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9화 (9/169)

9화 레비

#1

사르가스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난 뒤, 지쳐 버린 테리 헤링스를 배려해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거대한 나무에 몸을 기대고 앉은 우리는 곧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테리 헤링스는 한참 동안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말을 늘어놓더니, 예상대로 ‘브라이드 백작가’로 함께 갈 것을 권해왔다.

‘뭐, 단순한 권유라기엔 꽤 간절해 보이긴 했지만.’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이곳은 오르비스 대륙 5대 마경(魔境) 중 하나인 베헤르디아 대수림이었고.

그런 위험천만한 곳에서 기간트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데다, 설상가상 본인은 심각한 부상까지 당한 상황이었으니.

나와의 동행은 그에겐 목숨이 달린 일인 것이다.

잠시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끈 나는, 테리 헤링스의 간절한 눈동자를 일별한 뒤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어차피 이곳에 계속 머물 수는 없으니까...”

“가, 감사합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아, 제 이름은 테리 헤링스, 브라 이드 백작가의 금십자 기사단 소속 기사입니다.”

“테리 헤링스... 좋은 이름이군.”

나는 이미 알고 있는 그의 이름을 곱씹듯 되뇌며 살짝 칭찬을 곁들였다. 여태껏 이름 좋다는 칭찬을 싫어하는 인간은 본 적이 없었고. 실제로 그의 이름은 꽤 멋들어지기도 했으니까.

“그렇죠? 사실 테리는 제 할아버지 이름이에요. 아마 기억에 없으실 테지만... 27년 전, 그러니까 제가 태어나기 딱 1년 전에 있었던 몬스터들의 대침공을 막다가 전사하셨죠. 당시 할아버지는 금십자 기사단의 단장이셨는데, 단장 전용기인 ‘코페시’를 몰고 한 번에 오우거 일곱 마리를......”

그러니까 테리 헤링스의 말을 종합해 보면.

그는 ‘사르가스’보다 한 단계 위의 몬스터인 ‘오우거’ 일곱 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했을 정도로 용맹했었던, 전 기사단장인 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았다는것.

이 말 많은 친구는 그 스토리를 꽤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오직 단장 전용기라는 ‘코페시’의 이름만이 맴돌았다.

‘단장 전용기라면... 적어도 폴암보다는 더 뛰어난 기체란 뜻이겠지?’

브라이드 백작가로 향하기로 한 건 확실히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나는 테리 헤링스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준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면... 이제 슬슬 움직이지.”

“아, 네...”

조금 더 쉬고 싶은 표정이 역력해 보였지만, 나는 그의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브라이드 백작가로 향하기 전, 해결해야 할 작은 문제가 하나 남아 있기도 했고.

“끼잉......”

“레비, 네 영역 근처까지 왔어. 이제 돌아가도록 해.”

나는 레비의 안전을 위해 바르카들의 영역 근처까지 바래다주었고, 녀석의 머리를 몇 차례 쓰다듬어준 뒤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몇 발자국 움직이다 뒤를 돌아보면 녀석은 어김없이 내 뒤를 슬금슬금 따라오고 있었고, 나는 그때마다 바르카들의 영역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돌아가기를 종용했다.

“함께 갈 수 없어, 레비. 넌 네 동족들과 함께 이곳에서 살아야 해.”

“끼이잉, 끼이잉...”

몇 번이나 달래보고 화를 내보기도 했지만, 녀석은 길쭉한 귀를 축 늘어뜨린채 바닥에 넙죽 엎드려 낑낑댈 뿐이었다.

나 역시 아는 이 하나 없는 이세계에 떨어진 뒤, 무려 2주나 함께 했던 녀석과 정이 들었지만.

몬스터인 레비를 인간들의 세상에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물론 내가 백작가에 눌러앉을 심산이라면 꼭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지만(테리의 말에 의하면 몬스터를 길들여 전투나 호신에 이용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정작 백작가에서의 일이 어떻게 풀릴지는 제아무리 나라도 예측할 수 없었기에, 녀석을 데려가는 것은 썩 내키지 않았다.

나는 결국 레비에게 그림까지 그려가며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한 후, 녀석을 바르카들의 영역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내가 파악한 바로, 바르카의 지능은 인간의 5,6세 아이들 수준에 버금갔기에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한참 동안 나와 눈을 맞추던 레비는 내 가슴에 몇 번이고 얼굴을 부비적거리더니.

“커허어어어어엉”

한 차례 크게 울부짖고는 훌쩍 뛰어 베르헤디아 대수림의 나무들 사이로 사라졌다.

“하아...”

레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왠지 경이로운 눈길로 나와 레비가 사라진 나무들 사이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던 테리 헤링스가 서 있었고.

나는 그가 뭐라 입을 열기 전에 선수를 쳤다.

“출발하지. 브라이드 백작가로.”

#2

“제 생각으론... 아무래도 스노우님은 알텐시아로 향하는 개척 선단의 일원이었을 것 같습니다.”

레비를 돌려보낸 뒤, 숲이 완전히 어둠에 잠길 무렵까지 쉬지 않고 움직인 나와 테리 헤링스.

우리는 거대한 나무 옆 땅을 적당히 파낸 뒤, 그곳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이곳에서도 테리 헤링스의 입은 쉬지 않고 움직였는데.

