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 빈집털이 (3) (151/221)

〈 151화 〉 (70) 조선과 가까운 바다 건너의 변화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

“하아 힘들다....”

“이 타향에서 고생한다....”

병진호란, 다른 말로는 제 3차 조청전쟁에서 조선군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서 조선 본토와 신지인 요동에 억류된 청나라 병졸들의 한탄이었다. 이들은 몸값을 내기 어려운 가난한 집안의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집에 돌아가려면 몸값만큼 일하라고 조선 조정이 닦달이다.

그래서 이들의 노동력은 간척사업이며 철도 건설 등에 동원되고 있다. 또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로 유지 및 정비에도 일부가 동원되어서 굴려진다. 물론 제일 많이 청노들이 동원이 되는 것은 저 재령 쪽의 간척이었다.

황해도 재령 쪽은 갯벌로 간척하는 지역에서 청나라 포로들, 줄여서 청노들은 꼼짝도 못하고 일하였다. 반면에 인천의 철도 건설 현장은 좀 달랐다. 어떻게 이 조선 땅을 빠져나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아래의 대화를 하였다.

“살고 싶어!”

“저 일하러 온 자들 사이에 숨어들 수가 없을까?”

하지만 청나라 포로들은 조선인 역군과 동포 쿨리들과도 같이 일하지만 숙식은 철저히 분리되어서 관리가 된다. 일부는 쿨리들 사이에 섞여서 도망치려다가 걸려서 처벌을 당하고 누적이 된 자는 공개적으로 처형을 당했다.

사실 조선의 땅이 된 요동 등지에서도 현지인들이 숨겨달라고 하다가 거절을 당해 죽은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살아 돌아가려고 안간힘이었다. 물론 사람마다 다른지 그냥 조선에 귀화할 생각인 청나라 포로들도 있었다.

편을 바꿔서 대세에 붙으려는 모양으로 보이는지 그런 의사가 있는 쪽들은 의심을 받고 있었다. 그래도 진심으로 보이면 꽤나 관대해지는 모습에 생각이 점점 달라지는 이들이 있었다. 진심을 다 보이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

그리고 청나라 포로들의 이런 대화와 달리 조선인 임노동자들, 역군들은 꽤나 뽑혔다. 물론 임노동자가 아니라도 철도공사에 나선 이들에게는 일당과 끼니의 제공한다는 소식에 아직 해방이 되지 않은 사노비와 빈민들도 끼어들었다. 여기에 근방의 농사철인데도 일손이 비교적 덜 필요한 시기라서 그들도 당연하게 끼어들었다.

새참을 먹듯이 지급 받은 끼니를 제공받고 먹는 이들의 잡담이 보인다. 그들은 꽤 오랜만에 아주 큰 토지 공사를 하는 것이 놀라웠다. 물론 그런 일에 지주들이 별로 반발이 없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들은 그런 것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사실 토지기부채납으로 지주 혹은 자소작농은 얻는 것을 꽤 강조한 편이기는 했었다. 지주면 토지보상으로 간척지들이 생기면 우선 분배를 받기로 하였다. 자소작농은 명단에 오를 경우에 군역, 군포를 내는 것을 수정한 인두세 등을 면제하는 식으로 갔다.

“오씨는 이 철로인가 만드는데 땅을 팔았는데 요역 면제를 왜 안 해?”

“이 요역이면 돈도 받고 식량도 받고 새 군역세인 인두세도 면하는데! 땅 판 돈으로 다른 땅 혹은 소작권을 얻어야지.”

“군역과 인두세 면제? 그 거 참 부럽네. 지주들은 듣자하니 개척하는 땅의 주인으로 배정해준다는데!”

이런 대화를 하면서 철로를 짓는 땅을 수입하고 조선에서 이 철로의 의미와 이익을 각 고을의 수령들이며 육방이 직접 나서 향회의 향반들과 주민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저 일이 나중은 이익으로 돌아오는 것이 있음을 납득하였다.

이런 정책들은 조정이 많은 이들이 생각한 방안들을 정리해서 시행한 것이었다. 그 결과로 토지 수용 등은 당초의 예상보다 잘 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대화의 주제가 철도를 짓는 시간 등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 건설에 동원되는 보통의 노동력들은 이를 잘 몰랐다. 그래서 어렴풋이만 대화를 한다.

“근디야? 이 철도라는 것을 건설을 하라면 얼마나 걸리는 것이여?”

