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대회에서는 정말 어지간하면 나올 리 없다.
파앙!
그럼에도 과감하게 꺼내든 이유.
자신을 상징하는 챔피언이다.
마지막 일말의 자존심과도 같다.
─퍼스트 블러드!
도끼가 튕겨 오른다.
네 번째 세트의 막이 내린다.
* * *
성황 리에 진행되는 개스파컵.
수많은 논쟁을 야기시키던 챔피언이 드디어 도마 위에 올랐다.
〈리스크의 극한과도 같은 챔피언이잖아요. 해도 되는 거 맞나요?!〉
〈도라이븐 하나는 프로 선수들에게도 악명이 자자해요. 솔로랭크에서 보여준 인상적인 모습을 대회에서도 보여준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서울팀의 원딜러, 해강고원딜킹은 도라이븐 장인으로 익히 유명하다.
그 이미지 탓인지, 개스파컵 내내 쭉 저격밴을 당했다.
짐에어 그릴윙스가 밴픽을 수정하며 처음 살았다.
서울팀은 기다렸다는 듯이 칼픽.
장인으로서 명성을 증명할 기회를 잡아냈다.
하지만 도리어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짐에어가 도라이븐 열어준.EU
솔랭에서 도라이븐 미친놈처럼 하길래 잘랐는데
막상 대회에서 붙어보니까 좆밥이었던 거임ㅋ
└이거지ㅋㅋㅋㅋㅋ
└이 새끼 빠꾸 없누
└비겁하게 팩트 말고 선동과 날조로 승부하자!
└진짜 상상 이상으로 좆같이 못하긴 했음;;
짐에어 그릴윙스도 괜히 연 게 아니다.
선수들의 의견을 수렴해 내린 결론이다.
앞선 세 세트 모두 원딜러가 솔직하게 구멍이었다.
그다지 위협적인 선수는 되지 못한다.
오히려 자멸하기 쉬운 픽을 쥐어주는 것도 괜찮다.
해강고 선수로서는 그 굴욕적인 평가를 씻어내야 한다.
〈근데 나는 이거 망한 선택이라고 봐.〉
-벌써?
-아직 보여주지도 않았는데ㅋㅋㅋ
-클끼리 형님 한 번 쌌다고 너무하시네요……
-위에 강고 부캐임?
하지만 클끼리의 개인 방송.
사실상의 정면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그 이유를 잠자코 들어보면 혹평만은 아니다.
〈아니, 자꾸 채팅창에서 마왕은 저런 거 한다고 하는데 맞아. 그 선수는 여러가지 꺼내서, 여러가지 잘했지. 근데 그것도 상황이 받쳐줄 때의 이야기고.〉
앞선 세트에서 마왕은 여러가지 독특한 시도를 전부 성공시켰다.
해강고의 도라이븐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거 아니냐?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게 일단 크다.
〈지금 10명의 선수들 중 솔로랭크에서 해강고 도라이븐 안 만나본 선수 있을 것 같아? 일단 조커 카드로서의 의미는 없어.〉
-그렇네
-해강고가 지략파도 아니고
-도라이븐 그냥 킬만 안 주면 병신챔이잖아
-조합도 가관임ㅋㅋ
의외성이란 장점은 없는 셈이다.
그러면 조합적인 측면을 봐야 한다.
숙련도가 높은 만큼 조금은 더 활약을 기대할 수 있겠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픽이라 팀적으로 투자를 해줘야 돼. 그러면 뭐야? 상체 쪽은 못 봐준다는 이야기지.〉
도라이븐이란 픽이 괜히 조명 받는 게 아니다.
한 마디로 모 아니면 도.
하이 리스크&하이 리턴의 대표격으로 손꼽힌다.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서울팀은 바텀에 투자를 해야 한다.
이는 상체를 방관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클끼리 역시 선수 출신이라 날카롭네ㄷㄷ
서울팀 승리 패턴 생각하면 도라이븐은 별로래
└?? 오늘 로테 아니지 않음?
