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화 〉 (97) 천하 정세 변화와 조선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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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흘러서 아미리가 대륙에서 일어난 일로 세상이 시간이 흘러서 모두가 주목을 할 정도였다. 미리견, 다른 말로는 미국의 지도자를 뽑는 작년의 선거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휘구당, 휘그당의 분열로 등장한 공화당의 후보로 나선 에이브라함 링컨, 령건이라고도 할 수가 있고 조선의 새로운 음차로는 린건에 더 가까운 이 인사가 결국은 미리견의 대백리새천덕에 등극했었다.
다만 오귀자 노비, 흑인 노예에 대해서는 강경한 폐지론자인 그가 대백리새천덕이 되자 남부의 주들에서는 더 반발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와 미리견 중앙 조정에 대항하기 위해서 남부의 주들 중 일부는 강경하게 미리견 합중국에서 이탈을 운운했고 기어이 남부의 일부 주들은 미리견을 이탈했다.
그리고 린건, 에이브라함 링컨 등 미리견 중앙의 정부는 이를 막으려고 했다. 그럼에도 남부의 이탈한 주들은 뭉쳐서 나라를 세우는데 이가 아미리가 남부맹방이었다. 나라를 선포하기 전에 자신들의 집정 혹은 대백리새천덕으로 재파손 대이비수, 제퍼슨 데이비스를 내세웠다.
“이 나라의 부통령도 고향을 위해서 나라를 등졌소.”
부대백리새천덕, 부집정이라고 할 수가 있는 정치인도 사실상 사임하고 남부맹방에 투신하였다. 링컨은 노예제의 폐지를 원하고 그러면서도 연방 혹은 합중국인 자국의 존속을 원했다. 합중국을 이탈한 남부의 일부 주들의 이탈을 무효로 간주하고 돌아오게 노력했다.
하지만 남부맹방은 이런 제안을 무시했었다. 오히려 남부맹방에 원래 주둔하던 미리견 군대의 철수를 더 운운하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미리견의 군대 아래에 있는 섬터 요새를 두고 결국은 문제가 일어났다.
섬터 요새에 대한 남부맹방이 무력을 통한 강제 퇴거를 시도했다. 이에 미리견 중앙 조정은 ‘남부맹방’을 칭하는 남부의 ‘반란 세력’에 대한 무력 진압을 결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미리견의 남북내전이 일어났다.
분리 독립과 오귀자 노비제 등을 놓고 일어난 이 사실은 미리견에 있는 많은 외국인들에게 주목을 샀다. 그 중에서는 당연하게도 조선인 미리견 유학생들도 있었다. 그들은 심정으로는 대부분 정당한 미리견의 조정을 지지하였다.
린건, 에이브라함 링컨이라는 미리견의 집정이 어떤 사람은지 잘 알기에 그의 인품에 반한 이들도 있어서 지지하는 경향도 보였다. 또 미리견에 유학 중인 조선군의 무관 중 대표 격인 남자, 한성근 정사는 조선의 주 미리견 임시 조선통관을 통해서 관전단을 신청하였다.
‘이들의 전쟁을 보고 아국의 필요한 문물과 기술, 또 미리견 군대를 견문해서 서역 유주 제국들의 군대와 어떤 차이가 있고 전훈 등도 알 수가 있겠지.’
이런 생각으로 나섰다. 물론 그와 일부 조선인들은 잘 몰랐다. 이 미리견의 남북 내전이 조선에 생각보다 큰 파급력 등을 줄 상황이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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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8월 22일, 경사라고도 부르는 청조의 도성인 북경 자금성에서 함풍제인 혁저가 쓰러졌다. 그의 나이 31세로 요절이었다.
그는 청나라의 황제에 올랐다. 부황인 도광제는 유능하고 황제로서 능력이 좋을 것이라고 말을 들었던 자신의 서자인 혁흔 대신에 적자인 혁저에게 옥좌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부황의 기대를 받아서 청조를 통치하고 시대에 적응하려고 했음에도 하늘이, 시대가 그 것을 허락하지 못했다. 아울러서 아버지 도광제와 비교하면 더욱 부족한 군주였던 그다.
