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69) 새 호칭과 새 시찰단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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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황제를 모두 아우를 수가 있는 군주에 자주국이라서 대를 붙여서 대군주라고 표기하면 어떨까 합니다. 대군주 외의 종친 직계는 기존 명칭을 올려서 큰 수정을 하지 않게 한다면 될 것입니다.”
환재 박규수는 서역의 이해를 빠르게 하기 위해서도 대군주로 칭하여서 가자는 주장이었다. 물론 이는 이미 이전부터 자신이 다른 신료들보다 진심으로 충성하는 이영의 의향을 알고 추천하는 것이었다.
다만 이런 환재 박규수의 제안은 꽤 일리가 있다고 기울려는 찰나에 다른 이가 나섰다. 이상직과 함께 홍문관에서 영락태왕비에 대한 연구를 심대하게 하던 사영 김병기가 나선 것이다. 그가 최대한 차분하게 말을 이으려고 한다.
“저 환재 대감! 신의 생각은 다르옵니다. 대군주는 너무 임시로 지은 티가 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도 군주란 번역을 쓰기는 하여도 대군주는 서역의 깅(King)을 칭하는 것입니다. 자주국의 왕은 그 나라의 황제라는 인식이 저 서역에서는 강합니다.
그리고 저들이 칭제를 하지 않는 이유도 이 근방의 중원처럼 서역도 대진, 다른 말로는 라마를 계승했다고 인정한 이들만이 이를 보장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연유이기는 하여도 칭제에서 임금의 칭호를 올려야함이 마땅합니다.
그 것은 바로 왕은 이 동방에서는 독립한 나라의 임금보다는 황제의 아래에 있던 인식이 강합니다. 그래도 너무나 임시에 가까운 대군주라는 호칭으로 새로이 칭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옵니다.
따라서 저 전조 이전의 옛 고려, 고구려라고 칭했던 나라에서 태왕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어떤 분들은 태왕이 그냥 왕에게서 따오고 대왕의 이칭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황제 외의 5호 16국 등은 황제 말고 왕의 명칭을 응용해서 단순한 제후의 봉작이 아닌 새로운 자주한 임금의 호칭으로 꽤 근본이 있는 것입니다.
태왕은 그 비문을 해석해본다면 고구려에서도 처음부터 태왕을 칭한 것이 아니었고 영락태왕 대 혹은 영락태왕 이전 몇 대부터 사용했다가 분명합니다. 어차피 황과 왕은 이체라고 본다면 태왕을 태황으로 칭해서 가도 됩니다.
저기 왜국의 천황이라고 불리는 자인 왜황은 왜국 내의 황제이지. 외왕내제로 보고 있습니다. 서역은 자신들의 지역 외에는 황제를 칭해도 별로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건원을 하여도 칭제를 하지 않는 이유는 청나라와 적당히 마찰을 줄이기 위해서 아닙니까? 따라서 임시에 가깝고 명칭의 근본이 적은 대군주 대신에 태왕을 하는 것이 좋다고 보옵니다.”
사영 김병기의 논지를 다 들은 신료들은 대군주보다 태왕이 더 일리가 있다고 봤다. 환재 박규수도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낸 김병기를 노여워하기 보다는 태왕도 그럴 듯하다고 생각을 하였다. 물론 결정은 주상인 이영에게 달린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신료가 조심히 자신의 의견을 내었다. 그 자신의 의견을 신료들과 주상에게 전하는 이는 곧 개편이 될 중추부의 첨지사 중 하나에 규장각의 제학으로 있는 혜강 최한기다.
그는 대군주도 태왕도 일리가 있지만 다른 제안을 꺼냈다. 최한기가 낸 제안은 제왕이었다.
“황은 왕의 이체자라고 본다하여도 황과 제는 같이 쓰이기도 합니다. 또한 황보다는 제가 더 격이 높습니다.
황제와 비슷하면서 그만한 권위를 부여할 만한 호칭인 당연히 제왕입니다. 왕과 황제를 모두 아우를 수가 있음은 군주도 마찬가지지만 제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마립간 등도 생각하였지만 너무나도 옛날의 명칭입니다. 또 호칭이 중원의 방식보다는 청이 겸하는 만주대한이니 달자 대가한과도 같아서 배제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왕으로 생각하였는데 대왕이란 정식명칭보다는 훨씬 격이 높고 태왕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봅니다. 전조에서도 신성제왕으로 미사여구를 넣은 미칭이 있는데 이를 줄여서 제왕으로 단출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하옵니다.”
