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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다시 위대하게!-185화 (185/221)

〈 185화 〉 (87) 항의사절 파견과 그 중에서도 바쁜 조선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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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평후 대감, 정말 괜찮겠습니까?”

“죽을 위기도 감수하고 내가 청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살날이 적다는 사실을 내가 직감했다오.

그래도 살고 있군요. 타국에서 객사하는 것보다 집에서 친지 곁에서 떠나는 죽음이 요절일지언정 호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익평후 이희가 말하는데 초연을 가장한 체념이 어린 표정에서도 진심이 묻어 나오는 것이 드러난다. 그 것은 잘 만들어지지 못한 도자기에서 유약이 번져 나오는 듯이 그랬다. 그런 익평후 이희를 보면서 항의사절의 부사를 맡은 류후조도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항의사절은 아주 거창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을 호위할 군대는 조선의 경군에서 차출한 1개 중대였다. 너무 많을 수가 있고 막부도 왜관을 통해서 들은 이 통보에 거부하려고 했지만 조선이 왜국과 유구에서 겪은 일로 강하게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정확히는 보군 1개 중대였다. 그들이 동행하는데 큰 일이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항의사절이지만 그런 것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을 태운 배는 인천부 제물포 개방장에서 중간 기착지를 거치고 왜국의 에도 근방의 개방장인 가나가와 지역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근데 어째서 지원을 하신 것입니까? 은언궁의 종주이신 분께서 왜?”

“그것 말입니까? 사실은 아까도 말했다시피 종주 자리만 맡은 종친이 이 변하는 나라에 무어가 쓸모가 있습니까? 종친의 일을 볼 자리에 궁무부라고 해서 의정부와 궁정의 사무를 태왕께서 분리하려는 중에 종친이 맡을 자리에서 나는 그 자리를 맡을 시간이 없어짐을 깨닫습니다.

나에게는 중부이신 완계백 어른 쪽에게 본의 아니게 맡던 제사의 자리를 빼앗은 것도 있지요. 근데 완계백 어른 쪽에서는 흥선백 이하응을 교대로 할 유구의 견외통사로 보내질 예정이라고도 들었습니다. 일부 종친도 일이 생겨서 부족한 능력에도 일하게 되었지요.

나도 기대를 하다가 내 병을 알게 되니까 무기력하게 배제 당하고 싶지 않았소. 원래 태왕께서는 내가 수강소학당에서 자리를 맡아주기를 바랬소.”

익평후 이희의 속내를 더 알게 되자 복잡한 심정이기는 했었다. 그래도 마지막에 말한 그 것에 더 놀랐다. 양평후 이명이 받은 자리는 원래는 익평후 이희로 내정한 자리였음에 그랬다.

사실 이상하지는 않았다. 익평후 이희는 종친 중에서 그나마 정학에 밝은 축으로 높은 순위에 오른다는 사실을 류후조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렇습니까? 한데 어찌....”

“말했잖소. 내 몸의 병이 심각하다고 말이요. 아무리 길어야 3년이라고 합니다. 고작 3년...”

“....”

“그러면 더 오래 앉아서 돌봐줄 수가 있을 이가 낫다고 봤소. 그래서 내 병환을 태왕 폐하께 고백했소.”

흔들리는 배는 왁자지껄 해야만 정상일 텐데 둘 사이는 매우 고요하다고 할 정도로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어두운 밤도 이보다 더 시끄러울 정도로 분위기는 하강한 상태다.

류후조는 그런 분위기에서도 아주 차분하게 익평후 이희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차분해 보이는 류후조도 속은 아주 착잡한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익평후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차분과 평정을 가장한 체념이 있었다.

“그렇습니까?”

“그래도 수년을 수강학당 등에서 보낼 수도 있었을 겁니다. 굳이 위험 자처하지 않아도 되었고요. 그저 왜국에서 큰 일이 없이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예 부사 영감, 꼭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호위로 차출된 병력은 경군 삼군문에서 어영청의 보군연대 중 1개 중대를 뽑아서 동행시키는데 그들도 조선 조정의 관선에 탄 상태였다. 그런 중대를 이끄는 지휘관, 정사는 청나라 외의 외국 경험과 아국 고관의 호위라는 중책을 맡게 되어서 기쁜 면과 불안함으로 걱정하는 면을 다 가지고 있었다.

