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다시 위대하게!-219화 (219/221)

〈 219화 〉 (100) 새로운 흐름, 한계에도 흐르려고 하노라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

“오랜만의 조슈로군요.”

“지난 전화의 상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군...”

“아무래도요.”

“변을 피했고 대신에 옛 학우들하고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각오한 일이지... 우리 신국에서 우리가 도움이 되려면 존왕을 하더라도 양이는 아니지...”

“네, 나으리...”

이토 슌스케, 가츠라 코고로가 새로이 지어준 이름으로는 이토 히로부미가 된 청년이 된 소년과 이런 이토를 종자로 부리는 가츠라 코고로가 수년간의 조선 동래부 왜관 등에서 반강제에 가까운 유학 끝에 조슈로 돌아왔다. 역시나 조슈는 한창 재건 중이었다.

물론 저기 사쓰마에 비하면 조슈가 입은 피해는 생각보다 덜했다. 끝까지 항전한 사쓰마에 비하면 조슈는 영주와 보수파의 내부 숙청으로 영지의 중심지에서 일하는 존왕양이파가 실각한 판이었다.

귀국하는 가츠라 코고로, 더 정확히는 가츠라 다카요시는 제 종자로 들인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조슈에 자신들이 어떻게 영향을 더 줄 수가 있을지 여러모로 고심할 필요가 있었다. 둘 다 스승의 정한론은 허황된 주장이라고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조선과 연대해서 내부 경장을 해야 한다가 낫다고 봤다.

“양이는 지난 조선의 침공으로 제발 때려 치워야 한다고 깨달았기를 바라야지...”

“제발 그래야 합니다.”

다만 그들의 신국, 일본도 팽창해야 될 땅이 필요했다. 그래서 북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가츠라 코코로, 가츠라 다카요시였다. 이토는 그 말에 놀라서 제 상전에게 다시 물어볼 정도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표정은 매우 놀라서 눈이 아주 동그랗게 떠진 모습이 맞았다. 가츠라 다카요시는 왜 자신이 그런 말을 하는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북쪽의 땅이면 저기 에조치(에조의 땅)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래. 어차피 유구와 그 너머의 대만을 노리는 것은 어불성설이 되었다. 그럼 무주지에 가까운 땅을 노려야지. 마쓰마에가 그들의 남쪽에 영유하니 남은 에조치를 우리가 먹어치워야 함이 옳다. 히로부미...”

“그러면 아라사와도 충돌해야 합니다.”

“어차피 아라사는 내려오려고 기를 쓸 자들이다.”

가츠라 다카요시는 담담하게 말한다. 사실 가츠라 다카요시가 조선의 동래부 부산포와 왜관 등에서 정보를 얻은 것을 본다면 아라사는 어떤 방면이던지 남하하려고 노력한다고 짐작한다. 대마도, 쓰시마에서의 그 행위도 아라사의 남하를 위해서 일어난 행동이었다.

“조선도 이기리스도 모두 아라사의 남하는 매우 싫어한다고 알 수가 있다. 즉 이를 잘 어필하면서 움직이면 이른바 ‘투자’를 받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기리스가 아라사를 견제하는데 우리가 더 득이 되어준다고 입증을 하면... 그리고 조선에게도 환심을 더 사면서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네.”

“그렇습니까?”

물론 이토 히로부미는 이 일이 과연 잘 될까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이 그들, 자신들을 신국이라고 부르는 나라인 일본에 대한 신뢰를 별로 하지 않는다고 잘 알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어떻게 신뢰를 얻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뇌가 필요했다.

가츠라 다카요시의 경우는 이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이토에게는 보였다. 다만 그런 이토의 우려와 달리 가츠라 다카요시도 매우 고뇌를 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아직 젊은 이토를 안정시키려고 하는 일종의 하얀 거짓말이다.

‘조선에게 어떻게 환심을 더 살 수가 있을까? 막부를 내세우기에는 막부는 무력하다. 그래도 이 신국에서 조정을 제외하고 전 신국의 66주를 제대로 통치한 세력이다.

공무합체가 더 대안이라고 여기는 편이 나을 수가 있다. 단, 이 것도 존왕양이 파벌도 모두 납득을 할 만 한 자가 쇼군의 자리에 올라야 한다. 그에 일치하는 조건은...