새로운 임금의 호칭에 대해서는 대군주, 태왕, 제왕의 삼파전이 되었다. 대군주와 태왕, 제왕을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가 모두 일리가 있는 것이라서 다른 것이 무조건 좋다고 선택하기 애매하였다.
다만 신료들은 대군주라는 명칭은 서역의 번국이 아닌 자주한 나라지만 칭제하지 않은 임금에게만 붙여 쓰기를 했었다. 그렇기에 조선 자국도 굳이 이 명칭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하였다. 외교용으로 대군주란 것을 같이 쓰거나 사실상 같은 의미라고 설명하면 그만이라서 말이었다.
‘태왕이냐 제왕이냐 인데...’
‘제왕이 왜 이렇게 끌리는지 모르겠군.’
‘이거 대군주 명칭은 물 건너갔군요. 전하. 제왕과 태왕 중 하나를 선택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제왕은 그래도 있는 말이지만 왕과 황제를 두루 부르는 말이라서 그렇다. 차라리 태왕이 낫지 않은가?’
신료들의 마음은 이미 태왕과 제왕의 양파전이 되어버렸다. 환재 박규수도 이런 분위기를 눈치를 채서 조심히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영도 이를 읽었는데 대군주가 심플하면서도 괜찮다고 여겼다. 제왕처럼 왕과 황제를 모두 어우르지만 근래에 생긴 단어라도 근본이 없지만 임금의 호칭이 칭제를 해서 황제인 오지리국과 아라사를 빼면 대군주로 명칭을 통일하기는 딱 좋았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대군주가 되기를 신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지. 그렇다면 태왕과 제왕 중 무엇이 낫겠는가?’
이영은 제왕을 곰곰이 생각하지만 제왕의 원래 용례를 생각하면 임금의 호칭으로 쓰기는 힘들다고 봤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태왕이었다.
전조에서도 쓰지는 않아서 크게 상관은 없었다. 물론 조선의 전조인 고려의 유산에서 시작했던 것을 생각하면 과거는 전조인 고려는 크게 참조해서는 안 될 시대였던 것이다. 이제는 본디라면 별로 닮아서는 안 되는 국가인 고구려의 임금 호칭을 이렇게 사용할지 고심하게 될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것과 같이 말이었다.
‘참으로 세상은 오묘한 것이다. 원하는 것을 택하지 못해서 차선을 택하는 것이라면야...’
이미 결정을 정한 이영이었다. 그래도 신료들의 생각을 들어볼 생각이었다. 주상인 그가 입을 열어서 그들에게 물었다.
“경들은 어떤 생각인가? 무엇이 새로이 출발할 이 나라의 임금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적절하다고 보는가? 태왕과 제왕, 대군주 중에서 말일세.”
많은 신료들은 저 마다의 의견을 내었다. 태왕과 제왕의 백중세였으며 대군주를 말하는 이들은 적었다. 이를 보면서 제왕보다는 태왕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강한 이영은 태왕과 제왕 중 뭐가 옳다는 식으로 싸우려는 이들을 멈추었다.
“어허 멈추라. 나는 결정을 내렸다. 태왕! 태왕이 옳다고 본다.”
“예! 알겠사옵니다.”
“이제 대조선국의 태왕이십니다. 전하.”
“아니지요. 폐하이시지요.”
사실 제왕을 밀어준 사람들도 제왕보다는 태왕이 더 일리가 있고 실제로도 임금의 호칭으로 쓰인 적이 있기에 태왕이 더 옳을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이영의 결정에 모든 신료들은 대체로 동의를 하였다.
다만 태왕과 대군주의 차이를 잘 설명할 필요가 있었지만 말이었다. 그런 것은 다음으로 하고 추사 김정희와 중추부에 영중추부사로 임시로 소속을 한 정원용이 앞장서서 나선다.
“태왕 폐하! 만세!”
“태왕 폐하 만세!”
“태왕 폐하 만세!”
조선국 국왕, 아니 대조선국 태왕이 된 이영은 아까에 이어서 다시 듣는 그 만세 소리를 기쁘게 듣고 있었다. 새로운 임금의 호칭을 결정하고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천자국에 준하는 예법과 표기들을 정하였고 왕대비 등은 왕태후, 왕비는 이제 왕후로, 왕세자는 왕태자, 세자빈은 태자비로 격상되었다.
이후 봉작제도에 대해서는 정하는 것이 사실 이견이 꽤 나왔다. 국초의 기록을 인용해서 공, 후, 백만을 사용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공 경 대부 사로 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또 서역의 봉작제에 대해서 대체로 기본으로 공, 백, 남을 중심으로 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예기를 따라서 공, 후, 백, 자, 남으로 하는 것이 제일 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근방에서 후의 상징성이 더 높습니다.