“부사, 왜국에서 방심은 금물이다. 우리가 정예한 경군이라도 왜국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예, 알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방심하지도 않을 겁니다. 다만 너무 과대해서 적을 경계하지도 않을 겁니다.”

정사 외의 유일한 소수의 무관 중 중대의 2인자인 부사가 그렇게 말한다. 이 항의사절의 호위로 왜 경군 1개 중대가 동원이 된 이유를 부사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정사가 생각을 할 정도였다.

물론 사실 부사의 말도 일리가 있기는 했다. 예나 지금이나 중용의 덕이 왜 강조가 되었는가를 생각하면 과민할 필요도 깔 볼 필요도 없다. 딱 중용으로 호위 등의 소임에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었다.

그들을 태운 관선은 조선 조정이 제정한 관선기를 게양해서 항해 중이었다. 영길리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해상기는 역시나 푸른색 배경이 들어가면 정부와 해군기, 즉 관선기가 되었다.

붉은색 배경은 민간 해상기가 되었다. 올해 초에 완전하게 제정이 되어서 해군으로 재편한 조선 수군의 깃발과 관선의 깃발이 되었다.

‘종친이 탔는데 다른 깃발을 게양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서유시찰단에야 군기로도 쓰이다가 의장용으로 바뀐 깃발도 아국의 국기와 함께 게양했다고 들었으니.’

관선의 선장은 새로이 정한 관선의 깃발이 아직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도 영길리의 배들 중에서 민선, 즉 상선에서 저런 것을 게양한 것이 있기에 조선도 이를 모방한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이 시기의 영길리 해군과 영길리 상선단도 각각 푸른색, 백색과 붉은색을 사용했다. 청색함대와 비 청색함대의 군기는 유니언 잭과 푸른 깃발이냐 유니언잭과 하얀색의 성조지 십자가 그려진 잉글랜드 기와 합체한 것인가로 구분되었다.

조선은 영길리 해군처럼 해상기를 3개 이상 굳이 세분화를 할 필요가 없기에 청기와 적기만 제정한 것이었다. 제 1 사분면에는 태극과 검은 닻을 그려 넣었다. 영길리의 영향력이 조선에도 반영되었다는 증거기도 하지만 조선이 쉽게 영길리의 해상기를 모방하는 것이면 충분하다고 봤기에 그렇다.

“아국의 배는 동래 부산포에 정박했다가 왜국의 하관에 정박하고 이후에 강호로 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하관에 내리던지, 아님 저들이 연 계(사카이)에서 내리어 왜국의 도성에서 왜황을 먼저 만나서 이를 따져도 되기는 합니다. 다만 문제가 저들의 도성으로 바로 아국의 군대가 닿는 것을 매우 싫어할 것입니다.”

“그러니 강호에서 먼저 왜국의 대군을 만나고 대군의 사자와 함께 우리 사절이 호위대와 함께 도성에 간다고 했지요. 왜국의 왜황이 자신이 있는 도성에 아국 군대가 들어오는 것을 용납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다른 방법을 현지에서 논의할 수가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런 일로 왜국 내부에서 불만이 쌓일 여지는 높았다. 항의사절과 현지의 최고위 조선의 외관 관원인 강로가 이미 막부와 물밑 교섭 중이지만 쉽지가 않았다.

“정 안되면 저들 도성의 밖에서 아국의 호위대가 주둔한 쪽에서 협의를 보면 되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좋겠지만 홀대한다고 서역의 외관들이 왜국을 공격하겠지요.”

“큰 상관은 없습니다. 우리는 항의를 하고 이미 주왜국 견외통사가 교섭한 것을 바탕으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야 하지요. 아울러서 유구 문제를 이 동방에서 더 이야기를 하게 화두를 일으켜야 합니다.”

항의사절은 죽으러 가는 길은 아니었다. 다만 뒤숭숭한 왜국의 상황에서 문제가 있을 수가 있기에 보내는 병력으로 조선과 왜국이 알력을 드러날 수가 있었다.

그래도 강호의 대군부, 즉 막부는 이를 용인하지만 쿄, 교토의 왜국 조정은 설령 조선의 사저를 호위하는 병력이라도 도성 진입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아예 막부가 조정에 사람을 보내서 막부 <> 주왜국 조선관, 막부 <> 조정으로 어떻게 의견 차이를 조율 중이었다.

