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19) 군사고문단 들이기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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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 해에는 꽤나 슬픈 일도 있었다. 지금의 주상인 이영도 아끼고 선왕 시절에도 조선을 위해서 일했던 역관 천초 문순득의 서거였다. 이영은 그의 사망을 매우 안타까워하면서 그의 지인들이며 가족들을 위로했다.
가장 슬퍼한 이야 문순득이랑 가까웠던 정씨 형제의 자녀들이랑 환재 박규수였으며 추사 김정희도 말할 필요가 없었다. 박규수랑 김정희와 함께 주상의 총신집단에 분류되었던 문순득이였으며 그런 그의 사망은 앞으로의 정국과 경장에서는 타격이 있었으나 이미 노인이었던 그에게 더 많은 삶을 바라기는 무리였었다.
“천초, 경은 큰 사람이었다. 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많은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죽음이 안타까우며 슬프다. 그만한 사람이 어디 있었는가?”
“천초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저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면서 견문을 넓게 했습니다.”
“그의 도움도 있기에 조선은 개방을 더욱 진취로 해낼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나는 천초의 명예직으로 받았던 품계를 고인을 위하여 가자하고자 한다.”
이영의 진심어린 말에 박규수와 김정희는 더욱 슬퍼졌다. 문순득의 족적은 표해록, 표류기의 작성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조선을 위해서 일하고 그 능력으로 역관이 되며 많은 일을 조정을 위해 헌신했다. 그리고 이제 그의 빈자리를 그 작지만 컸던 거인의 제자들이 메울 것이었다.
그의 품계를 사후 추증하자는 것에 신료들은 무리한 것만 아니면 동조를 할 생각이었는데 원래 문숙득은 명예직이지만 품계로 종 2품 하계, 가선대부였었다. 그리고 여러 공적으로 종 2품 상계인 가정대부, 이어서 정 2품 하계인 자헌대부로 올라갔었다.
이에 대해서 생전에도 반발이 있었다만 그의 성과를 무시할 수 없기에 그랬었고 또 명예직이니까 넘어갔었다. 주상인 이영은 천초의 생전 품계이던 정 2품 하계인 자헌대부에서 정 2품 상계인 정헌대부를 넘어서 그를 종 1품 하계인 숭정대부에 봉하려고 했으며 이는 품계가 2급이나 더 올라간 것이었다.
“전하, 중인 중에 당상관에 올랐던 이들이 있지만 천초는 매우 파격입니다. 정 2품 상계인 정헌대부만으로도 족하지 않나 생각하옵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역관 천초가 공적이 높아도 1품은 좀 높지 않은가 싶습니다.”
신료들은 그의 공적을 부정하지 않았는데 다만 좀 높다고 지적을 하는 것이었다. 이영은 내심 문순득이 선왕이랑 저 밑에서 얼마나 고생하고 실무자로서 일했는지를 보고를 통해서 잘 알기에 저 정도는 충분히 줄만하다고 여기고 있었으나 신료들은 생각이 달랐던 것이었다.
이를 어느 정도는 인정을 하고 있으며 그래서 아직은 대화의 여지가 있기에 신료들을 설득한 생각인 주상이었다. 저가 보기에는 천초 문순득은 저만한 품계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봤으며 실제로도 공적을 그만큼 세웠다.
이영은 이들을 설득할 요량으로 입을 열었고 바로 화를 낼 이유가 없었다. 신료들은 그가 그만한 공적이 있다고 인정은 하지만 일정 부분은 과하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신료들도 주상에게 정 2품 상계에도 충분히 높다고 설득을 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서로를 설득하려는 설득의 언쟁이 시작이 되었다.
“전하, 천초의 공적은 분명히 높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높은 것을 준다는 것에서 전례가 없습니다. 물론 천초는 전례가 없음에도 받을 수 있는 공적이 마땅합니다. 그래서 전례가 없어도 정 2품 상계면 매우 높습니다.”
