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11화 (11/169)

11화 요새 '베른'

#1

“밀라!”

테리 헤링스가 멀쩡한 왼팔을 휙휙 휘저으며 전방으로 달려 나갔다.

그의 음성을 들은 것인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있던 기간트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단숨에 기간트 앞까지 달려간 테리 헤링스가 무어라 떠들어대기 시작했고.

이내 기간트가 들고 있던 3미터에 가까운 대검이 사라지더니, 연이어 옅은 빛을 발산한 기간트마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그리고 기간트가 사라진 자리에는 160cm가 간신히 넘을 듯한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떨떠름한 표정을 한 채 서 있었다.

그녀의 정체는 테리 헤링스와 함께 베헤르디아 대수림에 파견된 세 명의 기사 중 하나인 밀라 테네시였다.

반가움에 끌어안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다가가는 테리 헤링스.

하지만 질색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내보인 그녀의 입에선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멍청한 테리... 넌 지금부터 날 제대로 설득시켜야 할 거야. 대체 그 꼴은 뭐고, 합류 시간을 하루나 넘긴 이유는 뭐지?”

여자의 냉정한 태도에 흠칫한 테리 헤링스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미, 밀라... 거기엔 사정이 있었다고.”

“그러니까 그 사정을 말해.”

“말하자면 너무 길어. 좀 이따 자세히 이야기해줄게. 그보다 네게 소개시켜 줄 분이 있어. 스노우님!”

테리 헤링스의 외침에, 대수림의 거대한 나무들 사이에서 검은 머리카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의 사내.

스노우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흠칫 놀란 밀라 테네시.

그녀는 잠시 눈을 껌뻑거리며 스노우를 바라보더니 이내 한마디를 내뱉었다.

“동... 대륙인?”

“맞아, 잘 들어봐 밀라. 스노우님은 동대륙에서 알텐시아로 향하던 개척선단의......”

이후 테리 헤링스는 약 5분간 스노우에 대한 장황한 소개와 찬사를 늘어놓았고.

묵묵히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준 밀라 테네시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어이 없음’과 ‘분노’였다.

그녀는 말없이 서 있는 스노우를 한 차례 흘깃 바라보더니...

빠아아아아악

“크헉! 왜, 왜 때려!”

자신보다 두 배는 큰 몸집을 지닌 테리 헤링스의 머리통을 거세게 후려갈겨 버렸다.

억울함과 아픔에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드는 테리 헤링스.

하지만 밀라 테네시는 그의 억울함과 아픔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두 눈에 쌍심지를 켠 채 한심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동료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야이 멍청아! 네 말 대로라면 저 사람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며. 알텐시아 개척 선단이고 뭐고, 죄다 네 머릿속에서 나온 말이잖아! 그런데 뭐? 그런 자를 백작님께 데려가겠다고? 대체 뭘 믿고?”

“스노우님은 내 목숨을 구해주셨어!”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게 저 사람이 안전한 인물이라는 보장은 될 수 없어.

정체가 불분명한 인물을 함부로 백작령에 들일 순 없다고!”

“그건 네가 저분의 능력을 몰라서 하는 소리야.”

“오호라... 정체가 불분명한데 능력까지 뛰어나다고? 내 귀에 그 말은, 저 사람이 매우 위험한 인물이라는 뜻으로 들리는데?”

“그런...... 아, 베른! 베른 요새까지라면 상관없잖아! 너도 알다시피 베른 요새는, 절대로 인간의 출입에 간섭하지 않으니까.”

“윽...”

브라이드 변경백 가문이 대수림 몬스터들의 준동을 막아내기 위해 수십 년에 걸쳐 완성한 요새 ‘베른’.

높이만 70m에 이르는 이 웅장한 요새의 방벽 한편에는 높이 4미터 폭 5미터짜리 자그마한(?) 문이 존재했는데.

27년 전 있었던 몬스터들의 대침공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닫힌 적 없는 이 문에는 한가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곳으로 출입할 수 없는 존재는 오직 살아있는 몬스터뿐이다.’

브라이드 백작가는 다른 국가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북부와 동부의 변경백(루페른 왕국 남부는 해안지대라 해군 총사령관 관할) 가문에 비해 엄청난 부를 자랑했는데.

이 부(富)는 오로지 대수림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의 부산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 만큼 베른 요새를 통해 대수림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전혀 통제하지 않았으며, 간단한 검문조차 하지 않는 대범함을 보여주었다.

단, 몬스터들의 부산물은 무조건 베른 요새 내부에 자리한 상단을 통해서만 판매할 수 있었는데.

이 상단들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세금이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세금을 부담하더라도 엄청난 수익이 보장되어 있었기에.

이 자리를 차지하려는 루페른 왕국 상단들의 경쟁은 해가 지날수록 치열해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건...”