서역에서는 백으로 번역이 가능할 그 작위가 상징성이 있지만 우리는 아니옵니다.”
“그래서 반드시 후를 넣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환재 박규수가 자신의 의견을 꺼낸다. 서역의 제도에 대해서 서계여의 영환지리는 물론이고 서역에 직접 다녀오고 그들의 명사록과 역사책 등으로 분석하였다.
서역의 봉작제도와 동방의 봉작제도는 확실히 다르다고 인지하는 환재 박규수였다. 그런 그는 예기 등을 가져오고 조선의 상황에 매우 맞는 봉작제도를 연구하였다. 얄궂게도 조선의 국초 봉작제도와 그 제도의 원형인 전조 고려의 문종이 만든 봉작제가 적당하다고 보고 있었다.
물론 작금의 조선에 맞게 개조에 대한 것은 일을 하면서 작성하였다. 그리고 그 생각을 지금 이 자리에서 군국기무아문의 제조로서 동료 신료들과 주상인 이영에게 아뢰었다.
“전조 문종의 봉작제도를 가져와서 작금의 사례에 맞추면 그만입니다. 종친을 위한 봉작으로 공, 후, 백의 삼등작을! 신료들은 예기에서 가져온 오등작으로 하면 됩니다.
서진의 사례에서도 왔기에 완연히 전조 고려만의 것은 아니지요. 다만 전조는 식읍을 주었는데 우리는 그런 식읍을 주지 않아도 됩니다.
또 국초의 제도처럼 신료들은 본관을 기초로 하면 됩니다. 아니면 하사를 받는 명목상의 봉지를 따로 두면 되겠지요.
종친은 중전 마마 소생의 친왕자면 공을! 후궁 소생의 친왕자이고 태자 전하의 왕손들에 폐하와 가까운 종친은 후, 그보다 더 멀면 백! 이렇게 하면 됩니다.”
환재 박규수의 제안에 모두가 그 것이 더 낫지 않나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다른 신료들의 답변과 의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서진 등 중원에서도 공, 후, 백, 자, 남은 확실히 잘 쓰였지요. 저 대명은 외척과 공신은 공, 후, 백 위주로 확실하게 그렇다고 압니다.”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의 경우를 고려하면... 또 서역의 봉작들도 맞추려면 영길리의 봉작을 기준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영은 환재 박규수가 이런 준비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정교하면서도 전례가 있는 제도들을 사용할 줄은 잘 몰랐다. 또 서역의 제후 자리를 번역하는데도 더욱 쓰이기는 해야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더 논의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리 간다면 부원군은 공과 후로 나뉘고 군은 백을 바탕으로 할 것이다.
종친의 군은 후와 백으로 나뉠 것이다. 그 아래의 봉군 등은 애매하지만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도다. 더 검토해야 하지만 나는 긍정으로 보노라.”
이영의 조건부 찬성도 있었다. 그렇게 봉작제도도 좀 더 고쳐질 것이었다. 다만 산계 등도 변화를 주어야 하는지는 물론이고 여러 변수가 상당하였기에 예부가 되고 여기에 외교 관장 부서가 갈라지기 전의 예조 등이 제일 고생할 것이었다.
“저도 나서서 예조를 돕겠습니다.”
“환재, 고생하게나. 종친 직계의 예법과 서열을 더 수정하여도 외명부와 내명부의 직급도 천자국에 맞게 고쳐야 하는데 대명의 기록도 참조가 필요하겠군...”
“그렇습니다.”
빈은 비로 수정하고 그 아래도 고쳐야 할 부분은 꽤 있었다. 그렇기에 더 손질이 확실히 필요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내심 이영은 내명부의 후궁제도를 이참에 개편을 할까 생각을 하였다.
‘서자와 얼자가 나오는 근본은 축첩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물론 왕실의 피가 잘 이어져야만 권위가 이어진다. 그렇기에 축첩을 함부로 페할 수가 없다. 타협을 해야만 하는가....’
물론 역대에서 세종과 숙종을 제외하고 가장 권위가 있을 왕인 작금의 임금인 대조선국 태왕이 되는 이영으로도 매우 난감한 문제가 있었다. 적서의 구분을 없애야 하는 말은 옳았다. 하지만 아예 서자와 얼자 등이 나오지 않을 구조를 생각하는데 반대가 여전히 강했다.
그러면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도 고심하였다. 그렇지만 지금 이영에게 쏟아지는 국정의 결재문서들이 많았다. 또 이영이 참여해야 할 정책 심의도 많았다.