히토츠바시의 요시노부님 정도이지...’

사실 이런 가츠라 다카요시의 결정도 중앙의 막부 내 반 미토파벌 등이 존속하는 상황에서 매우 힘들 것으로 봐야 한다. 특히 막부를 조선과 이기리스, 영길리에 법국이 우선 밀어주는 일은 다른 상황이었다.

영길리의 일부 무기상인이 조슈나 이런 일부 영지의 편을 들어도 아예 조정, 정부가 막부의 편을 드는 상황이라면 중과부적이 맞았다. 가츠라 다카요시와 이토 히로부미는 아직 자신들의 배움이 부족하다고는 여긴다. 아마 조슈가 없는 살림에서도 서역 중 요로빠라고도 부르는 유주로 간다면 더 승산이 생길 것 같았다.

다만 이것도 그들이 조슈의 모리 가문에게 신임을 얻어서 유학을 보내는 인원에 선발이 되어야 가능할 일이다. 고향인 영지로 귀국해서 능력 등을 인정 받아야했다. 두 사람에게는 아주 다행이게도 조슈는 지금 보수파와 영주 가문인 모리 가문에서 조선을 꽤 아는 이들을 중용할 생각이 있었다.

그 것도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인데 가츠라 다카요시는 모리 가문의 직신이었기에 이런 승진에서는 꽤나 유리한 위치를 접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가츠라 다카요시의 종자격인 이토 히로부미에게도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조선에게 환심을 사려면 무엇이 좋겠는가?”

“조선에게 모든 이익을 가져다 바치는 행위는 당연하게도 하책입니다.”

“그렇지. 그럼 뭐가 좋은가?”

모리 가문의 직신이라는 위치를 통해서 모리 가문의 가주는 가츠라 디카요시의 고견을 들어보고 있었다. 가츠라 다카요시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조슈가 할 최선의 방책은....”

***

그리고 조선의 어디인가에서는 한 사내가 있다. 사내의 이름은 최제선이다.

지난 수년 전의 일을 떠올리면서 최제선은 천하가 달라지고 있음을 더욱 알게 되었다. 그는 더욱 이 조선의 본토 곳곳을 돌아다녔었다. 이후에 조선이 새 영토인 요동을 얻자 북방에 가족과 이주하여서 그 곳에서 서리 등으로 일하고 있었다.

군수 감무 서리로 뽑혔다가 다시 이방, 이후에 정식의 과거를 대체하는 문관거시에 합격해서 관료로 임용되어 자신이 군수 감무을 대리하던 곳 이웃 군의 군수 감무로 부임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기를 수년이다가 한 번은 골똘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북방은 언제 안정을 찾는가?”

최제선은 이런 혼잣말을 하면서 생각했다. 이 북방에서 관리로 일을 하면서 받았던 그 계시는 무엇일까? 동도를 세우고 그 균형을 유지하라는 것일까? 등의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매우 고뇌했다.

문관거시, 신과거라도 부르는 새로운 관리 채용 시험에서 만났던, 조선의 태왕이 된 ‘나라님’은 믿어볼 수 있을까? 알 수가 없다. 다시 귀를 닫고 수행하면서도 정무를 꽤하다가 그 가르침의 중요한 점들을 정리하는데 성공했다.

‘이 개벽하는 세상에서 동쪽의 도를 바탕으로 나아가야 한다. 공맹의 도가 더 보강이 필요하였고 서학도 완전하지 않기에 이 둘의 중간일 가르침으로 이를 극복하리라.... 이 북방에서 조선인이던 아니던 같은 사람으로 평등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최제선은 정학과 서역의 정학 일부를 섞어서 정학의 일종인 동학을 창시하였다. 그런 동학의 제일 중요한 가르침으로 시천주 인내천을 이야기했다. 꽤나 호응을 얻었다.

“사람이 곧 하늘일세. 민심이 곧 천심이라고 함은 무슨 뜻인가? 이는 민이 곧 천이라네.

그만큼 소중하다오. 또 민은 곧 사람이지. 모든 사람은 하늘과도 같기에 소중하네.

상제라고도 할 수가 있는 하늘의 님을 모시는 것은 중요하네. 근데 아까도 말했다시피 사람은 하늘이네, 하늘의 님을 모시는 것과 같이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시게.