“그렇소. 허나 명예직이요. 천초가 한 실무의 업적은 매우 높소. 실직으로도 당상관에도 올랐소. 동의보감을 지었던 허준도 견줄 수 있는 공적은 이미 있소. 그리고 나는 열심히 일하고 공적을 보이며 조정에 헌신한 이에게는 그에 걸이 맞는 상을 주어야 한다고 여기고 있소,”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정 2품 상계로도 천초의 공적을 매우 높이 평가한 것이라고 생각하옵니다.”
이영이랑 신료들 사이에서는 언쟁이 이어지고 있으나 서로에게 악감정은 없었다. 그저 생각하는 견해의 차이로 화를 내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박규수와 김정희는 우선 어디에 가담을 할지 생각을 하고 있으며 그들은 대체로 문순득의 공적을 알기에 파격을 시행해도 옳다고 여긴다.
“저어 허준은 사후에 그 품계는 정 1품 상계인 보국숭록대부에도 올랐으며 부원군의 자리를 봉작 받았다. 그대들은 천초, 순득의 공이 허준보다 낮다고 보는가?”
“그 것은...”
“천초의 공은 양평부원군이랑 견줄 수가 있습니다.”
“내가 그에게 부원군의 자리와 보국숭록대부를 줄까 했지만 반대가 있어서 이리했는데 이마저도 아니 되는가? 허준의 전례에 비하면 천초의 공적을 도리어 낮게 평가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이다.”
허준을 언급하면서 명분을 선점하는 이영이었으나 그래도 신료들은 할 말이 있기는 했는데 비교하기가 맞지가 않으며 둘 다 중인이라도 출신이며 둘의 공적은 비슷하지만 양평부원군의 공로가 묘하게 더 큰 것을 강조하였다.
“허나 양평부원군은 선대의 군주들을 구한 일이 있으며 호종 공신들의 일이 있으며 의관이랑 역관을 같이 비교하는 것은 좀 맞지가 않다고 봅니다.”
“둘 다 중인이라도 결이 다르옵니다.”
“양평부원군은 반가의 서자였고 천초는 상민이어서 상황은 다릅니다. 물론 공적은 둘 다 비등하옵니다. 허나 역관 중에 종 1품의 품계를 지낸 경우가 전례가 없으며 역적 장가는 실직으로 정 2품까지 지냈으나 품계는 그 것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역적 장가는 희빈 장씨의 외척으로 오른 것이다. 결이 더욱 다르다. 천초는 조정의 충신이로 역적 장가는 역적이로다.”
“그렇습니다. 허나 상민으로서 역관이던 관료로 들어가서 생전에는 정 2품 하계였고 사후에는 그보다 높은 정 2품의 품계를 받을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천초는 그런 전례가 없어도 그 공적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너무 파격은 아니 되옵니다.”
“법도에 큰 파격은 아니 되옵니다.”
언쟁은 더욱 격화가 되고 있으나 물론 서로에게 화를 내지 않고 있었다. 서로를 이해하고 있으며 고인인 문순득이 상당히 비범했기에 이러는 것이며 신료들도 그의 공적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파격이라서 타협으로 정 2품 상계로만 올리는 것을 우선 족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반상의 법제가 크다. 서얼은 물론이며 중인들의 소청과 청요직 진출이 되었지만 반가는 능력이 있어도 중인 등이 그리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아무리 명예직이라도 말이다.’
‘하물며 상민이다가 중인이 된 천초라면 그들은 반대를 할 것이다. 그마저도 저런 의견을 내는 것은 천초의 공적을 부인할 수 없기에다. 그나마 그게 다행이지 않은가?’
그래도 다른 이들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안 되면 정 2품 상계로도 충분할 수도 있다고 여긴다. 대신에 고인의 유족을 기리고 그 공적을 인정해서 은자를 꽤 내리는 타협도 생각을 하는 김정희와 박규수였다. 언쟁은 계속 이어지지만 그렇게 날카로운 설전은 아니었다.
