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입장에서는 곤란할 수 있는 문제지만.'
스크림에서 열심히 준비한 픽이 도로 아미타불이다.
그런 난감한 경험을 한국 선수들이 간혹 한다.
당연하게도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
"저는 후픽 해도 돼요."
"리심 안 잡아줘도 되겠어?"
"미달리 하는 게 나아서요."
"그래……?"
알고 있기 때문에 당할 이유도 없다.
미달리는 의도적으로 노출하지 않았다.
광저우에서 쓰기는 썼지만, 한 번으로는 정보가 충분치 않다.
카정으로 운 좋게 이긴 거 아니야?
안이한 생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이런 독특한 픽이야 말로 조커 카드로의 가치가 높다.
─아군이 RG 차이(리심)을 지목!
시작된 두 번째 세트.
상대는 첫 번째 세트의 패배를 교훈삼아 동선을 보완한 걸로 보인다.
대략적인 구도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탑&미드가 봐주면서 역버프 하고, 라인을 미는 바텀이 카정을 커버친다는 느낌이겠지.'
위치와 픽만 봐도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다.
프로 레벨에서는 그다지 특이할 것도 없다.
남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읽어낼 뿐.
"적 블루 들어가자."
"나도?"
"미드, 바텀 다."
상대의 동선은 물론 안정적이다.
하지만 읽어낸 이상 카운터도 가능하다.
타이밍을 맞춰 적 블루 지역에 침입한다.
'카정형 정글을 하다 보면 수싸움에 도가 터.'
일련의 플레이는 나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에 반해 상대는 익숙하지가 않다.
카정 메타는 차후에나 유행한다.
현재도 있기는 하지만 어설프다.
리심은 아군 블루로 기어 들어온다.
안정적인 동선을 포기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퍼스트 블러드!
적을 처치했습니다!
아군 탑은 리쉬를 하지 않았다.
주도권을 바탕으로 나루가 먼저 내려왔다.
약간 늦게 도착한 내가 앞뒤에서 싸먹듯 잡는다.
'아마 뇌정지 왔을 걸?'
사소하다면 사소할 판단 미스다.
초반 카정 싸움은 한 끗 차이로 승부가 결정된다.
그 경험치에 있어 비교를 불허한다.
슈룽~!
그리고 어설프게 맞백업 온 나무카이.
도망 치는 과정에서 나루의 부메랑을 맞았다.
느려지자 뻔하게 날아오는 창을 피할 수가 없다.
'점멸 정도 빼는 게 최선이긴 한데.'
슬슬 부활한 리심이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 초반 싸움은 상정할 여지가 많다.
센스와 경험, 둘 다 절실하게 중요하다.
그 둘 모두 앞설 수밖에 없다.
게임이 개판이 날수록 상대는 미스가 많아진다.
반대로 나는 판을 짜기 쉬워진다.
꾸웡!
한 터 기다려 다시 탑갱을 노린다.
거대하게 변한 나루가 내려 찍는다.
기절해버린 나무카이를 향해 정확하게.
타악!
점멸이 빠졌기에 피할 수가 없다.
리심의 동선도 아래쪽으로 강제됐다.
역갱의 걱정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아군이 적을 처치했습니다!
초반 교전의 균열이 번져 나간다.
얼핏 보기에는 운으로 보일 만도 하다.
그 과정에는 복잡한 설계와 심리전이 바탕된다.
'그래서 미달리가 양학용 정글로 손 꼽히는 거지.'
서로 가진 바 지식과 경험이 비등하다?
그러면 맞대응도 못할 것이 없다.
고수준의 게임에서는 톱니바퀴 돌아가듯 공격쪽도, 수비쪽도 알아서 척척 잘한다.
하지만 상대는 부족하다.
보이는 빈틈을 파고들듯 후벼 판다.
수준이 되지 못하자 일방적으로 당한다.
카운터 정글에 특화된 정글러.
실력 차이가 날수록 게임을 지배하기 이토록 쉽다.
나로서는 적당한 느낌의 실력 행사다.
당하는 입장에서 그러지 않을 뿐이지.
좁은 정글 지역.
미달리를 잡기 위한 포위망이 좁혀진다.
