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다시 위대하게!-55화 (55/221)

〈 55화 〉 (30) 조선의 사정, 유자이태리제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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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프랑스 북서부를 둘러보고 돌아온 이들은 ‘명혜’호의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 것에서 걱정을 하는 분부 분견대며 그들의 치료에 서유시찰단이 가져온 예산, 영길리랑 법국의 화폐로 환전한 것 중 일부로 더 지급하였다. 파리로 돌아온 북부 시찰단은 파리에서 잠깐 쉬었다가 그 다음날에 다시 기차를 타서 벨기에, 네덜란드와 독일 연방 북부로 향하는 기찻길에 올랐다. 시간이 없기에 벨기에는 들르지 않고 네덜란드만을 지나가기로 하였다.

“저들의 왕궁에 우리를 초청하였지.”

“그들의 도시를 둘러보고 친서를 전하고 만찬 이후에 하루 더 체류하고 하노파(하노버)로 간다.”

하노파, 하노버로 영국이랑은 동군연합을 했던 나라로 연합왕국인 영국과 달리 살리카 법으로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자 다른 이를 군주로 올리고 동군연합을 청산하였다. 서유시찰단 중에서 북부 분견대는 하노버에 대해서 이미 이야기를 하기는 했었다.

“하노파는 영길리 왕실이 왕을 겸직한 다른 나라였다고 합니다.”

“영길리 왕실이 본디 영길리에 왕조를 열기 전에 전대 왕조의 피를 이은 하노파의 군주가 영길리의 옥좌에 앉았다지요.”

“근데 유주의 종법이라고 살리가법이라고 있는데 이 것으로 살리가법이 약했던 영길리에서 지금의 여주, 아니 여왕이 즉위하자 살리가법으로 나라가 달라졌다는 군요.”

유주의 종법인 살리가법, 그러니까 유럽의 살리카 법은 조선인들이 보기에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적자의 승계를 위해서 더욱 유교 계열의 종법보다 더 엄격한 경향을 보인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조선은 왕실의 경우는 서자의 즉위를 인정하기도 했기에 말이었다. 조선을 기준할 경우에 사대부의 종법 수준으로 아니, 그 이상으로 엄격한 것을 생각할 수가 있는 그들이었다. 왕실과 달리 사대부는 서자가 있어도 주로 적자, 방계라도 적자인 아이를 양자로 들여오는 경향이 우선이었고 양자로 들일 친척 아이가 없다면 그 다음에 서자에게 가는 방식이었다.

“다만 저들의 혼약은 매우 중첩이 되어서....”

“부계로도 촌수가 가까운데도 혼인이라니...”

물론 종법이 유교 계열보다 엄격함에 놀라면서도 이전에 읽거나 영길리 귀족들이랑 법국 귀족들에게 소개를 듣기로는 부계로 가까운 촌수의 혼인은 물론 사촌지간의 혼인도 허락하는 것에는 그들은 생각하기엔 놀라온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모계의 먼 친척들이랑은 중첩된 혼인을 해도 문제가 없지만 유럽은 그보다 더했기에 그러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를 대놓고 미개하다고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문물이랑 문명은 저마다 다른 것이라고 여기었으며 그들에게 오해를 사서 척을 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말은 화의 근원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었다.

“그래도 많이 이상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천하에 사람은 비슷한 면도 있지만 다른 것이 있으니 그런 것 아니오?”

그런 이들은 조심스럽게 말을 하기는 하였다. 이들은 현재 이 유주에서 조선의 얼굴이니까 그러한 것이 있었고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쓰지 말라고 정원용이 푸근하고 인자한 얼굴로 북부분견대 소속의 일동들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너무 신경을 쓰지 맙시다.”

“네, 영상.”