온통 모르는 것 투성이인 나로서는 녀석의 입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

“알텐시아?”

“아... 알텐시아는 오르비스와 동대륙, 그러니까 켈모리안의 남쪽에 있는 거대한 섬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섬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대륙에 가깝죠. 그 크기가 저희 루페른 왕국의 열 배는 족히 넘는다고 하니까요.”

“개척 선단이라면 그곳은...”

“네, 대부분 미개척 지대로 남아 있죠. 일단 여태껏 확인된 국가 단위의 연합체는 없습니다. 몇몇 원주민 부족들만 확인된 정도죠. 양 대륙의 국가 중 그곳의 개척에 열을 올리는 곳이 제법 되는 것 같더군요.”

“미개척 지대가 대부분이라는 걸 보면, 영토를 확보하는 일이 쉽지 않은 모양이로군.”

“네, 일단 칼링해의 날씨나 몬스터들 때문에 알텐시아로 건너가는 일부터 쉽지가 않죠. 흔하지는 않지만, 브라이드 백작령에 속해 있는 캠던 영지에도...

종종 난파선의 흔적과 함께 동대륙인들의 시체가 떠밀려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날 동대륙의 개척 선단 소속이라 생각한 거로군.”

“뭐, 일단 스노우님은 외모부터가 완벽한 동대륙인이었으니까요. 오르비스 대륙에도 저 북부의 사막 왕국에 황인종으로 구성된 몇몇 부족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하이델어’를 사용하지 않죠. 그리고 지금 입고 계신 그 옷은... 저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라 당연히 동대륙 출신일 거라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곳 베르헤디아 대수림은 대륙 남서부 최남단에 있으니, 아마도 스노우님은 난파된 배에서 운 좋게 살아남아 대수림 남부의 해안지대에 도착한 것일 테죠. 아닌가요?”

“그... 러고 보니, 정신을 차린 곳이 바닷가였었지. 기억이 나는군.”

내가 말 많은 놈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될 줄이야...

지구에 있을 때만 해도 떠버리는 질색이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테리 헤링스의 입에서는 나로선 생각조차 해낼 수 없는 내 프로필이 실시간으로 완성되는 중이었다.

게다가 투머치한 경향이 짙긴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정보들은 대부분 내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다.

테리 헤링스가 나를 부르는 이름인 ‘스노우’는 ‘저기’나 ‘그쪽’, ‘당신’으로 부르기 껄끄럽다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즉석에서 만들어낸 가명이었고.

언어의 경우에는...

[언어(C) : 언어를 듣고, 말하고, 쓸 수 있다. 다만 마력 사용자가 아닌 경우 입 모양 보정을 받을 수 없다. 스킬 당 한 가지 언어만 등록할 수 있다.

-스킬 적용 중인 언어-

no.1 영어

no.2 러시아어

no.3 일본어

no.4 중국어

no.5 스페인어

no.6 하우사어(서아프리카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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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49 하이델어(오르비스 전체, 켈모리안 일부)

no.50 ------------------

no.51 ------------------

no.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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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68 ------------------]

스킬석 중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되는 ‘언어 스킬’ 덕분이었다.

그중 가장 높은 등급인 ‘C급 언어’는 무려 처음 접하는 언어를 말하고 쓰고 읽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놀라운 스킬이었다.

이게 비싼 이유는 무려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일반인’이 익힐 수 있는 몇 안 되는 스킬이었기 때문인데.

전 세계 부호들의 구매 러쉬 탓에, 나조차 고작(?) 68개를 매입하는 데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뭐, 일반인들은 입과 소리가 따로 놀아서 꼭 더빙 영화를 보는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하이델어’를 등록한 이유는 기간트를 소환 해제한 테리 헤링스가 입 밖으로 내뱉은 언어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좀 의문스러운 점은, 어째서 스노우님 같은 실력자가 기간트를 가지고 있지 않냐는 겁니다. 아, 물론 본신의 실력과 기간트 운용 능력은 별 관계가 없지만... 스노우님 같이 대단한 실력자일 경우, 호신을 위해서라도 하급 기간트정도는 지급하는 게 관례라서요. 아, 동대륙은 좀 다른가?”

이건 정말로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 이야기를 좀 자세히 들어보고 싶은데.”

“네?”

“실력자에겐 기간트를 지급한다는 그 이야기 말이야.”

“아, 물론 가문의 기사로서 신뢰를 쌓는 기간이 필요하긴 합니다.”

“음...”

내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자, 테리 헤링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하, 하지만 스노우님 정도의 실력자라면 ‘대거’ 정도는 곧바로 지급받으실 수 있을지도!”

그런 건 빨리빨리 말하라고 이 자식아!

나도 모르게 냉정함이란 이름의 가면을 벗어던져 버릴 뻔했다.

“대거?”

“그게... 평균 출력 800rp(rozentinpower, 마력엔진의 출력 단위)인 폴암보다한 단계 아래급인 기간트입니다.”

“그보다 더 아래도 있나?”

“......아뇨.”

테리 헤링스는 머쓱한 듯 고개를 돌렸지만.

인상을 찡그리는 얼굴과는 다르게, 내 마음은 흡족하기 그지없었다.

‘뭐, 출력 차이야... 당장은 문제가 아니지.’

일단은 기간트라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기체에 탑승해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

‘파일럿(S) 특성’이 제대로 적용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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