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한국인의 이미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중산층 이하 계층의 사람들은 많이 밉본다.
소위 질투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
'대만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 안 좋아했던 거랑 똑같아.'
옛날에는 비슷비슷하게 살았던 거 같은데.
어느 순간 아득히 추월해 저~ 앞을 달리고 있다.
그 마음의 격차가 대만보다도 훨씬 심하다.
물론 그들이 어떻게 느끼던 별 상관은 없다.
어쩌라고 나보고.
하지만 팀 내의 위치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한자도 알아보나?"
"간체는 조금. 그래도 영문 계약서도 준비해주세요."
자신을 JCG Games의 감독이라 소개한 남자.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만 살짝 끄덕인다.
'팀의 실세인가 보네.'
어떤 팀이든 마찬가지다.
감독과 구단주는 가장 가까운 사이다.
한국 만큼은 아니어도 영향력이 있다고 보는 게 맞다.
하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
코치들이 대놓고 뒷담을 깔 정도다.
감독이 어느 쪽 입장을 대변할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임용 계약서』
■ 제1조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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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반나절을 기다려 계약서를 받아볼 수 있었다.
평이한 느낌이 드는 일반적인 계약서다.
얼핏 기본적인 것 같지만 의외로 감격적인 광경이다.
'그냥 A4용지에 볼펜으로 대충 쓱쓱 쓰는 곳도 있어.'
농담 같지만 농담이 아니다.
가계약이라고 대외적인 발표만 한다.
어, 그럼 나 취직한 건가? 그러고 중국에 건너온다.
픽업 받고 도착하니 백지 계약서를 내민다.
그러면 무서워서라도 보통 사인을 한다.
심지어 이게 사기가 아닌 경우도 많다.
'그냥 대충 한 거지 서로.'
엄밀히 말하면 탈세용이다.
걸리면 같이 좆되기 때문에 절대로 하면 안된다.
하지만 이곳 JCG Games는 표면적으로는 괜찮은 곳이다.
"근데 구단주님과 얘기했던 것보다 좀 많네요? 계약금 60만 위안에 승격 인센티브가 무려 240만 위안."
"사장님이 너를 특별히 마음에 들어해서 말이야."
"와~~ 심지어 세후 금액이네."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세금 공제 전, 세전으로 주면 실질 급여가 거의 반토막이다.
업계 평균은 당연히 세후지만 가끔 세전으로 후려치기 하는 곳이 존재한다.
'사장님이 날 좋아하는 건 맞아.'
이쁨 받을 말만 골라서 했으니 당연하다.
이제 신나게 계약서에 사인할 일만 남았다.
그렇게 와~ 개꿀띠! 하고 방심하는 순간 인생 좆되는 거 한순간이다.
■ 제5조 특이사항
JCG Games가 광저우 LDL에서 승격할시 을은 갑에게 240만 위안의 인센티브를 지급한다. 단, 갑이 확실한 활약을 증명한 경우에 한한다.
무심코 넘어가기 쉬운 문구다.
당연히 캐리하려고 온 거 아니야?
하지만 계약이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번외편으로는 출전 회수에 따라 급여를 받는 것도 있지.'
예를 들어 코치가 출전을 시켜주지 않는다.
강제로 벤치에 앉히고 서브만 내보낸다.
그러면 생으로 시간만 죽이는 거다.
한국 선수들이 가장 많이 당하는 독소 조항이다.
물론 중국팀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
원래 이러한 계약은 서로 따져야 한다.
저는 이 조항 마음에 안 듭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연봉을 이만큼 책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딱딱 조정이 돼야 하는데 한국 선수들이 어리고, 잘 모르니까 넙죽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거다.
'갑자기 3억원에서 5억원으로 상향 조정이 된 것도 그런 연유겠고.'
중국은 정말 재미있는 나라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흐름이다.
기껏 회귀까지 했는데 이런 안전 벨트 하나쯤은 가볍게 풀어헤쳐 줘야지.
"사인했어요! 우리 이제 한 팀이네요?"
"그렇게 되겠군."
"잘 지내봐요 즐겁게. 별 일 만들지 말고."
나의 충고가 와 닿았는지는 모르겠다.
* * *
본래 중국 LOL 리그는 1부부터 3부까지 나뉘어 있었다.
1부 리그 LPL
2부 리그 LSPL(East, West, North, South 총 4곳)
3부 리그 TGA(그 외 다수)
하지만 2015년에 들어 제도가 재정비됐다.