인의가 있으나 결단이 부족하고 따르는 호걸이 적었다. 그는 유비가 아니었다. 그 유비도 상당한 효웅이었음을 감안하면야....
비슷한 시기의 군주이던 조선의 이영이 더욱 뛰어났고 혁저보다 운이 따랐다. 이영은 혹자는 계한 소열제의 화신, 후한 광무제의 재림이라고 까지 혁저가 다스리는 청조 아래의 한족 사이에서 이야기가 되어졌다.
“하늘도 무심하도다... 하늘은 나에게 부황의 마음을 바꿔서 옥좌를 허락해주었는데... 어째서 하늘은 이영이라는 자가 조선의 임금이 되게 하는가?
그 곁에 인재가 많은 것인가? 나에게는 더 많은 인재들이 곁에 있지 않았는가?
참으로 원통하다. 원통하고 참담한 심정이다..”
그에 반해 혁저는 토목의 변 이래로 몽골의 칸이자 만주의 대한이요, 중화왕조의 천자가 사로잡힌 일을 당했다. 그것도 번국이던 조선에게 사로잡힌 일이었고 무려 두 번이었다.
그렇게 잃었던 땅은 아버지 도광제보다 훨씬 더 많았다. 무엇보다 상실한 땅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대청 황조과 황조을 떠받드는 만주팔기, 만주인 세가들의 고향을 상실했다.
이로 인하여 멸청흥한을 운운하는 이들이 늘었고 이는 태평천국을 진압하는 와중으로도 한족 피지배층의 불신은 여전히 높았다. 그는 마음의 화와 그 드높은 자존심이 입은 상처를 이기지 못했다. 무력감에 섭정들에게 나라를 대신 다스리게 하고 마음을 추스르려고 했다.
하지만 어린 아들을 두고 더욱 분한 마음을 가지며 눈을 뜨고 죽었다. 그의 치세 11년은 짧았으나 청조의 가장 큰 오욕이라고 당대가 생각했다. 청조의 도성인 경사, 북경의 자금성에서 그의 붕어는 화려한 전각 속의 화려한 침대에서 화려했을 것이나 동시에 그의 마음속은 오욕과 분노로 얼룩져서 마지막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그의 붕어를 곁에서 지켜본 이들은 혁저의 황후와 부인, 혁저의 아들 외에도 대청 황조의 종실에 속한 이들도 있었다. 혁저의 죽음에 슬퍼하면서도 망자를 원망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공친왕 혁흔이 그런 사람의 대표로 이 자리에 있다.
‘형님, 편하게 쉬라고 말하고 싶지만 원망스럽소. 이런 엉망진창이 된 대청을 남기고 떠나니 말입니다!’
함풍제 혁저는 후계자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이복형제인 공친왕 혁흔을 지목하지 않았다. 제 어린 아들을 지목했다. 거기에 섭정친왕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서도 혁흔은 말석에 가까웠다.
아울러서 혁저의 생전에서도 청나라는 위태로웠다. 제대로 진압이 되지 않는 것 같은 강남의 장발적, 태평천국을 자칭하는 이들과 북쪽의 염군이라는 무리 등이 문제였다. 또 그들과 무관하게 수적이며 다른 도적들이 일어나서 미칠 판이었다.
‘아라사가 신장 일대에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지 도통 모르겠군. 회족과 이회족(異回族, 무슬림)들이 더 불순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들었다.’
원래 신장, 청나라가 과거 준가르를 멸망시키고 통치하는 땅인데 이 땅은 강남의 세수로 지원해서 통치의 원활함을 유지하던 곳이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점점 옛 말이었다.
장발적의 난, 다른 말로는 태평천국 운동으로 강남에서 거두어 들 일 수 있는 세수들은 마비가 된 상황이었다. 이 상태에서 청나라는 동북의 중요한 땅들을 상실하고 서역과 조선에게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중첩이 된 이런 상황에서 신장에게로 향하는 지원금이니 같은 돈은 사치라고 여겼다.
