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다시 위대하게!-163화 (163/221)

〈 163화 〉 (77) 중앙과 요동에서의 일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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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저나 폐하.”

“무엇이요? 영중추원사?”

중추원의 회의 결과를 결제하기 위해서 중추원의 하급 관원과 같이 태왕인 이영을 만나러 간 영중추원사, 중추원의 의장인 원상 동래백 정원용이었다. 그런 회의 결과를 쓴 문제를 받고 서기는 돌려보낸 다음에 동래백과 이영은 대화를 하게 되었다.

대화는 잘 이어지다가 정원용의 물음으로 잠깐 멈추었다. 물음의 다음 내용을 말하려다가 뭘 말하려는가 묻던 이영의 말에 잘렸다.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이영이었다.

“아, 나의 실책이로다. 계속 이야기를 하시오.”

동래백 정원용은 태왕께서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넘겼다. 그러고는 자신이 말을 하려는 의도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바로 일본에 이제 진정으로 파견을 해야 할 견외통사를 정해야 함이 옳다고 보고 있었다.

“왜국에 보낼 주왜국 조선관 견외통사를 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왜국의 천기(가와사키)가 개방되면 그 곳에 견외통사가 머물 조선관도 세워야 하고 말입니다.”

“확실히 그렇소. 근데 천기보다는 횡빈(요코하마)가 더 입지가 좋다고 하던데? 왜국의 왜황과 그 조정은 통치를 못하는데 결국은 강호(에도)의 대군부와 가까운 곳이 좋다고 보오.”

물론 천기 외의 다른 곳에 조선관을 짓는 것이 옳기는 했었다. 그러나 요코하마는 개방을 제외한 곳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에도에 가까운 가와사키가 제일 적정하였다. 그 외에 견외통사에 대한 인선이 필요했다.

“아국에 주재하는 영길리의 견외통사급 외관 로구 남작(헨리 로크 남작)과 주청 영길리 견외통사인 외관 부래도닉 부루스(프레드릭 브루스, 엘긴 백작의 동생이다.)가 영길리 본국의 고관이자 전권대표인 재임수 브루수(8대 엘긴 백작, 제임스 브루스)와 협의하여서 알곡 경(러더포드 올콕)을 왜국의 통사로 보낸다고 압니다.”

“외부의 보고와 영길리 측의 전달이라고 기억하오. 내일 견외통사와 왜국에 보낼 왜국 측 개방장들에 보낼 통사들도 논의를 해야 할 필요가 확실히 있겠군.”

태왕인 이영도 슬슬 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봤었다. 그러면서도 결재를 위해서 도장을 찍을 문서들을 확인하면서 그 인선도 조심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왜국도 비록 청나라만큼은 아니라도 안전하기 힘든 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기에 종친을 보내기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 맞았다. 인선은 그러면 다른 신료에게 맡길 필요가 있는데 너무 격이 떨어져서도 안 되었다.

내일 조정과 중추원의 추천을 들어볼 생각이 커졌다. 왜국에 보낼 주왜국 조선관 견외통사로 이영이 이미 낙점한 인물이 없었기도 하였다.

“내가 딱히 낙점을 한 이가 없다오. 영중추원사. 그럼 경은 누구를 생각한 자가 있는가?”

“신도 그렇게 뾰족한 인물이 마땅하지가 않습니다. 게다가 비준서를 우리는 대마도주를 통해서 받아서 이를 대마도주를 통해서도 넘겼습니다. 그럼에도 이 수교에 대해서 축하를 기념하는 사절을 보내심이 어떻습니까?

견외통사를 보내는 사절이자 왜국의 왜황과 왜국을 실질로 통치하는 대군을 아국의 특사로 종친을 보내서 이를 접견하여 명목이나마 아국과 왜국의 우호를 표방함을 보이면 말이지요.”

동래백이자 중추원의 의장인 정원용이 하는 의견은 확실하게 그럴 듯하게 보였다. 물론 이 사안도 조정과 중추원에서 논의하여서 결정을 할 예정이었다. 정원용과의 대화를 끝내고 정무를 봤다가 침전으로 들어가는 이영은 인선을 누구로 할까 자기 전까지 고심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었다. 조정의 편전에 모인 그들에게 이영이 동래백 정원용과 이미 이야기를 했던 대로 그 화제를 이야기해서 결정을 할 예정이었다.

