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째인지 세는 것조차 잊어버린 한타는 4 대 4의 교환으로 끝이 난다.
'물론 이런다고 게임을 이긴 건 아니야.'
이런 숨 막히는 혈전.
아군은 고작해야 한숨 돌리는 정도다.
적팀은 딱 한 번만 이기면 게임을 끝낼 수 있다.
가진 바 리스크가 차원을 달리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실낱 같은 희망이 보인다.
그것은 바로 내가 원딜이기 때문이다.
'○○이 잘하니까 후반 가보자. 여기서 ○○은 원딜 말고 그 어떤 포지션이 들어가도 어색해.'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분명 가장 수동적이고, 영향력 떨어지고, 팀운에 좌지우지 된다.
그런데 항상 게임의 중심에 있고, 어느샌가 보면 원딜의 생존에 승패가 갈린다.
오죽하면 코치들이 하는 속설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상체 잘하는 팀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우승하는 팀은 결국 원딜 잘하는 팀이라고.
그만큼 LOL에서 원딜의 중요성은 말해서야 입만 아프다.
찰칵!
풀템을 갖추고도 돈이 남는다.
한 명이 성장을 독식하는 것은 악수다.
다른 포지션이라면 분명 그 지적이 맞다.
하지만 원딜이다.
스태틱을 팔고 망령 무희를 산다.
아이템을 보다 호화롭게 꾸릴 수가 있다.
심지어 신발도 팔 수가 있다.
'신발 팔고 트포는 국룰이지.'
오직 딜템만으로 아이템창을 채운다.
그런 미친 짓이 가능한 유일무이한 포지션이다.
IC의 일방적인 리드였다.
보기 드물 정도로 터져버렸다.
25분을 채 넘기지 못할 것만 같았던 게임이.
〈결국 또 막긴 막았어요.〉
〈아니……, 쌍둥이를 끼고 대체 몇 번을 버티는 거죠?〉
60분.
장장 한 시간을 넘기고 말았다.
그 과정 하나하나가 애간장을 태우게 만들었다.
─레드팀의 억제탑이 재생성되었습니다.
고비를 넘고 넘은 보람이 생긴다.
휑했던 벌판에 건물이 하나둘 들어선다.
쏟아져 오던 거대 미니언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 의미는.
타랑! 탕, 탕탕!
라인 클리어에 쓰이던 부메랑.
이제는 적들에게 닿을 수 있다.
V5가 정말 처음으로 치고 나간다.
「모조리 쓸어버려!」
이랠리야가 어림도 없다며 물어온다.
풍부한 시야를 바탕으로 한타를 건다.
IC의 과감하기 그지없는 이니시에 당황할 만도 하지만.
탕! 탕!
이전과는 다르다.
치비르의 평타 한 방, 한 방이 묵직하다.
애초에 퓨어 탱커도 아닌 이랠리야는 탱킹이 될 시점이 지났다.
〈어, 어? 이러다 죽어요?〉
〈6코어 나온 치비르거든요?!〉
그리고 치비르는 강해졌다.
아이템 하나하나가 고급이 아닌 것이 없다.
신발까지 팔고 6코어로 무장한 원딜러의 화력이다.
탕! 탕!
이랠리야가 제대로 접근하기도 전에 갈려버린다.
아니, 접근하지 못하게 함이 옳다.
신발이 없어도 빠르다.
치비르 특유의 이동 속도.
삼종신기도 추가 이동 속도가 있다.
카이팅을 하며 이랠리야를 거의 잡아내긴 했으나.
퍼엉-!
철컹!
그 직전에 닿는데 성공한다.
억지로 접근해 안두인의 방패를 터트린다.
느려진 치비르를 향해 평형의 일격을 박았다.
확정 스턴.
아군이 호응할 발판을 만든다.
르풀랑과 리심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들어간다.
타랑! 탕, 탕탕!
「숨어보시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패대기를 치고 있다.
한나의 보조를 믿고 힐장판 위에서 팔을 멈추지 않는다.
「노력은 인정해주지!」
때로는 과감하게 받아낸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와도 같은 곡예.
성공했을 때 쏟아지는 찬사는 예정된 것이다.
와아아아-!
일촉즉발의 상황이 일단락된다.
한나의 실드 쿨타임이 다시 돈다.
