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8화 (8/169)

8화 마법사?

#1

테리 헤링스는 마력이 끊겨 새카만 어둠으로 가득한 기간트의 내부에서 정신을 차렸다.

눈을 떴음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과 오른쪽 어깨의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백작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진입한 대수림에서 길을 잃었고, 상급 몬스터 사르가스 무리에게 둘러싸여 마력홀이 텅텅 빌 때까지 전투를 치렀다.

대 브라이드 백작 가문의 엘리트 기사답게 십여 마리의 사라가스를 해치웠지만.

어쨌든 결과는 패배.

대수림이란 마경에서 패배는 곧 죽음으로 직결된다.

그런데...

“살아 있잖아.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는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참으며 자신의 몸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크윽...”

억지로 마력을 끌어올리자 극소량의 마력이 홀을 빠져나와 ‘로드(마력홀에서 전신으로 마력을 전달하는 통로)’를 내달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너무 미미한 양이었던 것일까.

그의 마력은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 로드 내부에서 모두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리 헤링스의 표정은 한층 밝아졌다.

“마력홀이 터져버리지 않은 게 어디야. 그럼 무조건 죽었을 텐데.”

기사나 마법사 같은 마력 사용자들이 마력홀을 한계까지 사용할 경우, 때에 따라서는 마력홀이 터져버리거나 찢어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되면 최소 폐인이되거나 높은 확률로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극소량이나마 마력을 홀 외부로 내보낼 수 있다는 사실은, 마력홀이 타격을 받았을지언정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뜻.

이는 마력홀이 완전히 비워지기 직전, 테리 헤링스가 정신을 잃어버렸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운이 좋았군...”

물론 당장에 목숨을 건진 것일 뿐, 이곳은 여전히 강력한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는 대수림 내부였다.

이곳에서 살아남아 브라이드 백작가로 무사히 복귀해야만 진정 운이 좋다 말할 수 있으리라.

현재 테리 헤링스의 몸 상태는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홀이 타격을 받아 마력의 회복 속도가 평소의 1/5에도 못 미쳤고, 마지막 순간 동화율을 최대한 높인 상태로 전투에 임한 탓에 몸도 성한 곳을 찾기 힘들 지경이었다.

특히 폴암의 오른쪽 팔이 완전히 뜯겨나갈 때 받은 충격으로 인해, 그의 오른쪽 어깨는 완전히 박살이 난 상태였다.

아무튼 마력이 끊긴 기간트 내부에서는 주변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가지고 있는 마력으로 기간트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꿈조차 꿀수 없는 상황.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일단 몸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도 기간트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경화되어버린 블루스펀에 둘러싸인 상태로는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했으니까.

“젠장, 소환을 해제했는데 근처에 사르가스가 한 마리라도 있으면... 그대로 죽은 목숨이겠군.”

그렇다고 이대로 시간만 보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테리 헤링스는 대수림과 함께 성장한 브라이드 출신 사나이다운 깡다구로 기간트 폴암의 소환 해제 주문을 내뱉었다.

“아그리샤.”

그러자 아주 짧은 순간 전신에서 옅은 빛을 발한 기간트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어깨 밑까지 기른 금발을 끈으로 질끈 묶은 미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 뭐야, 왜 이렇게 추워? 가만... 추위를 느껴? 5월의 베헤르디아 대수림에서?”

당황한 그가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미끌

“어억!”

쿠당탕

미끄러운 지면 상태로 인해 미쳐 중심을 잡을 새도 없이 바닥에 나자빠지고 말았고.

그것이 그의 목숨을 또 한 번 살렸다.

쉬이이이이이이이잉

무언가 엄청난 속도로 땅바닥에 주저앉은 그의 머리 위를 지나쳤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앙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의 지면에 처박히며 엄청난 먼지구름과 굉음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

“이런 젠장! 또 죄다 몰려오겠군.”