“왜국에 파견할 조선관 견외통사를 누구로 하면 좋은가 의견을 들어볼 생각이다. 경들은 누가 제일 적절한지 이야기를 해보라.”

“네, 폐하!”

“신 김병국이 감히 추천을 한다면 이조의 판서(판서가 상서로 올라가자 참판이 판서가 되었다.)인 매산 대감을 추천합니다.”

“매산의 경륜 등은 확실히 높습니다. 또 그의 품계 등은 견외통사로 가기에 적법합니다. 아직 유효한 산직과 지금의 직급에 준거하면 말입니다.”

매산 류후조가 추천을 받았고 그의 인선을 지지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현임 상서 중 하나인 호부상서 이경재는 매산 류후조 말고 다른 사람을 추천하였다. 이경재가 추천한 사람은 종친인 흥인백 이최응이었다.

“흥인백 이최응이 양잠을 전하고 태왕 폐하의 종친으로서 최소한 직무를 다하면서 소임을 하고 있습니다. 더 큰 소임을 주시어 작은 일도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그도 중용하소서.

무엇보다 태왕 폐하의 종친을 보낸다는 사실은 왜국이 불의하고 신의가 없다고 하여도 저들이 아국의 교린을 하려는 의도를 모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호부상서 이경재의 제안은 매산 유후조를 추천하고 이에 대한 지지와 있던 것과는 달랐다. 왜국, 일본을 청나라만큼이나 신뢰할 수가 없기에 종친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 주장의 선봉에서는 신료로 주왜국 조선관 견외통사를 세워야 한다는 의견을 이미 태왕에게 피력했던 중추원의 의장이고 북벌공신으로 그 공적으로 동래백에 봉작이 된 정원용이 있었다.

그 외에도 환재 박규수와 유산 정학연도 이에 가세하였다.

세 사람 말고도 중추원의 부의장격 중 하나로 실질적인 부의장으로 기능하고 있는 화서 이항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제일 격렬하게 반대를 하는 이가 화서 이항로였는데 아주 철저히 논박하고 있었다.

“종친들은 안 됩니다. 유구에서도 왜국의 살마 인들이 아국의 견외통사를 사사로이 위협할 수도 있다고 우려가 있습니다. 헌데 왜국의 본거지에서 아국의 종친을 둔다고요? 호부상서가 너무 위험한 제안을 했습니다.

청나라 못지않게 아국이 믿기 어려운 왜국입니다. 정녕으로 우리가 그들을 신의로 대한다고 그들은 자신들 밖에 대해서 아국보다 더욱 적대가 어린 시선을 가집니다. 왜국이 과연 아국을 정말로 신뢰하는가는 알 수가 없기에 종친을 보낸다고 이를 우호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우선은 말이 없이 모든 신료들의 의견을 경청 중인 태왕 이영도 종친을 왜국에 조선관 견외통사로 보내는 것은 반대가 심했다. 물론 호위를 잘 하고 저들이 그 호위의 안전성을 보장한다면 특사로 종친을 보낼 생각은 있었다.

그래도 꽤 길게 머무르는 일인 왜국과 청에 종친을 보내는 행동은 별로 원하지 않았다. 다만 이영이 친히 나설 필요가 없이 이미 청나라로 보내진 김영근 같이 신료를 보내면 충분하다고 봤었다.

“은퇴한 고관을 견외통사로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입니다. 허나 평판이 좋아야 하며 김문의 기경(김흥근의 자) 같이 방자한 행동을 했다가 물러난 이는 절대로 아니 되옵니다.”

“현직의 고관, 영감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사람이어도 됩니다. 다만 그들은 아국의 경장에 더 집중을 해야 하니까 은퇴한 고관 중 기력이 있는 이로 하여금 해야 않을까 싶습니다.”

그들은 퇴직한 고관도 인선을 두어야 한다는 의견도 꺼냈다. 이 의견은 영의정인 사기 이시원이 먼저 답하였는데 그러면서도 기경 김흥근 같은 이를 보내서는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복주후인 김좌근은 안동을 본관으로 한성 장동에 결집한 장동 김문의 수장으로서 문중에게 망신을 줬던 친척이 언급이 되자 잠깐 표정이 굳었다. 이내에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였다. 물론 경은 김좌근, 그 자신이 생각해도 기경 김흥근은 꽤 거만하게 움직였다가 당시에 임금 이영의 눈 밖에 났다.

