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두 공식 경기장에서 결승전은 치러진다.
와아아아아아-!
금일 경기가 가진 의미를 감안하면 관중들의 들끓는 흥분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현장의 관중수는 제한이 있지만, 제한이 없는 온라인 시청자수는 가히 이례적이다.
-이걸 1천만명이나 봐?
-응 뻥튀기
-오늘 경기가 경기잖아
-대륙은 광활하고, 사람은 모래알처럼 많다!
자릿수의 차원이 다를 정도다.
1천만 명.
대한민국 서울의 인구수와 비견된다.
물론, 스트리밍 사이트의 눈속임은 중국 내에서도 공공연하다.
LPL의 평균 시청자가 1500만 이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천문학적이다.
하물며 2부 리그 LDL.
대부분의 경기는 자릿수가 2개 정도 낮다.
한 선수, 아니 두 선수의 등장이 파급력을 미친다는 증거다.
〈오늘 두 팀의 경기를 어떻게 예상하시나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그야말로 백중지세, 용호상박이 아니겠습니까?〉
해설진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마왕의 기세가 승천하는 용이라면, 안섹은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범이다.
중국스러운 비유와 함께 선수들이 무대 위로 오른다.
-그렇다면 지금 무대 위는 호거용반인가
-멋지네
-오늘 둘 중 하나는 떨어진다는 거지?
-어느 쪽이 이기던 명경기가 나올 거야
현장에서도, 온라인에서도 반응이 엄청나다.
엄청날 수밖에 없는 광경이기도 하다.
네임드급 한국 선수가 충돌하는 최초의 사건이다.
「?云彪」
3일 전。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몰아낸다!
웨이보에는 드립 아닌 드립이 퍼지고 있다.
최근 가장 입방아에 오르는 선수.
중국에서 가장 많은 경력을 쌓은 선수.
그 둘의 대결을 빗댄 고사성어다.
상당히 무거운 표현으로, 일반적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그만큼 기대를 모으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Team King 대 KF eSports의 첫 번째 세트를 만나보…… 어?〉
해설자의 당황 어린 의문과 함께 시작한다.
* * *
플레이오프까지 사흘.
결승전까지 또 엿새.
이적한지도 벌써 열흘의 시간이 흘렀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항상 긴장을 하고 살아도 부족한 나라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속담이 중국에서 넘어온 건 아닐지.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막장이긴 한데.'
JCG Games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런 일을 또 당하지 말란 보장은 없다.
이곳에서도 그럴 가능성이 분명 있었다.
굴러온 돌이 너무 주목 받는다.
내 지분이 줄어드는 거 아니냐?
특히 기존 에이스인 키드의 입장에선 신경이 곤두설 수 있었으나.
'딱히 그러진 않더라고.'
불확실한 캐리보단 확실한 우승이 낫다.
우승만 하면 보너스와 LPL 활동이 약속된다.
그 편이 훨씬 합리적이고, 편한 것도 사실이다.
누구처럼 누나를 만나야 하는 게 아닌 이상 캐리에 목숨 걸 이유가 있을까?
중국인들이 자기 잇속에 민감하긴 해도 그 방향이 항상 극단적인 것은 아니다.
"긴장 돼?"
"아닙니다. 이겨야죠."
"오늘만 날인 건 아니니까 할 수 있을 만큼만 해. 긴장하면 오히려 더 안돼."
코치와 선수들의 마인드도 좋다.
KF eSports는 단합도 잘되는 편이다.
플레이오프 과정에서 준비도 얍삽하게 해놨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책임감.
상대가 네임드급 선수라는 부담감.
그 모든 걸 감수하고도 이길 수 있는 판을 깔아뒀는데.
터억!
생각보다 경기가 수월하게 진행된다.
상대 리심의 미드 갱킹.
"리심! 리심부터!"
"샤? 샤!"
역갱으로 잡아 먹는다.
거미여왕의 실뭉치를 적중시킨다.
그 위로 아군 제우스의 호응이 겹치자.
─적을 처치했습니다!
더블 킬!
역으로 젠부샤쓰.
리심을 순삭하고, 들어온끠즈까?잡아낸다.
허무하리 만큼 쉽게 미드&정글 싸움을 승리한다.
'물론 내가 역갱을 잘 봐서이긴 해.'
상대의 동선과, 갱킹 타이밍 등을 예상해 지근거리에서 시팅을 해준다.
일련의 행위를 역갱이라고 한다.
