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기간트 '폴암'
#1
마지막 메시지로부터 대략 1분 30여 초가 지난 뒤.
[분석이 종료되었습니다.]
십수 마리의 괴수들과 격전을 치르고 있는 로봇(?)의 정보가 떠올랐다.
[폴암(B-) : 출력 800rp. 오르비스 대륙 남서부에 위치한 기사왕국 ‘루페른’산하의 왕립병기창에서 제작된 기간트다. C+급 마력엔진을 탑재하여 동급 기간트 대비 출력이 떨어지지만, B-급 합금으로 이루어진 기체의 견고함은 동급 대비 매우 뛰어난 편. 루페른제 기간트의 특색인 ‘동화율 보정’이 적용되어 등급이 한 단계 상승했다.]
“기간트... 폴암?”
나는 고조되어가는 전장의 분위기를 인지하지도 못한 채 거대로봇... 아니, 폴암이라는 기간트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미친... 이거 혹시 꿈이냐?”
그 순간.
현실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몇 가지 메시지가 오른쪽 시야를 가득 채 우기 시작했다.
[고유스킬 ‘위대한 결속’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마력기체’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한계돌파’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원격조종’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수복’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호랑이 교관’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격납고’의 공간이 대폭 확장됩니다.]
“......!”
‘파일럿(S)’ 특성으로 인해 획득한 일곱 가지 고유스킬들의 숙련도 상승.
특성을 최초로 각성한 직후에는 꽤 자주 볼 수 있었던 상태창의 메시지였다.
하지만 ‘제우스’와 동기화를 이루며 숙련도가 대폭 상승한 이후로는 1년에 고작 3,4번 보는 것조차 힘들었고.
심지어 지난 1년간은 ‘마력기체’의 숙련도 상승 1회 이외에는 단 한 번도 나타난 적 없는 메시지였다.
그런데 한두 개도 아니고 모든 고유스킬의 숙련도가, 그것도 대폭 상승하다니.
“하긴, C+급도 아닌 B-급 기체라면... 그럴 만도 하지.”
수치화되지 않는 ‘위대한 결속’, ‘마력기체’, ‘한계돌파’ 스킬의 경우 기체에 탑승하지 않는 이상 그 성장 폭을 체감할 수 없었지만.
[원격조종(S) : 탑승물을 원거리에서 운용할 수 있다. 탑승물과의 결속이 공고할수록 스킬 효율이 증가한다. 원격조종 등록 가능 기체(3).
no.1 제우스(C) 최대 900미터
no.2 토마호크 SS7 스피릿(E+) 최대 22킬로미터
no.3 ------------------------------]
말 그대로 외부에서 기체를 조종할 수 있는 ‘원격조정’ 스킬은 최대 조종 거리가 제우스 기준 250미터가량 늘어나 있었고.
[수복(S) - 마력을 이용해 기체를 원상태로 되돌린다. 파손율 55% 미만의 기체에만 적용 가능.]
파손된 기체를 원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고유스킬 ‘수복’의 수복 한계 파손율이 5% 더 증가했으며.
[호랑이 교관(S) : 등록된 훈련생의 교육 및 훈련 효율이 크게 상승한다. 탑승물에 대한 동화율이 높을수록 교육 효울이 증가한다. 등록 가능 훈련생(2).
no.1 ---------------------------
no.2 ---------------------------]
누군가를 가르치는 데는 취미가 없었기에 여태껏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스킬이었지만, 어쨌든 등록 가능한 훈련생의 숫자가 한 명 더 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격납고(S) : 등록된 기체를 가로, 세로, 높이가 10미터인 아공간에 보관할 수 있다.
현재 보관 중인 기체 : 토마호크 SS7 스피릿(E+)]
주력 기체인 ‘제우스’를 보관하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거의 써먹을 일이 없었던 스킬, 격납고의 크기가 가로, 세로, 높이 각각 3미터씩 증가했다.