그리고 북부 분견대가 철도를 통해서 네덜란드를, 며칠 뒤에는 독일 연방권 경내로 이동하려는 중에서도 남부 분견대는 프랑스랑 사르데냐 왕국의 국경을 넘고 있었다. 물론 당연히 프랑스 정부의 도움을 받아서 사르데냐 왕국이랑 오스트리아 제국이며 이미 교황령 등지에 조선의 서유시찰단이 방문한다고 공문을 내려서 그들의 편의를 요청하였다.

남부 분견대는 사르데냐의 수도인 토리노에 방문하여 사르데냐의 국왕에게 친서를 전할 예정이었다. 남부 분견대는 이태리 반도의 북부 경내로 들어가는데 프랑스에 버금가게 멋이 있으며 강력하였다. 이 분열이 된 반도의 각 도시들이 있었다. 그런데 북부랑 남부의 격차는 매우 컸다고 듣고 있는 그들이었다.

“이렇게 격차가 있는 것인가?”

“다른 나라라고 해도.... 그렇게 격차가 난단 말이야?”

이최응, 이항로에 김병국은 셋이 모여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심히 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의 차이는 대강 알았다. 그런데 이 이태리 반도의 격차는 매우 크다고 말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북쪽이랑 달리 무역할 상황이 조선 못지않게 마땅치가 않아서 그럴까요?”

“부유한 성읍(도시)이 북쪽에만 더 많다고 말을 듣는 것을 생각하면...”

김병국이 매우 그럴 듯한 추측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탈리아 반도는 당시나 옛날이나 무역을 가장 하기 좋은 곳은 주변이 잘 사는 경향이 커서 시장이 크다고 할 수가 있는 북부에 해당하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주도한 것은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었으니까 말이었다.

“그 외의 다른 양상이 있는가에 대해서 궁금하군...”

“우리 조선도 저들보다 가난할 수가 있지요. 다만 우리는 사정상, 이태리 반도 중부까지만 가서 다시 북부로 가, 오지리 제국으로 가니까요.”

“남부에 직접 가기는 애매하겠지.”

“다음에 갈 기회가 있으면... 왜 그런 차이가 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남부와 북부의 격차가 어째서 더 오는 것인가에 대해서 추론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잘 모르는데 남부 이탈리아는 평야도 적고 농사를 잘 짓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이는 조선의 남부랑은 분명하게 다른 상황이었다.

조선도 산이 많을지라도 하천은 많으며 구릉이며 평야들은 있었다. 이래서 남부 이탈리아 같은 상황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래도 그들이 우려하는 것은 조선도 남북의 격차가 혹여 그렇게 발생할까에 대한 것이 있었다.

“그런 문제가 혹시나 우리 조선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옳네. 옳아”

“그런 문제가 덜 생기면 좋으련만....”

사실 조선은 조선 건국 이래로 조선의 수부인 한성부와 그 근방의 인구가 더 많이 생기고 도시로 이촌향도라도 이 것이 한성으로 몰리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었다. 훗날에 말하기를 수도권 집중화가 과해지는 것을 막는 것이 조선의 과제였다. 자원의 배치 문제로 지금이나 미래의 이탈리아만큼은 아니라도 남북 격차가 나중에 발생할까 우려를 하는데 이를 조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었다. 그들은 무거운 이야기를 잠시 잊으려고 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 이태리 북부와 중부는 라마국을 만든 기원이라고도 하니까 문물이 어떠한지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라마는 우리 조선 근방으로 치면 주 혹은 한과 같은 나라가 아니겠는가?”

“그 역사에 매우 오래되었더군요.”

“중화에 버금가는 것은 라마라고 봅니다.”

조선인들이 보기에 라마, 로마는 중화문명권에서 주나라와 한나라, 혹은 그 둘을 합친 것 같았는데 그 역사는 중화에 못지않게 오래갔었다. 나라로 치면 더 오래갔다고 할 수가 있었으며 후라마라고 할 수가 있을 동로마에 대해서는 이견이 갈리나 비잔탄 제국(비잔틴 제국)이라고 구분하는 서역 유주의 사람들을 별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비잔탄을 라마라고 인정하지 않는지를 모르겠습니다.”