“기간은 길면 2년은 넘게 걸리겠고... 이 것을 만든다고 적게 잡아도 은 100만 냥은 넘게 쏟아 붓겠다는데?”

“워매, 참말이단가?”

“아 그렇다니까!”

철도의 철로를 파는 노동자들은 만져 보기 매우 드문 거금이 들어가는 사실에 그저 놀란다. 그 표정들은 매우 혀를 내밀면서 눈동자도 아주 동그랗게 되는 것이 보인다.

“이 철도가 얼마나 유용할까?”

“우마차들과 비교해도 사람 옮기는데 훨씬 매우 유용하다지?”

“얼마나 이익이 될지 나중에는 알겠지?”

조선은 자국의 필요로 철로를 파고 있다. 그 외에도 기존 도로의 정비와 보강을 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 지방관아의 재정은 물론이고 조정이 이를 뒷받침하려고 일부 환곡미를 전용해서 도로들의 관리에 사용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여전히 연안수운으로 물자를 운송하는 것이 중심인 조선이었다. 다만 그런 조선의 관점에서도 육상에도 강력한 수송수단이 점점 더 필요했다. 수운과 육상운송이 더욱 제 기능을 할 필요가 있었다.

개항장인 제물포와 한수 이남의 한성 남쪽을 연결하는 이 철로는 군사적인 목표와 유럽에서 확인했던 철로의 소송역량을 보고 건설을 결정한 것이었다. 앞으로 전쟁에서 경군을 제물포로 빨리 이송해 기선으로 수군 혹은 해군의 호위 아래에 북방이나 남방으로 증원하는 것이 목적이다.

‘기왕이면 요동에 철도를 깔아야 하지만 힘들지요. 그럼 지금은 조선과 중요한 군사 요충지에 넓은 강의 철교를 빼고는 서역과 통하는 개방장과 요충지를 연결하는 곳들에 지어야 합니다.’

‘한성도 한수가 아니면 그렇고 싶지만... 대신에 한성 근방과 인천부 외에도 수원부를 연결하는 것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요?’

‘장용영 등을 생각하면...’

‘매우 일리가 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따져서 내린 결론을 바탕으로 이 철로를 영조 혹은 설영하는 조선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첫 철도 사업을 돕고 감독하는 영길리인 철도 기술자들은 산업고문과 함께 검토하고 보완하며 공사를 지도하고 있었다.

그들은 저렴한 물가를 이용해서 꽤나 많은 노동자를 끌어 모으고 청나라 포로도 철도 건설에 동원하는 조선 조정에 놀란다. 이 시대의 토목 건설은 기계보다야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다만 원안에서 청나라 포로들이 많은 사실에 우려하고 이를 지적한 철도 기술자와 기술 및 산업 고문이 있었다. 그들이 말리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숙련된 노동력을 만들려면 경험이 쌓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저 청나라 포로들에게 경험을 몰아주게 됩니다.

조선 자체의 철도 공사 경험을 가진 숙련된 이들이 더 늘어야 앞으로 조선이 철도를 까는 일이 더욱 나아질 것입니다.”

“외국인 포로들과 노동자들에게 그런 경험을 몰아주면 조선은 얻는 경험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 청나라 포로들은 다른 일에 동원해야 합니다.”

상기하는 이유를 통역을 통해서 듣자 이영 등의 조선 조정 수뇌부들은 청나라 포로들을 다른 일에 동원하였다. 바로 황해도 재령만의 간척에 더욱 동원하게 된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 일로 조정을 했어도 수천 명의 포로들과 약 1천의 청나라 쿨리 외에는 대부분 조선인 임노동자들을 고용해서 굴리는 상황을 확인하였다. 그들의 지시에도 근면하게 일을 수행하고 동원 인력이 많자 진척이 생각보다 많았다.

“부실 공사를 하지 않아도 이 정도면 속도가 빠를 겁니다.”

“예상보다 빨리 완공이 될 수가 있습니다.”

“협궤가 아닌 1453mm의 표준궤라도 고객의 의뢰니까 감수해야지.”

사실 그들은 조선에서 활동하는 자국 출신의 고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이 원한 철도 규격을 알 수가 있었다.

게다가 우연으로 법국과 입찰 경쟁을 했었다. 하지만 여러 정보 등으로 조선의 첫 철도 개통 사업은 영길리에게 돌아간 상황이었다.

“협궤를 고집했으면 프랑스에게 뺏겼을 겁니다.”

“사망자는?”

