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20) 군사고문단 아래에서 조련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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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영길리 군사고문단과 프랑스 군사고문단은 의견을 합쳐서 조선군의 다른 문제로 평시에 다른 대형 제대의 부재를 지적하고 있었다. 전시와 반란을 진압할 때에 부대를 섞어서 편성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보고 있지만 평시에 대형 제대가 없어서 조선의 경군 전통의 오군영과 장용영을 조선의 전쟁성, 병조가 일일이 다 지휘해야 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을 한다.
“조선은 평시에도 오군영과 장용영, 통칭 여섯 군영을 관할한 조직을 만들어야 합니다. 조선 같이 군인을 문민이 압도하는 쪽입니다. 군사정변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전쟁성 장관의 부재에도 오군영을 관할하는 조직이 군사정변이랑 반란을 진압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경군 여섯 군영의 상위 조직으로 병부 사이에 설치하자는 의견이었다. 이 의견에 대해서 꽤나 갑론을박이 있었는데 이러면 지방군에 적용할 경우에 지방의 군대를 일시 통제할 위치는 단임 병마절도사들로 한정해야 한다.
그래서 이를 일시에 적용할지 아니면 우선은 경군에만 적용할지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갑론을박이 컸고 또 다른 건의로도 불이 타고 있었다. 지방관들의 군사권을 되도록 이를 배제하는 것으로 가자는 제안이었다.
“전하, 군사고문단의 제안을 보니까 일정부분은 합당은 합니다. 다만 그 조직의 지휘관을 누구로 하며 이에 그 권한을 평시와 전시를 어떻게 구분할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따라서 신이 생각하건데 평시는 오군영의 지휘에 한정하고 전시에는 오군영과 배속이 된 군대를 지휘하는 쪽으로 가야합니다. 단, 순무영이나 일선 지휘를 다른 이가 한다면 남는 병력을 두고 한성을 지키는 역할을 주셔야 합니다.”
신하 중 하나가 입을 열었는데 정종대왕 시기의 장용외영을 축소해서 얻은 조선 경군의 중요 지휘관 자리 차지로 조선군을 더욱 장악했던 것은 수십 년이 지났다. 군권의 장악은 선왕 시기의 서토 무관들이며 여타 무관들로 조선 경군에 유입이 되었다.
“그렇습니다. 지방군에 이를 적용하는 것은 이르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경군에 적용시키고 장점이 있다면 이를 두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경군이 아니라도 진무영은 경군에 준하게 빠르게 이를 재편해야 합니다. 심도를 지키는 심영(沈營)인 진무영은 경군이 아니라도 이를 적용해야 합니다. 다른 지방군들은 나중이라도 말입니다.”
지금의 주상인 이영은 두 선왕들에게 물려받은 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대리청정 시기부터 뽑은 저에게 충성하는 무관들이며 수원의 장용외영과 훈국을 바탕으로 조선 경군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즉 이영은 믿을만한 무관들이 많았기에 그래서 크게 상관은 없었다.
그리고 그만한 권한을 주는 대신에 책임을 지게 할 생각이었다. 다만 그런 이영이라도 지방군의 경우는 좀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고 또 지방 수령의 병권을 제외하면 군사의 요충지에 세우는 도호부사들이나 병마절도사에게 이를 맡기고 총괄 관리는 감찰사에게 담당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아직은 경군, 만약 더해도 진무영에만 속히 그런 체계를 적용하자는 것인가?”
“진무영까지는 가능할 것입니다. 다른 지방의 군영들은 회의감이 큽니다.”
“우리가 돈이 많은 것도 아님을 고려해야 하지 않습니까? 진무영은 나중이어도 됩니다.”
“아닙니다. 장용영보다 더 급한 곳이 저 곳이라고 여깁니다.”
아직 이영은 본인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다 들어보고 이를 절충하고 자신의 의견을 밝히기를 선호하는 편이었으며 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심도(강화도)에 세워진 진무영은 숙종대왕 시기에 조직이 된 군영으로 큰 비중이 없으나 지금의 상황에서는 심도와 한수 하구를 지키는 군영으로서 그 중요성이 올라갔다. 그래서 진무영의 강화를 청하는 것인데 다만 진무영 각 포대들을 지켜야 해서 세부편성은 다를 수밖에 없었으며 그래서 진무영도 포함하느냐 마느냐로 설왕설래가 있다.
‘진무영도 포함하는 것이 맞다.’