쿠루룽!
제우스의 섬전이 쏘아진다.
애꿎은 땅만 갈랐을 뿐이다.
그럼에도 일단 닥치는 대로 날린다.
닥치는 대로 피한다.
미달리의 무빙이 절묘하게 약오르다.
하지만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다.
「싸엘라 싸틴!」
가르마의 RQ 포킹이 작렬한다.
서포터인 탓에 데미지는 약하다.
그래도 슬로우는 걸었고, 리심이 각도를 재 음파를 날렸다.
와아아아-!
야릇한 무빙으로 결국 피해냈다.
가르마가 이은 끈도 간발의 차이로 풀린다.
관중석의 함성이 터진 이유는 다른데 있다.
〈나루궁 대박!〉
〈너무 깊게 쫓았어요 Rogue Gaming!〉
지나치게 시선이 쏠렸다.
좀만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몸도 종잇장이고, 별다른 생존템도 없다.
코앞에서 얄밉게 날뛰니 어? 열받네…….
단체로 쫓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대가를 치를 시간이 왔을 뿐이다.
─KF 키드님이 학살 중입니다!
잘 큰 나루가 미쳐 날뛸 판이 깔린다.
KF eSports의 백업이 속속들이 도착한다.
하지만 역포위망이 완벽하게 구성되진 않았다.
「평화가 함께 하시길」
가르마의 특유의 유지력.
한 명, 한 명 침착하게 퇴로로 빠진다.
제우스의 원호가 쏟아지며 상대의 진입을 막았지만.
타악!
쏘는 것은 마찬가지다.
미달리의 창이 적중한다.
포킹 데미지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만큼 맞히기 어려운 스킬이다.
논타겟이고 판정도 굉장히 박하다.
그럴 텐데도 쏘는 족족 이상하게 들어맞는다.
와아아아-!
정신 없이 도망가는 와중이다.
움직이는 동선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 점을 노려 절묘하게 쏙쏙 적중시킨다.
두 번 연속으로 적중하자 시선이 쏠린다.
관중들이 탄성 또한 쏟아진다.
어느새 창이 맞냐, 안 맞냐만 보고 있다.
─KF 마왕님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맞는다.
점멸까지 빠진다.
결과론을 따지기엔 미달리의 플레이가 너무 신출귀몰하다.
줄타기 같은 곡예를 오히려 즐기고 있다.
상대의 노림수를 역으로 흘려 넘긴다.
두 번째 세트도 빠른 속도로 기운다.
〈미달리가 원래 탑에서도 악명 높은 챔피언이지만 정글에서도 이렇게 매서운 활용이 가능할 거라고는…….〉
〈정말 스킬샷 한 대 차이였거든요?〉
첫 세트에서도 비슷한 반응을 했다.
하지만 어감이, 담긴 감정이 전혀 다르다.
우연이라고 볼 수 없는 확실한 자신감.
타악!
창끝에 담겨있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Rogue Gaming의 진영이 과녁처럼 보인다.
본대에서는 미달리의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블루팀의 포탑이 파괴되었습니다!
사이드에서는 잘 큰 나루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
이전 세트와 똑같은 흐름.
시종일관 휘몰아치며 게임을 이른 시간에 끝낸다.
〈두 세트 연속 KF eSports의 압승이 나왔습니다!〉
〈이변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너무 일방적인 흐름인데요.〉
첫 세트에 이어 두 번째 세트까지 연이어 승리한다.
심지어 경기 내용도 사실상 완승에 가까웠다.
해설진이 당황을 금치 못하는 이유가 있다.
-이게 말이 돼?? 짜고 치는 마작 아니야??
-스킬샷 피하는 걸 어떻게 짜고 치냐ㅋㅋㅋㅋ
-아니, 이 정도로 무너지다니……
-마왕 한 명 꼈다고 균형이 아작 났어!
난리가 난 건 일반팬들도 마찬가지다.
금일 경기의 향방이 어떻게 흘러갈지.
SNS와 커뮤니티에서 의견 차가 워낙 분분했다.
마왕에 대한 기대치는 물론 높다.
하지만 Rogue Gaming도 그에 못지 않다.
