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바르카
#1
츠르르륵...
마치 바람이 풀잎 위를 스치는 듯한 가벼운 소음.
내 시선이 닿자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정체불명의 존재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건 뭐야? 표범? 치타?
“그렇다기엔 지나치게 큰데?”
숲의 어둠에 완벽하게 동화된 칠흑 같은 피부.
얼핏 보기엔 표범이나 치타 같은 고양잇과 동물을 닮았지만 두 귀가 30cm 정도 위로 비죽이 솟아있는 특이한 생김새였고.
결정적으로 몸길이가 150~180cm 정도인 표범이나 치타에 비해 덩치가 최소 두배는 큰 것 같았다.
그런 녀석들이 스무 마리에 가까웠고, 이쪽을 향해 명백하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
녀석들은 이쪽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천천히 나와 반파된 제우스의 잔해를 포위하듯 반원을 그리며 둘러쌌다. 여전히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나 혼자만 있었더라면 좀 더 공격적으로 접근해 왔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거대한 제우스의 동체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제우스가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녀석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만만해 보이는 놈들은 아닌데...”
나는 슬금슬금 거리를 좁히려는 녀석들을 노려보며 왼쪽 시야 한편을 응시했다.
[공용스킬(172) 상세▶]
그리고 이윽고 나타난 172개의 스킬 목록 중 하나에 마력을 부여해 활성화시켰다.
[관찰(C) : 상대방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단, 스킬 레벨을 상회하는 객체의 정보는 확인 불가.]
공용스킬이라 효과는 한정적, 하지만 스킬이 적용되기만 한다면 사용하지 않는 것보다는 여러모로 좋다.
만약 스킬 레벨이 낮아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메시지가 뜬다 하더라도, 최소한 저 녀석들이 B등급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지 않겠나.
뭐, 그렇게 되면 조금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운이 좋았는지 곧바로 녀석들의 정보가 떠올랐다.
[바르카(C) : 베헤르디아 대수림과 아르칸 산맥에 주로 서식하는 사족보행 몬스터. 20~40마리 정도가 무리를 이루며, 수컷과 암컷의 생김새에 거의 차이가 없고 새끼들을 무리가 공동으로 양육한다. 고대 엘븐하임에서 떨어져 나와 베헤르디아 대수림에 정착했던 다크엘프 전사들이 이들을 길들여 이동 수단으로 삼았었다.]
“베헤르디아? 아르칸? 게다가 뭐? 다크... 엘프? 하, 아예 지구가 아니라고 도장을 찍어버리는군.”
게다가 저거... 뭔가 묘하게 상세하다.
지구에선 몬스터의 양육행태나 과거의 스토리 같은 게 나온 적은 없었는데.
어쨌든, 지구가 던전 시대에 접어든 지 벌써 40여 년이 흘렀지만, 여태 다크엘프 같은 걸 봤다는 소리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게다가 그 어떤 헌터보다 A급 이하의 몬스터들을 많이 상대해본 나로서도 눈앞에 있는 이 녀석들은 처음 본다.
“뭐, 아직 좀 얼떨떨하긴 하지만. 그렇게 나쁜 상황은 아니야.”
이곳에 온 이후 처음 만나는 몬스터가 감당 못 할 괴물이 아닌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C등급에 저 정도 숫자라면...”
나는 슬슬 거리를 좁혀오는 녀석들을 한 차례 둘러본 후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다른 차원? 이세계? 아무튼 이곳에서의 데뷔전으론 나쁘지 않군.”
#2
나는 전 세계에 고작 184명 밖에 없는 S급 헌터였다.
국제협약상 S급 헌터는 1년 중 한 달은 비상 상황(인비저블 던전 브레이크 같은)을 대비해 던전 외부에서 대기해야 한다.
자신의 차례가 아닌 S급 헌터는 대개 S급 던전 공략에 거의 모든 시간을 투자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헌터의 능력은 던전 내부에서만 ‘성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튀어나온 몬스터를 아무리 때려잡아 봐야 헌터의 능력 치는 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경우는 좀 달랐는데.
나는 헌터로 각성한 이후 처음 2년을 제외하고는, 던전에 들어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헌터 업계에서 쓰레기 취급을 받는 ‘파일럿’ 특성이었지만 어쨌든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등장한 S급이었던데다.
A급 이하의 파일럿 특성 헌터들과는 다르게 탑승물과 무기에 마력을 부여해 몬스터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이 가능했기에, 나는 대한민국 정부와 헌터협회로부터 엄청난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2년간 던전에서 살다시피하며 능력치를 상승시켰었다.
하지만 신체 능력이나 마력 계열 보정이 전혀 없는 S급 파일럿 특성을 제외하면, 나는 B급 마력계열과 C급 육체계열 특성을 동시에 각성한 헌터에 불과했기에 성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는 천부적인 전투 센스를 지니고 있었던 데다, 마법계열최상위 특성인 ‘서리바람(B)’과 육체계열 특성 중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육체강화(C)’ 특성을 동시에 각성한 트리플(S급인 파일럿 특성은 탑승물이 없으면 무용지물이기에 실제로는 더블이나 다름없었지만) 각성자였다.
내 본신의 전투력은 A급 중위권 헌터에 필적했고, 이는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전투 관련 상위 특성을 각성한 A급 상위권 헌터들에게는 비빌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나를 무시하는 A급 헌터들도 존재했다.
물론 내 면전에다 대고 그런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놈은 없었지만.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우스를 이끌고 A급 이하의 몬스터 수십만 마리를 학살 할 때에 비할 수는 없지만.
‘S급 파일럿’ 특성을 제외한 내 본신의 전투력 역시.