글쓴이-갠방으로 방구석 해설하면서 밴픽 짚어줌
└공식 방송이랑 달리 과격하네
└그래서 가끔 보면 꿀?
충분히 일리가 있는 해석이다.
현직 해설자가, 전직 선수가 말하자 신빙성이 실린다.
그리고 실제로 그만한 신뢰를 얻지 못한 선수이기도 했다.
─퍼스트 블러드!
과거의 이야기다.
바텀에서 선취점이 나온다.
해강고의 도라이븐이 캡잭의 치비르를 잡아냈다.
〈와! 아니-! 그냥 딜교환에서 끝나는 그림이었는데 갑자기 뒤로 홱! 돌아서 킬각을 잡았어요!!〉
-???
-아니, 저게 킬각이 나와?
-깜빡이도 안 키고 훅 들어오네
-사스가 클펠레;;
갑작스레 터진 사고다.
그 과정이 언뜻 이해가 안 간다.
리플레이를 통해 자세하게 보여진다.
꽈앙!
한 번의 딜교환이 있었고, 서울팀의 바텀이 졌다.
후퇴하는 과정에서 날린 방패.
브라운의 Q스킬이 적중했다.
파앙!
파앙!
순간적인 킬 캐치력.
극한의 숙련도가 돋보인다.
도라이븐이 앞점멸로 파고들어 도끼를 세 번 튕겼다.
〈저글링이 멈추지 않았고, 결국 브라운 패시브 터트렸습니다. 스킬이 빠진 모르피나는 무력하게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어요.〉
아무리 그럴 듯한 계산, 근거가 뒷받침된다고 한들.
세상 일이라는 게 생각대로 흘러갈 만큼 만만하지 않다.
프로 선수들도 방심은 분명히 하고, 사고는 심심치 않게 터진다.
파앙!
파앙!
문제는 그 한 번의 사고가 너무 치명적이다.
원딜간의 대화가 성립하지 않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적절한 플레이 메이킹.
─더블 킬!
KGS 해강고님이 학살 중입니다!
마왕의 나무카이가 텔레포트를 탔다.
정글을 포함한 4인 다이브가 이뤄졌다.
도라이븐의 성장이 정상의 범주를 넘어섰다.
이후 게임의 흐름은 간단해진다.
괴물 같이 큰 도라이븐에 의해 박살이 난다.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신명나게 울려퍼지며 끝을 맺는다.
〈도라이븐이 프로 레벨에서 이렇게 활약하는 장면은 처음 보는 거 같거든요? 솔로랭크에서는 정말 많이 봤는데…… 역시 장인은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드네요.〉
〈도라이븐을 수천 판씩 했잖아요! 이러니까 지금까지 밴 당하고, 견제 당한 것 아니겠습니까~?〉
해설진들까지 격찬을 쏟아지며 결국 탄다.
네 번째 세트의 MVP를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에 따라 커뮤니티의 여론도 역변하게 된다.
─Mr씨발좌…… 헤드셋 내동댕이.gif
넥서스 밀자마자 갖다 던지고 소리 지름
└롤원순씨 욕 나올 뻔했누
└롤원순 씹ㅋㅋㅋㅋㅋㅋㅋ
└"야이씨"까지 나왔다는 게 학계의 정설
└씨발좌 씹호감!
선수가 경기에서 실수했을 때.
허허, 그럴 수도 있지!
넘어 가줄 만큼 우리나라 팬문화가 성숙하진 않다.
대신 잘하면 웬만한 건 이해해주는 문화도 있다.
약간 금붕어 똥 같은 기질이다.
이전에 잘못한 건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린다.
사실 애시당초 가벼운 화두이기도 했다.
조롱성 비난이 나오는 이유도 그 선수가 너무 싫다, 밉상이다!
그래서라기 보다는 오버랩 되는 탓이 크다.