미니언 웨이브를 치며 피흡까지 완료시킨다.
그 사이.
V5도 앞라인이 정리 당한다.
하지만 그 속도가 누가 봐도 차이가 난다.
-케잉 너무 노딜 아님?
-딱총
-원딜 차이ㅋㅋㅋㅋㅋ
-안 그래도 약한데 생존템까지 갔잖아
좋게 말하면 안정적이다.
나쁘게 말하면 원딜이 노딜이다.
그런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 포지셔닝, 카이팅, 그리고 템트리.
모든 것에서 차이가 현저하다.
원딜러가 아니라 암살자라는 느낌이다.
순간 그런 착각이 들어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다.
타랑! 탕!
점멸과 연이어진 두 번의 평타.
평캔을 통해 한순간에 욱여 넣는다.
당황한 헤이클린은 투망으로 일단 거리를 벌렸다.
「이거나 먹어라!」
그 위를 슥삭-! 긋고 지나간다.
후반 원딜러는 누킹이 가능하다.
일련의 이야기가 어째서 나오는지 보여주는 광경이다.
〈수호 악마가 있기는 한데…….〉
〈이거 살리나요? 버리나요? 일단 1 대1 은 무조건 집니다!〉
똑같이 평타를 주고 받아도 같은 한 방이 아니다.
모든 리스크를 짊어진 치비르.
안전 벨트를 동여맨 헤이클린.
돌아오는 리턴의 무게는 급이 다르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것도 사실이다.
IC는 원딜을 살리기 위해 총력을 다해 들어갔다.
파앗!
패시브가 터지고 후퇴했던 르풀랑.
한 번 죽고 수호 악마로 살아난 이랠리야.
얼핏 3 대 1의 일방적인 구도가 연출됐지만.
타랑! 탕, 탕탕!
「숨어보시지!」
치비르의 부메랑은 튕긴다.
광역 데미지에 함께 쓸려 나간다.
6코어, 한나의 실드를 감안하면 7코어나 다름없는 원딜이다.
평타 한 방, 한 방의 무게가 상상을 초월한다.
설마 하는 데미지가 펑펑 터진다.
동시에 피흡까지 가능한.
─트리플 킬!
전설의 출현! V5 마왕!
미쳐버린 광경을 목도한다.
세 명의 딜러가 단 한 명한테 병풍처럼 쓰러진다.
시체가 널브러져있는 전장에 홀로 고고하게 서있다.
와아아아아아-!
남은 진을 쏙 털어 넣는 듯한 외침이다.
그도 그럴게 힘든 건 선수들만이 아니다.
현장 관중들도 거의 기진맥진해진 상태다.
-이걸 한 시간이 넘게 하다니……
-밥 먹고 왔는데 아직도 안 끝났어?
-결국 비비고 비벼서 이겼네
-아직 안 끝났어ㅋㅋㅋㅋㅋㅋㅋ
온라인 시청자들도 마찬가지다.
애석하게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장 마지막에 죽었던 리심.
이쿠, 이쿠!
수호 악마의 부활 시간 동안 제외돼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미니언 웨이브를 지운다.
그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임은 맞다.
타랑! 탕, 탕탕!
하지만 이미 출발한 미니언은 어찌할 수 없다.
한줌에 불과한 미니언으로도 충분하다.
치비르와 한나가 성큼성큼 진격한다.
─블루팀의 포탑이 파괴되었습니다!
게임 시간 62분.
부활 대기 시간이 1분이 넘어간다.
연약한 포탑은 치비르가 툭-! 건들기만 해도 으스러진다.
〈게임 끝났어요. 못 막습니다!〉
〈천신만고의 수비 끝에 V5가 이번 스프링 시즌의 역사 한 페이지를 장식하네요…….〉
말을 잃게 만드는 과정과 결말이다.
라인전 단계의 유리함, 먹은 용의 개수, 바론의 개수, 민 포탑의 개수, 킬 스코어, 글로벌 골드, 각 선수들의 KDA 기타 등등의 지표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아무래도 상관없게 만들고 있다.
와아아아아아아-!
이번에야 말로 진심으로 짜낸다.
틈만 나면 '용준' 해버리는 LCK와 다르다.
난전과 막싸움이 일상인 LPL에서는 결코 흔하지 않다.
와 닿는 감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함성은 진심이다.