지원금이 줄어들자 현지의 팔기군 등은 이에 대해서 부족한 군비 등을 현지에서 쥐어 짜내는 수탈이 더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서 코칸드 칸국과 신장의 회족, 이회족 등이 손을 잡지 않게 하려던 것도 없는 상황에서 상황은 심각해졌다. 신장, 위구르의 회족과 비회족 무슬림들은 적대감과 증오 등이 서서히 불이 올라오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라사, 러시아와 영길리, 영국은 이 지역에 접근했다. 여기에 조금씩, 또 조금씩 술수를 부리기 시작했다. 물론 제일 적극인 것은 아라사였다.
만추리아라고도 부르는 동타타르(러시아의 만주를 부르던 명칭)와 몽골에 대한 접근 시도 중 전자는 사실상 뒤로 미루어졌다. 이 지역의 중요한 영토들을 조선이 의도하지 않게도 선점해서 그렇다. 그러면서도 조선 견제를 위해서 이주민 등을 이용하는 중에서 현재 아라사, 러시아의 동방 개척에 중요한 우선순위가 될 수 있는 곳은 몽골과 이 신장이라고도 부르는 동튀르크 혹은 위구르 일대이다.
‘반청 봉기를 더욱 그들이 유도할 것이 분명하다. 이거 어떻게 하면 좋은가?’
대청 황조를 다스리던 대한의 죽음 속에서도 슬프지만 미래를 도모하려는 공친왕 혁흔은 그렇게 냉혹하고 무자비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이 상황 속에서 대비할 것은 대비해야 한다고 여기기에 추론하고 고민하는 것이었다.
‘참 난국이다.’
이혁정친왕인 단화, 두완후아 역시도 섭정의친왕 혹은 섭정친왕으로서 대한으로 즉위할 어린 황자를 보좌할 보정대신도 겸해서 청나라를 대신해 통치해야 했다. 이혁군왕은 여전히 강남과 화북을 오가면서 대청에 반기를 든 역적들을 상대하고 진압하기 바빴다.
그래서 보정대신이라도 두완후아와 이힌, 다른 호칭으론 공친왕 혁흔이 경사에서 어린 대한의 대리로 섭정의 일 등을 봐야 했다. 물론 예법 등에 의거해서 두 태후가 있지만 명목의 수렴청정이었다. 실권은 보정대신 겸 섭정을 맡은 종실 인사들에게 기울었다.
물론 두 태후도 당장은 불만이 없었다. 수렴청정으로 자신들이 실권을 가져봤자 제대로 통치를 못할 수가 있기에 그들에게 맡기는 상황이었다. 청나라의 중흥 시도는 이 내부의 변란들을 정리한 다음에야 일어날 수가 있다.
그런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기에 섭정들은 당연하게도 시름에 잠기면서도 정무를 봤다. 현재를 포기한다면 다가올 미래는 더 끔찍할 수가 있기에 미래가 그나마 덜 끔찍하기를 바라면서 현재에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청나라 조정은 악몽 같은 다른 일이 마주할 것은 전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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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8월이 되기까지 조선의 서유시찰단은 다음과 같은 행적을 보였다. 우선 1861년 2월까지 아라사에서 살얼음 같던 체류지만 아라사의 고위층들하고도 우호를 다졌다.
특히 키슬료프 백작의 추천서 등은 그런 교류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밀류틴 삼형제가 그들의 친구가 되었고 주아라사 보로선 공사인 비스마르크와도 인연을 쌓았다.
상피득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세에는 일정 부분 감탄도 하던 조선인들이었다. 서역 유주도 조선 등 동방의 나라들처럼 군주의 법궁과 이궁이 나뉘어 있음이 같음은 신기하게 여긴다. 다만 아라사는 군주가 기거하는 궁궐을 청나라처럼 계절에 따라서 바꾸는 것은 특이하다고 여긴다.
