡으면 챌린저에서도 캐리한다.

-챌카림 강림!

-남만정벌ON

-무등산 적토마ㄷㄷ

-후지산이거든?

말카림.

그의 야생성을 유감 없이 발휘할 수 있는 챔피언이다.

무등산 쪽인지, 후지산 쪽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긍정적인 방향임은 틀림없다.

〈광주팀이 밴픽 양상을 싹 바꿨어요. CC기가 부족했던 첫 번째 세트와 달리 빅토리를 포커싱하기 훨씬 쉬워질 겁니다.〉

〈미드도 극단적인 탤런이 아니라 트페라서 보다 팀파이트에 적합하죠.〉

-보다 적국 테러에 적합하죠

-??? ???? ??? ???!

-뭘 해도 테러랑 엮이네ㅋㅋㅋ

-역시 IS형 미드라이너

서로 완성된 조합을 놓고 봤을 때 광주팀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하지만 마왕의 포텐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은 또 미드 라인이 관건이 될 것이다.

앞전 경기를 생각한다면 타당한 추측이다.

해설진들의 분석도 다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인생은 실전이었다.

* * *

밴픽이라는 건 정말 오묘하다.

알면 알수록 더 답이 없는 세계다.

'밴픽에는 답이 존재하지 않아.'

수학처럼 0과 1로 맞아 떨어지는 세계가 아니다.

OP를 가져가면 무조건 좋다?

조합으로 완성시키면 신호등 치킨이 될 수 있다.

그럼 조합이 좋으면 짜세다?

상대 조합에게 상성에서 먹힐 수 있다.

징검다리가 없어서 라인전이 망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면 이렇게 하면 되지 않나?

초중반에 중점을 두며, 후반의 안정적인 보험과 함께 어쩌고저쩌고 열심히 잘 최선을 다해서 좋게좋게.

'그게 쉬우면 코치한테 월급을 왜 주겠냐고.'

생각해야 할 변수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보통 코치마다, 팀마다 성향을 가진다.

예를 들어 삼선 갤럭시는 우리 조합을 완성시키는데 초점을 둔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마찬가지로 나도 나만의 스타일이 있다.

선수의 주력픽을 뼈대로 살을 붙이는 방식이다.

현재 진행되는 경기에서 아군 픽을 살린 것도 대동소이하다.

「화염방사기 출력 전개!」

탑라인 구도가 이전 판과 완전히 상이하다.

아군 탑라이너 현준의 람블이 밀어붙이고 있다.

상대방이 말카림이라는 조커 카드를 꺼내긴 했지만.

'원챔충 얘들이 원래 극과 극이야.'

이전 세트에서 라인전을 압도했다.

그렇기에 캐리형 픽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주 챔피언을 잡은 이상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탑 그냥 다이브 해도 될 거 같은데?"

"죽여! 그냥 죽여 놔!"

챔피언 폭이 좁은 거지 실력에서는 앞선다.

라인전이 풀리자 정글러도 취직 환경이 열렸다.

탈리반 3세가 뚜벅뚜벅 걸어가 EQ를 넣고 빠져나오자.

─퍼스트 블러드!

아군이 적을 처치했습니다!

점멸을 들지 않는 말카림이다.

깃창 에어본에 람블의 호응이 더해졌다.

깔끔하게 갱킹을 성공시키며 주도권을 가져온다.

첫 번째 세트와는 입장이 바뀌었다.

원챔충이 원챔을 잡자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미드 라인의 상황은 여전하다.

좌아악-!

한 줄기 레이저가 트와이스 페이크를 스친다.

불타오르며 2타.

앞무빙 밟을 때 3타까지 명치에 박아 넣는다.

방금 귀환하고 온 트페가 다시 걸레짝이 된다.

얼핏 AD라 덜 아프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라인전까지는 거의 AP다.

'트포 갖춰진 후부터 갈리는 거지.'

스킬딜은 고스란히 박힌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 스킬은 전부 박아 넣고 있다.

상대 입장에서는 오히려 찾아가서 맞게 된다.

간단하게 말하면 실력 차.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느낌이다.

한 마디로, 어차피 맞으니까 CS라도 먹고 맞자.

좌아악-!

키잉!

늘어난 틈을 봐줄 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다.

물약신공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불현듯 머리 위에 떠오른 느낌표.

애꾸사자가 궁극기를 켰다는 신호다.

수풀쪽 측면에서 위협적으로 덮쳐온다.

진짜 신경 써야 할 대상은 그게 아니다.

휘리릭-!

도약과 동시에 날아오는 강화된 올가미.

애꾸사자의 궁극기갱이 까다로운 이유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단점도 존재한다.

'피하면 딜이 없어.'

섬광이 뜨기 전까지는 속박 하나 믿는 정글러다.

패시브 스택도 이미 써버린 후다.

한 가지 판단을 가능케 만든다.

LOL은 실시간 게임이다.

내가 판단을 내리는 동안, 상대도 판단을 내린다.

그 판단은 나를 잡기 위해 호응하는 것.

콰지지직…!

앞점멸궁으로 트페를 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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