그래서 이런 일의 파도에서 좀 더 수월하게 벗어나려면 빨리 중추부를 개편해서 중추원으로 회의기구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서역의 방식 등도 고려해서 행정을 맡는 이들과 별개로 법의 집행과 심사를 맡는 이들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하였다.
‘나를 여전히 괴롭히는 이 소송문서들도 점점 버겁구나.’
사실 중앙의 이영 말고도 지방의 고을 수령들을 제일 괴롭히는 것은 이 소송문서들에 대한 처리와 소송이 문제였다. 그래서 대전 등의 법을 수정하는 의회와 그 법을 적용과 판결을 하는 부서를 수령들과 중앙 인사들을 위해서 분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하였다.
이영은 이를 좀 더 빨리 이행하자는 마음이 개인적으로 컸다. 그 자신을 위해서도 수령들을 위해서도 그랬다. 영길리인과 법국인 고문들이 했던 의견도 고려해서 말이었다.
그런 이영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환재 박규수도 군국기무아문 제조로서 일하고 예조를 도우려고 일하였다. 조선 조정은 논의로 수정할 일과 기존 업무들로 일이 터져나가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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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정에서 경장의 집행과 수행에 기획을 위한 작업 중에서도 다른 중요한 일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해외로 보낼 이들에 대한 부분이었다. 2차 서유시찰단이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었다.
2차 서유시찰단은 얼마 전의 모든 인원들을 확연하게 선발하였다. 정사의 한산대군 이성, 아니 한산공 이성이 되었다. 부사에는 엄한 강위와 다시 유림들을 인솔하기 위해서 시찰단을 자처한 기정진, 귤산 이유원으로 3명이 되었다.
물론 1차 서유시찰단에 비하면 이에 대한 대비 경력과 현직 관료들이 비교적 별로 없는 것이 다행일 수가 있었다. 다만 현직 무관들, 이번 전쟁에 공훈이 큰 비교적 젊은 무관들인 신정희와 양현수 등등을 중심으로 유학을 보내는 것도 있었다.
“앞으로 기대가 되는 인재들도 보낸다고 들었습니다.”
“현직 관료로 태왕을 제안했던 사영은 당연하지요. 면암과 운양 등도 말이지. 성균관 유생인 이들도 선발이 되었다지요?”
“난포란 친구가 꽤 걸물이고 면암의 사형으로 화서의 제자도 같이 간다지요. 그리고 저 상주에 사는 선비도 폐하의 명으로 상경시켜서 데려가게 했다지요.”
조선 조정은 이번에도 사실 꽤 기대가 되는 인재들을 제법 보내는 것이었다. 호만 들어도 알 수가 있는 유명한 이들과 그 관계자들이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에서 꽤 기인도 동행할 것으로 보였다.
한산대군, 이제는 한산공이 될 이성의 옆에서는 누군가가 있었다. 서유시찰단에서 부사인 강위 말고도 한산공을 직접 보조하기 위한 종사관도 같이 있었다. 그 종사관의 이름은...
“한산대군, 아니 한산공 대감을 보필할 종사관으로 왔습니다. 정가의 도균입니다. 호는 참봉(參峰)입니다.”
“호가 참봉이라니 묘하군, 본디 참봉은 관직을 떠올리는 것인데 말이야. 자네. 그럼 자는?”
“자는 종은입니다.”
이성은 호가 참봉인 이 특이한 정가의 사내를 재미있게 보고 있었다. 왕자인 이성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상당히 뻔뻔하고 기가 죽지 않는 모습에 많은 이들이 감탄하였다.
“그럼 자네를 참봉으로 부르겠네. 정 참봉!”
“주변에서도 정 참봉이라고 항상 했습니다.”
너스레를 떠는 이 종사관은 꽤 이색이었다. 한산공 이성은 결국 자신의 가족을 동행하였다. 이성 말고도 같이 가는 종친에는 돌아오면 백작의 봉작을 받을 이원범과 이하전도 있었다.
그리고 이성의 특권에 대대적으로 반발을 하는 일은 주상인 이영 등이 어떻게든 막아주었다. 대신 반대급부로 유모 외에도 가족을 일부 동행한 이들도 생겼다. 그렇게 많지는 않았고 우려하는 이들은 여전히 않았다.
‘이거 걱정이 큽니다.’
‘아녀자와 아이도 동행하는 시찰단이라...’
‘그 안전이 걱정이 되니...’
가족을 그래도 같이 데려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자제군관 같이 동행하는 일부도 있었다. 그래도 대체로 성인으로 인정되는 15세 이상이었다. 즉 어른이 가는데 한산공 이성은 갓난아이도 동행하는 것이라서 말이 알게 모르게 많은 셈이었다.