영길리, 법국, 보로선 등은 왕의 기분 등에 따라서 궐을 옮겨 다니지만 굳이 계절에 따라서 이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부분은 청나라와 아라사가 비슷했다. 물론 달자, 몽골이 세웠던 나라도 이런 계절에 따른 수도 혹은 궁궐 변화를 준 것을 고려하면 그 영향이 있지 않은가 조심히 추측하는 조선인 서유시찰단 일동도 있다.
“달자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요?”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요. 그래도 일리는 주장이오.”
아무튼 이런 대화를 논했다. 그러면서도 아라사의 지식을 늘려갔었다.
그리고 조선인들은 서봉, 스웨덴을 거쳐서 다시 함부르구에서 덕의지란토 북부를 거쳐서 그 내륙을 체류하고 시찰할 예정이었다. 다만 그들이 다시 돌아다닐 덕의지란토 권역은 여전히 시끌시끌하고 심창치가 않아서 조선인들과 일부 고문들로 동행해서 조선인 중심의 서유시찰단은 덕의지란토 북부로 가는 선단에서 이를 화제로 대화 중이다.
“그나저나 덕의지란토 권역이 심상치가 않소.”
“고인이 된 소반하우어(쇼펜하우어)도 그리 말했다오. 우연히 그런 대단한 석학의 마지막 친우가 된 행운을 얻은 나에게도 이 근방, 정세가 심상치가 않다고 했었소.”
함부루구, 함부르크에서 늙어서 죽은 그의 장례식에도 참가한 노사 기정진도 고인이 된 쇼펜하우어와 대화를 반추하면서 오지리 등에서 느끼는 정국을 말하고 있었다. 이전에 조선인들은 작년에 이미 오지리가 덕의지란토 권역의 영방제국들을 이끄는 덕의지란토 연방에서 대덕의지란토 선언을 했음을 알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덕의지란토 선언을 서역 유주 현지의 언론을 통해서 알았다. 이른바 오지리를 중심으로 덕의지란토 연방과 오지리 아래의 번국 및 동군연합인 나라들을 통합해서 하나의 통합된 연방제국을 수립한다인데 내부 반대가 심했다.
“보로선은 단마구와 술래수비히(슐레스비히)란 지방을 놓고 갈등하고 있지요. 그 외에도 저 덕의지연방 내에서는 보로선과 오지리가 갈등합니다.”
“덕의지란토 권역은 춘추전국시대의 옛 중원 같은 느낌이지요. 합종연횡과 나라와 나라 사이 단위의 권모술수가 판치고 있다고 봅니다.”
“보로선과 일부 나라들은 덕의지란토의 개루만(게르만)이란 족속을 조상으로 둔 이들에 의거한 내서날(內庶捺, 내셔널의 음차로 민족주의, 국민주의인 내셔널리즘을 가리킨다.)국, 같은 족속끼리 안에서 뭉치고 도장을 찍어서 결집하는 것을 원하고 있어서 비개루만 후손들이 오지리 황국의 영토에 많다고 반대한답니다.”
물론 이거야 보로선 등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 보로선도 포란국, 망국 폴란드의 유민 후손들이 꽤 살고 있는 나라로 그들이 주창하는 이상과 조금 거리가 있었다. 내서날국, 이른바 국민국가와도 거리가 있었다.
도이칠란트권이라고도 부르는 이른바 독일 연방권역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 또 게르만만의 국민국가 혹은 민족국가로서의 도이칠란트를 수립할 것인가, 아닌가로 시끌시끌했다. 지난 1848년, 그 이전부터 있던 도이칠란트권의 게르만 내서날국에 대한 염원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이에 대해서 어디가 옳은가에 대한 왈가왈부는 함부로 하지 않았다. 둘 다 일리는 있지만 작금의 조선도 둘 사이에 걸쳐 있기는 했다. 중화의 문물을 중시해서 중화의 문물을 수용하면 다 이에서 화가 되는 것에 근거해서 조선중화를 주창하는 이들이 주류기도 했었다.
다만 이 외에도 조선인 본위를 주창하면서 그들은 여전히 이로서 조선인들이 이들 위에 군림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소수도 있기는 했었다. 사실 둘은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큰 차이가 있었다.
