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46) 북벌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한편, 청나라로 간신히 살아 돌아온 부도통과 그 일행들 가운데에서 살아남은 길림장군과 흑룡강장군 아래의 주방팔기들은 각자의 상관들에게 조선 정벌의 실패를 보고하려고 흩어졌고 남은 이들은 쓸쓸하게 성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청나라 군대의 패배는 이미 요동 근방에서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게 사실이 되자 점점 소문에 살이 붙어지기 시작하였다.
“저게 무슨 꼴이야?”
“조선을 당당하게 치려고 남하했다가 저렇게 살아 돌아왔다는데...”
“에구머니, 그럼 조선이 보복을 하러 올라오지 않을까요?”
이렇게 현실적인 걱정을 하는 이들이 있었고 청군이 왜 조선을 당당하게 정벌하러 갔다가 처참하게 일부, 그 것도 3만이 넘었던 군대가 수천 명 미만으로 간신히 돌아온 일이 왜 발생했는가에 대한 말이 오가는 것도 있었다. 일부에서는 말도 안 되는 대화를 나누는 이들도 종종 보였다.
“조선군이 천병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어.”
“말도 안 되오, 소방인 조선이 무슨 천병이요? 듣기로는 사특한 서역의 주술을 알고는 이를 이용해서 청군이 깨졌다고 들었소.”
“서역의 주술이라니? 서역의 주술이면 그럴 수가 있는데 그럼 조선이 대방을 배반했다는 것이오?”
“그럴 수도 있지요.”
대방을 배반한 소방을 정벌하기 위한 청나라 군대가 위풍당당하게 나섰다가 저렇게 거지꼴로 돌아온 것에서 탄식을 금치 못하는 중에서 조선 군대가 위로 올라올 수도 있다는 소문도 커졌다. 그 소문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 더해지면서 점점 기괴해지면 소문이 커지고 있었다.
“조선이 머릿수가 모자란다! 라고 하니까 조선 내에 있는 서역의 술사들이 시체를 일으켜서 동원하다고 하네.”
“그런가? 우리가 듣기로는 서역 용병들을 대거 고용해서 싸운다고 한다네.”
“그게 가능한가?”
“뭐겠는가? 인삼을 팔아서 얻은 은에 인삼을 주고 그랬을 것이야!”
위의 대화를 한 이들은 요동과 동북 땅에 살고 있는 한족이었다. 봉금령으로 묶인 땅이라도 주로 요동에서는 한족들도 살고 있었다. 이는 청나라 관내의 상황이 좋지 못하자 산해관 너머로 가서 요동에서는 꽤 많은 한족들이 법을 어기고 숨어 있었다. 공식적으로 봉금령으로 묶인 청나라의 동북 땅에서는 만주인과 몽골족만이 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어디이던지 먹고 살기 힘들었으면 이주하는 법이었다. 그래서 청나라 조정은 지금 동북에 몰래 살고 있는 이들이 정확히 얼마나 많은지 잘 모르고 있었다. 동북의 3장군 중 필두인 성경장군은 물론이고 다른 두 장군도 이런 이주를 묵인하고 있었다. 그들이 걱정하는 이유는 이 곳마저 전장이 된다면 그들은 살 곳이 부족하고 간신히 터전을 세운 곳에서 피난하여도 언제 돌아올지 알 수가 없었기에 말이었다.
“이 곳이 전란에 휘말리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조선군이 여기로 들이닥치면....”
이런 상황이 되자 조선군이 쳐들어올까봐 매우 우려하는 이들이 많았다. 한족만이 아니라 만주인 등도 걱정하였다. 동북 내의 몽골족 사람들은 주로 동북의 북부, 구 투메드 부가 있던 곳들을 중심으로 살고 있었기에 관심이 없었고 전장이 그렇게 커질지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들을 안심하려고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만 여기고 있었다.
“조선군이 청군을 격퇴했는데... 여기까지 오겠어?”
“그래도요...”
“조선이 설마....”
“조선인들이 살고 있는 마을들에 가게 되면 나중에 알아보면 되지 않겠나?”
그들이 말한 조선인 마을도 이 동북 땅에서는 존재하였다. 당장 조선도 청나라보다는 어찌 보면 비교적 나은 상황에서도 조선의 북쪽 주민들 중심으로 두만강 너머와 압록강 너머로 도강해서 살기도 했었다. 그들은 이를 간도라고 해서 살았는데 청나라 땅을 넘어서 살고 왔다는 식으로 말을 할 수가 없으니까 두 강에서 꽤 많았던 하중도 등에서 살았다는 변명으로 펴져있던 것이 간도였다.
