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조우
#1
이세계 불시착 2일 차.
나는 지난밤 탑승부를 수리, 강화한 콕피트 안에서 잠이 들었다.
미친 듯이 배가 고팠지만 당장 사냥 같은 걸 나서기엔 심신이 너무나도 지쳐버린 상태였으니까.
“......”
그리고 햇살에 눈을 뜬 아침.
콕피트에서 내려온 내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게 뭐야?”
지난밤 바르카들이 모습을 드러냈던 숲의 경계와 제우스 잔해의 중간 지점.
그곳에 대략 10여 개에 달하는 무언가의 사체가 마치 진열하듯 주욱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황당한 와중에도 무의식적으로 관찰 스킬을 사용했다.
[아랑고(E-)의 사체 : 오르비스 대륙 전역의 산지나 수림에 서식하는 먹이사슬 최하위 몬스터. 마력을 각성하지 않은 성인 남성 홀로 사냥이 가능할 정도로 전투력이 낮지만, 보통 수백 마리 단위의 무리 생활을 하기에 함부로 건드리면 귀찮은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덴덴(D)의 사체 : 숲과 강이 교차하는 지점에 주로 서식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물속에서 보낸다. 어지간한 암석을 간단하게 박살내 버릴 만큼 엄청난 턱힘을 지니고 있으며, 성체의 크기는 최대 8미터까지 자란다. 새끼가 있거나 번식기가 아니라면 비교적 온순한 편. 하지만 새끼가 있는 덴덴의 곁으로 다가갈 경우 그들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리리라파(E)의 사체 : 베헤르디아 대수림에 서식하는 몬스터. 날개를 지니고 있지만 퇴화되어 날 수 없다. 날개 대신 발달한 강력한 두 다리는 순간 시속 150km로 달리는 것이 가능하며 리리라파의 강력한 공격 수단이다. 굉장히 난폭한 성격으로 번식기 이외에는 두 마리가 함께 있는 것을 보기 힘들다.]
사체의 개수는 총 아홉.
프랙탈필드의 영향으로 진창이 되어버린 지면에 찍힌 발자국으로 보건데, 이것들을 여기에 가져다 놓은 범인이 누구인지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뭐, 발자국이 아니더라도... 이곳에 와서 본 거라고 이상하게 생긴 새랑 그녀석들이 전부니까.”
이건 감사의 선물일까, 굴복의 표현일까?
아니면 둘 다?
어쨌건 간에, 이건 지난밤 살려 보냈던 바르카 무리가 가져온 목숨값임에는 분명해 보였다.
‘근데 난 몬스터는 먹을 수 없는데...’
바르카들이 조공(?)으로 바친 사체들은 대부분 생전 처음 보는 몬스터로, 몬스터의 고기는 특유의 독성으로 인해 인간이 먹을 수 없었다.
고등급 헌터의 경우 기본적인 독 내성이 강해 몬스터 고기를 먹어도 죽음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지독한 배탈 정도는 각오해야만 했고.
무엇보다...
“찝찝하잖아. 몬스터 고기라니... 응?”
차례차례 생소한 몬스터들의 정보창을 읽어나가던 차.
가장 마지막에 놓인 아홉 번째 사체의 정보창에서 기어이 눈이 번쩍 뜨일만한 정보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아이어엘크 : 오르비스 대륙의 산지나 수림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4족 보행초식동물. 거대한 4개의 뿔을 지니고 있으며 최대 3미터까지 자란다. 육질이 굉장히 뛰어나 귀족들에게 비싼 값에 팔린다.]
“오오오오오!”
몸길이 1.5미터, 신장 90여 센티미터의 사슴과 여우를 합성해 놓은 듯한 생물의 사체.
뿔이 두 개에 몸집이 작은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새끼인 것 같았다.
정보창에 나와 있듯 몬스터가 아닌 평범한(외관은 그렇지 않았지만) 동물인데다.
무엇보다...