조선인이던 아니던 사람은 소중한 법이라고 보오. 내가 있는 이 군에서는 그런 생각에 동의하면 꼭 그래주시게나!”

개척과 마적, 아라사 마병들로 낙이 있지만 심신은 힘들어지는 중이어서 그 북방에서 꽤나 동조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 상황을 지켜본 최제선이 일하는 발해주, 속군인 그 군의 상급자 격인 주군 군수와 더 상급자인 발해주의 주감영 관헌들은 이를 중앙에 보고한다.

최제선에 대한 장계를 태왕 이영은 이를 꽤 유심히 읽어봤다. 정학에 기틀하고 서역의 신교와 서역의 석학을 섞었는데 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본 것 같은 이라고 여기었다.

그리고 최제선을 왕명으로 한성으로 데려왔다. 그렇게 궁궐인 창덕궁에서 최제선은 주상인 태왕 이영과 만났다.

“그대가 동학의 창시자인가?”

최제선은 자신의 앞에서 용이 새겨진 융복을 입은 자를 보고 직감한다. 또 낯이 익은 얼굴이이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몇 년 전의 문과와 병행을 끝내고 온전히 처음 시도하는 문관고거에서 그 최종시험인 ‘전시’에서 태왕 이영이 낸 시제를 그 자리에서 소과 출신이던 최제선도 들었다. 그 용안을 잊었을 리가 없다.

그렇기에 안다. 저 분이 이 나라, 대조선국의 태왕이라고.... 따라서 더욱 고개를 숙인다. 그 자신도 어릴 적은 정학을 배웠던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전, 아니 폐하....”

예법이 바뀌었기에 이제 이 나라의 주상을 폐하라고 불러야 한다. 태왕 이영은 겸손한 신 관리로서 그에게 흥미를 가지게 만든 최제선를 내려다보면서 말한다.

옥좌에 앉은 태왕의 그 눈동자에는 불쾌함보다는 호기심이 더 강하다. 이 나라의 임금인 이영은 최제선을 일개 사교 무리의 우두머리로 봤다면 그런 시선을 보일 리가 없다.

오히려 새로운 학문의 창시자로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따라서 그런 임금, 이영의 목소리는 흥미에 궁금함, 호기심을 담았으나 위엄을 가지고 묻고 있었다.

“그대는 서학, 천주신교에 대항하고 정학을 보좌하며 그 한계를 뛰어 넘어 보기 위해서 동학을 지었다고 했는가? 또 조선의 변화를 위해서 그랬다고 한다. 사실인가?”

태왕 이영은 그, 최제선이 왜 동학을 지었는가를 남이 말한 것을 듣고 묻는다. 하지만 이는 형식으로 하는 말이었다. 기실은 태왕인 그는 이미 정보를 듣고 정리해서 물어보는, 최제선에게 직접 그 저의와 동학의 본질을 질문한 셈이었다.

그 의도에 최제선은 태왕의 모습에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 강해진다. 당연히 거짓을 논할 수 없고 설령 거짓을 고하면 그는 더욱 사지로 몰수가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근데 부여주의 인사들은 그를 혹세무민을 일으키는 사교가 아니라 정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가 있는 새로운 학문을 열었다고 조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태왕 이영도 평가가 비슷했다.

아울러서 조정의 많은 신료들도 동학을 운운한 최제선을 생각보다 딱히 적대감이 어리게 바라보는 편은 아니었다. 태왕 이영이 공개한 장계 등을 본다면 최제선은 정학의 연장선상으로 한 지파로서 동학을 주창했다고 볼 수가 있다.

‘동학이 우리가 생각하는 정학의 한계 등을 보완할 수가 있지. 저 굴리 문제 등에 의거해서도 도움이며 해답을 줄 수가 있을 것이다.’

최제선은 자신이 생각보다 높이 평가되는 것을 모르고 우물쭈물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려고 한다. 궁궐이 아직 낯서니까 그럴 수가 있다고는 신료들이며 태왕 이영 등은 여긴다.

그래도 최제선의 저의 등을 듣고 다른 대화도 들으면서 그에 대한 평가에 중히 쓸지에 대해서 더 결정할 여지가 높았다. 최제선은 결심을 하듯이 입을 열었다.