테리 헤링스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색적인 복장의 검은 머리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피가 뚝뚝 흐르는 양손을 사르가스의 조악한 하의에 문지르고 있었는데, 조금 전 내뱉은 말과는 달리 꽤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테리 헤링스는 시선을 돌려 조금 전 울려퍼진 굉음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사르가스들이 사용하는 3미터 길이의 거대한 몽둥이가 지면에 절반쯤 처박힌 채 손잡이를 바르르 떨어대고 있었다.

정황상 저 검은 머리 사내가 사라가스의 몽둥이 투척을 피한 뒤, 맨손으로 녀석을 쳐 죽인 것으로 보였다.

‘근데... 그게 가능해?’

물론 그런 일이 가능한 인간들이 존재하기는 했다.

당장 브라이드 영지에만 해도 소드 엑스퍼트 최상급 경지에 이른 브라이드 백작과 그의 수호기사인 알버트 자작이 있었다.

그들이라면 사르가스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나이 40을 훌쩍 넘긴 원숙한 경지의 기사들.

반면 눈앞의 사내는 26세인 자신과 비슷하거나 조금 어려 보이는 외모가 아닌가.

입을 쩍 벌린 채 검은 머리 사내를 바라보던 테리 헤링스.

번뜩 정신을 차린 그가 몸을 일으키기 위해 비교적 멀쩡한 왼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으앗!”

그는 냉기로 인해 얼얼해진 손바닥과 지면을 번갈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어, 얼음?”

빠르게 녹고 있는 것 같았지만 분명 얼음이었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자 검은 머리 사내를 중심으로 대략 반경 30여 미터가 온통 새하얀 얼음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광경에 테리 헤링스의 두 눈이 경악으로 치떠졌다.

“마법사?”

사르가스가 마법을 쓴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으니, 이건 저 검은 머리 사내가 일으킨 이적(異蹟)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분명 맨손으로 사르가스를 때려잡지 않았었나?’

죽이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정황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봐.”

혼란함에 휩싸인 채 주저앉아 있는 테리 헤링스에게 검은 머리 사내가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사내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 사내는 손가락으로 사라가스의 사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통성명은 좀 미뤄두고, 일단 자리를 피해야겠는데. 지금 저 녀석의 친구들이 죄다 이리로 몰려들고 있거든.”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테리 헤링스가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빠, 빨리 튑시다!”

#2

기간트가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을 때는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잠시 뒤 모습을 드러낸 남자의 왼쪽 손목, 그곳에 차고 있는 팔찌 아래로 기간트 ‘폴암’의 정보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나는 예상대로 비어있는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어슬렁거리며 접근한 사르가스와 전투를 치르는 중이었다.

‘프랙탈필드(B)’를 비롯한 온갖 디버프에 걸려 움직임이 느려진 사르가스.

나는 녀석의 몸통에 ‘샤프니스(C)’ 스킬이 걸린 수도를 연달아 박아넣으면서도 흐뭇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자체 격납고 기능까지 있었군.”

물론 파일럿(S) 특성의 고유스킬 ‘격납고(S)’를 가진 내겐 그닥 쓸모없는 기능일 수도 있었지만.

격납고는 보관 가능한 용량에 제한이 있었다.

아마도 폴암과 비슷한 체급의 기간트라면 10대 정도는 넉넉히 집어넣을 수 있겠지만.

‘더 큰 기간트라면 몇 대 보관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나는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금발 사내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이봐.”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시야 왼편을 확인하자 지금 막 미니맵 상에 진입한 빨간색 점 두 개가 보인다.

시간을 지체하면 저 숫자가 얼마로 불어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오른손 검지로 방금 전 잡은 사라가스의 사체를 가리켰다.

“통성명은 좀 미뤄두고, 일단 자리를 피해야겠는데. 지금 저 녀석의 친구들이 죄다 이리로 몰려들고 있거든.”

다행히 금발 사내는 상황판단이 제법 빨랐다.

궁금해서 죽어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당장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황급히 몸을 일으킨 그가 말했다.

“빠, 빨리 튑시다!”