“육질이... 뛰어나다고?”
그 순간 미칠듯한 허기가 몰려들었다.
나는 지난 3년간 단 한 번도 사용한 적 없었던 도축(C) 스킬과 발화(C) 스킬을 이용해 순식간에 아이언엘크를 구워버렸고.
꺼어어억
그 자리에서 무려 1/3 가량을 먹어치웠다.
“과연, 육질이 끝내주는군.”
어찌나 만족스러운 식사였는지, 지난밤 나를 향해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던 바르카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졌을 지경.
“음, 이럴 줄 알았으면 이빨은 부러트리지 말 걸 그랬나?”
뭐, 그래도 한쪽만 부러뜨렸으니까.
반대쪽으로 씹으면 되지 않겠어?
아니면 말고...
#2
이세계 불시착 12일 차.
세 개의 달이 뜨고 지는 시각으로 유추해봤을 때.
이곳에서 하루의 길이는 지구의 그것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는 듯했다.
그렇게 달이 지고 해가 뜨길 열한 번.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이곳으로 떨어지게 된 이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유를 알게 될 날이 오기는 할까?”
끝이 보이지 않는 대수림의 한복판에 홀로 생존하게 되면서, 내게는 몇 가지 변화가 생겼는데.
첫 번째는 혼잣말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처음 며칠간은 무의식적으로 혼잣말을 내뱉은 다음 흠칫 놀라곤 했었지만.
과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맞는지,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져 버린 상태였다.
두 번째 변화는 팔자에도 없던 애완동물(?) 비슷한 게 생겼다는 것.
“지구에서도 애완동물 같은 건 키워본 적 없었는데...”
애완동물의 정체는 이곳에 떨어진 첫날, 나를 습격했다가 쓴맛을 본 바 있었던 C급 몬스터 바르카였다.
그 무리 중에서도 유독 한 마리가 내게 친근하게 굴며 주위를 맴돌았는데.
알고 보니 가장 먼저 덤벼들었다 주먹에 얻어맞고 기절했었던 바로 그 녀석이었다.
이놈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녀석이 내게 가장 처참하게 당한 바르카였기 때문이다.
다른 바르카들은 고작 이빨 두세 개가 부러진 게 전부였던 데 반해. 제일 앞장서서 덤벼들었다는 죄로 인해, 녀석은 왼쪽 이빨 10여 개가 박살이 나 버렸으니까.
“뭐, 벌써 새 이빨이 돋아난 건 좀 의외긴 하지만.”
녀석은 3일 차부터 내 곁에 슬금슬금 다가와 벌렁 배를 까뒤집고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는데.
헥헥거리며 벌린 입안을 확인하자, 놀랍게도 부러진 이가 빠진 자리에 새로운 이빨들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닌가.
말 그대로 짐승 같은 회복력.
흠, 사실 짐승보다는 몬스터들의 회복력이 대체로 더 좋은 편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12일 차에 접어든 현재, 녀석의 이빨들은 언제 부러졌었냐는 듯 원래의 모습을 회복한 상태였다.
같이 지내며 확인한 바르카들의 지능은 예상대로 꽤나 높은 편이었는데.
녀석들은 정확히 이틀간 몬스터와 짐승의 사체를 가리지 않고 가져오더니.
내가 몬스터의 사체에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3일 차부터 오로지 짐승의 사체만을 물어다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번 그 짐승 사체를 가지고 오는 녀석이 바로.
“레비!”
“크아아아아앙!”
내가 ‘레비’라는 이름을 붙인 바로 이 녀석이었다.
그런 이름을 붙인 이유는 단순했다.
‘레비’는 레이비아 투레라는 나이지리아 출신 S급 헌터의 애칭이었는데.
흑인에 고양이상인 그녀의 생김새가 바르카와 매우 닮았기 때문이다.
“뭐, 동료를 끔찍하게 아낀다는 것도 비슷하고.”