어지간한 A급 헌터에 필적한다는 사실이었다.
#3
크르르르르르....
마력의 움직임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내 투기에 반응한 것인지 바르카 무리가 낮은 신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리곤 자세를 낮추며 나를 향해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한다.
“하나, 둘... 모두 열일곱 마리? 덩치가 있어서 그런지 제법 위압적이로군.”
워낙에 제우스를 이용해 공중 폭격으로 양학을 하는 게 일상처럼 되어놔서 그렇지, 사실 C급 정도되면 그리 우습게 볼만한 몬스터는 아니다.
아주 좋은 전투 관련 특성을 각성한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은 C급 헌터 두셋이 붙어야만 상대가 가능한 중급 괴수.
하지만 내 경우엔 마법계열과 육체계열 특성을 동시에 각성한 데다, 그중에서도 마법계열인 ‘서리바람’은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데 있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특성이었다.
일찍이 ‘S급 서리바람’을 각성한 세븐스타의 일원, 영국의 S급 헌터 코트니 블레인은 단 3분 만에 5만여 마리의 몬스터를 학살해버려 명성을 떨친 바 있었다.
캬아아아아아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던 바르카 무리 중 하나가 엄청난 속도로 무리에서 튀어 나오자, 나머지 녀석들 역시 동시에 나를 향해 쇄도해 들어왔다.
나는 첫 번째 놈이 튀어나오기 위해 뒷다리에 힘을 주는 순간, 이미 한 가지 스킬을 발동시킨 상태였는데.
[프랙탈 필드(B) : 시전자를 중심으로 지면 온도를 급하강시키는 미세한 눈결정 문양을 퍼뜨린다. 숙련도가 오를수록 문양이 퍼지는 속도가 빨라진다. 필드 위에 존재하는 객체는 냉기저항력에 따라 움직임에 제약을 받으며, 시전자는 최대 20%의 행동력을 보정 받는다.]
‘서리바람’ 특성의 고유스킬로 일종의 광역기이자 군중제어기인데다, 미약한 능력치 버프까지 겸비한 '프랙탈 필드'였다.
스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를 중심으로 새하얀 얼음 지대가 빠르게 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한다.
‘끄륵?’
가장 먼저 달려들던 바르카의 움직임이 대략 절반 정도로 느려졌고, 이상을 느낀 녀석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고양잇과의 동물들이 대개 그렇듯, 이 녀석들도 얼굴만은 굉장히 귀여운 편.
하지만 내게 이빨을 드러낸 이상 자비는 없었다.
아무런 무기도 없었지만 C급 육체강화 스킬 덕에 기본적으로 몸이 꽤 단단한 편이었고, 공용스킬 중에는 맨주먹의 파괴력을 강화하는 스킬도 존재했다.
[피스트마스터리(C) : 맨손의 공격력을 강화한다. 무기 장착 시 적용 불가.
숙련도(MAX) ? 맨손 공격력 200% 상승.]
[강철피부(C) : 원하는 부위를 30초간 경화시킨다. 스킬 적용 범위가 넓을수록 마력 소모가 증가한다.]
[중력조절(C) : 물체에 가해지는 중력을 최대 200% 늘리거나 줄일 수 있다.]
시간상 더 많은 스킬을 적용할 수는 없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꺾은 채 목을 노려오는 녀석의 얼굴을 세 가지 스킬로 강화한 오른쪽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콰아아아아앙
아마도 바르카들의 돌격대장이었을 녀석은 새하얀 이빨을 와르르 뱉어내며 4,5미터를 날아갔고.
쿠우우우우웅
반경 40여 미터를 뒤덮은 얼음의 대지에 처박힌 뒤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돌격대장의 뒤를 따라 연달아 몸을 띄운 나머지 바르카들에게도 공평하게 적용되었다.
콰아아앙
콰아앙
콰아아아아앙
.
.
.
콰아아아앙
그래도 어느 정도 지능을 지닌 녀석들인지, 아홉 마리가 주먹에 맞아 지면에 처박힌 이후로는 사방으로 흩어지며 몸을 낮춘 채 경계 태세를 취하는 모습을 보였다.
“호... 도망가지 않아?”
이 정도면 ‘걸음아 날 살려라’를 시전 할 법도 할 텐데, 몸을 피한 녀석들은 오히려 지면에 처박힌 녀석들에게 다가가 동료의 주위를 돌며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아마도 생사여부를 확인하려는 듯.
그리고 난 내게 얻어맞은 녀석들이 정신을 잃었을 뿐, 단 한 놈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새끼들을 공동으로 키운다더니... 일반적인 몬스터들과는 좀 다르군.”
내가 지구에서 본 몬스터들은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미쳐 날뛰는 놈들이 대부 분이었고, 그놈들에게 동료애 따위는 없었다.
내 눈치를 살피며 동료들의 생사 확인을 끝낸 바르카들.
녀석들은 조심스럽게 기절한 동료들을 질질 끌고 자신들이 튀어나왔던 숲속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아 나를 경계하고 있던 가장 커다란 몸집의 바르카.
일곱 마리의 바르카들이 각자 한 마리씩 동료를 물고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녀석은 나를 바라보며 몸을 넙죽 숙인 채로 한 차례 ‘크허어엉’ 울부짖더니.
남은 두 마리를 동시에 입에 물고는 동료들이 앞서간 숲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뭐, 지능이 꽤 높은 것 같으니 다시 덤벼들 일은 없겠지.”
나는 단순히 지구의 몬스터들과 조금 다른 행태를 보인다는 이유로 녀석들을 살려주었고.
다음 날부터 바르카들의 보은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