조선인 관료 외에 실무적으로 철도 공사의 감독을 맡은 고문과 수석 기술자의 물음에 그 휘하 기술자가 보고를 하였다. 조선인 통역의 도움을 받아서 작성한 보고서를 근거로 하였다.

“좀 나오나 많은 인력으로 해서 사망자가 빨리 치워지고 요역에 나서려는 이들이 줄을 서고 있습니다.”

그 말에 영길리의 철도 기술자들은 여기도 돈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비교적 구식인 증기기관차를 구매했으나 조선의 상황에선 충분하게 쓸 수가 있다.

“조선이 우리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오히려 그게 더 궁금하군.”

“동감입니다.”

제한적 개항과 전면 개항 이후로 일어난 것에서 당장 조선사회엔 전체적으로 엄청 큰 파급력이 없어보였다. 허나 작은 속에서 이미 일은 일어나고 있었으며 달라짐이 강대하다.

지도층의 인식 변화 등을 바탕으로 교육과 서역 지식과 기술의 응용에 이를 배우고 보급하는 제도를 제일 열심히 연구해서 조선의 실정에 맞게 적용할 예정이었다.

또 조선의 시행착오에도 청나라와 일본의 무관심함과 자국 내부의 상황으로 이렇게 되고 있었다. 서역과의 교류가 빨랐어도 조선이 빠르게 직접 교역을 하면서 조선인들이 가진 시대의 유행을 최대한 따려가는 경향이 더해지면서 시너지를 내고 있었다.

***

공식적으로 조선의 사회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주로 의식주 등의 변화를 비롯해서 꽤 많았다. 조선의 중부와 남부는 영길리의 로드 애머스트호를 통해서 들어온 감자,-비공식적으론 북부에서 청나라 사람들의 감자를 얻으면서 생긴 것이다.- 다르게는 양감저라고 부르는 감자를 심음으로 구황작물의 다양화가 되었다.

특히 그걸로 식량 부족과 기근을 극복하는데 기여도 되었다. 고구마와 감자는 흉년이 오는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환곡으로 인한 문제도 조정은 이를 조정하면서 통제하였다. 지방재정과 환곡미의 교통에서의 전용도 고구마와 감자 등의 다각화된 구황작물로 해를 넘기는 경향도 있었다.

다른 변화는 역시 의술 부분도 있었다. 그래도 급격한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래도 마마는 몰라도 그 마마보다 무서운 호열자, 골역을 이길 수 없지요.”

“호열자 혹은 골역은 양의들이라도 대책이 없더군. 그나마 마마는 축적한 경험들과 마과회통을 통해서 나온 치료법이며 우두법 등으로 피해를 줄이고 있도다.”

비록 마마는 그럭저럭 제압해도 저 호열자라고 불렀던 골역(콜레라)을 완전히 이기지 못하였다. 하지만 조정의 의지와 양의를 통한 교류로 세상을 보다 더 다르게 보려고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것이 더 중요한 일이 생길 상황이었다.

또 다른 점은 양선을 도입함으로서 물류운송의 효율점이 늘어났다. 아예 양선을 모방한 배를 만들었다. 민간이던 말이었다. 그 중에서도 조선이 부품을 수입하고 몇 개는 만들어서 자체의 증기선을 만들었다.

“그 것을 내가 개인으로 시작했는데 나처럼 관심이 있는 자들과 조정이 나서서 결국은 성공했었지...”

“다만 서역의 조선소도 모방해서 만들지만 주로 서역식의 범선 위주지요.”

“포함이니 같은 것도 얻으면 뭐하나? 우리는 당장 그런 것을 양산할 여력이 없음을 인정했지.”

“다음을 기약하십니까?”

“그래!”

그 작업은 그 때를 회상하는 혜강 최한기가 대표해서 만들었다. 조선 최초의 증기선, 정확히는 기범선인 그 배는 관선이 되었다. 정확히는 경기수군 소속으로 말이었다.

그러나 목탄을 쓰기에 효율이 부족했었다. 평양 등 관서에서는 매탄, 다른 말로는 석탄을 캐 쓴다는 사실과 증기기관을 운용하는 서양선원들의 조언을 들은 수군 무관이 이를 건의하자 더욱 성공적이었다. 이를 서방의 구형 대포와 유사한 소포에 대포 등의 신화포를 두어서 경기수영을 지키게 했다.