온유하나 서로의 논리를 내면서 서로를 설득하려는 것은 매우 힘든 것이다. 두 사람은 이제 자신들이 나서야 할 때가 왔다고 여긴다. 먼저 김정희랑 박규수는 서로 말없이 눈으로 보면서 소임 분담을 시작했으며 이어서 김정희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전하와 다른 분들은 잠깐 진정하시지요. 신이랑 환재가 제안을 하나 올리고자 합니다. 주상 전하의 의견대로 고인인 천초는 매우 공적이 높습니다. 그래서 주상께서 제안한대로의 품계를 받아도 마땅합니다. 하지만 신료들의 의견대로 너무 파격이라는 것도 타당은 합니다. 그래서 정 2품 상계인 정헌대부면 됩니다. 정헌대부로 두시지만 그 공로를 고려해서 천초의 아버지도 높은 자리에 추증을 하고 그 공적에 맞은 상으로 은자를 내리는 것은 어떠하옵니까?”
“신 환재, 고인인 천초와도 가까운 사람으로서 이러는 것이 고인도 합당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 어떤 중인이며 상민 중 공명첩으로 그 이상의 품계를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더욱 스스로 공로를 겸손했던 고인입니다. 이를 배려하여 주소서.”
주상은 두 총신의 말을 들으면서 파격이라고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다른 대안이라면 너무 과한 포상의 돈이 아니면 신료들도 반대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려를 한다. 좀 아쉽다고 여기는 이영이었으나 그래도 이번에는 잠깐 물러나는 것이 좋다고도 본다. 다음에 그의 품계는 얼마든지 추증을 할 수가 있으니까 말이다.
“좋다. 그대들의 중재를 들어서 그렇게 시행하겠노라. 그의 유족에게 내리는 은자로 은 2천 냥이다. 어떠한가? 그 돈은 내수사의 내탕금으로 내겠다.”
“좋습니다. 전하.”
은 2천 냥이면 적당하다고 여기는 신료들이었다. 이렇게 간신히 타협을 했으며 이영은 또 천초의 유족을 위로하려고 친필로 글을 써내려 간다.
지금의 주상인 이영은 잘생긴 얼굴에 못지않게 필체가 좋았다. 그 필체가 좋기로 유명한 추사도 주상의 필체에는 호평을 하는데 그 친필서신을 천초의 유족에게 전하려고 한다.
사역원의 홍이학은 더욱 번창하고 있었으며 그의 유족에게 주상은 은자를 내려주고 그의 공로를 치하하고 친필서신으로 위로하기로 했다. 역관이 되면서 어부, 평민에서 중인이 된 그의 집안은 아들들이 아버지를 따라서 역관을 도전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만큼의 위대하고 능력이 있는 역관은 아니어도 역관이 되었다. 오계순, 오응현 부자의 제자가 되고 추사와 그 제자 밑에서 수학했다. 그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조선 조정을 위해서 일하는 역관들이었다. 주상께서 진심으로 부친의 공을 치하하고 그 죽음을 위로하기에 더욱 기쁘면서도 울었다.
“주상 전하께서는 우리 아버지를 정말 인정하셨지.”
“아버지랑 가까웠던 두 대신 분들도 은자를 내리게 했다지?”
“다른 대신들도 공적을 부정하지 않았지. 다만 역관으로 종 1품의 품계를 주는 것은 전례가 없고 파격이라서 말리지 않았습니까?”
“그래.”
천초의 두 아들은 이야기를 하는데 불만은 있으나 그래도 그 것이라도 다행이었다고 여긴다. 그들은 주상의 배려에 감사를 드리고 있으며 그리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조선이랑 조정에 그리고 주상을 위해 봉사할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사후 품계 추증을 막은 이들이 원망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이 나라의 법도이기도 하다. 아마 점점 법도를 바꾸어야 하지 않나 생각을 하는 둘이었고 그 일을 위해서 주상 전하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가진다. 물론 이 둘의 기대는 어떻게 관철이 될 지는 나중에 알 수가 있을 것이었다.
같은 해에 봉작을 아직 받지 못했던 왕자가 대군에 책봉이 되었다. 장릉에 계신 분, 인조대왕 이래로 다른 적자 왕자가 태어 난지 10년이 되는 해다. 조선식의 나이로는 이제 11살이 되는 왕자로 대군이 되는데 대군의 명목상 봉지는 양주로 그 옛 지명 중 하나로 따와서 한산대군에 봉해졌다.