“하, 5년이라는 시간이 부질없게 느껴질 정도로군...”
그렇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지.
지난 5년간 이뤄낸 성장보다, B- 등급 기체를 발견한 이후 단 몇 분 만에 더 크게 성장해 버린 셈이었으니까.
일례로 지난 5년 동안 늘어난 ‘수복’ 스킬의 수복 한계 파손률은 3%였고, 원격조종의 최대거리는 고작 150미터였으니까.
심지어 격납고의 경우는 E+등급의 바이크 한 대만 달랑 넣어두어서 그런지, 제우스와의 만남으로 인한 성장을 끝으로 단 1cm도 성장하지 않았다.
“동기화한 기체 말고도 이것저것 넣을 수 있었다면 꽤 쓸모가 많았겠지만.”
아쉽게도 격납고에는 동기화를 마친 기체 이외에는 그 무엇도 넣을 수 없었다.
확인을 끝낸 메시지를 시야에서 지웠다.
기간트라는 존재를 발견한 이후 마구 떨리던 심장도 어느새 잠잠해진 상태.
나는 여전히 격전을 벌이고 있는 전장을 바라보았다.
“저거 좀... 위험해보이는데.”
최초의 굉음이 울려 퍼진 지 15분 정도가 흘렀다.
한손 검과 왼쪽 팔뚝에 부착된 둥그런 방패로 무장한 채,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기민한 움직임으로 몬스터들을 상대하던 기간트 폴암.
이미 10여 마리 몬스터가 목숨을 잃은 상태였고, 남은 것은 고작 일곱 마리였다.
하지만 비교적 멀쩡한 외관에 비해 기간트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둔해진 상태였다.
콰아아아아아앙
전면에서 몬스터 두 마리가 재질을 짐작하기 힘든 몽둥이로 공격을 가하는 사이.
뒤편에서 덮쳐온 다른 한 마리의 숄더차지를 피하지 못한 기간트가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어진 것은 분노한 몬스터들의 집단린치.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
캬아아아아아아아악
키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온갖 괴성을 지르며 밟고 때리기를 1분여.
위태롭게 깜빡이던 기간트 안면부의 빛이 완전히 사그라들었고.
살아남은 몬스터들은 더이상 방어 자세조차 취하지 못하는 기간트의 사지를 잡아당기거나 심지어 깨물기까지 하며 온갖 난장을 피워댔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가까스로 팔 한 짝을 뽑아내는 데 성공한 한 녀석이 탈진한 듯 퍼져버린 데다.
이빨로는 외부 장갑에 흠집을 내는 것조차 힘들다는 것을 깨닫자 관심이 시들해진 듯 하나 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분명 기간트 안에 누군가 있겠지? ......죽었을까?”
솔직히 안에 탑승해 있을 사람의 생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내 관심은 오직 ‘폴암’이라는 이름을 가진 저 기간트.
그리고 내 오른편 시야에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기체명 : 폴암(B-등급) - 파손율 54.18%(수복 가능)]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마침 불과 몇십 분 전 50%에서 55%로 늘어난 수복 한계 파손율.
그러니까 그 말인즉슨...
“저거... 고쳐 쓸 수 있을지도.”
#2
브라이드 백작가의 기사이자 기간트 오너인 테리 헤링스.
그는 같은 기사단 소속의 오너 둘과 함께 모종의 임무를 지니고 베헤르디아대수림에 발을 들였다.
오르비스 대륙 5대 마경 중 하나인 베헤르디아 대수림.
브라이드 백작가는 오랜 기간 왕국 서부 경계의 일부와 맞닿아 있는 베헤르디아 대수림을 경계해온 변경백 가문이었기에.
가문의 기사와 병사들은 몬스터의 준동이 극심해지는 겨울을 대비해, 매년 가을이 끝나갈 무렵이면 대규모 토벌군을 결성해 대수림 외곽지역의 몬스터들을 소탕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오르비스 대륙 남부에 여름이 오기 직전인 늦은 봄.