1부 리그 LPL(East, West)
2부 리그 LDL(상하이, 베이징 포함 12도시)
연고제를 위한 합리적인 변화이지만 프로팀들 입장에서는 다르다.
갑작스레 대격변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
물론 가장 영향을 받는 건 한 곳 뿐이다.
1부 리그팀 입장에서는 웬만하면 시드권 하나는 따겠지.
3부 리그팀 입장에서는 2부 리그 자동 승격 개꿀띠.
중간에 놓인 2부 리그팀만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처지에 놓였다.
승격하여 인생역전을 맞이할 것인가?
실패하여 문턱이 낮아진 2부 리그에 만족할 것인가?
그 갈림길이 현재 광저우 LDL에서도 조짐을 보이고 있다.
와아아아아-!
지역 팬들 입장에서도 민감할 수밖에 없다.
광저우 스포츠센터는 당연하다는 듯 만원이다.
심지어 가장 기대를 모으던 팀이 경기를 치른다.
〈Team CC 기회입니다! 전혀 모르는 눈치거든요?!〉
해설자의 긴박한 목소리를 관중들도 느끼고 있다.
Team CC의 정글러가 바텀 갱킹을 노린다.
당할 수밖에 없는 날카로운 타이밍이었다.
─더블 킬!
CC 고고라님이 학살 중입니다!
캐리 라인인 원딜러에게 2킬을 먹이는데 성공한다.
본래 광저우에서 가장 인기가 있던 팀.
현장팬들의 반응이 뜨겁게 터진 순간.
하아!
리심이 음파를 맞히고 날아온다.
3 대 1.
자포자기, 미쳤냐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Team CC의 대응은 침착하다.
탈리반 3세가 깃창을 그어버린다.
모르피나의 속박도 엇박자로 잘 날렸는데.
이~쿠우!
점멸로 피하며 방호로 순식간에 파고든다.
파고든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기가 막힌 각도의 당구킥.
─더블 킬!
트리플 킬!
JCG 마왕님이 전장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3인 당구가 작렬하며 전황이 뒤바뀐다.
원딜러가 순식간에 터진다.
스킬 빠진 모르피나는 샌드백에 불과하다.
살아남은 탈리반 3세.
정말 자연스럽게 방호로 따라붙는다.
평타를 퍽퍽 욱여넣으며 결국 잡아내고 말았다.
〈저 선수 혼자 철권 하고 있는데요?〉
〈아니, 대체…….〉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광경에 해설진도 말을 잃는다.
중국 LPL에서도 나오지 않는 슈퍼 플레이다.
하물며 LDL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저 무림 고수 같은 선수는 누구야?
-한국 선수라는데
-아, 그 마왕……
-무조건 승리한다는??
JCG Games는 후발주자다.
광저우팬들에게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만큼은 스치듯 들어봤다.
어마어마한 자금력.
최근 엄청난 한국 선수를 영입했다.
황금이 만드는 힘을 경기력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야.'
Team CC의 코치 겸 매니저.
류샤오는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두 다리 쭈욱 펴면 고향의 안방.
'안타깝게도 고향은 아니지.'
중국에서 치른 첫 경기.
다소 사고는 있었지만 결과는 좋다.
좋게 만들었다.
"하~~ 선생! 이렇게 속 시원한 경기는 처음이네.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하게."
"앞으로 많이 보실 텐데."
"하하! 그런 자신감 정말 좋아."
JCG Games의 광저우 LDL 첫 경기다.
구단주까지 응원을 위해 나왔다.
중국에서는 딱히 드물지도 않다.
'워낙 한두 푼이 걸린 게 아니라.'
LPL 때문에 파산하는 기업들이 속출한다는 게 농담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특히 중국은 극단적인 투자가 많다.
사람들의 기본 성향이 그러하다.
넓고 넓은 대륙.
지나치게 들끓는 사람.
이런 나라에 산다면, 나라는 한 사람의 가치가 우주의 티끌처럼 느껴지는 것도 일부 공감은 된다.
그러다 보니 모 아니면 도.
애매하게 사느니 도박수라도 던져본다.
중국에서 도박이 성행하는 이유이며, 기업들도 큰 틀에서 비슷한 감이 있다.
JCG Games도 얼핏 여유 있어 보여도 속사정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번 광저우 LDL에서 반드시 승격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이루어주고 있으니 얼마나 이뻐 보이겠는가?
"이렇게 빨리 Team CC 녀석들을 잡을 줄은 몰랐는데……. 괜히 무조건 이긴다는 명성을 쌓은 게 아니었어!"
"에이, 저만 잘해서 이긴 건 아니죠."