진무영이 위치한 심영에 괜히 양선에서 달리 포 중에서 대형의 포를 설치한 것이 아니다. 공성용 포로 쓰기 좋은 포라고 했으며 요새포로 써도 될 법하기에 그렇다.
게다가 진무영에 속한 포대들에는 벽돌이랑 돌을 섞은 수원 화성의 성벽을 응용해서 지었다. 진무영의 전문성을 위해서 그런 개편도 주상인 이영도 긍정으로 보고 있었으며 지금도 그렇기에 결정을 내렸다.
“진무영도 포함하겠다. 경성과 경기를 지키는 경군에 중요한 지방군 전력을 먼저 개편함이 옳다. 그래서 진무영의 수장인 진무사를 강화유수의 겸직에서 단독 외관직으로 하겠다. 경군을 총괄하는 자리에는 대장보다는 높아야 한다. 또 전에 삼군부를 부활시킨 대로 군령을 관할하라. 삼군부 아래에 경군 도통부를 두어서 경군 도통사가 오군영과 장용영을 관할하라.”
“예, 전하.”
“명을 받들겠나이다.”
신료들은 진무영의 강화에도 동의를 했는데 경군의 오군영처럼 단독의 영사를 두는 식으로 가는 것이었다. 겸직을 점점 줄이고 있기는 하며 특히나 외관의 겸직은 물론이고 경관의 겸직을 줄이려고 시도하는 이영이었다. 비용은 이전에 장비를 들인 것 외에는 편제의 재편에 치중을 한다.
그 외에는 단임일 진무사에게 줄 녹봉 문제 정도만 생겼는데 삼군부 아래의 경군 도통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삼군부랑 경군 도통사는 의정부랑 분리가 되었으며 비변사도 전시 겸직을 제외하고는 의정부랑 분리해서 돌아가게 결정을 이미 했었다.
“그렇다면 경군 도통부의 설치와 강화유수와 진무사의 분리를 우선하라.”
“알겠사옵니다.”
주상인 이영의 의지로 조선의 군대는 삼군부가 군령을 쥐고 지방군영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경군은 그 상부로 경군 도통부가 세워졌고 진무영은 강화유수와의 분리에 단임 진무사의 부임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 이외의 건의 관련 보고도 들었다.
“구식 화포들을 녹여서 새로운 대포를 만들자는 것인가? 또 전마를 들여온다라....”
“그 것이...”
구식 화포를 녹여서 서방식의 대포를 만들자는 것은 이영도 동의를 했었다. 시대에 맞지 않는 것들을 일정 부분 정리하는 것이니까 그렇다. 근데 전마를 어디서 들여오자는 것인지는 고심이 생긴다. 지금 조선 내부에서는 목장은 적어졌고 제주도의 목장에 있는 말들은 작아졌다.
‘어디서 키 큰 전마를 구해온다....’
이영의 새로운 고민은 이런 것이 생겼다. 비록 이는 주상인 그만의 고민이 아니었는데 조정 신료들 모두의 고민이 되었다. 특히나 돈이 나가는 곳이 엄청 늘어난 호조와 말들을 교체해야 하는데 방법을 고심 중인 병조가 그런 상황이었다.
“전하, 건의서에 쓰인대로 영길리 공사관이랑 법국 공사관이랑 이를 협조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한 신하가 그에게 그런 제안을 했다. 이영은 그 제안은 건의서에도 있다고 인지했다. 그리고 그가 생각을 하기에 달자, 천축, 청이라는 방향성이 떠오른다.
그러나 문제는 달자, 청이랑 달리 천축에는 그들이 원하는 말이 얼마나 있는지 모른다. 또 달자와 청의 말도 조선의 말이랑 비교하면 그렇게 큰 쪽은 아니다.
“두 공사관에게 문의하라.”
“예, 전하.”
무관들은 키가 큰 말을 구할 수 있게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려고 한다. 세종대왕 시절의 전마를 개량하던 방법이 있는가를 찾아보려고 한다. 사실 이것도 달자와 청에서 호마를 구해 와야 하는 것인데 어디서든 키 큰 말을 구해오고 교잡으로 이를 지속시켜서 키 큰 말을 뽑아내려고 해야 한다.
‘우리 조선에서 목장은 더욱 줄었다. 제주도와 강화도에 목장을 정비하거나 세워야 하는가?’
인구가 늘며 농지가 늘어나는 대가로 초지가 줄어들었으며 목장은 폐지가 된 것들이 많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조선의 중요한 목장은 제주도 정도이지만 제주도에 있는 전마는 키가 여전히 작다.