‘그 때 주상께서 기경의 짓을 더 알고 그를 작정하고 정리하고 우리 문중도 적극으로 구명하면 정말 박살내려고 했을 것이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으니 망정이지...’

당연하게도 그 일로 일족에서도 기세가 꺾였다. 문중의 평판을 깠던 이를 위해서 위세가 강한 주상에게 도전할 수가 없고 큰 처벌은 면하게만 조심히 구면할 정도였다. 결국은 김흥근은 파직되어 물어야 할 죄가 커서 기존의 유배를 대체하는 유형을 선고 받았다.

평양의 유형소에서 그 죄가 중해서 10년 형을 선고 받아 징역과 노역을 하는 중이었다. 김흥근의 가족이 공채를 꽤 사들이는 일에 대청승전에 대한 기념 등으로 태왕인 이영 사면령을 선포했었다. 기경 김흥근, 그도 사면인 명단에 속해 있었다.

그렇게 남은 죄를 사면 받아서 10년의 형량 중 6년 만에 유형소에서 출소하였다. 평양에서 한성으로 일족의 도움을 받아 돌아오고는 조용하게 살고 있었다. 태왕 이영은 기경 김흥근을 복직시키지 않았다.

‘기경 김흥근은 국외에서 조선의 얼굴이 될 수가 없는 이다. 그런 관리의 자리에 어찌 그런 사람을 앉히는가? 그런 생각을 한 중신들의 의견은 일리가 있다. 영상인 그가 하는 말이니 내가 참아야지.’

그런 상황에서 불미스러운 일로 물러난 전직 고관을 견외통사로 복직시키는 일은 힘들었다. 이는 경은 김좌근 역시도 마찬가지라고 봤다. 호부상서가 추천을 철회한 흥인백 이최응을 제외하고 류후조 말고도 다른 추천들이 들어왔다.

“전직 영의정인 이재(권돈인의 자 중 하나)는 매우 격이 높습니다. 그리고 고령에 지금 병석이라고 하여서 애매합니다.”

“다른 전직들도 고령인 경향이고 전직과 현직 중 젊은이들은 다수가 영감 급의 아니거나 서유시찰단으로 파견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직인 표운과 매산의 경합입니까?”

사간원의 대사간을 역임해서 그 임기가 끝나가는 표운 강로와 이부의 2인자, 이부판서인 매산 류후조의 양파전이 되어갔다. 이영은 둘 다 쓸만 한 인재라고 보고 있었다. 특히나 류후조도 김영근과 더불어서 차기 정승 감으로 이미 하마평이 있었다.

강로는 그보다는 젊어도 그 다음 다음에 정승이 될 수가 있다고 이야기가 이미 나오는 상황이었다. 강직한 모습도 있으며 아직 남아있는 당색에 의거해서 북인이라도 그 끈을 이영으로 해서 이영에게 충성하는 이였다.

‘흠 누가 좋은가?’

이영 말고도 조정의 고관들은 당연하게도 고심을 하고 있었다. 물론 둘 중 하나가 되어도 심각한 결점은 없었다. 그래도 나라의 외교에 대해서 당연히 중요하기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으로 끝날 것으로 보이지 않자 다음에 더 논의하기로 하였다. 주왜국 조선국 견외통사로 갈 후보를 둘로 압축한 부분에 대해서 조정의 인사들은 우선은 만족하였다. 물론 이제 두 후보의 의향 등도 더 고려를 할 필요가 생기고 있었다.

사실 대마도주를 통해서 받은 서신으로 왜국, 일본에서는 서역의 나라들과 조선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도 우려가 되었다, 또 금과 은의 교환이 일본 밖과 일본이 다른 것을 이용해서 부당하게 이익을 챙기는데 이는 조선 상인들도 그렇다는 식으로 항의하는 문서도 받은 조선 조정이었다.

그렇기에 주왜국 조선관 견외통사로 보내질 사람은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추가로 통사들 파견 받으면 그들을 통제해서 현지에서 활동하는 조선인들이 허튼 짓을 할 수가 없게 해야 했다. 이런 정보를 고려하면 태왕 이영과 조선 조정은 당연히 그 인선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

고구려주 관찰사 이지원의 관할인 고구려주에서 집안은 영락태왕비가 근방에 있기에 주군으로 빠르게 정해질 정도로 중요해진 고장이었다. 그리고 집안은 조선이 새로 지은 명칭은 국내성이 있던 곳이라서 국내성의 국을 떼서 내성군이라고 지었다.