베헤르디아 대수림의 몬스터들이 가장 온순해지는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이에 따라 몬스터들이 왕국의 경계를 침범하는 일도 매우 드물었기에, 백작가의 기사가 대수림에 발을 들일 만한 일은 거의 없었다.
‘제길, 막내라고 귀찮은 일은 죄다 내게 미뤄버리다니.’
테리 헤링스는 브라이드 백작가 최강의 기사단인 ‘금십자 기사단’ 소속이었다.
그는 전원 기간트 오너로 구성된 12명의 기사 중 경력이 제일 짧았던데다 나이마저도 26세로 가장 어렸다.
그와 함께 온 동료들 역시 27살과 26살로 기사단의 막내 그룹에 속한 오너들이었고.
‘젠장, 이 넓은 대수림에서 그 쥐똥만 한 꽃을 어떻게 찾으란 거야.’
테리 헤링스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주변을 면밀하게 살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쉴 새 없이 불평을 토해내고 있었지만, 그는 훈련이 가혹하기로 유명한 변경백 가문에서도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기간트 오너에 오른 인물.
기분이 잡쳤다는 이유로 임무를 소홀히 하는 부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브라이드 백작가의 기사, 그것도 무려 기간트 오너 셋이 베헤르디아 대수림깊숙한 곳까지 들어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
거기에는 왕국의 실세이자 왕국 서부의 패자인 백슬리 후작이 연관되어 있었는데.
후작이 애지중지하는 딸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희귀 약초가 이곳 베르헤디아대수림에서만 서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라이드 백작가는 후작의 파벌에 속해있지는 않았지만, 썩 나쁜 관계는 아니었기에.
가주인 로저 브라이드 백작은 흔쾌히 후작가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런 이유로, 테리 헤링스는 벌써 3일째 대수림 탐사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처음 이틀 동안은 베헤르디아 대수림의 위험성을 고려하여 기간트 오너 세 사람이 다 같이 탐사를 진행했지만.
효율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테리 헤링스의 강력한 주장으로, 오늘부터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탐사를 이어가기로 한 것이다.
탐사지역이 대수림의 중심부에서는 제법 거리가 있었던 데다, 기간트 오너의 자격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세 사람의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일행과 헤어진 지 채 다섯 시간도 지나지 않아.
테리 헤링스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크헉!”
아무래도 방향을 잘못 잡은 게 틀림없었다.
그가 맡기로 한 방향에는 5대 마경인 대수림에서도 상급 몬스터 취급을 받는 ‘사르가스’의 영역 같은 건 존재 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젠장, 남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방향을 잘못 잡은 게 틀림없어.’
최중심부에 똬리를 틀고 있는 괴물들만큼은 아니었지만, 사르가스라면 적어도 왕국 경계에서 대수림의 중심부까지 절반 정도는 진입해야만 마주칠 수 있는 몬스터였기 때문이다.
“으아아아아아악!”
스걱
테리 헤링스는 마지막 남은 마력을 쥐어짜 열 번째 사르가스의 목을 베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곤 이내 아랫배에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마력이 완전히 고갈되어 버린 것이다.
죽음이 그의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기간트 내부.
테리 헤링스를 둘러싸고 있던 블루스펀(슬라임 형태의 마력 전달 물질)이 더 이상 마력을 공급받지 못하자 0.1mm 이하의 미세하고 딱딱한 알갱이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블루스펀은 더이상 마력엔진과 기간트 오너 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인간으로 따지자면 신경계통이 완전히 죽어버린 것이다.
“장가도 못 가보고 이렇게 뒈질 줄이야. 빌어먹을 단장 새끼, 죽어서도 저주할 테다...”
그는 평소 존경하던 기사단장을 욕하며 서서히 눈을 감았고.
기간트 폴암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