잠깐 유모와 같이 있다가 그에게 다가오는 이성의 부인이었다. 종사관 정도균은 자리를 비켜주었고 두 사람만 남았다.
“부인, 나와 아기와 함께 서역을 돌아다니고 많이 배웁시다.”
“저 때문에 대감께서 욕을 듣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문화부부인 류씨, 예법이 달라지는데 명칭이 확립이 되면 국태부인 혹은 공비(公妃)가 되는 그녀는 자신의 지아비가 더욱 욕을 먹는 부분은 마음이 안쓰러웠다. 유모와 동행하지만 대체로 직접 아이를 안고 장옷을 입은 조선 종친 중 오랜만에 나온 다른 친왕자의 부인을 보고는 그들은 직접 욕을 하지는 못했다.
그저 그런 고집을 부린 한산공 이성에 대해서 복잡한 생각, 혹은 욕을 할 뿐이었다. 그마저도 한산공에게도 속으로 욕을 하였다. 아니면 무모하다고 속으로 생각할 따름이었다.
“내가 감수해야지요. 부인은 그저 서역을 같이 잘 둘러보고 견문을 함께 넓히도록 하지요.”
“네, 서방님!”
“그럼 나는 종사관과 함께 더 이야기를 나누겠소.”
“유모와 같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도 이런 구설에서도 이전의 서유시찰단보다 더 규모가 큰 시찰단이었고 이전에 가지 못했던 아라사와 서반아에 미리견 등도 갈 생각이었다. 또 이전보다 더 수준이 높은 유학생들도 동행하였다.
여기에 대외 교류의 보강을 위해서 조선관 통사도 더 보낼 예정이었다. 정확히는 통사를 세분화하여서 견외통사와 통사로 하였는데 서역에도 서역의 공사관 같이 견외통사를 보낼 생각이었다.
다시 정 참봉과 이야기를 하는 한산공 이성이었다. 그는 마침 부왕인 광명태왕 이영이 해준 말을 떠올리면서 제 종사관에게 말했다.
“유구와 왜국을 거쳐서 미리견으로 가는데 그러면 흥선군을 만나겠군. 그래서 선전관도 일부 동행하는 것이었나?”
유구에 파견한 조선관 통사인 흥선군 이하응도 견외통사로 승격하며 흥선백으로 봉작을 내리기로 하였고 이번 서유시찰단은 첫 목적지를 미리견으로 잡았기에 유구와 일본을 거쳐서 갈 예정이었다. 그런 일을 위해서 선전관들이 같이 동행하다가 별도로 귀국할 예정이었다.
“왜국도 서역과 화친조규, 그리고 통상수호조규를 맺었기에 우리도 슬슬 왜국과 통상조규를 위해서 대마도주에게 연락을 하는데 아국의 서역으로 가는 시찰단이 일본의 개방장에 잠시 상륙하고 지나갈 것인데 양해를 부탁하였지요.”
“아국의 신하를 청하는 대마도주가 정말 사실 그대로 전할지는 배움이 짧은 나라도 의심이 든다네.”
“그렇습니까? 한산공 대감?”
물론 대마도주에 대한 신뢰는 근래 수십 년 동안 떨어지던 것도 있었다. 조선의 서신과 요청을 중간에 있는 대마도주가 왜곡한다는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 강해지고 있었다.
내부 정치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왜국의 삐뚤어진 인식을 고려하면 대마도주의 행동을 사실로 파악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는 이전부터 꽤 강하게 처결해야 한다가 힘을 얻고 있었다. 그래도 왜국의 그 서신을 문제가 되지 않게 첨삭한 것도 있을 것이라는 참작에 대한 의견도 있지만 강하지 않았다.
“유구와 왜국에서 별 일이 없어야겠지요.”
“그러기를 바란다네.”
이제 인천의 제물포 개방장에서는 조선 조정의 철저한 검토를 바탕으로 조선의 서유시찰단 단원들을 미리견으로 보내기 위해서 태평양을 자주 횡단한 서역인 수부들을 주로 골랐다. 태평양 전체 횡단 경험이 부족해도 배에서의 근무로는 잔뼈가 굵은 조선인 수부들도 동행하였다.
서역인 상선사관들은 당연히도 경험이 많은 이들을 선발하였다. 또 항해감에서 육성이 된 조선인 상선사관, 다른 말로는 민선사관들도 경력이 있는 이들로만 뽑아서 고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타고 가는 배는 조선의 관선들이었고 당연하게도 서역식 선박으로 최소 3척 이상의 선단을 구성해서 미리견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들의 세계일주를 겸한 2차 서유시찰단은 그렇게 시작이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