“주상, 이제 한산대군에게 가례를 치르고 궁에서 나와 살아야하지 않습니까?”
대비가 한산대군의 출궁, 그러니까 분가를 제안을 했었다. 주상인 이영은 왕비랑 같이 생각을 하건데 아직 이르지 않나 생각을 했는데 물론 지금의 세자에 비하면 주상과 왕비는 혼례를 매우 빨리 치른 쪽이었다. 세자는 17세 즈음에야 혼례를 했고 아직은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하기로는 좀 더 나중에도 해도 된다고 여긴다. 특히나 왕비는 세자 못지않게 한산대군을 매우 아껴서 아직은 떨어져 살게 할 생각이 없었고 주상인 이영도 형제가 없던 저에 비하면 제 자식인 형제는 서로를 아끼고 세자도 아직 동생을 곁에 두고 싶음을 알았다. 사실 주상은 아직 한산대군을 옆에 두고 싶어 하는데 한산대군이 잘 살 수가 있을까 걱정이 있어서 그렇다.
그는 어릴 때에 이미 세자였고 혼례를 했을 때도 궐은 넓어도 궁내에서 살았다. 다만 다른 대군, 즉 제 아들인 한산대군은 가례를 치르고 난 이후에는 바로 궁을 나와야 한다. 그런 대군을 걱정해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었다.
“아직은 이르지 않을까 생각이 드옵니다. 어마마마.”
“소첩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대비마마.”
주상이랑 왕비가 그리 말하자 대비 김씨도 딱히 더 밀어붙일 생각은 없어졌다. 대비가 봐도 아직 한산대군은 더 있어도 되지 않는가 생각을 한다. 대비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오라버니인 김좌근 쪽에서 넌지시 대군이랑 혼례를 주선함은 어떠한지 제안을 했기도 해서 그렇다.
‘사실 아무리 봐도 한산대군이랑 우리 가문인 김문이랑 혼인을 맺으려고 한 것이 아닌가?’
대비는 이리 생각하고 있다. 아마도 대비는 설령 대군의 가례를 치르게 되어도 안동 김문은 아닐 것이라고 여긴다. 또 왕가와 사돈을 맺는 것을 주상도 별로 좋지 않게 여기니까 그렇다. 이제 10살 내외로 충분히 가례를 치를 수 있으나 주상과 왕비의 반대라면 대비는 더 이상 나서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주상인 이영은 한산대군에 대한 가례 제의에 안동 김문이 무슨 일을 꾸미나 의심도 들기 시작한다. 대비는 사실 안동 김문의 제의를 듣고 말을 했을 여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모후인 대비가 내탕금이나 왕실재정이 좀 줄어서 불만이 있기는 하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도 주상이 왜 그런지를 설명하면서 납득을 하고 있었던 대비였다.
‘그들이 한산대군이랑 혼인을 주선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종친이나 왕실의 외척이 되는 것은 견제를 심하게 받을 터인데?’
세자가 장성하게 잘 자랐는데 대군을 미는 것이라고는 보고 있지 않는 이영이었다. 그래도 놓친 것이 있는가를 되짚으면서 의구심을 가지고 안동 김문이 무슨 의도로 그렇게 제안했는가를 추론하고 있었는데 중요한 동기는 권력을 더 보존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세도는 왕실의 권위를 바탕으로 그 호가호위를 하는 것이다. 이게 부정으로 간다면 더 최악이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세자와의 간택에서 안동 김가의 규슈 대신에 남양 홍씨의 규수가 세자빈이 되었다.’
그러면 세자 대신에 한산대군을 노릴 법은 했는데 그러나 세자빈이랑 부부인의 배출은 격이 다르고 종친의 세력이 커지면 그에 기생해서 권력을 지키려고 하는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니까 좀 불쾌해진 주상이었다. 이영은 외삼촌이기도 한 경은 김좌근이 그 이상의 욕심을 딱히 부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른 가문의 여식을 며느리로 들일 생각이 더 큰 주상이었다.