─솔로랭크에 보면 해강고 같은 애들 꼭 있지
우리팀일 때 존나 못함
상대팀일 때 존나 잘함
주사위형 원딜러
└ㅋㅋㅋㅋㅋㅋㅋ
└Fact) 해강고는 그 짓을 밥 먹듯이 한다
└도라이븐은 원래 복불복 재미지
└어찌 됐든 잘하기만 하면 된 겨
세상에 스로잉 좋아하는 롤유저 없다.
마찬가지로 하드 캐리 싫어하는 롤 유저도 없다.
결국 두 번재 세트의 결자해지를 해낸 셈이다.
서울팀이 짐에어 그릴윙스를 3대1로 잡고 결승 진출을 확정지었다.
경기 내용도 역대급이었다는 평가다.
커뮤니티가 폭주하고 있는 와중.
「[GeSPA컵] 각본 없는 드라마! 서울팀, 짐에어 상대 3:1 최종 승리」
「[GeSPA컵] 이변의 연속! 백전노장 맛밤, 짐에어 잡은 서울팀 결승 진출」
「[GeSPA컵]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역대급 이변, 개스파컵 결승 대진 확정!」
포털 사이트의 기사들도 예외는 아니다.
설마 하던 이변이 결국 터졌고, 대중들의 관심이 집중된다.
차근차근 쌓아온 스토리가 실력, 스타성과 더해지며 파급력을 낳고 있다.
심지어 이변은 그 하나가 아니다.
반대쪽 대진.
사실 바로 어제에도 커뮤니티를 폭파시킨 사건이 있었다.
「[GeSPA컵] GOO Tigers, 엄청난 난전 끝에 SKY T1 제압. 세트 스코어 3대2」
「[GeSPA컵] SKY T1마저 잡고 부산행…… GOO Tigers, 그들은 누구인가?」
「[GeSPA컵] ESPN 파워 랭킹 1위. GOO Tigers 탑솔 스맥을 소개합니다」
누구도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이변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다.
두 가지 대형 사고가 맞물리며, 새로이 쌓인 힘의 균형에 LCK팬들의 논쟁이 뜨겁다.
결승전 벌어지는 건 일주일 후.
부산 BEXCO 오디토리움이 무대가 된다.
자세한 속사정을 기다리기에는 팬들의 인내심과 궁금증이 벌써 한계에 가깝다.
-여기가 클펠레씨 방송인가요?
-이 형은 맞는 예측이 없네……
-이쯤 되면 일부러 안 맞추는 거 아닐까ㅋㅋ
-우승팀도 맞춰주세요! 저 마왕팬임 ㄹㅇ루다가
대체 어찌 된 형국인지.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싶기 마련이다.
그럴 수 있는 자리는 한정돼있고, 당장 떠오르는 건 한 사람 뿐이다.
〈어……, 그러니까 그게…….〉
클끼리 해설의 개인 방송에 때 아닌 변명회가 열린 이유였다.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다.
어제 대회가 끝나고 제안을 받았다.
개스파컵의 스태프가 직접 전달해준 사항이다.
《아직도 숙소 문제가 해결 안된 거면 결승 전까지 우리가 스태프 숙소를 대관해줄 수도 있거든? 어떡할래. 강제는 아니고, 우리도 일단 신경을 써줘야 할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비슷한 제안은 숱하게 받아왔다.
하나 같이 다 음흉한 속셈이 있어서 문제지.
하지만 이번 제안은 속셈이 아닌 순수한 호의다.
결승전 개최 장소가 부산.
스태프들은 미리 가서 준비를 해야 한다.
묵게 되는 숙소에 우리 자리도 마련해주겠다는 이야기다.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
그래서 받아들였다.
이전과는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환경이 변하는 건 어차피 감수해야 할 사항이다.
부산과 서울.
아무리 같은 한국이라도 저 끝에서 끝이다.
현지 적응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차라리 미리 가는 편이 낫다.
당일 날 KTX 타고 준비하는 것보단 여유가 생긴다.
생활비도 큰 폭으로 아끼니 일석이조다.
물론 개스파컵측도 100%는 아니고, 동네에서 파는 생과일 주스 같은 느낌이다.