그만큼 세밀한 플레이가 요구되기에, 상대 입장에서도 예상할 수 있다.
역갱의 역갱의 역갱이었던 거임!
프로 레벨에서는 의외로 보편적이다.
경력도, 실력도 있는 안섹이 그 정도도 예상 못했을 리 없다.
─아군이 King Hu1(리심)을 지목!
이유는 간단하다.
안섹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섹은 탑라인에서 안색이 안 좋아 보인다.
쿠훙!
리픈의 일방적인 딜교환.
스턴으로 체력만 갉아먹고 빠진다.
그럼에도 안섹의 블러디체리는 쫓아갈 생각을 못한다.
'흔하디 흔한 정글 영향력 차이지.'
다이브를 의식해 체력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익숙지 않은 라인에서 고생하는 듯하다.
퍼엉!
가시는 길 편히 보내드린다.
폭탄 거미를 터트리며 풀딜.
아무리 체력 관리가 돼있어도 거미여왕은.
─적을 처치했습니다!
KF 마왕님이 학살 중입니다!
다이브의 마술사다.
적절한 핑퐁 관리로 깔끔하게 잡아낸다.
안타깝게도 상대 정글은 반대쪽 동선을 밟고 있다.
'정글러가 탑 설 때만큼 재밌는 게 없어.'
동선만 봐도 속 터져 뒤지거든.
첫 번째 세트를 가볍게 승리한다.
터진 속이 두 번째 세트에서 새어 나온 모양이다.
"탑야흐오?"
"킹시국에 야흐오를 하다니."
참교육을 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리심과의 시너지를 노린 걸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정글러가 잘해줄 때나 빛을 보는 거지.'
난이도 높은 픽일수록 정글러의 역할이 중요하다
애석하게도 상대 정글러는 그리 잘해 보이지 않다.
첫 번째 세트를 승리.
두 번째 세트도 승리.
세 번째 세트도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어메이징하구만.'
심혈을 기울였던 청두 LDL.
상대의 자멸로 김 빠지게 막을 내린다.
회귀를 한 만큼 이 당시의 사건들도 기억한다.
한국에서 떠나기 전에 이것저것 준비도 했다.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가야 할 것 아닌가?
준비한 덕을 톡톡히 보았다.
중국에서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연유다.
그렇게 여러가지 신경 쓰다 보니 오히려 허를 찔린 감이 있다.
'……선수 개개인의 사정까진 생각이 안 났지.'
아무리 미래의 정보를 알고 있어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하물며 그때그때 기억해 내는 것도 일이다.
맹점이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안섹.
한국에도 익히 알려진 네임드 선수다.
2014년 중순, 중국에 건너가 롤드컵 준우승이라는 자신의 최고 커리어를 달성했다.
하지만 이듬해.
2015년은 안섹에게 최악의 한 해였다.
Team King으로 이적 후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포지션을 변경하게 된다.
당연히 제 실력이 나올 수가 없다.
팀은 무려 두 번이나 강등을 당한다.
일련의 사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경기가 끝나고 나서야 떠올랐다.
'자신의 용감함을 증명하기 위해 2층에서 뛰어내리다 다리가 뽀개진 사건도.'
아무튼 전도다난하다.
나로 인해 조금 더 꼬인 것 같지만, 용감함을 증명할 일이 없어진다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딱히 남 걱정할 만큼 오지랖이 있진 않아서 곱씹어만 봤다.
"안섹이 탑으로 나와서 진짜 쉽게 이겼네."
"그래도 탑도 잘하던데요?"
"근데 낭비잖아. 고급 돼지인 왕이웨이양을 훠궈로 먹는 거나 다름없지."
결승전에서의 승리.
이후에 따르는 건 당연히 회식 자리다.
감독님이 훠궈의 붉은 국물에 돼지고기를 휘휘 저으며 말해온다.
'경기가 정말 빡센 경우에는 일단 쉬고, 다음날 예약 잡는 경우도 있는데.'
사회 생활에서는 일의 연장선일 수 있지만, 프로팀의 회식은 단순한 만찬이다.
피곤한데 굳이 맥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늘 결승전은 워낙 쉽게 끝나서 그런지 오히려 다들 기운이 넘친다.
"왜 그랬을까?"
"감독님은 뭐 들은 거 없어요?"
"알았으면 전략에 반영했겠지! 1부팀들은 스크림을 지들끼리만 해서 몰라."