이곳의 군수로 부임한 내성군수 심순택은 지난 순시에서 태왕인 이영을 만나고 그 군수로서 보인 행적 등을 상당히 칭찬받은, 능력이 있는 인재에 속했다. 다만 이런 심순택도 당연하게 골머리를 앓는 일은 주로 송사였다.

아직 이 신지에서는 순회판법관, 줄여서 순회법관이 파견이 되지 않았다. 그럴만한 것이 순회법관들은 조선의 팔도에 먼저 파견이 되려고 우선이라서 그렇다. 각도 10명씩 보내는데 신지인 요동을 합치면 100명을 그냥 넘는 순회판법관들을 급히 양성한다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형조, 형부로 승격이 된 부서의 율관들이나 형부의 형률 등 율법을 다루는 이들 중에서 형법을 연구하고 조선의 형법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 이들을 빼고 순회법관의 자리를 급히 채우는 것으로도 힘들었다.

“휴우... 이 신지인 요동 6주 등에서 순회판관들이 보내지려면 아직 수년은 더 남았다고 하던가?”

지방관인 내성군수 심순택은 부임하자마자 매우 바빴다. 그가 조정의 명령으로 내성군주에 부임하고 얼마가 되지 않아서 조정의 지원을 받아서 이 내성군의 중요한 비석인 영락태왕비에 대한 보호를 하는 전각을 만들어야 했다.

그 공사를 감독하면서 공무와 송사를 본다고 정신이 없던 심순택이었다. 그 전각 공사가 꼼꼼하게 마무리가 되는 것 같았지만 행정과 송사로 여전히 바빴다. 특히나 송사가 제일 많았는데 주로 농지에 대한 싸움이 원인이었다.

“조선인 개척민끼리 싸우는 것도 있지. 그런데 이를 넘어서 한족 백성과 원래 아국 사람인 조선인의 송사도 매우 많단 말이다.”

사실 조선인끼리의 송사면 큰 문제는 없었다. 이전에 조선 본토에서 했던 대로 잘 처리하면 되었다.

그러나 조선인과 비조선인 사이의 송사가 제일 골치가 아팠다. 그 이유는 매우 다양했다. 주로 달자, 몽골인과 만주인 대 조선인의 송사 원인은 주로 앞의 두 부류가 조선인들이 데려온 소 등을 훔치는 일 때문이었다.

반면에 조선인과 한족의 송사 원인 토지에 대한 문제는 물론이고 쓰던 단위가 달라서 서로가 사기를 쳤다고 소송을 해서 일어나는 일도 많았다. 사실 쓰던 단위 차이로 인한 오해는 애교에 가깝다. 이건 그나마 서로의 단위계를 알려주고 현행 조선이 쓰고 있는 단위계를 기준으로 하라고 하면 그만이라서 그렇다.

“이 놈의 토지 관련이 제일 문제로군. 조선에서도 지방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토지 관련 송사가 제일 힘들었지.”

조선인끼리의 토지 송사도 사실 번거로웠지만 조선인과 한족 사이의 토지 송사는 더욱 까다로웠다. 여기에 청나라와 이전 명나라에서는 있었고 그리고 지금도 있는 송사에 여성이 참여할 수가 있는가에 대한 인정여부도 문제였다. 한족들이 이런 송사는 있을 수가 없다는 식의 송사 방해를 하고 있어서 신지 요동 중 한족이 더욱 많은 쪽들은 이런 위기가 있다.

게다가 이는 달자라고 부르는 몽골인들과 만주인들도 여성은 송사 등에 참예할 수가 없거나 단독으로 참여할 수가 없는 존재라는 인식이 조선인들이 가지는 여성의 송사에서 위치에서 남녀가 동등한 부분과 상당한 간극이 있었다.

“남자이던지 여자이던지 송사에서는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이 아국, 대조선의 원칙이라고 말을 해주어도 고집을 부리는 자들이 많다...”

내성군수 심순택은 비조선인 쪽에서 송사에 여자 따위가 끼어든다고 송사를 뒤로 미루든가 그도 아님 파행을 하려는 이들이 많았던 사실에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일이 쌓이면 쌓일수록 송사에 파행을 저지르는 이들에게 철저하게 불이익을 주어도 되었다.