고군분투한 IC에게도, 결국 승리를 거머쥔 V5에게도.
「Royal Never Give Up!」
30분 전。
IC가 진다??? 장강 다이브한다 쒸불련들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장강물 온도 어떠냐??
-수영하기는 좋겠다야 날이 더워져서
-효도 찬스
-따뜻해서 안 죽음ㅋㅋㅋ
마침 3월 중순이 지나 강물이 따듯해진 일부 안티들에게도.
* * *
가끔 커뮤니티를 보면 이런 글이 올라온다.
─원딜은 팀빨이다
1.탑이 못한다= 한타때 딜 못 넣음
2.정글이 못한다= 생태계 초토화
3.미드가 못한다= 끔살
4.서폿이 못한다= 15GG
반박하는 놈은 대가리에 총구멍 날 예정
└격하게 공감 가네요!
└원딜은 잘 커도 암살자에게 썰리지ㅋ
└전라인 중에 원딜로 올리기가 제일 어려워
└이런 글 쓰는 놈 특) 자기가 원딜이라 못 올리는 줄 암
원딜러의 한을 서럽게 토로한다.
이는 일반 유저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티어 올릴 거면 원딜 하지 마.》
《게임사는 내 방송 보고 있으면 바로 원딜 상향해야 돼~.》
천상계 원딜 스트리머들까지 선동하는 일이 있다.
어떻게 보면 그럴 듯한 소리.
하지만 정작 프로 선수, 혹은 관계자들은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내용이다.
'저런 말 하는 애들 보면 뒤통수 한 대씩 존나 세게 때려주고 싶어.'
백문이 불여일타라고 맞아야 깨닫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마스터, 챌린저가 말했으니 맞겠지~.
안이한 마인드로 선동 당하는 유저들이 실제로 적지 않다.
만에 하나 여론이 안 좋아서 원딜이 상향된다?
심지어 시즌 중이다?
기존의 전략, 밴픽 싹 다 갈아엎고 처음부터 다시 짜야 한다.
회사로 따지면 야근 확정이다.
'롤알못 새끼들 닥치게 만드는 법안 제정 왜 안 하냐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니까?'
울화통이 터지니 하는 소리고.
이성이 아닌 감성의 영역에서는 이해한다.
팀 차이가 나면 원딜러가 멘탈이 깨지기 딱 좋은 게 사실이다.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압류 딱지가 오브젝트랑 타워마다 붙고 있는데 당연히 힘들지.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으면 하늘이 원망스러워진다.
하지만 힘든 건 어디까지나 멘탈이다.
원딜러는 후반 라인.
그 중요도는 다른 어느 라인도 대체하지 못한다.
멘탈만 부여잡고 게임을 이어나가면 개천에서 용이 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한 시간이 넘어가는 접전 끝에 역전승을 이루어내셨습니다. 감회가 깊으실 것 같은데 소감 부탁드려요!"
인터뷰를 진행한다.
사실 코치 입장에서 보면 할 말이 많다.
'존나 많지.'
백문이 불여일타하고 싶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하지만 선수 입장에서 보면 간단하다.
"조금 길게 가긴 했는데."
"조금이요……?"
"결국 후반 가면 저희가 이길 수밖에 없는 경기라고 봤어요."
"어……, 이전까지의 LPL 공식 최장 시간 경기가 55분 13초고, 최다 CS가 458개였습니다. 그 둘을 전부 갱신하셨거든요?"
최고 CS 778개, 최장 시간 경기가 62분 12초로.
인터뷰어가 떠듬떠듬 긴장하며 읊어온다.
준비해왔던 흐름과 조금 다른 모양이다.
'어렵게 보일 수도 있어.'
IC의 공세가 대단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버텨냈다.
원딜러가 우여곡절 끝에 하드 캐리를 했다.
딱 그거 세 개만 보일 수도 있는 노릇이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프로씬의 모든 판단에는 이유가 따른다.
원딜 차이.
그로 인해 상대는 조급함을 느낀다.
그 조급함으로 인해 실수가 만들어진다.
이를 하나둘 받아먹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씩 끌린다.
상대의 조합 파워가 한계를 드러낸다.
"한나가 붙은 치비르를 상대가 잡을 수가 없어요. 주요 스킬만 적당히 피하면서 카이팅 하면."
"아,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