호마 등을 수급할 수 있는 길을 뚫으려는 것이 간절하다고 여긴다. 이영은 일부 신료들에게 두 공사관이랑 같이 이를 해결할 방안을 찾으라고 지시를 내렸다.
“국빈에게 이와 관련한 업무를 법국의 마군고문들이랑 함께 이를 해결하고 그대를 도울 역관 2명에 아국인 천주승 1명과 문관으로는 혜강이랑 함께하라.”
국빈, 신관호는 예조의 문관인 혜강 최한기에 사역원 소속 홍이어 역관 2명에 조선인 천주승 1명이며 법국의 기병고문 2명으로 전마를 구할 방도를 두 공사관과 협력해서 해결해야만 한다. 자신이 맡은 꽤나 큰 소임에 긴장을 하고 있는 30대 중후반의 중년 무관 신관호였었다. 주상이 맡긴 소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속으로 결의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는 별개로 지난 2~3년 전에 국빈은 해국도지를 입수해서 이를 바탕으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갈 증기군함의 기동을 막을 것으로 수뢰라는 것에 관심이 생겼다. 동화모 혹은 뇌홍이라고 불리는 뇌관을 넣고 터트리는 일종의 기뢰인 수뢰포의 설계를 하고 있었다. 잠수부를 통해서 이를 끌고 배에 접근해서 연결하고는 시간이 지나서 물이 채워져서 장치에 따라서 공이를 건드리게 되면 터트리는 수뢰이다.
해국도지와 그 해국도지를 빠르게 인수해서 훈국을 중심으로 해국도지를 바탕으로 쓴 글인 훈국신조군기도설을 보고 생각을 하게 된 신관호가 이를 고안하고 있었다. 동화모 혹은 뇌홍은 광둥이나 제물포 개방장을 통해서 조선이 뇌홍총 등을 쓰려고 이를 수급하고 있어서 그리 구하기 어렵지는 않으나 아직 조선에서는 만들기가 힘들다. 뇌홍을 만드는데 수은 등이 들어가서 그렇다. 하지만 수뢰포에 대한 것은 뒤로 미루고 소임에 열중하려고 하는 그다.
“유산은 다산이 올렸던 제안 중 행정구역의 재편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가?”
“신외에 선친께서 가르쳤던 제자들도 모두 힘을 합쳐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역시 땅거스러미와 월경지를 정리하는 것이 옳다고 보옵니다.”
한편 정학연이랑 대화를 시작하는 이영이었다. 정학연에게 명을 내렸던 것은 조선의 행정구역을 재편하는 것에 있었다. 사실 조선 전기에서는 이런 월경지와 떵거스러미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 것들이 이제는 아국의 통치에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이라고 보는가?”
“그렇사옵니다. 그러니 이를 수정해야 하옵니다.”
전조인 고려시대에 남겨진 잔재인데 이를 굳이 수정하지 못한 것은 다른 산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이런 문제는 현감과 군수 위에 부사와 감사를 빼고 현장의 광역 행정을 책임지는 목사가 잘 통제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행정구역 재편에 행정력 강화에 세수의 수급을 보다 명확하게 하려는 의도로 그런 것이다. 이중장부를 입수하고 양전의 시기를 수정하고 전세를 조금 더 인상했음에도 세수의 증가는 폭발인 것은 아니다. 면세지들에게도 세금을 돌리는 등이며 관세에 인삼을 통한 것도 세수를 늘렸음에도 이렇다.
그래서 행정구역 수정에 월경지와 땅거스러미를 수정해서 각 고을 자체의 세수를 이전과 비교하면 호구와 세수를 더 쉬이 파악하려는 것이 있었다. 여기에 수령의 역할 수정과 생활권을 일정 부분 반영해서 8도를 12성에서 12~13도로 분도하자는 주장도 있었는데 아직은 더욱 연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방관의 임무가 너무 많습니다. 선친께서 목민심서를 내놓았음에도 지방관들의 격무는 심하옵니다. 영길리 고문이랑 이야기를 해보니까 지방관의 권한이랑 임무를 쪼개야 한다는 제안도 듣고 이를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길리 고문 중 하나가 그런 말을 정학연이랑 정약용의 제자들이 모인 이른바 다산 학파에게 남겼다는 것에 이영은 놀랐었다. 그러고 보니까 영길리 공사 혹은 영길리 쪽의 관원이랑 이야기를 했다가 인상이 깊은 것들을 떠올렸다. 영길리는 지방관에게 조선의 수령만큼 권한이랑 소임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권한을 쪼개고 소임을 분산한다면 되지 않겠는가? 물론 그런 것이 되려면 서역식의 제도를 우리 조선의 실정에 맞게 보고 반영해야 한다. 게다가 당장 군사권도 분리하려고 하면 지방의 수령들 권한이 약화가 되는 일이 있다. 성과가 있다면 먼저 군사권을 분리하고 점점 다른 소임과 권한을 분산한다.’