“후신이라면 후신인데...”

“서라마를 이었다고 하는 제국들이 나온 것을 보면...”

“일종의 그들을 인정하지 않겠다가 보입니다.”

그렇게 추측을 하면서도 그들의 라마 사랑은 자신들 조선에서 보이는 모화, 중화를 흠모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라마를 논하면서 일부 나라들은 자신들의 제위 자리를 정당화하는 이들이 그들이었다고 봤으며 또 영길리라는 나라가 그리 강대한데도 제위를 주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에 찬탈자, 나팔륜이 라마와는 상관없는 민중이 뽑는 제왕이란 주창하자 당시 유주에서 매우 논란이 되었음을 알았다.

이제 이야기는 유주의 이전 시기, 천주신교가 매우 강대한 영향력을 주었던 시기를 화제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당연히 조선의 이전 역사 등이랑 준거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였다.

“저들은 이전의 천주신교가 영향이 컸다는 시기를 어둡게 표현하지만 그게 전조 말엽에 비할 수가 있습니까?”

“불씨들이 타락한 것에 버금간다고 하는데 그래도 불씨들만 하겠습니까?”

“불씨들에게 우리 조선이 시작할 때에 억불을 할 정도로 그렇게 그들의 부와 권세를 거세시켰는데 저들은 천주신교에 그리하지 못하고 있다지요.”

천주신교를 왜 그렇게 까지 정리하지 못하는가에 대해서는 그들은 의문이 가기는 했었다. 그리고 법국은 약간 다른 경향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았는데 이에 대해서 김병국이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사실 이는 김병국이 말한 것처럼 쉬이 사라지기란 힘든 것이었다.

수백 년 이상으로 천주신교 혹은 야소를 믿는 신교들로 풍습이며 생활이 젖어들었고 이전 조선 초와 작금의 조선에 각각 불씨의 가르침과 정학을 인위로 없애려고 해도 쉬이 사라지기 힘들기랑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다른 이들, 흥인군 이최응이랑 이항로가 이해를 하였다. 계몽주의자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다.

“법국은 그나마 적극이지만 다른 이들은 천주신교 혹은 야소를 믿는 신교(종교) 성직자들이랑 우호를 다지고 하니요. 게다가 저들의 천주신교에 대한 것은 우리 조선이 열리고 그 동안 불씨의 가르침으로 익숙했던 생활이 달라지지 않았잖습니까? 지금 조선에서 만약 정학을 억불하듯이 한다고 이 것이 쉽게 사라지지 않듯이 말이지요.”

“그러하겠군...”

“계몽을 주창하는 이들은 그래도 신교의 지배를 매우 부정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다만 신교를 믿는 천주승들 중에는 이를 반박하는 이들이 있으며 지금을 혼란하고 옛 과거의 질서를 선호하던 이들이 있다고 하지.”

“정학을 부정하는 것 같으면서 정작 자기들 고장에서는 정학 마냥 도전을 받고 있군....”

물론 천주신교, 라마의 법왕이 영향력을 행사하던 중세 유럽의 시대는 근대 당대에서 중세를 매우 비난하는 수준으로 말하는 계몽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로마의 유산을 보존하고 그 폐허처럼 보이는 토대에서 재건을 한창 하던 시기였다. 중세 유럽도 어떻게 보면 로마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고대 로마를 동경하는 작금에서도 로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리고 중세 유럽에 대해서 계몽주의자들이 하는 말을 조선의 옛 역사들이랑 비교해서 어떤지를 말을 이어가는 세 사람이었다. 전조인 고려에 대한 비교를 하다가 그에 버금가는 혼란기인 신라 말엽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갔다. 다만 여기에서 조선 이전 역사를 열심히 연구한 이가 적어서 상세한 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신라 말엽에도 비할 수가 있을지?”