경기 내용에 대해 피드백 아닌 피드백이 오가고 있다.
상대팀의 내부 사정이 신경 쓰이는 건 나 뿐만이 아닌 듯싶다.
'안섹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어이가 없는 게 당연해.'
현시점에서는 가히 세체정 후보로 불릴 만한 선수다.
그런 안섹을 난데없이 탑으로?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간다.
그런 일이 비일비재 하기에 중국이다.
강제 포지션 변경은 사실 드물지도 않았다.
특히 용병으로 온 한국 선수들이 숱하게 당했다.
'중국 부자가 명품 가게 가서 싹쓸이 한다는 일화가 있잖아.'
이거, 이거, 이거, 이거……, 빼고 다 주세요.
듣기만 하면 엄청나지만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그 부자는 결국 명품의 가치가 아닌, 과시욕에 돈을 쓴 것이다.
푸얼다이(福二代) 구단주들이 실제로 간혹 범하는 실수다.
돈은 때려 부어서 네임드급 선수를 영입했다.
그런데 전체적인 조립은 생각 못한 거지.
"창민아, 우리팀도 처음에는 시행착오 많이 겪었다."
"그래요?"
"솔직히…… 못 들으니까 하는 소리인데 나도 고생 많이 했어."
"한 잔 받으세요."
"어, 그래!"
KF eSports의 유일한 한국인 코치.
한국말로 소심하게 고민을 토로해온다.
스타크래프트부터 경력이 이어지신 분이라고 한다.
'나는 절대로 선입견 같은 건 없어.'
롤프로 출신도 아니면서 뭘 아냐?
색안경 끼기 쉽지만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성실하게 노력하신 분들은 경쟁력을 가진다.
선수 관리를 하는 노하우라던지.
스크림 스케줄과 영업 방법이라던지.
경력 없이는 알기 힘들 것들도 적지가 않다.
엑소더스가 프로게이머 위주로 주목 받아서 그렇지, 사실 코치나 감독도 엄청나게 많이 갔다.
중국이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운영이었으니 당연하다.
이분도 그런 분들 중 한 명일 것이다.
"근데 진짜 갈 거야?"
"네?"
"아니, 뭐 이 팀에서 계속 해도 되지 않을까 해서. 우리팀 분위기도 좋고, 승격도 했으니까……."
나에게 상당히 미련이 남으신 듯하다.
실력적인 면도 있겠지만 아마 가장 큰 건 생활이다.
까놓고 말해 외국인 노동자, 타지 생활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하지만 나는 적응도 됐거니와 중국말도 그럭저럭 잘한다.
아직 과도기인 코치님은 애로사항이 있어 보인다.
안타깝게도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맑은 정신으로 기상한다.
감독과 코치들과 달리 나는 술상을 고량주로 적시지 않았다.
'아무리 중국이라도 이 나이에 술은 마실 수 없으니까.'
그런 것 치고 몇몇 선수들은 잘만 마셨다.
살짝 혹하기는 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아침에 바로 선약이 잡혀있기 때문이다.
"수고했어 정말! 어제는 내가 회식에 참여했어야 했는데……."
KF eSports의 구단주님.
처음에는 그냥 푸얼다이인 줄 알았는데 상당히 바쁜 분이었다.
경기만 후다닥 보시고, 축하해 주시고, 회식 자리 깔아주시는 어떻게 보면 가장 이상적인 상사이긴 하다.
"그런데 상당히 쉽게 이겼더라?"
"뭐, 그렇게 됐죠."
"그만큼 덜 주면 안돼?"
"……."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고객님.
무슨 남대문 시장도 아니고 가격 후려치기는 어림도 없다.
당연하게도 그런 의도로 하는 말이 아니다.
중국 부자들은 돈을 쓸 때 아끼지 않는다.
통 크게 쓴 만큼, 통 크게 벌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문화다.
"사실 내 개인적으로는 네가 이 팀에 더 있으면 좋겠거든?"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시구연."
"아니, 정말로! 우리팀에 잡고 있기에는 아까워서 그래. 큰 물고기는 큰 물에서 놀아야지."
구단주님을 뵌지 얼마 되진 않았다.
알고 지낸 기간만 따지면 JCG Games보다 훨씬 짧다.
그럼에도 신뢰가 가는 건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괜찮은 분이더라고.'
실제로 그럴 만도 한 일이다.
이곳 청두는 LPL West, 서쪽에 소속돼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