급하게 모든 것을 다하려고 하기는 힘들다고 인식하는 이영이었다. 차근차근이라도 동도처럼 뜻이 같으면 서도라도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이라도 제도가 조선이랑 서역은 역시 이질성이 있다. 이런 차이를 극복하려면 시대 변화를 더욱 알기는 알아야 했다.
그래서 고심이 큰 그였다. 주상은 관료들을 서역으로 보내서 그 모습을 더욱 확인하는 사절단을 이미 보낼 생각이 있었다. 일정 부분에서 보낼 인재들은 다 염두를 했다. 다만 이를 공식화하고 준비를 시작하는 것은 좀 더 나중으로 잡을 예정이다.
“우리 아국의 인구는 어느 정도로 잡히는가?”
“그것이 작년을 기준으로 해서 아이들도 하니까 1300만 내외입니다. 다만 이도 지난 역병 등으로 죽은 이들도 있으며 화전하는 이들이 있어서 더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많으면 1500만 까지 아국의 인구가 갈 수가 있을 겁니다.”
화전민도 꽤나 고심인 이영이었는데 화전민들은 살려고 그러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삼림 자원을 더욱 불태우고 있는데 심지어 법도를 어기면서 말이었다.
온돌이 널리 퍼졌다니 해도 땔감의 사용은 중요하기에 그런 산의 관리는 중요하게 여긴다. 근데 이들 화전민들로 인해서 산의 나무들이 남아돌지 않고 있다. 도리어 문중의 선산이 있는 곳들을 제외하고는 산들은 민둥산이 된 것들이 많다.
“화전민들을 어찌 단속을 해야 할 터인데...”
“허나 농지가 부족하고 도망을 친 이들도 있으며 유민이나 기민이 된다면 더욱 문제가 되옵니다.”
“그것도 문제로다. 화전민들을 잡는다고 해도 이들을 다시 정착할 마땅한 곳이 없도다.”
화전민을 단속해도 겸화전이나 단화전 등 화전민의 수는 매우 많다. 문제는 이들을 정착시킬 땅은 부족하였다. 지주들이 있어도 소농 사회에 가까운 양상의 농촌도 땅은 이미 소작농이나 자소작농, 자작농 등의 소농과 자소작농이랑 소작농에게 땅을 빌려주면서 세금도 내는 식의 지주로 구성이 된 상황에서 겸화전을 빼더라도 단화전을 하는 화전민이 정착해서 줄 땅이 없어서 유민이나 기민이 될 것이다.
“설령 정착을 시켜도 기존의 농민들은 불만이 생깁니다. 어떤 방식으로도 민란이 나올 수 있사옵니다.”
“역시나인가?”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섬을 개척하는 것이 아닌 이상에는...”
“방도를 더 생각해봐야겠구나.”
“방도를 찾겠습니다. 전하.”
“그러도록 하라.”
민란의 위험성도 고려해야 한다. 민란이 드물게 일어났어도 가끔씩 수령의 탐학으로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경우는 세수 문제로 일어나는 것이 흔했다. 금벌령을 내린 숲과 산을 더욱 관리하고 문중들의 산림이며 화전민들의 수를 파악하고 그들에 대한 처벌은 다음으로 미루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또한 조선 내에 산림을 회복하려면 무엇이 좋은가? 로도 고심을 하는 이영이었다. 한역이 된 서역의 초목유서들을 뒤져보라고 지시를 할까 생각도 하는 그였다.
‘너무 자질구레하지 않은가? 흠 어찌한다?’
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쌓여서 다른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경군이랑 진무영에 적용한 새로운 지휘체계가 제대로 돌아가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있다. 그 외에는 안 쓰는 구리로 만든 구식 화포를 녹여서 새로운 대포를 만드는 것이다.
한역한 서역의 군기도설이며 병서에 입각해서며 이전 구식 화포를 주조해서 만들었던 조선은 그를 보고 군사고문의 도움도 받으며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다만 이것도 나무의 수급 문제가 생기는데 동차 때문이었다. 동차를 수급하려면 역시 나무가 필요하다. 조선에서는 동차를 만들 나무가 부족해서 대포의 동차를 수입하기로 한다.