“그만한 혼란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혼란했다고 생각은 드는데...”

“그것은 알 수가 없지요. 우리가 그들의 그 역사를 잘 모르니 말이오.”

“예, 신라와 전조도 잘 모르지요, 정확히는 신라를 전조보다 더 모르니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중세 유럽에 대한 이야기는 중원에서 비슷한 역사가 있는지에 대해서 넘어갔다. 그들은 사서삼경이며 통감을 조선 이전의 역사보다 좀 더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었다. 토리노를 향한 여정에서 남부 분견대의 나머지는 세 사람의 대화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마차를 분승해서 타고 가고 있기에 인데 세 사람의 대화를 듣는 이는 그들에게 붙은 남부 분견대 소속의 역관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어디인가에서는 누군가가 걷고 있었다. 길이랑 흙의 구분을 하게 한 흙길이 있는 길을 걷고는 있는 사내는 선비 같았으나 단아함이 없고 갓 대신에 삿갓을 쓰고 있으나 스님 같지는 아니하였다.

스님이라고 하기엔 초연함이 없고 향내가 없었으며 입은 옷도 승복이지는 않았는데 두루마기를 입은 사내는 스님도, 선비도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도사도 아니고 무당도 아니었다. 대나무 지팡이를 잡아서 땅을 짚고 등과 허리에는 배낭이라고 해야 할지 적은 소지품을 담고 다니기 것을 매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걸으면서 주변을 보다가 이내에 걷는 것을 멈추고 하늘을 봤다.

참으로 시리게 푸르고 맑았으나 그런 하늘 아래의 땅은 그런 하늘과는 별개로 조용하지가 않았다. 그런 땅의 풍경을 돌아다니면서 봐왔던 자, 김병연은 하늘을 보면서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옆에서 본 그 모습은 방랑을 많이 하는지 피부는 상하고 수염이 나고 그 수염에는 윤기가 없으나 눈은 그 누구보다 살아있었고 하늘을 보는 그 눈은 빛나고 하늘과 땅을 꿰뚫을 만큼이나 예리한 눈빛을 가졌다.

“조선은 더 달라지겠는데 이게 과연 약만이 되겠는가? 독만이 되겠는가...”

조선 팔도를 떠도는 방랑시인 김병연은 이 조선 팔도가 있는 땅의 변화를 알고 있었다. 또 조선팔도 말고도 세상, 천하는 더 변화하고 있었다. 이 조선 땅의 변화를 실제로 눈으로 더 보는 사람은 더 있겠지만 김병연은 전체를 더 볼 수가 있었다. 이에 그는 세상의 변화는 역시 빛과 그림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그래도 김문이 더 어지럽히지 않은 것 아닌가? 그리고 김문의 술책이 있다면 나는 나서서 이를 견제할 것이다.”

제 가문이지만 간혹 정도를 모르는 문중의 일원들을 보면서 경멸을 보이거나 짜증이 많았다. 그래도 이런 염세와 회의로 가득한 김병연도 주상인 이영을 인정하고는 있었다. 다만 어두움을 좀 더 직시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왕도와 빛 외의 어두움이랑 슬픔을 알기를 바라옵니다. 나라님.”

그 말을 하고 하늘을 보던 얼굴은 땅을 향해서 내리어 지팡이로 땅 짚으면서 다시 길을 걷는 김병연, 김삿갓이었다. 그는 변하는 조선 땅을 제 눈으로 보고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할 것을 시로 풀어서 말하고 저속함이 담기어도 그 속의 예리한 글로 된 칼은 이면의 의미를 아는 이들을 서늘하게 하거나 시원하게 해줄 것이었다.