위의 대화, 그대로 조선의 인천부 제물포 개방장에 양선과 같은 배를 만드는 선소가 만들어지자 범선을 주로 만드는 것은 증기선을 만들기는 조선의 역량으로 한계가 있기에 그랬다. 아마도 나중에 조선의 국력과 서역의 기술과 격물학에 능통해지면 만들 것으로 보였다.

“중고지만 양선들은 사들이는 것으로 족하다.”

“그렇습니다. 아직은 말이지요.”

그 외에도 조선은 더 성능이 좋은 양선들을 구매하는 식으로 가서 그렇다. 그런 양선들을 잘 다룰 인재들을 육성하는 기관은 물론 만들었다. 그 결과로 조선의 해운전력은 점점 더 상승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런 해운전력의 강화가 지난 병진호란, 혹자는 3차 조청전쟁에서 조선이 이길 기반 중 하나를 제공했다고 보고 있었다. 이런 발전 등이 어떻게 흐를지는 아무도 모르고 좋게 흐르게 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이야 있다.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

그리고 조선 내부에서는 관리를 임용하는 제도가 서역에서는 시험이 없었다가 영길리는 동천축 상회사(동인도 회사) 등으로 퍼져나가서 영길리 조정도 이를 더욱 채용했다고 알았다. 덕의지란도권(독일어권)인 보로선을 중심으로 자신들과 유사한 제도가 나온 것을 확인하였다.

그들의 양상을 일정 부분 감안해서 1854년에 과거 시험을 부분 재편하였고 1865년에는 완전히 개편하기로 합의를 하였다. 기정진과 이항로가 주상의 도움 등으로 이를 관철하고 2차 서유시찰단이 나중에 이를 보탤 것으로 보였다.

“과거 제도는 을축년(1865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재편이 될 것이요. 기존의 제도를 바탕으로 하오. 정학의 기본 소양을 따지고 실용학문도 선택해서 뽑는 것이다. 기존의 잡과를 재편한 것도 추가할 것이다.”

“예, 폐하!”

“작금의 제도는 기존 과거의 문과는 더 실용으로 바꾸고 난이도를 1차는 문답시험, 2차는 과거의 3차에 해당하게 하고 3차는 면접으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연수를 하는 과정을 거치게 했습니다.”

“무과는 사라졌지요. 이제 무과 대신에 육예서당, 육예당에 수군을 위한 병학당인 수사학당을 거쳐서 무관들이 선발이 될 것입니다.”

조선의 제도는 조종성헌을 고려해도 대조선국으로의 변화로 제도들은 과거의 기본을 바탕으로 이를 보강하는 방식이라도 혁신도 충분히 있었다. 다만 아직 중추원이 빨리 나왔지만 사법부라고 할 수 있는 조직은 분리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영은 서역의 제도를 생각해서 형과 율, 법을 관할하는 이들의 중요성이 더 높아지고 있음을 알았다. 원래 동양에서도 예와 법을 모두 통치에 사용하였다. 다만 이제 때가 될수록 법의 중요성이 더 높아지는 현실을 이영 등 조선의 지도부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영과 그런 이영의 뜻에 동조하는 이들은 이라고 법원이라고 번역을 할 수가 있는 것을 내놓을 생각이었다. 수령들의 재판권을 회수해서 재판을 담당하는 이들에게 분리할 작정이었다. 그러면 중앙은 물론이고 수령들의 부담도 줄 것은 확실하니까 그렇다.

‘다만 아직 법을 더 다듬고 그런 법을 다루는 율관 등의 위치로 조정하고 더 높은 자리의 그들을 두어서 사법과 행정을 분리해야 하는데 급격하게 이루기는 힘들다.’

그런 일도 인재들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그렇기 힘들어서 결국 중장기를 기약하였다. 그 전에 수령들, 특히나 신지인 요동 등에 부임하는 수령들이 더 힘들 것이니까 방법을 더 찾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외부의 일도 중요한 일이 처리해서 바쁜 조선이었다. 당장 급한 외정은 청나라와의 조청수호조규를 체결하는 것이었다. 이전에 구상한 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편전에서 입을 여는 태왕 이영이었다.

“아 환재. 귀공은 예법을 만지는 것을 멈추고 저기 연경으로 조청수호조규의 전권부관으로 임명하는 바이오. 대관은 특별사 서장관과 북벌군의 서진군 체찰사에서 복직하여 예부상서 김영근이 맡으시오.”

“네, 폐하! 조청수호조규를 꼭 성사시키겠습니다.”

“그리고 이부상서 김영근은 청나라의 아국 조선의 조선관 견외통사로 부임시키겠다.”