주로 동북의 조선인 마을은 함경도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두만강 너머에 많이 있었으나 군사적 성격이 강한 길림장군과 흑룡강장군은 이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오히려 그들은 원래 살던 만주인과 몽골인을 관리하는데 더 치중하고 일부 몰래 들어온 한족들을 관리해도 노동력으로 활용하려고 묵인하였다,
그 이유는 조선인도 한족들처럼 비슷하게 쓰려고 오래도록 묵인하였던 것이었다. 물론 이례적으로 압록강 너머에 평안도 사람들이 사는 마을들이 간혹 있었는데 위의 한족들이 말하는 조선인 마을은 그런 마을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이라고 뭘 알겠는가?”
“그렇습니다.”
“그래도요...”
“조선의 군대가 애꿎게 여기로 오지 않았으면....”
조선의 북벌에 대한 것을 우려하면서도 하지 않겠다고 자신들의 희망이 실현되기를 바라면서 가만히 있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만상들 중에 일부가 일부러 북벌에 대한 것을 밀무역 중에 이를 전하게 되자 요동과 동북의 많은 이들은 더욱 두려움에 떨어서 소문은 커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요동과 동북이 이런 소문 등이 퍼지고 있을 때에 조선 조정에서는 북벌군의 병참을 대기 위해서 노력 중이었다. 기존 조선의 군대가 장기보관으로 쓰던 병량 등을 활용하는 면모도 보이고 있었다.
그 외에도 서역에서 들어온 것 중에서 건면포 혹은 건병이라고 불리는 것도 활용이 되기로 했었다. 다만 유주의 건병과 달리 조선에서 직접 만드는 건병은 차이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조선에서 직접 만든 건병은 밀이 아니라 주로 메밀과 보리로 만들었다. 이렇게 된 것은 꽤 이전에 했던 대화 때문이었다.
“전하, 서역에서는 오랜 보관을 위하여서 말린 것을 준비하온데 염장한 고기를 제외하고는 곡류로 만든 것은 그 이치가 찐쌀을 말린 것과 같사옵니다. 아니면 우리가 쌀을 찧어서 떡을 만드는데 이를 말려서 보관하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러한가?”
주상인 이영은 조선이 혹여 전쟁을 할 경우에 병량이 좀 더 좋아지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다른 신하가 말하는 서역의 음식을 알고 있었다. 듣자하니 아산과 인천의 개방장에서 유주인들을 고려해서 유주의 사람들 일부가 만드는 빵, 떡과 비슷한데 다른 것이라서 서양의 떡이라고 양병(洋餠)이라고도 칭하는 것을 말이었다. 다만 서역에서도 군에서 먹는 양병은 평소에 서역 민가 사람들이 먹는 것과는 다르다고 하였다.
“그렇습니다. 다만 그들은 밀을 이용해서 빵, 양병이라는 음식을 만드는데 특히 건양병은 불이 있는 틀에 넣고 적으면 2번, 많으면 4번을 구워서 만드옵니다. 이런 물건을 군에 보급하면 어떻겠습니까?”
“빵, 양병이라는 것이 있기는 했었지. 그런데 그 것이 아국의 사정에 맞는 것인가?”
주상인 이영은 양병이 쓸 만할 수가 있다고 여기지만 이 역시도 검증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영이 의문을 제시하자 양병을 만드는 것은 둘째 치고 그 재료에 대해서 지적을 하는 신료가 등장했었다. 그 신료의 견해에 많은 이들은 고개를 끄덕여서 일리가 있다고 여기었다.
“하지만 귀한 진가루이옵니다. 먹기는 간편해도 보관은 꽤 힘들 것이옵니다. 게다가 건양병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구워서 오래 보존하려고 한다는데 습한 기운이 많은 아 조선에서 과연 쉬울지 모르겠습니다.”
이어서 다른 신료가 건양병을 일반 병사들이 먹을 수가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이미 해당하는 음식인 건양병을 먹기도 하는 수부들에게 서역의 건양병은 결코 선호가 되는 음식이 아니라고 입을 올려서 말하고 있었다.
“아 조선의 수부들도 건양병 혹은 건병을 별로 좋아하지 않사옵니다. 아국의 수부들은 배에 탄다면 쌀밥을 고깃국에 말아먹는 것을 더욱 좋아합니다. 건양병은 뭍에 내려서 식재를 살 수가 없게 되면 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만큼 별로 좋아하지 않사옵니다.”
건병, 건빵의 보급은 매우 험난한 역사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조선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또한 유럽에서 쓰는 밀가루는 빵을 만들기가 좋으며 과하게 찰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주로 조선에서 나는 재래의 토착밀, 소맥의 경우는 난쟁이인 상태에서 찰기가 있어서 이로 밥을 만들어서 먹는 것이 나은 것이었다.