녀석과 나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숨어있던 레비는 전장을 벗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바, 바르카?”

“내 동료다.”

“......”

갑자기 튀어나온 레비로 인해 금발 사내가 조금 놀라긴 했지만, 동료라는 설명에 다시 묵묵히 달리기 시작했다.

일행을 이끄는 것은 나였다.

괴력형 몬스터인 사르가스는 엄청나게 빠른 편도 아니었고, 추적에도 별다른 재능이 없는 듯했다.

나는 미니맵에 나타나는 사르가스들을 피해 대수림을 내달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들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는 대략 20분 정도를 쉼 없이 달린 뒤 멈추었다.

“헉, 헉, 헉, 헉......”

멀쩡한 나와 레비와는 다르게,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금발 사내는 상당히 지친 듯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뒤.

호흡을 정리한 금발 사내가 내 눈치를 보며 품에서 조그마한 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제가 치료를 좀...”

그의 손에 들린 게 무엇인지, 이미 관찰 스킬로 파악하고 있었던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힐링포션(C) : 오르비스 대륙 5대 마탑 중 하나인 ‘알메이든 마탑’에서 제작된 중급 포션. 외상과 내상에 모두 효과를 발휘하지만, 내상을 다스리는데 더욱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

힐링포션이라면 지구에도 존재했다.

차이점이라면 그쪽은 C급이 가장 높은 등급의 포션인 반면, 이곳에서는 고작 중급으로 취급받는다는 것 정도.

‘놀랍군... 아무래도 마법 쪽은 이곳이 훨씬 발달한 모양이야.’

뭐, 기간트 같은 게 존재하는 것만 봐도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문제였다.

저런 건 과학 기술만으로 가능한 게 아닐 테니까.

금발 사내는 갑옷과 겉옷을 벗은 뒤, 병의 뚜껑을 열어 내용물의 절반가량을 오른쪽 어깨에 부은 다음 나머지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휴우... 윽!”

안색이 한결 편안해진 그가 오른쪽 팔을 조심스레 들어 올려 보았지만,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은 듯 4~5cm정도 올라왔던 손을 힘겹게 내리며 옅은 신음을 흘렸다.

외상보다 내상에 효과가 탁월하다더니, 어깨부상에는 그다지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애초에 워낙 심각한 부상이었던 탓도 있을 것이고.

나는 인상을 찡그리는 금발 사내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잠시 실례하지.”

“......?”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오른손을 들어 그의 어깨에 가져다 대었다.

“힐.”

[힐(C) : 외상을 치료한다. 마력 대비 효율이 떨어진다.]

공용스킬 중 가장 높은 등급의 치유스킬이지만, 마력을 어마어마하게 잡아먹는 데 반해 치료 효과가 썩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은 마력의 1/5 가량을 퍼부어 스킬을 사용하자 금발 사내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스킬을 중지한 뒤 움직여본 그의 팔은 조금 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아래위로 움직였다.

물론 격한 움직임이 가능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금발 사내는 이 정도만으로도 굉장히 만족스러운 듯했다.

“역시, 당신은 마법사였군요.”

음, 그건 아닌데.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정정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누구지? 그리고 우리가 있는 이곳은 어딘가?”

“네?”

황당한 표정의 금발 사내.

“여기가 어딘지 모른단 말입니까? 그럼 대체 왜 이곳에... 아니, 그보다 당신은 동대륙 사람입니까?”

동대륙?

오르비스 대륙의 동쪽에 있는 대륙인가?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이미 컨셉에 충실하기로 굳게 마음먹은 상태.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동대륙...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군.”

“네?”

“이곳이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서, 설마?”

맞아.

네가 생각하는 그거라고.

나는 철저하게 기억상실을 연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곳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이상,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확신했기에.

그리고 난 이 테리 헤링스라는 녀석에게 들러붙어 그가 속한 ‘브라이드 백작가’에 입성할 것이다.

상태창의 메시지에 따르면...

그곳에는 폴암을 제외하고도 최소 11개의 기간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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