한편, 영국이랑 프랑스에게 군사고문단 파견에 대한 답신이 왔었다. 그보다 좀 더 앞으로 가보자. 영국 본토에서는 조선의 군사고문단 파견 요청이 들어오자 환영을 하는데 이 것이 프랑스가 원래 10명의 군사고문 중 절반을 가져간 것에는 유감이었다.
“그래도 조선에 군사 부분에서 더 영향을 줄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습니다.”
“적당히 조선의 군대를 훈련시켜줄 고문단 중 보병과 공병에서 뽑도록 하지요.”
영국 전쟁성의 인사들에게 영국 내각은 고문단 인선을 주문했다. 휘그당의 당수이자 현 영국 서민원, 하원의 대표인 영국 수상 존 러셀은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이익을 보장하고 확대하기 위해선 영국에 우호가 깊은 세력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그레이트 게임을 하고 있는 영국과 러시아는 서로를 매우 견제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언젠가 동아시아에도 영향력을 확대할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조선은 우리가 통제하기 쉬운 곳으로 우리에게는 우호의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청은 러시아랑은 협정을 했고 이를 경계하지만 우리가 마냥 신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존 러셀이 친히 서민원에게 영국이 조선에 군사고문단을 보낼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즉 조선에 친영세력을 심어서 영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혹시나 러시아가 남하할 때에 조선이랑 기타, 다른 나라를 내세우고 지원하며 공조해 이를 막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의 친영세력을 심기 위해서 고문들이 파견에 적극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었고 그 일환으로 군사고문의 파견도 긍정으로 보고 있는 셈이었다.
“서민원 여러분들의 결정에 따를 겁니다.”
존 러셀의 호소가 먹혔는지에 이에 대해서 큰 반대도 없이 통과가 되었고 영국의 이익이 더욱 커지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영국의 무기와 기물을 조선은 더욱 사들이고 있었으며 영국의 신사들이나 상인들이 조선에서 이익을 보려고 이를 지지하는 것이었다.
‘다행이 통과를 했군,’
존 러셀은 속으로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는 과거를 떠올린다. 파머스턴 자작인 존 헨리 템플과의 대화다. 파머스턴 자작은 지난 1832년의 로드 애머스트 호가 이룬 성과를 가져온 이라면 이가 맞았다.
그는 선주를 가장한 휴 해밀턴 린제이 자작에게 중요 해역 측량을 맡겼다. 그러던 중에 조선의 개항에 성공했는데 그 과정에서 조선의 해역에 대한 측량 보고는 물론이고 그 짧은 시간에 얻어낸 정보 등을 파머스턴 자작은 꽤나 면밀하게 분석을 했다.
‘조선은 우리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 필요가 없다. 애초에 식민지로 두지 않고 우호세력으로 두면서 영국의 영향권 아래에 두는 것이 옳다. 또 조선의 인삼이라는 자원은 린제이 자작의 보고대로 청나라에서는 불티가 나게 인기가 있는 작물로 청나라의 고서들과 달리 현지 청나라인들의 최신 정보가 정확하다면 조선의 인삼은 청에서는 최고로 치는 것이 맞다.
(중략....)
즉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그 인삼을 사서 청에 팔고 조선에는 면직물 등의 직물이나 일부 수출품을 팔면서 그들을 우리 영국이 주도하는 무역망에 포함하며 점점 그들을 청에게서 분리를 해야 한다.’
이런 보고서를 영국 내각에 올린 적이 있던 파머스턴 자작이었다. 그는 홍콩 외에 조선을 유사 거점으로 동양에 더욱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조선에 호의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파머스턴 자작은 순전히 영국의 이익을 위해서 그게 옳다고 주창을 하는 것이다. 이후에 아편전쟁이 끝나고는 조선을 전면 개항시키자는 쪽에 속했던 그다.