“밀도 부족하면 뭐가 좋겠는가?”
“밀에 가까운 것들을 대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겨울에 재배하는 밀은 쌀과 보리 이모작에 영향을 주옵니다.”
실제로 유럽에서 들여온 밀이 큰 수확에 실패했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연구하는 농업에 대한 이들이 있으나 따로 길게 언급을 하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조선에서 그나마 밀을 많이 재배하는 곳은 평안도와 황해도 등 북부지역이었다. 다른 지역은 주로 쌀과 보리였다.
“하오면 조선에서 흔한 메밀과 보리를 쓰는 것은 어떻습니까?”
“서역의 제병장(製餠匠), 제병인(製餠人)들이 이를 만들 수가 있으면 다행이로군.”
“그들 지역에서도 메밀과 보리로 빵을 만들기도 한답니다.”
이렇게 되자 북부 지역을 제외하고 다른 지역에서 서역의 건양병을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려고 시도해서 주목을 한 것이 바로 대맥, 보리였다. 그리고 황해도와 평안도, 함경도 등에서는 메밀이 있었다. 이 두 가지의 재료로 떡에 가깝지만 양병, 빵을 만들어 보는 시도를 하였다. 주로 그러는 것은 서역에서 건너온 이들 중 빵을 만들 수 있는 이들이 서역에서 온 이들을 상대로 장사하려고 그랬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허락을 하노라.”
“게다가 개방장 등에서 하고 있을 이들을 수소문 해보겠습니다.”
게다가 메밀과 보리로도 이미 빵을 만들 수가 있기에 건양병도 그렇게 만들기로 시도했던 것이었다. 실제로 개방장에서는 이미 조선 현지의 사정에 맞게 청나라의 화북에서 사오는 밀가루를 사서 여기에 메밀과 보리 가루를 섞어서 빵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밀가루가 부족하면 아예 메밀가루 혹은 보리 가루로 만들었다.
여기에 너무 딱딱하지 않게 원래 서역 수사들의 건양병은 4번을 굽는데 반해서 지상의 조선군을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들은 2번만 굽기로 하였다. 물론 조선의 수부들이 타는 배에서는 원래처럼 건양병을 4번 구워서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조선에서 만들어진, 조선 현지 사정에 맞는 건양병의 제조법은 경군은 물론이고 각 감영과 병영으로 퍼졌다.
이런 과거가 있었기에 보리와 메밀로 만든 건양병은 현재 조선과 조선군에서는 꽤 알려지고 익숙해지는 음식이었다. 그리고 북벌군의 군량 등을 대기 위해서 수레와 선박을 동원하는 중에서 조정에서는 주로 전통적인 병량 외에도 건양병을 최대한 편성하자고 주청하고 있는 이들이 나왔다.
“북벌군에게 건양병을 최대한 지급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 건양병은 조리하지 않고 먹어도 되니까 말입니다. 민란을 진압할 때에 이 건양병으로 야전에서의 조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전투를 속행해서 진압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또 찐쌀 등이며 여러 가지 거추장스러운 것을 몸에 매고 다니는 것 보다 낫습니다.”
한 신료, 김병학이 말을 한대로 이 건양병은 이전에 민란을 진압하는데도 기여를 한 음식이기도 했었다. 그 이유는 비가 오는 상황에서 야전 조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건양병을 먹고 작전을 속행하고 민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선의 지휘관과 교관 등 숙련된 병사들 사이에서는 이런 부분에서는 건양병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일선에서는 건양병을 마냥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를 알고 있는 다른 신료, 화서 이항로가 아까의 신료인 김병학이 말한 주로 건양병만으로 병량을 보내기에는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들으면서 편의성을 이유로 건양병을 위주로 대대적이게 보낼 수가 없다고 생각하던 이들이 더욱 동조를 하고 있었다.
“하오나, 건양병을 대량으로 만들어 놓기도 애매하옵니다. 지금의 때에 이미 만들어 놓은 건양병들을 소비한다고 해도 북벌군, 그리고 이에 따라가는 포군과 의병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건양병을 4번 이상 구운 것이 아닌 이상 아주 오래 보관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아국은 보리와 메밀을 수확한 후에 가루로 만들고 장마가 끝난 이후에야 건병을 만드는 것이옵니다. 그리고 지금 만든 건양병들을 다 옮기려고 한다고 해도 시간이 걸릴 겁니다.
설령 남은 메밀가루와 보리 가루로 건양병을 만들어도 각 병영과 감영에 개방장의 서역인이 운영하는 제병공방으로도 그 많은 수요를 다 챙기기 힘들 것입니다. 따라서 평안도와 함경도, 황해도와 경기의 감영과 병영에서 만들어진 건양병을 운송하고 몰아주시옵소서. 또 각 병영과 감영에서도 서역식의 건양병을 굽는 전벽가옥들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존에 쓰던 병량들도 같이 들고 가서 북벌을 해야 할 것이 옳다고 보옵니다.”