바람 같은 방랑자, 문중의 과거와 제 조부의 과거를 잊기엔 그는 너무나 머리가 좋았고 그 것을 외면하지 못하기에 떠도는 자였다. 그의 길은 조선 팔도 삼천리를 돌아도 끝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그 자신도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또 한편, 조선의 동래에서는 이 수상한 왜인들에게 대해서 동래부사가 왜관을 관리하기에 장계를 작성하고 있었다. 요즘의 동래는 동래부 부산포는 부산포 개방장관이 관할 아래에 있기에 동래부의 행정부담이 늘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왜관에 대한 감시는 더욱 철저해졌다.

‘이 시기에 왜국에서 수상한 이들이 왔다. 게다가 대마도주의 부하들은 추정으로는 아니다... 누구지?’

동래부사는 왜관에 교체가 되어서 온 그 왜인들을 매우 의심해서 보고 있는 중이었고 이들이 조선에서 무기를, 그 것도 서역 무기를 사가려는 점이 드러나자 더욱 수상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장계를 작성하였고 내일 조정에게 이를 보내기로 할 예정이었다.

“동래부가 더 발전하고 있지만 이는 한지역이 독점하던 것이 풀리면서다. 게다가 발전은 듣자하니 인천부가 제일이지 않은가?”

동래부의 발전은 동래부사가 혼잣말로 지적을 한 대로 비단 동래부만이 잘해서가 아니었다. 개방장에서의 교역으로 기존에 의주에서만 독점하던 목면 거래는 영국산 목면, 옥양목의 직거래로 의주에서만 쌓이던 부는 조선의 각 개방장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로 일시적은 목면 가치의 폭락은 이전에도 조선 세수에 막대한 타격을 줄 뻔하였다. 이를 점점 관세에 무역이 늘어나고 조선에서도 꽤나 경쟁력이 있는 상품을 팔아도 그 타격을 메우는데 성공했고 목면 거래에 조선인들이 기존 만들던 목면으로 만든 천은 몰락할 것 같았으나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가기는 하였다.

‘동래부는 예상치 못하게 커지고 있지, 그래도 미리견과의 교역이 생기자...’

또 양모직물의 거래도 활발한데 이는 사실 조선에서는 한성이나 북쪽의 평양이랑 가까워서 가장 큰 거점이 되는 각각 제물포와 진남포가 있으며 동래와 옥구 쪽은 그런 양모 옷감의 수요가 별로 없었다. 목면 거래와는 별개로 동래랑 덕원에서는 고래 부산물을 이용한 장사로 이전보다 활성화를 띄었는데 이런 종합적인 교역량의 증가로 돈이 모이는 상황이었다. 이런 것을 왜관을 통해서 파악한 일본의 대마도주였다.

이 커진 거래에 편승하려고 왜관이고 그 뒤의 대마도주가 나서서 심혈을 기울이나 큰 성과는 없으며 동래에서도 서역 국가들과의 장사가 더 중요하지, 일본과의 교역 비중은 줄어들어 나갔다. 그래서 동래의 상인들인 내상들도 주로 거래하는 대상이 점점 서역 국가들의 상인들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내상의 중진들이 개방장을 들락날락거리면서 서역 상인들이랑 장사한다는 것은 동래에서는 매우 흔한 일이 점점 되고 있었다. 동래에서는 돈이 모이자 주변에서 사람들이 모이는데 이 것으로 동래부의 인구는 늘지만 이를 효율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서 읍성이며 주변을 재정비할 필요가 늘고 있었다. 서역인들을 상대하는 행정부담과는 별개로 늘어나는 인구 등으로 동래부 관아는 그동안 일이 더 늘어있으며 동래부가 임시 관리해야 할 다른 군현, 감무를 파견해서 다스릴 곳들까지 생각하면.... 동래부사는 그 왜관 감시와는 별개로 일에 치여 살고 있었다.

“아 힘들다...”

이렇게 툴툴되어도 시간은 지나기에 열심히 다시 일을 해야만 하였다. 동래부사는 동래부 관아의 자기 집무실에서 결제할 문서들을 보며 처리를 해나갔다. 장계를 쓴다고 밀린 일들을 다시 하면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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