“정학만으로는 천하를 논하기 힘들다고 여기어서 감히 했습니다. 허나 제가 주자며 이부자, 송자와 같지 않기에 창학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정학을 돕고 서역 신교들과 서역 정학을 대응하려면 필요하다고 생각을 정리했을 따람입니다.”

“그렇다면 굴리와 천민 등을 시천주 인내천에 따라서 동등하게 대우함이 옳다고 보느냐?”

최제선은 태왕 이영의 물음에 이게 함정인가? 아니면 순수한 물음인가? 고심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최대한 솔직하게, 그러면서도 격식을 갖추어서 입을 열기로 생각한다.

“저는....”

***

1862년 까지 조선에서는 큰 변화 중의 하나로는 대표로는 당연하게도 교통 분야에서 마차가 보다 더 쓰이게 되었다. 물론 이미 수레는 조선에서도 북부 지방이나 일부 지역에서는 꽤 활발하게 쓰였다. 단지, 소달구지들 위주로 굴렸다.

그래도 작금 조선에서는 소달구지 말고도 마차의 수요 등은 당연하게도 늘어난 상황이었다. 마차에 대한 부분으로 일마 외에도 전마 등의 수요가 높았다. 이는 다른 일을 낳았다.

“마차라.”

“근래에 말의 수가 늘기도 해서 마차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몽골과의 차마시로 말입니다. 서양의 전마도 수입하고 길러서 잘 키우고 있습니다.”

“소달구지보다 점점 많아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네.”

“우리가 서역 제국에게서 무기 등을 사올 때에 들여온 마차와 일부 말들로 그리고 서역 제국의 외교관이며 상인들이 마차를 선호해서 민가에서도 마차의 유행이 생기었다고 합니다.”

마차의 유행이 생기고 길의 정비로 마차에 대한 수요는 많이 늘고 있다. 기선 외의 육상에선 철도를 빼고 마차랑 우차는 많이 쓰이고 있었다.

수레의 사용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개항 이후론 더 커진 셈이다. 하지만 아직 이 시기에 많은 것은 조선의 토종마와 몽고마가 주력이다.

물론 순종 서양 전마와 청나라에서 들여온 호마 및 중마 등이며 그 혼혈로 키가 큰 잡종마들을 잘 관리해서 수를 늘리려고 한다. 문제는 가축의 수량이 늘어서 가축에게 먹일 소금을 구한다고 소금 수요가 올라가 소금의 가격이 올라갈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쉬이 소금을 구할 방법이 없겠는가?”

“찾고 있사오나 시일이 걸리옵니다.”

조선의 소금은 주로 자염이고 그 자염은 만드는데 품이 매우 드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안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것은 나중에 해결이 되었다.

다만 당장은 해결하기가 꽤 무리인 것들이 많았다. 소금을 어떻게 더 충당해야 하는가는 골머리를 썩어야 함은 어쩔 수가 없는 셈이었다.

차마시에서는 청나라 북부의 달자, 몽골족들은 찻잎 외에도 소금에 대한 수요가 상당히 높았다. 그래서 조선 보고 청나라에서 들여오는 물자 외에도 소금을 팔라고 했다. 다만 조선에서도 소금 등이 부족한 상황이라서 쉽지가 않다.

서역의 전마는 어렵게 배에 태워서 데려온 말들도 있지만 아닌 경우도 있다. 의외의 경우지만 바로 아라사 방면의 가살극, 카자크들에게서 말을 사들이는 일이었다. 그들은 조선의 변경을 침투해서 정찰하고 약탈하는 아라사 마적이란 멸칭으로 불리지만 조선의 북방에서는 차마시와 더불어서 중요한 말 수급원이었다.

또 말에게 먹이는 잡곡 등의 가격이 오르는데 이를 양감자 등으로도 대체한다가 사실 쉬운 일도 아니었다. 그나마 조선의 북부가 된 신지 요동에서 말을 키우고 잡곡은 얼보리 등이며 밀을 기르는 것이 점점 성공하자 쌀 외의 잡곡 수급은 소금 수급보다야 부담은 덜했다.

“바닷물을 채취하고 이를 소금을 끓여서 만드는 것이 나을 수가 있지요. 자염을 만들기 어려운 곳들에서는 이런다고 합니다. 미리견도 바닷물을 끓여서 이리 소금을 얻는다고 하지요.”