북벌공신으로 임명되고 그 간의 공적으로 금산(나주의 이칭)백이 된 환재 박규수와 마찬가지로 북벌공신의 일좌로 길주(안동의 이칭)백에 봉해진 김영근은 각각 전권부관과 전권대관으로 청나라와의 교린을 위한 대등한 관계를 맺기 위한 특사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여기에 이영의 다른 발언에 그 당사자인 김영근이 제일 당황한다.

“폐하?!”

“길주백이라면 꽤나 적임입니다. 좀 더 젊은 사람을 해도 되겠지만 청나라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정승에 오를 수 있는 인사가 견외통사로 오는 것을 꽤 신경을 쓸 것입니다.”

“신 좌의정! 우상의 의견이 합당하다고 봅니다.”

군국기무처로 개칭한 군국기무아문의 제조였다가 정승 중 우의정으로 진급한 추사 김정희가 이렇게 아뢰었다. 이에 대해서 복직해서 좌의정이 된 조두순도 동조하였다. 영의정을 공석으로 둔 상황에 두 정승의 지지에 김영근을 그 자리에 보내는 것에 찬성하였다.

김좌근의 일파와는 거리가 먼 김영근은 장차 정승의 자리에 올릴 수가 있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판단하는 태왕 이영과 그의 총신들이었다. 정원용은 영의정에서 복귀하지 않고 의회로 개편되는 중추부, 중추원의 첫 의장 격인 영중추원사로 안배가 되었다.

그 외에도 태왕과 조정의 천거로 인선된 중추원 의관 중에서는 화서 이항로, 김좌근, 이경재 등이 앉게 되었다. 김좌근은 영돈녕부사를 겸직하지만 그 뿐이었다. 김영근의 좌천인지 아니면 영전인지 모를 상황에 김좌근은 겉의 속내를 감추고 표정을 관리하면서 계산을 매우 하고 있었다.

“신 길주백! 김영근! 예조판서에서 예부상서가 되었지만 신은 부덕합니다. 그런 제가 견외통사가 되는 것이 조선에 도움이 된다면 그 일을 하겠습니다.”

김영근은 자신에게는 꽤 버거운 자리인 판서, 상서 자리보다는 중추원 의관의 자리를 원했다. 다만 청나라에 간다는 것은 좀 그렇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도 청나라에서 무시당하지 않는 위치와 청나라를 압박하는 자리에 앉을 수가 있다면 옳다고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당황으로 가득하다가 이내에 주상인 이영의 결정에 이미 두 정승이 찬성한 상황에서 견외통사를 하고 돌아오는 것이 낫지 않을까 진지하게 생각하였다. 심지를 굳힌 김영근은 문중의 영수인 김좌근의 눈치를 보지도 않고 답한 것이 위의 답이다.

“경은 나와 이 대조선국에 충의가 깊도다.”

“아니옵니다. 폐하와 아국의 녹을 받는 이로서 최대한 그 명에 순응할 뿐입니다.”

김좌근은 돌아가는 상황을 생각했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김좌근은 실직에서 크게 배제가 되었다. 이 중추원의 의관 자리도 판중추부사의 자리를 받겠지만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중추원의 의관도 배분을 했지만 대체로 태왕인 이영의 사람들과 그에 가까웠다. 여기에 김좌근에게 적대적인 유림들도 고려하면 그는 큰 힘을 쓰지 못할 것이었다.

‘역시, 부와 명예를 더 쌓는 것이 낫지. 영돈녕부사의 자리에서도 슬슬 물러날까?’

김좌근이 조정에서의 권력을 더 이상 가지는데 초탈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두려운 이들도 있었지만 아닌 이들도 있었다. 내막을 알고 있는 김문 출신의 관원들과 제 수족들을 통해서 그 내막을 전해들은 대조선국 태왕도 마찬가지였다.

‘외숙, 조정에서 필요 이상의 부패를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다면 조정의 일 외로 버는 치부는 내가 상관하지 않을 것이요.’

‘경은 대감은 달라진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충족할 생각인가?’

‘세상 천하의 일을 참 알 수가 없어. 이게 좋은 것으로 더 이어지기를 바라지.’

신료들은 견외통사로 김영근이 부임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대체로 찬성하였다. 그리고 그런 결정 외에도 유림들의 추천으로 중추원 의관이 된 이들의 소집도 받아서 중추원의 의관 30명, 전원이 모인다면 그 개회를 태왕인 이영이 좋은 선례를 남겨서 행할 것이었다.