다만 적어도 ‘내성군 내의 모든 백성들은 조선인이던 아니던 최대한 공정하게 대우 받아야 한다!’ 같은 이런 생각을 가진 내성군수 심순택은 그런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모른다면 가르치면 된다는 식이며 그들을 적당히 달래면서 적당히 혼내는 식의 강온양면으로 통치하였다.

오늘도 있는 송사에서 만주인 여성이 남편과 같이 자신을 겁탈한 조선인 사내를 고발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남의 아녀자를 겁탈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중죄였다. 그 조선인 사내는 자신의 죄를 부인하고 있었다.

“네 서방에게 돈을 받고 널 안았을 뿐이다. 네 서방을 원망해라!”

이런 식으로 있지도 않은 매춘을 주장하는 모습에서 내성군의 관헌에서 방청객에 가까운 이들은 혀를 내두르고 짜게 식은 눈으로 사내를 보고 있었다. 조선인과 비조선인 가리지 않았다.

내성군수 심순택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만주어 등이 가능한 역관의 통역을 바탕으로 어렵게 송사를 이어갔다. 게다가 이 송사라는 것이 한 번에 끝나는 일이 드물었다. 이후에 이 관련 송사는 다른 날 시행하기로 하였다.

송사가 끝나도 다른 업무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저런 상황으로 내성군수 심순택은 신지 요동의 제주들에도 순회법관이 빨리 파견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사실 여기면 송사 처리가 비교하자면 편하지.’

발해주와 부여주, 솔빈주, 흑말주(흑수주) 등은 역관이 아직 다 파견이 되지 못해서 송사도 제대로 못할 수가 있었다. 또 필담을 할 정도로 한문이 능통한 이들은 별로 없어서 육체를 처벌하는 식으로 대충 처리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요동의 동부 주들은 역관이니 아님 관리가 만주어 등을 익혀야할 것이었다. 따라서 내성군수인 심순택 정도면 신지 수령으로서는 업부 부담이 적다고 볼 수가 있을 지경이다. 조선의 신지 요동 통치는 아직 갈 길이 먼 셈이었다.

***

요동군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 요동의 6주에 속한 군대에서는 정 3품의 병마절도사들이 보내졌다. 그들을 쉽게 통제하기 위해서 요동주 혹은 고구려주에 경군의 모든 군영을 쉽게 요동도통부를 세우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 이전까지는 요동주 병마절도사지만 그 품계 자체는 이미 종 2품 이상인 자가 최선임으로 그들을 통솔하는 위치였다.

요동주 병마절도사는 바로 정기원으로 품계와 공적을 생각한다면 경군의 군영을 지휘하는 사를 맡아도 되며 그 이상인 경군도통부 혹은 삼군부의 고관이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노장은 이전에 결의한대로 태왕 이영에게 간청하여서 수년을 요동군의 요동 제주에서 각주의 군대를 관리하는 병마절도사로 요동군의 기틀을 세울 것이었다.

“아직 체제가 확고하지 않습니다. 조선의 군제를 요동에 주둔하는 이들로 세운다고 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요동군은 확고한 군대로 자리매김했다고 보기는 애매하지요.”

요동주 관찰사이자 심양군수를 겸하는 홍순목은 자신보다 훨씬 늙은 무장의 푸념을 들어주고 있었다. 홍순목도 매우 막대한 업무를 수행 중이었다. 두 사람은 업무 관련으로 만나는 일이 많았기에 가까워졌다.

사실상 요동군의 수장인 정기원이 하는 말에 따르고 홍순목이 알기로도 요동 제주의 병력 체제는 훨씬 느슨하였다. 요동 제주의 병마절도사들 아래로는 부가 없어서 그 역할을 주군의 군수가 담당하지만 군수를 돕는 병방 외에 주군과 속군의 군대를 지휘할 대대장, 연대장이 따로 있었다.

그들은 아직 수가 적고 주군의 군수에게 간섭하지 않고 군무 등만을 맡았다. 겸파총, 이제의 말로는 겸대대장에 방어사인 겸연대장을 맡는 주군 군수들은 지방 군대의 지휘는 그들에게 맡겼다. 다만 군사 지휘 말고 병참과 지원, 군정에 대한 부분은 군수들이 맡았다. 다만 수령들은 그 외에도 업무가 많기 때문에 거의 전적으로 군무는 무관들이 맡게 되는 상황이었다.