또 다른 신료, 환재 박규수가 건양병만을 주로 지급하는 것이 힘든 이유를 지적한 다음에는 건양병만을 대부분 지급하면 안 되는 다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곡류를 사람이 주로 먹어도 병사는 그런 것만을 먹고 싸울 수가 없었기에 말이었다. 주로 병사들의 사기를 고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건양병만 먹기에는 건양병은 더욱 빨리 허기가 집니다. 게다가 그 민란도 육포를 같이 먹어서 진압을 속행할 수가 있었고 성공했습니다. 육포는 늘어난 돼지의 고기를 간장과 소금을 쳐서 잘 말려야 하옵니다. 그래도 건양병만을 먹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비가 오는 상황 등을 고려해서 움직여서 건양병만을 먹게 하기 보다는 치중을 최대한 열심히 하여서 병졸들의 사기를 진작해야 합니다. 저 서역의 현 법국의 제왕인 자의 백부이고 전 법국의 제왕이던 나파륜이 강조했던 말이 군대는 먹어야 진군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옛 법국 마냥 약탈로 일관하기에는 치중로가 공격당할 여지가 더 늘기에 부담이 가더라도 병량 문제로 인한 약탈을 줄이고 치중을 중시하여야 하옵니다.”
주상인 이영은 물론이고 조선 조정의 많은 이들은 북벌군의 치중에 대해서 역시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치중에 매우 중시하고 있었는데 조선 초기의 세조 시절에 북벌에 동원이 된 군대보다 더 거대한 군대가 분명할 현재의 북벌군의 병참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세조 시절, 그러니까 조선 초기에 동원이 된 군대가 4만이 넘는다면 이번의 북벌에 동원하는 조선의 군대는 무려 5만을 넘기는 규모의 군대로 다른 군대들도 혹여 올라가는 상황이 된다면 그 이상의 치중과 병참 부담은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병참 계획을 중시하고 있는 상황이 맞았다.
“북삼도의 건양병을 최대한 북벌군에게 쥐어주고 육포와 기존에 주로 쓰던 병량도 최대한 내주어라. 관선과 징발한 민선이며 땅 위의 중요한 수레들, 북벌군에 속한 군대가 쓰는 수레와 북삼도에서 모은 수레들을 중심으로 움직여라.”
“예, 전하!”
“그리고 필요하다면 경기의 수레들도 최대한 동원하여라. 수레를 끌 짐승인 마소도 많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마소에게 먹일 건초에 마소가 더욱 힘을 내기 위한 곡식, 주로 잡곡을 동원해야 하였다. 다만 돼지의 수가 늘어나서 잡곡의 수요가 늘어난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서 돼지들에게 잡곡 대신에 다른 것을 주기로 하였고 잡곡은 말과 소에게 주로 돌려지게 하는 일이 잦게 하였다. 다만 이때처럼 대규모로 군용으로 쓸 전마 외에도 운송용으로 쓸 마소에게 먹일 건초와 잡곡의 필요양은 더욱 늘어날 여지가 분명하였다.
“건초와 잡곡도 그 동안 거둔 국채에 전쟁을 위한 특별한 세금으로도 추가로 사들여서 집행하라. 화약도 최대한 모아서 올려 보내도록!”
“수레와 마소의 징발도 더 하겠습니다.”
“관선의 징발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했듯이 수레와 마소 역시도 마찬가지네.”
“알겠사옵니다.”
북벌을 선언한 이래로 조선 조정은 비번, 휴식로 주던 것도 빼먹거나 교대 방식으로 운영을 해서 북벌에 필요한 물자들이며 이를 운송할 수단들을 최대한 검토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관선을 이용한 치중과 보급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의주 용암포에 물자를 집적하는 것 외에도 청의 바닷가에 상륙하고 점령해 보급로를 연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레를 통한 보급은 그런 관선 수송이 한 것을 받아서 전선, 혹은 치중로를 지키는 아군에게 보급하면서 올라가는 것이었다.
사실 무리하지 않는 선이라고 했어도 조선 조정의 예상보다 치중의 수요량은 늘어나게 될 수도 있었다. 조선은 이번 북벌에 동원할 수레를 적게 잡아도 5천대 이상을 동원할 것이었다. 그 이상도 동원이 될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조선은 이번 북벌에 많은 것을 걸었음을 보여주고 그 동안 쌓았던 국력 혹은 개방 이후에 쌓은 여력을 동원해서 청을 치려고 할 정도로 최선이라고 알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