“흠 청나라 강남에서 소금을 얻는 방식도 있습니다만 이에 대한 제법을 더 연구해서 아국에서 써먹을 수가 있음은?”

역시 소금을 얻기 위한 대안을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낸다고 열심이었다. 다만 다양한 방법을 써보고 제일 적합한 것을 취하는 방향이 나올 필요가 있었다.

한편, 전면 개항 이후로 은을 비축하는 것을 선호하는 조선 조정이었다. 그렇지만 단기간에 화폐로 모든 세수를 납부받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기존 납부 방식과 전납을 병행하였다. 바로 쌀, 포목과 엽전에 은을 더하는 방식이었다. 전자 기존의 납부하던 세금을 더욱 효율적으로 굴리게 일종의 서방에서도 쓰이던 태환을 빌려 왔다.

그렇지만 당시 조정에선 이게 통할까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서역에서도 금은 태환을 쓰는데 문제는 조정은 쌀과 포목에도 이런 태환을 적용하는 방식이었다. 조선은 금과 은이 태환이 되기에는 적기에 다른 품목들도 추가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교초와도 같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매개하는 물건, 즉 태환을 넣었고 그 액수를 서방에선 정한 것과 같이 하소서.”

교초, 원말명초의 동양에서 쓰던 지폐였다. 사실 이것도 은태환이 기초였지만 은태환을 무시한 남발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렇기에 그와 동 시기였던 여말선초에서 교초와 같은 일로 인한 재앙이 또 나올 것을 방지하려고 다양한 보강책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신료들과 조선 조정이었다.

그러나 강제하지 않고 당장은 시범사용을 시켜보는 식으로 갔다. 점점 느리겠지만 이미 무거운 쌀과 포목에 엽전을 대신해서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런 부분으로도 의외로 성과는 있었다.

사실 이미 민간에선 어음이 쓰였음을 고려하면 민간에선 상인들은 저 태환권은 일종의 조정이 보증하는 어음이었다. 이를 상인들이 쓰게 되자 일부 서민들도 쓰게 되었다.

하지만 마냥 긍정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 이용한 사기와 위조 문제가 엽전 마냥 항상 발생하려고 했다. 이에 조선 조정은 발 빠르게 대항했다.

“모든 태환권은 오직 조정과 호부가 지정한 조선 은항에서만 발행할 것이다. 이를 더 확고하게 한다. 이전의 엽전과 달리 말이다.

작금의 엽전도 호부에서 조폐를 맡을 것이다.”

이를 어명으로 알리고 언론에도 선포하였다. 이런 반응에 많은 민초들은 반신반의했고 엽전을 고집했다. 어쩔 수 없는 세태기는 하였다.

민초들과 상반되게도 상인들은 이런 세태에 더욱 적응했고 태환권을 애용할 생각이었다. 특히 상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고액이기도 하며 가장 가치가 안정한 은태환권이다.

그리고 조선의 서유시찰단이 오지리, 오스트리아 제국의 인사들이 했던 제안 등을 통해서 대조선국의 신규한 조폐국을 세우고 이 품질 등이며 비법을 전수하려고 꽤 도움을 주었다. 지금 그들이 대조선국 호부의 조폐국 고문 등으로 일하게 되었다.

또 서역의 많은, 재리와 재정 및 은항에 조예가 깊은 이들이 말했던 제안을 조선 조정도 받아들이는 부분이었다. 조선의 조정에서 운영하지는 않을지언정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조선 은항에 발행권을 주고 호부의 관리감독을 되도록 최소로 움직여야 한다는 제안을 실행 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었다.

“매사가 다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래도 해봐야 합니다.”

그래도 위의 말을 한 호부상서, 이경재가 말 한대로 이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원래 조선의 중앙에서는 상당한 중앙 통제력을 기틀로 물가 등이며 상인들을 통제하던 양상이었다. 그렇기에 간섭 최소에 재량권 부여는 꽤 어려울 수가 있다.

비록 조선 은항이 국립은항으로 관아에 가까워도 관아라고 하기 애매한 상태에서 그럴 수가 있다. 또 이외에도 조선 은항이 다른 조선의 민간 은항들과 관계 설정도 더 필요했다. 조선은 아직 갈 길이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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