“조선은 방어사. 겸연대장은 이제는 재편해서 부의 부윤들에게 맡기지만 실질은 이미 단연대장이라고 불리는 이들과 군수들이 단대대장에게 군무를 맡기고 있지요. 요동도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문관이 지방 방어의 최종 책임자지만 실무는 무관에게 맡기는 사실이 이제는 편하니 말이요. 요동은 문관의 수도 더 적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요동군의 체제는 그 두 사람 말고도 요동 제주에서 관찰사와 병마절도사로 있는 이들도 다 동의하듯이 지방군이 더욱 향보포군 등과 밀착되어 있었다. 여기에 지방군도 향보포군에서도 둔전병이 있기에 실질적으로 둔전병 중심의 군대였다.

상비하는 군대는 주로 정예한 경군 출신들로 유지하려고 하지만 그 수가 적었다. 그나마 요동주에서는 경군 출신들이 받은 땅을 소작 주는 방식에 급료도 받아서 버티는 식이었다. 경군 출신들을 상비하는 군대로 두고 있을 수가 있었지만 다른 곳들은 그런 상황이 좀 힘들었다.

정확히는 경군 출신들이 그렇게 해도 요동주보다 그 수가 더 적은 점을 고려해야 했다. 게다가 식량 수급이 안정적이라고 보기 애매해서 경군 출신도 같이 농사를 짓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요동군은 조선의 본토 군대가 상비군인 경군과 반상비군인 지방군, 요동처럼 이제는 제도가 재편이 되어서 기존 포군에 군에서 퇴역한 이들을 조합한 예비군으로 조합이 되는 상황과 달랐다. 요동군은 지금 상황이 거의 대부분이 반상비군, 반예비군인 둔전병과 둔전병을 겸하는 향보포군이고 일부의 상비군만 있는 상태였다.

이 것도 조선인 개척촌의 포수들과 향약에 의거해서 뭉치는 자경단을 편입해서 수를 불리고 있었다. 즉 일부 관군 출신들과 옛 북방 포군들을 빼면 오합지졸이었다. 은퇴한 지방군이 훨씬 정예한 상황이었다.

“저들을 다른 병사들과 함께 아라사와 청나라 군대가 와도 무너지지 않게 잘 조병해야 하는 것이 나의 소임이라고 봅니다. 요동주 관찰사.”

“저는 그런 요동주 병사인 대감을 도와주어야지요. 게다가 요동주의 군무는 사실상 대감께 떠넘기고 있잖습니까?”

그렇기에 정기원과 홍순목의 대화는 이어졌다. 물론 정기원도 홍순목이 일이 많기에 더 많은 잡다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주로 하는 대화는 업무를 협의하기 위해서 하는 대화들인 셈이었다.

요동주 관찰사이자 심양군수에 심국의 요동총독 겸 재상서리라는 거창한 관직의 조합을 가진 홍순목은 그나마 한족 향사들이 갑자기 이 요동주 통치에 도움을 더 주려는 것으로 부담이 줄고는 있었다.

홍순목은 태왕인 이영이 서북과 신지 서부 순시를 하고 돌아가던 중에 요동주와 고구려주 사이에 달자와 만주인으로 구성한 비적들이 태왕의 행렬을 습격했던 일에 가슴이 철렁했던 적이 있었다. 죄를 청하고 사직하려는 자신을 친필 서신으로 이를 만류한 이가 태왕이라는 사실에 제 불충을 반드시 씻겠다고 자신을 철저히 갈아 넣다시피 업무 중이었다.

“내가 쓰러져도 이보다 더 큰 고뇌와 업무를 하던 태왕 폐하이다. 내가 분골쇄신해야 되지 않겠는가?”

홍순목은 눈 아래는 퀭해도 눈빛은 밤하늘의 별처럼 이채를 빛내며 혼잣말을 하였다. 40대의 나이로 이영에게 재정 등의 분야로 인정을 받는 신료로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관찰사에 정 3품의 관직으로 있는 그는 수명을 몇 년 단축시킬 수가 있는 업무지옥에 여전히 있었다.

물론 그를 돕는 이들과 한족 향사들의 협조로 생각보다 빨리 요동주에 한해서는 통치가 원활하게 될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여전히 신지 요동제주의 지방관들로 보내진 이들은 업무지옥 속이었다.

이런 일 때문에 주군의 군수와 관찰사들은 확실하게 조정의 인정을 받는 노소를 불문한 인재들이 보내짐도 사실이었다. 다만 군수감무로 보내진 이들도 비슷하나 아닌 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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