조선중화로의 흡수를 주창하는 이들은 일종의 보편주의를 추구하면서 새로운 이들, 화에 접해서 화로 가는 종족들이나 이미 화를 결합해서 새로운 화로 나아가자는 양상이다. 반대로 조선인들 본위로 화이던 이에서 화가 되던 조선인들이 이른바 1등 족속으로 있어야 한다는 서역의 내서날 영향이 짙어보였다.
“아무튼 우리는 덕의지란토권역의 남부에 오지리의 일부인 훈가리(헝가리) 등을 방문하는데 그들의 문제에 필요 이상 말을 꺼내지 맙시다. 지난 서유시찰단에서도 보로선의 그걸로 남부 분견대가 고생했다고 아오.”
“우리는 덕의지란토 권역과 상황이 다릅니다. 여러 가지를 보고 판단해서 아국의 본디 국인들과 새로이 아국의 통치 아래에 들어온 족속, 한인과 만주인, 달자 등을 최대한 포용 가능한 이들은 들여야지요. 우리가 없는 사이의 아국 조정도 그렇게 가고 있기는 했습니다.”
“서역의 이 아국의 외국과 교섭에 지장을 줄 화제는 언급을 최대한 피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오지리 측도 우리의 입을 빌려서 뭔가 이득을 취하려고 하겠지요.”
“철저하게 단속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조선의 서유시찰단 고위층은 이런 결론을 내리면서 오지리 등으로 향하였다. 덕의지란토 권역의 남부의 왕과 공작 등 군주들이 있는 나라들도 짧게 거칠 예정이었다. 그들은 친오지리 성향이기에 언행을 역시나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덕의지란토의 남부 나라들은 꽤 흥미로운 것이 있었다. 더 농업과 목가의 모습이 그들에게서 나타났다. 바이애론, 바이에른 왕국 일대에서 꽤 융숭한 대접을 받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발언을 하는 듯하면서도 하지 않았다.
오지리에 도착할 때에 한산공 이성 부부는 이전에 기쁘지만 힘들 수 있는 일이 생겼었다. 바로, 아이가 생겨서 이 유주에서 조선의 왕족이 태어날 수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 이전에도 아이가 생길 수가 있었지만 다행(?)일 수도 있게도 들어서지는 않았다.
그런데 보로선을 떠나고 아라사로 향하던 중에 서봉에서 류희지의 구역질 등으로 진단을 받으니까 한상공의 부인 류희지의 태중에 아이가 들어선 상황이었다. 아직 남은 일정과 유람에 귀국 등으로 반년, 길면 1년은 더 걸릴 것이었다. 서유시찰단이 출발할 때에 갓난아이였던 왕손도 만으로 3~4살 내외였다.
즉 귀국한다면 조선 왕조는 조선 밖인 외방에서 태어난 왕족을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그것도 서역 유주에서 처음 태어난 아기가 되는 셈이었다. 물론 이도 무사히 먼 땅을 거쳐서 조선으로 돌아와야만 가능한 일이다.
“왕손이 생겼다는 사실에 유주 제국에서는 축하하면서도 걱정으로 자국에 오래 머물러도 된다고 했지요.”
“사실 우리도 그러고 싶었지요. 다만 삼한국대부인께서 사양하시니까요.”
“공비께 더 무리하지 않게 신경을 더 써야 합니다. 한산공 대감.”
“여부가 있겠습니까?”
지금 류희지의 태중에서 조선 왕실의 핏줄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중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조선의 왕족이 유주, 유럽에서 태어날 수가 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흥미를 가진다. 이 유명해진 젊은 조선 왕족 부부와 가족들을 유주 각국이 더 주시하고 있다.