"겸손할 필요 없네. 수천만 위안을 쏟아 부어도 결과 하나 못 내는 저 못난이들과 선생은 달라."
"하하……."
하물며 이긴 팀이 보통 팀이 아니다.
구단주가 체통을 못 지키는 이유가 있다.
Team CC.
광저우 LDL의 최대 장벽이라 봐도 무방하다.
우연찮게도 첫 경기에서 만났다.
배정이 그렇게 떨어진 걸 뭐 어떡해.
하지만 나를 곤란하게 만들기엔 한참은 밋밋하다.
'나름 실력은 있는데 그래봤자 나름이야.'
LPL 이상의 용담호혈이 바로 현재의 LCK다.
그 아래인 LDL은 따질 필요나 있을까?
그냥 피지컬로 간단하게 때려 부쉈다.
"너희도 수고했어. 회사 카드 멋대로 긁어도 되니 회식하러 떠나게."
"……알겠습니다."
"선생은 시간 있으면 나랑 어디 좀 들리고."
"꼭 가야 되는 곳이에요?"
"눈치 없기는! 좋은 곳에 가자는 소리지~."
눈치가 없는 게 과연 어느 쪽인지.
적어도 사장 입장에서는 모를 수 있다.
원래 사장 좋은 게, 아랫사람 눈치 안 봐도 되는 거니까.
'근데 이런 특별 취급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거든?'
많은 한국 선수들이 나 성공했구나 개꿀띠!
그렇게 생각하고 높은 사람 뒤만 쫄래쫄래 어울려 다닌다.
물론 멀리 보면 그것도 나쁜 판단은 아니다.
그런 것도 꽌시(인맥)를 쌓는 과정 중 하나다.
가끔 XX 선수 중국에서 연봉 수십억 받고, 재벌 구단주랑 친하다더라?
이게 한국팬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엄~~~~~~~~~~~청나게 성공한 거다.
최소 죽을 때까지 먹고 살 걱정이 없을 만큼.
꽌시라는 게 쌓기도 힘들지만, 한 번 쌓으면 잘 무너지지도 않는다.
특히 결혼처럼 혈연으로 얽힌 건 인생 끝났다고 보면 된다 좋은 쪽으로.
"또 비싼 걸 먹으러 가겠군."
"호강하네 호강해."
"소국(小國)에서 찾아온 기회주의자."
하지만 사람이 너무 멀리만 보고 살면 안된다.
때로는 가까이에 있는 것이 소중할 수 있다.
해외 생활은 마라톤이라는 점을 항상 상기해야 한다.
'단체 생활에서 튀는 건 당연히 안 좋아.'
안 그래도 튈 수밖에 없는 한국 선수다.
귀가 밝은 덕에 코치들의 뒷담이 언뜻 들린다.
이전보다 심각해진 듯 몇몇 선수들까지 섞여있다.
안타까운 상황이다.
눈치 없는 사장도.
일일이 시기하는 소인배 같은 팀원들도.
캐리를 하고 욕 먹는다니 참 진귀한 경험이다.
"안녕하세요?"
사실 먹을 만하기도 했다.
매니저의 안내를 받아 사장이 기다리는 주차장으로 가던 도중.
익숙한 얼굴을 마주쳤다.
"스미마셍."
"네?"
"와타시와 니혼징데스. 주고쿠고와 데키마센."
"아~~ 일본말도 잘하시네요. 중국말처럼."
"……."
외국에서 쪽팔린 일을 당했을 때.
일본인인 척 하라는 옛날 방송이 떠올랐다.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당연히 먹힐 리가 없지.'
나도 무안하다.
사장이 체통을 지키지 못했다면, 나는 양심의 우체통을 지키지 못했다.
편지가 좀 많이 오더라고.
어쩌다 하나 뽑았는데 주소가 하필 바로 옆 번지였다.
그게 가장 탐스럽게 두꺼웠단 말이야.
하지만 결코 의도했던 일은 아니다.
"우연이네요. 이런 데서 다 만나고."
"저희 선수들과는 먼저 인사하신 것 같던데?"
"잘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무참히 박살내셨던데?"
"……."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다.
서로간의 오해와 불신이 다소 생겼다.
한·일, 한·중 관계가 그러하듯 대화를 통해 풀 수 있을 거라 본다.
"케케묵은 과거는 뒤로 하고, 페어 플레이 정신에 입각해 서로 좋은 경기 만들어나가면 좋겠습니다."
"일본인이나 할 법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요? 그래서 일본어를 쓰셨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