회의를 끝내고 자신의 편전에서 쉬면서도 정무를 생각하는 이영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개방 이후로 돈이 많이 들어가고 있음을 말이다.
‘참으로 많은 돈이 들어가는 군.’
인삼이나 도자기에 호피며 일부 귀한 맹수 가죽이며 유기에 이런 것으로 금이나 은을 청과 서역의 상인들에게서 거두어들이고 관세며 전세며 면세지도 없애서 세수가 늘어났기에 망정이다. 아니었으면 전세를 터무니없이 높여서 민란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주상인데 이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우려가 현실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여긴다.
‘이렇게 돈이 들어간다. 나중에는 조정이 민중을 더욱 쥐어짜려고 할 수가 있다. 그 전에 민중을 좀 더 살찌우면 되지 않을까 생각이... 환곡도 세금으로 만드는 것 대신에 이를 사들이거나 사창으로 지방별로 이를 분산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이 외에도 화폐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조선은 서역이랑 청이랑 무역을 다 은으로 하게 되었다. 은이 더 늘기는 했지만 그나마도 주로 청에게서 가져온 금은의 덕이 크다. 상평통보는 여전히 쓰이고 있지만 은보다는 가치가 없고 장사에 필요한 수량만큼 엽전을 다 들고 다닐 수 없기에 어음 등이 유행했었으며 은으로 그보다 가치가 떨어진 상황이다.
‘다만 동전 등 화폐가 있어야 한다는 제안을 하는 것이 있었지. 이는 다산도 주창했던 것이고 천초도 그랬다. 문제는 조선은 은이 더 늘었어도 은보다 더 아래의 구리가 수량이 적다. 일각에서는 극단이지만 상평통보의 엽전들도 녹여서 서역식의 대포를 만들자고 상소를 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래도 필요가 있기에 상평통보의 상위에 있는 더 가치가 있는 엽전을 만들자고 하는 이도 있지만 반대로 폐전론을 논했다가 은 등으로 이에 대한 반론을 들은 것도 많았다. 지금의 상평통보 1전보다 더 가치가 있는 잘해야 5배 정도의 가치를 가진 동전은 해볼 만은 하지 않은가 생각을 한 이영이었다.
허나 이것도 문제가 너무 많이 찍어내면 부작용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다. 지금 상평통보가 얼마나 발행이 되는지는 조정도 알 수가 없다. 찍어내는 곳들이 많아서 그랬다.
‘그렇다면 호조에서만 찍어내게 하면? 수량을 통제하면 어떨까? 수량을 매우 많지는 않아도 수만 여개의 엽전, 가칭 당오전을 발행하면?’
이런 발상으로까지 이어가는데 하지만 여건이 되는가를 다시 검토하기 시작을 했다. 이영은 정책을 실행하기 전에 대안을 구성하기를 즐기는데 그 외에도 당연히 여건을 고려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조선의 상황에서 구리는 당연히 적었다.
일본에게서, 더 정확히는 왜관을 통해서 구리와 유황을 수입하는 것이 더 늘기는 했었다. 전면 개방 이전과 그 이후를 비교하면 당연히 후자가 많았다. 그마저도 무기는 완성된 서역의 대포를 사는 것이라서 무기 제조가 주 이유가 아니라 상평전을 더 발행하려고 그런 것이다.
그래도 수요는 넘치는 상황인데 그래서 주상인 이영이 조선에서 구리 광산이 있기를 바라면서 탐광을 할 수 있는 광업고문을 고용하고 중앙의 관료를 붙여서 이를 탐광하게 특별하게 조선 내륙을 돌아다니게 허락한 이유도 있었다. 사실 구리 외에도 다른 자원들을 확인하려는 것도 있었다.
‘다만 청에 이러한 정보가 들어오지 않게 잘 차단을 해야 한다.’
주상인 이영은 조선인 중에 청나라를 믿지 않는 이 중에서 제일일 것이다. 암암리에 있는 신 서학파는 물론이며 영길리와 청의 전쟁 이후에 청나라를 의심하는 관원들은 더욱 늘어났었다. 이미 북벌의 대의는 희미해졌지만 청나라를 명목상으로나 상전으로 모시는 이들은 많았었다. 근데 지난 청은 영길리와의 전쟁으로 제 무능을 입증했다.
‘우리 조선도 이제 시대에 맞추어서 적응하고 살아남는다. 청은 쉬이 믿기 어렵다. 정세를 보는 눈이 정확하다면 저들은 제 위치를 유지하려고 할 것이며 그 전쟁에서도 교훈을 얻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