오지리의 도성인 비안나, 빈에서는 조선의 서유시찰단을 매우 환대하였다. 특히나 임부인 한산공비 혹은 삼한국대부인 류씨의 편의를 최대한 봐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보수성이 짙은 오지리의 합수부루구 황조도 아이의 중요함을 알기에 그렇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의 서유시찰단이 감사함을 표하게 되었다. 빈에서의 공무와 시찰은 매우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이야 이 오지리, 오스트리아 제국을 처음 방문한 것이었다. 빈은 매우 독특한 도성이라고도 그들은 여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데 여기도 도성의 변화를 준다고 바쁜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특히나 빈을 감싸던 성벽 등의 일부 철거하는 모습은 일부에게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우리도 철도 등을 연결한다면 아국의 도성 성벽을 허물어야 하지요.”
“보로선의 배루을린(베를린)도 성벽을 허물고 철도를 연결했다고 하며 일부가 그렇다고 압니다.”
“한성도 이래저래 바뀌는 일을 한다면 정신이 없을 것입니다. 누가 이를 총대를 쥐고 할지가 궁금하구려.”
서역의 도성, 성읍들의 성벽 허물기와 철도 개설에서 나온 일은 잘 참조하면 역시 조선에게도 득이 될 부분이 있었다. 오지리는 영길리, 법국, 미리견과 달리 조선에 대한 투자는 없었지만 우호를 다졌다. 그들도 조선에 관심을 보이면서 교류하기를 원했다.
빈의 국제성과 그 예인들이 많고 후원함은 법국의 도성인 파리 그 이상 성세였다. 화려한 궁은 오지리 황실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이 화려함 속의 어두움이 있을까도 몰래 확인하기도 했다. 있기는 했다고 여긴다.
그럼에도 이를 함부로 말하지는 않았고 그들의 장계와 일기 등에 기입이 될 것이다. 사실 조선도 화려한 궁 등을 지을 때에 이런 이면이 없을 리가 없다. 또 한성을 이른바 다른 영조하고 길을 더 내는 일에서 많은 문제가 일어날 수가 있다.
‘이를 감수하고 총대를 멜 사람이 당연하게도 필요할 일이지.’
귤산 이유원이 특히 이를 각오할 생각도 잘 드러났다. 그를 도울 종친이던 비종친의 명망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이런 생각 중에서도 조선의 서유시찰단을 위해서 빈의 오지리 합수부루그 황조 아래의 악단과 예인들이 나서서 음악을 연주한다.
정확히는 그들에게 빈과 오지리의 우월성 등을 잘 표현하고 싶어서 안달인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이런 것은 조선도 짐작하지만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의 연주 등을 잘 감상한다. 한산공비 류희지는 빈의 악단들이 공연하는 음악들을 잘 즐긴다.
‘우리 아가, 잘 태어나주렴.’
그 옆에서 한산공 이성은 아들을 품에 안고 서역 음악들을 감상한다. 그러면서도 아들을 품에 낀 그가 머나먼 고국, 조선에 있을 부왕을 생각한다. 이런 것을 배우거나 초빙해서 부왕도 조선에서 이를 더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귀국해서 한 일로 혼난 뒤에야 이런 저런 건의 등을 할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해도 부왕과 모후가 문득 그리워지는 한상공 이성도 누군가의 자식이었다. 향수병이 나지만 만날 수가 있다고 여기면서 그 음악들로 달랜다.
이와 별개로 한산공 이성 부부는 헤르베크라는 음악가 말고도 브람스와도 교우했다. 브람스의 자장가는 특히 한산공의 부인, 류희지가 정말 좋아한다. 그래서 해당 곡의 친필 사본을 브람스에게 선물 받을 정도였다.
그렇게 며칠을 더 체류하고는 1861년 5월 즈음에 조선의 서유시찰단은 빈 생활도 청산하고 법국으로 향했다. 법국에서 좀 더 체류하고 조선의 서유시찰단은 유학생 등을 제외하고 귀국할 이들은 귀국할 예정이었다.
빈을 떠날 때에 많은 이들, 친교를 나누었던 이들에게 전송 등을 받고 기차와 마차 등으로 법국 파리로 향했다. 그리고 파리에서 한산공비 류희지는 아이를 낳았다. 아주 오랜만의 왕족 여성 아기씨였고 태왕 부부의 첫 손녀이자 태자 이환 부부의 첫 질녀가 그렇게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