***

한편, 조선인들의 일상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변화를 어렴풋이 알았지만 다 깨달은 것은 없었다. 항산에 대해서 전세와 토지에 대한 세금 등이 늘었지만 기존 잡세 등을 줄였기에 부담은 줄어들었다.

그래도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잡세 등을 거두기도 했기에 그렇다. 주로 주세 등이 그렇다.

다만 이 것도 사치스러운 서역의 술 등이 비싼 것이었다. 관세 외에도 주세 부담은 컸고 기존 조선에서 수요가 많은 술들에 붙이는 주세는 높은 편은 아니었다.

“어째 조금씩 물건 값들이 비싸지는 것 같구먼.”

“그런가? 청주도 확실히 비싸졌다고. 진사댁 나리 말도 있구먼야.”

“요즘 내가 거시기 맥주라고 보리술에 빠졌는데 그 것이 우째 막걸리와 동동주보다 비싸단가.”

이전부터 그들은 주세란 세금의 도입으로 때문에 좀 올랐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내막을 잘 모르는 그들이었다. 그리고 담배세며 일부 물건은 확실하게 가격이 올랐다.

장돌뱅이들은 보부상을 관할하는 조직에서 전체적으로 내는 세금이 올랐다고 관에게 전해 들어서 부담이 커지는 듯도 하다. 하지만 오히려 상업이 느는 추세도 더하고 간접세인 소비세 중 사치재를 빼고는 소비세는 물건 1개 당 일정 비율로 납부하는데 그 부담이 적었다.

다만 상인들이라고 무조건 조정의 시책에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도로들에 통행료를 받기 시작했다. 여기에 신 잡세로 인식되는 세금 등은 상인들이 관의 허가를 받으려고 할 때에 주로 물기 시작했다.

반발하기에는 나랏님이 북벌을 성공하고 돈이 많이 쌓임으로 저항하기도 힘들다. 여기에 상인들 말고도 조선의 백성들도 관아에서 서류 작성을 하려면 그런 인지세를 내는 것이 당연시가 되고 있었다.

또 제한적이지만 외국에게 관세를 물려서 세금을 늘이고 국내 물건에는 관세를 매기지 않고 잡세가 관세보다는 비싸지 않기에 대체로 따르고 있다.

“우리 상인들에게 돌아가는 돈이 좀 적어지고 있는 것이 불만이요만.”

“그래도 강남이며 더 먼 곳까지 무역하라고 하시고 상인들인 우리도 꽤나 발언권이 커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반대를 한다고 해도 조정은 우리를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소.”

이런 상황을 파악해서 조심히 구는 이들이 많았다. 각 지방 거상집단과 보부상을 연결하며 중개하는 송상이며 수상 물류에 힘이 강한 경강상인에 산업가들로 변모하는 유상도 있었다.

여기에 해외무역 전담이던 만상과 내상은 수출량과 무역량의 전반적 증가로 부를 쌓으나 그 부를 조정에 꽤나 상납하고 있다.

관허상인이었던 시전상인과 공인 중 공인은 무너지고 시전상인은 한성이란 기반을 이용해서 한성 근방 사상들을 압도할 관과의 중요 정보 입수며 경관이란 큰 고객들로 납품 수량이 늘자 오히려 관과의 거래를 더욱 중시하고 있었다.

한성 근방의 난전이라고 부르던 사상들하고도 경쟁하기 벅차나 한성의 공장들은 이 시전상인들이나 시전상인들의 건물주들이 꽤나 투자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생각보다 살맛이 나는군.”

다만 조정이라고 항상 상인의 편은 아니었다. 쌀을 선대하여 매점매석하는 행위는 태왕이 세자 일적에 대리청정을 하던 시절과 국왕이던 시절에 즉위 이후 일어난 초기 쌀로 인한 폭동 문제로 조정은 매우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을 정도이다.

점점 자유무역 관련으로 환곡의 규모가 좀 줄여도 우회적으로 쟁여놓을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또 저곡가 정책 시행으로 농민들에게 생존도 어느 정도 보장해야 하기에 축소했다고 주장하는 환곡 제도로 사실상 계속 이용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이런 유사 환곡은 기존 환곡 제도가 도로의 유지 등을 위해서 지방에서 거두고 활용하는 방식의 잉여분을 들여놓기 위한 방식 등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었다. 공조에서도 이 도로도감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이는 공부로 재편 중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위상이 올라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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