'100%라고 써있긴 한데 얼음 존나 넣잖아.'
막상 마시면 밍밍해.
그렇다고 얼음 안 넣은 곳은 또 비싸다.
수익 문제가 있으니 당연하겠지만, 아무튼 순수한 호의는 아니라는 뜻이다.
「[GeSPA컵] '결승' 진출한 서울팀…… 여전히 부족한 여건. 이대로 괜찮은가?」
「[GeSPA컵] 결승팀이 PC방에서 연습을? e스포츠 아마추어 실태 집중 조사!」
「[GeSPA컵] 개스파컵曰 'Keg 서울' 지원 약속. 팬들께 심려 끼치지 않을 것」
인터뷰를 통해 동정 여론을 이끌었다.
방송에도 출연하여 관심을 심화시켰다.
결승 진출이 확정된 이후 기사가 수없이 뜨며 꼬집고 있다.
어쭙잖은 대회가 아니다.
국내 수백만 롤팬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장이다.
이대로 방관하면 욕 먹을 게 뻔할 뻔자, 피드백이 오게 된 건 필연이었다.
'원래 우리나라는 언플이 짱이야.'
사실 당연하게도 주최측이 그럴 의무는 없다.
여론이 워낙 극성이자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다분 의도적으로 저지른 짓이 성공적인 수확을 거둔다.
부산 해운대에 위치한 비즈니스 호텔.
앞으로 결승 전까지 편하게 머무를 장소다.
이미 도착해 짐을 풀었고, 하루 정도는 여유를 가지기로 했다.
〈아니, 나도 사람인데 틀릴 수도 있는 거잖아…….〉
어디까지나 긴장이 풀리지 않는 선에서.
놀러 나가는 게 아니라 단순한 휴식이다.
숙소 안에서 노트북으로 영상을 보고 있다.
'이 양반은 10년이 넘도록 한 번도 맞춘 적이 없으면서 왜 자꾸 맞추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작년도 못 맞추고, 올해도 못 맞추는 게 아니라, 내년이랑 내후년이랑…… 아무튼 내가 알고 있는데까지는 전부 못 맞추는 분이다.
클끼리 해설의 개인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이번 결승전 반응을 검색하던 중에 알게 됐다.
커뮤니티에서 클펠레 소리를 엄청 듣는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다고.
-사람이 아니고 쓰레기 아님?
-쓰레기 그 자체!
-역시 롤판의 펠레
-형님 이번 건 진짜 너무 틀린 거 같아요ㅋㅋㅋ
개스파컵의 대진이 어떻게 될지.
예측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하나도 안 맞았다.
심지어 해강고의 도라이븐이 망한 픽이라 언급했다.
경기가 진행되니 이게 웬 걸?
거의 깡패처럼 게임을 캐리해냈다.
시청자들이 따지듯 들고 일어난 건 어쩔 수 없는 업보다.
'근데 그건 나도 몰랐어.'
그냥 경험치 쌓으라고 잡아준 픽이다.
선수 한 명이 완전히 녹다운.
멘탈이 나가면 결승전에 올라가도 문제가 생긴다.
어느 정도 기대치는 있었어도 그 이상이었다.
이런 부분은 운적인 요소가 워낙 커서 예측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
하지만 대회의 승패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펀드 전문가가 돈 딸 거 같아요? 차트 전문가가 돈 딸 거 같아요? 경제학자가 주식으로 돈 잃고, 부동산 전문가가 부동산으로 돈 잃는 거랑 똑같은 거야. 전문가일수록 예측이 더 어려워.〉
-그런가?
-하긴 경제학자들이 더 못 맞춘다고는 들어봤음
-아는 게 많다 보니 오히려 헷갈려서 그럼ㅋㅋ
-주식도 클끼리님 반대로 하면 이득 보나요? 주식 사시면 말좀요!
한 번쯤 들어보는 이야기다.
주식으로 돈 벌기 쉬우면 누구나 주식 공부하지.
그게 어려우니까 예측만 하고, 적극적으로 일을 벌리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