나는 레비와 함께 지난 8일간 이 베헤르디아 대수림이란 곳을 탐사했다.
하지만 최대 왕복 8시간 거리까지 정찰 범위를 넓혔음에도 여전히 거대한 나무의 숲만 이어질 뿐이었다.
가끔 눈에 띄는 몬스터나 짐승들을 제외하면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나무, 나무, 나무의 연속.
그건 제우스의 불시착 지점에서 2km 정도 떨어진 작은 강을 따라 계속해서 달려봐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이 빌어먹을 대수림이란 곳은 얼마나 넓은 거지?”
C급 몬스터인 바르카가 낼 수 있는 순간 최고 속도는 200km를 훌쩍 넘는 듯했지만.
지구의 치타와 마찬가지로 최고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대략 20~30초 정도로 무척이나 짧았다.
하지만 100km 전후의 속도로는 몇 시간이나 달려도 지치지 않았고, 이것은 대수림을 탐사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직접 발로 뛰어야 했으면... 하아,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군.”
바르카 무리에서도 꽤 큰 편인 레비.
녀석의 몸길이는 3미터가 조금 넘었고, 이는 무언가를 태우고 달리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아이어엘크의 고기를 말린 육포가 담긴 주머니를 허리춤에 묶으며 레비를 불렀다.
“레비, 오늘도 잘 부탁한다.”
“크아아앙!”
12일 차 대수림 탐사가 시작되었다.
#3
제우스가 불시착하며 생긴 공터를 중심으로 반경 30km 내에는 레비가 속한 바르카 무리를 위협할 만한 천적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영역을 벗어나면 사정이 달랐는데.
그때부터는 관찰(C) 스킬로 정보를 알 수 없는 몬스터도 종종 등장하곤 했다.
지난 8일간의 탐사에서 마주친 몬스터들은, 정보를 알 수 없다곤 하나 대부분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해치울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가장 멀리 탐사를 나갔던 지점보다 대략 2시간을 더 달린 장소에서 마주친 5미터 크기의 몬스터는 달랐는데.
“와씨, 헉, 헉... 진짜로 뒈질 뻔 했네.”
“커허엉... 헥, 헥, 헥, 헥...”
강철 같은 근육으로 온몸이 뒤덮인 그 2족 보행 몬스터는 엄청난 파괴력과 속도를 선보였고.
나는 온갖 스킬을 퍼부어 악전고투 끝에 간신히 녀석을 죽일 수 있었다.
문제는, 얼마 이동하지 않아 똑같은 종류의 몬스터를 또다시 마주쳤다는 것.
혼비백산한 나와 레비는 기척을 죽인 채 녀석이 지나치길 숨죽여 기다렸고.
무사히 녀석을 떠나보낸 뒤 탐사를 계속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여긴... 완전히 저 녀석들의 영역이구나.’
최소 A급 하위권에 해당하는 몬스터가 확실했고.
두 마리만 한꺼번에 몰려와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기에 발걸음을 베이스캠프로 돌리려는 찰나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엄청난 굉음이 터져나왔고.
주변의 괴수들이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일제히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기심을 참지 못한 나 역시 벌벌 떨고 있는 레비를 억지로 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허어어어억!”
나는 그야말로 숨이 막힐 듯한 놀라움에 헛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내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말 그대로 상상 속에서나 그려봤던.
바로 그런 광경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크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케에에에에에엑
“저, 저게 뭐야?”
그것은 십수 마리의 괴수들에게 둘러싸인 채 고군분투 중인...
“로, 로봇?”
5미터쯤 되는 신장의 괴수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대한 로봇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로봇의 전신을 눈에 담는 순간.
파아아아아아악
의도치 않았음에도 오른쪽 시야의 상태창이 확대되며.
번쩍번쩍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최초로 C+등급 이상의 기체를 발견했습니다. 분석 완료까지 1분 34초. 기체에서 시선이 떨어질 시 분석이 초기화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