‘그러니까 조선에 대해서 투자를 하자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물론 정부 차원까지는 아직 아니고 동인도 회사를 움직여서요. 동방에서는 동인도 회사만큼 우리의 목적을 가지고 임하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존 러셀은 자신과는 의견은 달라도 영국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은 같은 파머스턴 자작의 의향을 대체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과격한 그 답지 않게 이러는 것이었고 아마 더욱 이익이 되었으면 파머스턴 자작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자고 말했을 정도의 위인이었다. 물론 조선이 생각보다 영국에게 고분고분한 면모가 있어서 그렇게 여긴다.
“조선에 갈 5명은 인도 근무자도 고려하고 보조하는 10명의 대다수에는 세포이들을 붙여도 되겠는데, 무슬림 위주로 보내야 하나?”
존 러셀이 알기로는 세포이들은 주로 힌두교 보다는 무슬림 세포이들이 해외파병에 적극이었다. 힌두교는 해외에 나가면 카스트가 깎인다는 미신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미신으로 인도가 발전하지 못했다고 여기는 존 러셀이었다. 아마 이들에 대한 설명을 넣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기는 한다.
‘그들은 돼지를 먹지 않으니 소의 고기나 닭의 고기를 청구하라고 사전에 경고하라 훈령이라도 줘야 하나? 아니지,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아무튼 그렇게 영국은 조선에 갈 군사고문단 의결이 통과했으며 이제 그 인선만이 남았다. 누가 될지는 알 수가 없었으며 그들은 이제 극동으로 가야할 인사들을 불쌍하게 여길 것이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영국 못지않게 적극을 보이고 있는데, 아니 그 이상이었다. 조선은 프랑스에서는 신비한, 신앙을 유지하는 곳이라는 것이 더 퍼져있었고 이는 파리외방전도교회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프랑스는 조선에 더 큰 영향력을 위해서 그들과의 교류를 강하게 해야 합니다.”
“영국이 조선에 영향력을 더 늘리는 것을 적당히 견제하고요!”
“조선을 가톨릭의 품으로!”
이런 소리를 하고 있지만... 이들은 정말 진심이며 프랑스는 동아시아에 영향력을 더 행사하고 싶은 것이었다. 조선의 천주교회와 청나라 내의 교회들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영향력을 더 행사하려는 발로였다.
“기병과 포병이면 우리 프랑스지요.”
“포병 장비는 구식이라도 공여를 해주면 되겠는데 말은...”
“아라비아산 말로 환심을 사려고 해도 그만한 가치가 있을지는...”
이러한 말들이 나오나 그들은 프랑스가 얼마나 훌륭한가를 강조하려고 한다. 특히나 외교 관련의 성과를 가져온 7월 왕정은 후속 성과를 내려고 열심이었다. 그들이 조선을 지원하려는 것은 외교에서 성과를 내서 무너지려는 왕정도 유지하려고 열심인 경향이었고 이런 영향인지 프랑스에서도 군사고문단에 대한 파견을 결정한다.
“우리는 숙련된 하사관들을 보내지요.”
“그것이 마땅합니다.”
프랑스는 영국과 달리 자국 군대의 프랑스인 하사관을 같이 보내기로 한다. 영국은 세포이 하사관 6명에 영국인 하사관 4명을 보내는 쪽이었으며 그리고 다른 제안이 나왔다.
“프랑스 해군 육전대원을 보조하는 쪽으로 하자고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본토 차출 인력보다는 나을....”
“기병이랑 포병 하사관들을 줄일 일이 있습니까?”
“그들이 포병 하사관들만큼 포술에 전문입니까?”
프랑스 해군의 육전대원들을 같이 보낼까 했다가 기병과 포병 부사관들 수를 줄일 것이냐는 반발이 나오자 철회를 했다. 프랑스는 그 제안에 적극으로 나서며 열심히 준비한다. 이들이 무사히 조선 땅을 밟을 것은 1848년 초의 일이었으며 그 항해는 딱히 유쾌하지 않았다라고 회고하는 프랑스 장교 1명이 있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그 먼 항해를 하러 간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것이다. 돈에 미치지 않고서는... 그래서 프랑스의 상인들은 경이로운 존재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런 말을 남길 정도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