수석 로쥬에 오른 안도 노부마사는 열심이지만 의견 차이가 별로 좁혀지지가 않았다. 이런 상황을 잘 몰라도 조선의 사절 호위를 위한 병력으로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더 짐작할 뿐이었다.

“자신들이 사절을 지킬 호위 병력을 오게 빌미를 줬으면서 그러는 부분이 어이가 없지만 제가 보기엔 조정에서도 말이 꽤 나오던 지금 왜국은 조정과 대군부가 갈등을 하고 있다가 사실로 보입니다.

여기에 하부로는 그런 건달만도 못한 자들이 떠도는데 대군부의 위상이 말이 아닙니다. 대낮에 대군부의 중진이 살해당할 정도니 말이지요.”

“그리고 바다 밖 등은 전혀 모르니까 아직도 천하가 무서운 줄 모르는 것이겠지요. 우리보다 더 무지한 모습이 아닙니까? 게다가 영길리도 길길이 날뛰려고 한다지요?”

“이런 추세 등을 생각하면 저들이 참으로 어디로 날뛸지가 걱정입니다.”

항의사절의 정사인 익평후 이희와 부사인 류후조 등의 단출하게 꾸려진 일행, 그리고 이들을 호위하는 경군 중대는 제발 큰 일이 없기를 진실로 바랬다. 각자가 믿는 것에 이를 빌기도 하는데 그들의 문명은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앞으로의 일이 순탄할 지가 아닐지는 사람의 이치로는 크게 알 수가 없어서 그저 바랄 뿐이다. 그들의 항해는 순탄해도 왜국에서의 행보는 다를 수가 있었다. 한편 왜국, 일본에서는 쿄에서 언쟁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

조선의 본토에서 신지 요동으로 이주한 이들 중에서 원래 도한, 거골장으로도 불리던 백정들도 있는데 이들은 넓은 들이 많은 새 땅에 다른 방식으로 적응하고 있었다. 신백정으로 불리던 이들은 과거 조상이던 양수척 등이 북방민족을 조상으로 두었던지 잘 적응하는 듯이 보였다.

특히나 조선에 붙으려고 작정한 만주인이라고 불리는 그 아래 유목민족들과 달자, 몽골족 중 조선에 붙으려는 씨족들이 이들 백정과 교류가 적극이었다. 조선과 요동에서는 이들이 의기투합을 하고 각자가 보유한 소를 합쳐서 경영하려는 양상이 등장한다.

그래서 요동에서 활동하는 떠돌이 소치기들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조선인들과 한족에게서 곡식을 얻으려고 하는데 소와 말, 양 등을 길러서 교환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소를 치고 부려서 들소도 잡아먹고 살지.”

“우리가 뼈가 빠지도록 치고 잡는 소는 저기 조선인들 중 돈 있는 자들이나 먹는 것이지. 우라질....”

“니들이나 나나 운이 좋게 쇠고기를 먹을 때는 치던 소 중 다친 놈들, 들소 중 잡다가 다친 놈들 도축해서 먹잖아?”

“장작으로 구워먹는 것이 좋아. 그거라도 없으면 뭔 낙이 있어? 이 짓거리가!”

이 대화를 하는 그들은 지금은 조선에 속하지만 본래 조선인이 아닌 이들이었다. 조선의 땅이 된 북쪽, 신지 요동에서 소 등을 쳤다.

그리고 저 사람들은 그 소와 말, 양 등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에게 충성하기로 남은 몽골족과 만주족들이 주로 이런 일을 하고 있었다.

주로 활과 화살을 들고 돌아다니는 이들이었다. 물론 총도 있지만 수도 적었고 주로 조총이었다. 이들은 주로 조선인들 아래에 있는 자들이었다.

저 사람들 말고도 이런 일에 끼어든 이들은 조선인들도 있었다. 특히 조선인 중에 백정들 일부가 이런 일을 다시 시작하였다.

“조선인들 중에서 우리처럼 이런 일을 매우 좋아하는 이들이 생겼어. 본래 조상이 북쪽에 있던 자들이던가?”