보여준 경기력과 기존의 위치가 있기 때문이다.
결코 약팀이라 볼 팀이 아니다.
13승 1패, 압도적인 성적도 이를 뒷받침한다.
속수무책 휘둘린다는 사실이 어색하게 보일 지경이다.
「?目山河」
30초 전。
한 번만 더 이기면 5천元이 1만元으로 돌아온다!
-이걸 탄다고?
-두 달치 월급 꽁으로 버네
-제길, 난 잃게 생겼는데. 먹튀나 당해라
웨이보主- 凸
중국 정서상 노름은 굉장히 보편적이다.
예측이 과열된 경기는 도박판도 커진다.
웨이보는 일희일비가 오가고 있다.
따낼 예정인 사람.
잃을 예정인 사람.
하지만 그 결과가 아직 정해진 것은 아니다.
"KF의 승리 패턴 알잖아."
"알죠. 근데 알고도 대응이 안되게 들어와서……."
Rogue Gaming의 부스 안.
선수들과 코치진의 격한 피드백이 진행된다.
그 내용의 이해가 막히거나, 의견 차가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알고 있다.
어떻게 해야 경기를 이길지.
이른바 '승리 패턴'이 보이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승리 패턴」
대부분, 아니 프로팀이라면 100% 존재한다.
승리로 향해 나아가는 레퍼토리가 정해져 있다.
어느 라인이 흥하고, 어느 라인이 받쳐줘야 하는가?
"카정을 당해도 탑에서는 싸우면 안돼."
"그게 말처럼 안된니까요. 억지로 들어와 버려서."
강한 팀일수록 그 패턴이 다양하다.
반대로, 뻔한 팀은 단조로운 패턴을 보인다.
KF eSports의 경우 탑이 캐리하고, 미드&바텀이 무너지지 않는다.
첫 번째, 두 번째 세트의 경기 내용이 그러했다.
그 외의 패턴은 상대가 약팀이 아닌 이상 거의 없다.
Rogue Gaming은 이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준비까지 해왔는데.
"미달리가 대놓고 들어와서 툭툭 때리면 진짜…… 스킬샷 못 맞히면 답이 없어요."
"좀 신중하게 쓰지 그랬어."
"당연히 그랬죠!"
미달리의 동선에 휘둘린다.
정신을 차려보면 상대가 원하는 흐름이다.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 자취를 따라가고 있다.
상대의 승리 패턴.
강요받듯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과정이 실수 같아 보여도, 두 번 연속으로 당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달리는 밴을 하자?"
"……네."
"감독님, 차라리 대응이 되는 랙싸이 같은 걸 살려서 후반 보는 게 낫겠는데요?"
KF eSports는 분명 탑라인이 잘한다.
하지만 미드와 바텀의 기량이 애매하다.
라인전을 준수하게 버텨도 한타에 가면 딜을 못 뽑는다.
승리 패턴이 정해져 있는 이유다.
이렇듯 초반에만 안 터지면 자신들의 승산이 높다.
그 승산을 더욱 높이기 위해 한타형 정글러를 주지 않았으나.
'마왕의 개인기가 생각 이상이야. 철저한 기본기 싸움으로 끌고 가는 편이 낫겠어.'
인정하지 않기가 힘들다.
우틀않을 시전하는 것도 한 번까지다.
세 번째 세트까지 패배하면 그야말로 광탈이다.
이전까지의 13승 1패 성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늘 플레이오프에서 지면 그대로 탈락이다.
승격 보너스도 물거품이 된다.
〈결국 미달리를 밴을 하네요.〉
〈역시 밴이 가장 확실하긴 하죠.〉
-진작 밴을 했어야지ㅋㅋㅋ
-대체 뭘 믿고 안 함?
-미달리가 죽으면 딴 게 살 텐데……
밴카드 하나 차이로 밴픽 양상이 180도 뒤바뀐다.
세 번째 세트가 시작된다.
* * *
팀을 이적한지 고작 나흘.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지만 충분하다.
'얘들이 경력이 긴 편도 아니라.'
가진 바 컬러가 단색이다.
팀을 파악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아주 담백한 승리 패턴을 가진 팀이다.
구루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