“근데, 군대가 말 등을 원해서 조선의 상민들도 말 기르려고 열심히 라던가?”

“청나라에서도 많던 중마 등이며 몽골에서 데려온 말들도 ”

백정이 아니면 상민이 말 등을 키우려고 신지의 평원에 왔다가 다른 목축을 하면서 생겼다. 그래도 조선인 소치기 등은 만주인과 몽골족만큼 많은 것은 아니었다.

이 북방의 목동들은 때때로 일부가 무뢰한이 되기도 했었다. 그런 자들을 방비하려고 조선 조정은 신지에 파견한 병력 중 말을 타는 기마순군과 수가 부족한 기마순군을 지원하기 위해서 마병들에게 임시순군 소임을 주어 이들을 경계하고 순찰하며 진압하였다.

“우리는 마적이 될 수 있다니.”

“좀 심한 말이지.”

“지들이 우리를 마적이 되게 만들면서!”

조선의 행정력이 완전하게 미치지 못한 곳이라서 아직 조선에 반기를 든 자들, 그러면서도 청나라에게 충성하는 이들과 아닌 이들이 뒤섞인 마적들로 오인 받았다. 그런 오인을 불식하려고 마적 소탕에도 협조해 나선다.

하지만 그들도 가끔은 유사 마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잠재적인 마적으로 의심하는 것이 나오지만 그래도 불만이 나온다.

이런 불만에도 소치기를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제일 돈이 되니까 그렇다. 조선인들이 싫어도 그들이 소를 산다고 자신들에게 주는 돈은 좋았으니까 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낙이 있다면 고기에 대한 제약이 별로 없었다. 물론 기르는 소보다는 들소를 잡아먹는 것이 더 흔한 법이었다.

“상처 입은 들소네.”

“빨리 잡아서 맛있는 부위나 먹자고.”

“어차피 뭔가 튀겨먹을 수가 없으니 빨리 숯불에 굽자고.”

“양껏 먹자고!”

비슷한 시기에 존재하는 미리견, 미국의 카우보이와 비교하면 그들은 척 웨건 같은 마차 혹은 수레가 없었다. 들고 다닐 수 있는 소지품이 제한이 된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요리는 제한적이었다.

그런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직화구이고 주로였다. 그리고 그들은 수백 근은 넘는, 200~300킬로그램 정도의 소를 장정 여럿이 최대한 먹어치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소의 가죽을 쓰지 않으면 몽골에서 쓰는 ‘버덕’이라는 방식으로 요리를 해도 되었다. 다만 ‘버덕’을 별로 바라지는 않았다. 가죽을 상처 없이 손질하려면 시간과 손이 많이 걸려서 그랬다.

“버덕은 번거로워.”

“그냥 불에 고기 구워 먹는 것이 최고지!”

“피! 피도 마시자고!”

“당연히 내장도!”

그들은 소의 피를 마시면서 기력을 보충한다. 여기에 곁들여서 살코기 말고도 내장도 일부만 같이 구워먹을 생각이 강한 이 북방의 야인 소치기들이었다.

조선계 소치기들은 작은 마차에 일부 가재도구들을 들고 다녔다. 하지만 그들도 급하면 야인 소치기들과 별로 다르지는 않았다.

사실 그들은 야생마를 잡아다가 팔기도 하는데 다친 말도 그들에게는 훌륭한 식량자원이 되었다. 위에서 그들이 먹는 다친 들소도 여유가 된다면 육포로 만들어서 보관했다.

여름철에서는 고기는 대체로 매우 얇게 저며서 보관하는 식이었는데 이는 사실 만주인들과 달자, 몽골족들도 하는 행태였다. 다른 곳에서는 조선에서 이주한 백정과 상민들로 구성된 소치기들이 야영을 하면서 이야기 중이었다.

“둔전병이니 경군 출신의 조선 요동군에서는 건호궤를 주기가 애매해서 호궤로 지급한다더군,”

“그들이 먹는 고기 중에 우리가 납품하는 들소들이 얼마나 많을까?”

“알 수가 없지. 그리고 우리 말고 다른 곳들은 이전에 폐했던 우유소를 다시 세우고 요동에도 이를 세워서 수유와 우유, 타락을 생산해서 보내기도 한다더군.”

“수유, 우유, 타락이 비싸지. 암.”

조선에서는 사실 소가 많아도 젖소라고 부르는 품종이 없기 때문에 우유는 아주 적게 났다. 게다가 여름철에 나오는 우유는 소가 사람에게는 유해한 독초를 먹으면서 살 수도 있기 때문에 발효 등의 과정으로 수유를 만들던지 아님 송아지에게 주게 내버려 두었다.

이런 방식을 고려하면 우유는 귀한 식품이고 약 취급이었다. 우유의 가공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신지 요동에서는 가축을 기르기가 좋은지 농사하는 이들도 당장은 벼농사 대신에 북감저, 감자와 밀농사 위주로 하면서도 작은 목축을 의도하지 않게 병행하고 있었다.

우유소를 다시 만들자고 건의를 한 것은 서역의 고문들이 고기 말고도 우유를 원하기에 조선 본토에서는 이미 우유소가 등장했다. 다만 이를 핑계로 군역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 우유와 수유, 타락 등이며 서역에서는 치즈 등이라고 부르는 건락도 생산하면 대동미 등을 면해주고 있었다.

이런 우유소가 개척 중인 요동에서도 등장하고 있던 셈이었다. 요동 우유소는 대신에 조선에 귀부하려고 열심힌 순만인, 숙만인, 순달자, 숙달자 등으로 불리는 친조선 만주인과 달자들도 참여하였다.

“서역에서 쓰는 젖이 많이 나오는 소가 알게 모르게 들어오고 있기는 하지. 천축 등을 통해서 말이야.”

“팔도 권역은 그렇다고 치고 이 신지 요동에서는 많이 없나?”

“젖이 많이 나와서 젖소인 소를 우리 조선에 본디 있던 소와 섞어서 새로운 소를 만들던지, 기존 암수로 젖소를 만든다고 열심이지만 수가 아직 턱없이 적다는데?”

요동 개척 중에서도 조선 본토의 변화에 따라서 요동에서도 그 바람이 조금씩 불었다. 다만 이런 요동도 아직은 당장 ‘산업화’라고 부를 수 있는 바람은 조심스럽게 불 것으로 보였다. 그 이유는 조선 본토에서의 산업 발전이 우선이라는 정책 방향에 때문에 그럴 것이다.

물론 요동 개척은 여러 난관이 있어 보임에도 그 난관 속에서 많은 이들이 다투고 어우러짐이 드러났다. 다만 요동이 오롯이 대조선국의 영토가 되기에는 행정망이 더 착실하게 깔릴 필요가 있고 조선에 충성하는 이들이 신지 내에 많아져야 했다.

그래서 조선은 조선 8도의 인구들을 보내서 ‘조선화’를 시도하지만 쉽지는 않고 현지 원주민들과 갈등도 고려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조선본토에서 요동으로 보내는 순회판법관 등이 늘어나면서 수령들의 송사 부담은 점점 줄어들었다.

“태왕 폐하와 의정부의 결단 등으로 신지 수령들은 순회판법관들 도움으로 송사의 늪에서 벗어나 중요한 고을의 정무를 임할 수가 있습니다.”

내성군수 심순택 등이 이렇게 순회판법관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극찬할 정도였다. 다만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순군을 대동시키고 그들을 순회시켜야 했는데 오히려 이런 방식도 더해서 순회판법관들이 돌아다니는 구역 사이에 치안이 잡히는 예상치 못한 효과도 봤다.

조선은 이런 저런 시행착오를 다 하면서 요동 통치의 효율을 높이고 개선하려고 노력이었다. 또 전문 치안 인력을 육성하기 위한 논의가 조정에서는 항의사절을 보낸 이후로 더 열심인데 의견 차이가 발생하였다.

그 이유는 치안 인력 운영에 대해서 모방할 대상을 두고 싸우는 부분이었다. 영길리의 모방이냐 아님 법국 등 유주 대륙에 흔한 제도의 모방이냐로 갈등하고 있었다. 경찰만 두느냐, 경찰과 국가헌병대, 조선식 표기로는 국가순군을 병행해서 두는가에 대한 의견 차이였다.

그리고 이 의견 차이가 군국기무처의 두 제조가 의견이 달라서 더 치열해지는 모습이라서 흥미로웠다. 그들은 각자의 일리가 있는 근거를 들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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