테리 헤링스의 말은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밀라 테네시는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왠지 억울한 마음이 든 그녀는 얄미운 동료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차 버렸고.

뻐어어억

“끄아아악! 야 이 미친......”

“좋아, 일단 베른 요새까지 함께 가는 건 찬성.”

정강이를 붙잡은 채 한바탕 욕설을 퍼부으려던 테리 헤링스가 찡그렸던 미간을 활짝 폈다.

“진짜? 진짜지?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

그런 그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밀라 테네시가 멀뚱히 서 있는 검은 머리 사내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딴소리 안 할 테니 걱정 마. 그리고 어차피 그곳엔...”

브라이드 백작이 있는 브라이드 영지도 아니고, 베른 요새까지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곳에는 금십자 기사단 부단장이자.

베른 요새의 사령관인 콜튼 프리먼이 있었으니까.

모든 결정은 그에게 미루면 된다... 라고 밀라 테네시는 생각했다.

#2

밀라 테네시는 무려 기간트 오너 두 사람의 앞에서 길을 뚫으며, 거침없이 전진하는 검은 머리 사내를 바라보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마법사라며?”

“정확하게는 마권사라고 했지.”

“권사? 멍청한 테리, 네 눈은 장식품이냐? 난 살면서 저렇게까지 효율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인간은 본 적이 없어.”

그들보다 20미터 정도 앞서 달리고 있는 검은 머리 사내 스노우.

테리 헤링스의 마력홀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기에, 세 사람은 기척을 숨기는 것을 포기한 채 최단 경로를 주파하기로 했고.

이로 인해 주변 몬스터들의 어그로가 끌리는 것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자청해서 선두를 맡은 스노우.

그는 고풍스러운 손잡이를 지닌 검을 엄청난 속도로 휘두르며, 덤벼드는 몬스터들을 그야말로 도륙해버리는 중이었다.

경탄과 우려가 뒤섞인 눈길로 스노우를 바라보며 달리던 테리 헤링스가 말했다.

“그야, 이제까진 검을 쓰지 않으셨으니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나란히 달리던 밀라 테네시를 향해 훽 고개를 돌리며 짜증스레 외쳤다.

“젠장, 밀라! 저 검은 할아버지의 유품이라고! 그걸 네 맘대로 빌려주면 어떡해!”

“어차피 어깨를 다쳐서 쓰지도 못하잖아. 그럴 바엔 선두를 맡은 사람 손에 뭐라도 들려주는 게 낫지. 뭐 아무튼, 저 사람은 마법사나 권사 따위가 아니야. 뛰어난 실력을 지닌 검사라고.”

“그건 네가 스노우님의 마법을 보지 못해서 그런 거야.”

“그래? 정말 그 정도로 마법 실력이 뛰어나다면... 진짜로 완벽한 마검사라는 소린데... 바, 방금 봤어 테리? 드로우락 12마리를 해치우는데 고작 20초도 걸리지 않았다고. 저 순간적인 움직임은 대체 뭐지? 알버트 자작님도 저렇게는 못 할 것 같은데.”

“내가 말했잖아. 그는 사르가스도 맨손으로 해치워 버린 사람이란 말이다.”

“그건... 여전히 믿기 힘든 말이지만. 프리먼 부단장님에게 주의를 기울이도록 당부드리는 게 좋겠어.”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

윙윙윙윙윙윙윙윙윙윙

전방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몸집만 1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투비!”

방어력이 형편없어 중하급으로 분류되는 몬스터였지만.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 마리씩 뭉쳐 다니는 데다, 꽤 치명적인 독을 지니고 있어 기사들조차 상대하기를 꺼리는 녀석들이었다.

빠르게 날아드는 100여 마리 아투비 무리를 확인한 밀라 테네시는 기간트를 소환하기 위해 팔찌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때때로 엑스퍼트 중급의 기사들조차 죽음으로 몰아넣은바 있었던 흉악한 녀석들이었지만.

적어도 기간트 오너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아투비의 이빨이나 침으로는 기간트의 단단한 외부장갑에 흠집조차 낼 수 없었으니까.

그녀가 막 기간트 소환주문을 외우려는 찰나.

화르르르르르륵

달려들던 아투비 무리 앞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거대한 불의 장막이 모습을 드러냈고.

선두에서 날아들던 십수 마리가 불길에 휩싸이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이에 화들짝 놀란 나머지 무리가 사방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화르르르르르륵

화르르르르르륵

화르르르르르륵

나머지 세 방향에서 연달아 치솟은 불의 장막으로 인해 대부분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운 좋게 장막에 닿지 않은 예닐곱 마리 아투비가 불길이 존재하지 않는 위쪽으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지만.

서걱

서걱

.

.

.

서걱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바람의 칼날’에 몸의 일부분이 잘려나가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발을 멈춘 채 순식간에 끝나버린 전투를 바라보던 밀라 테네시.

그녀가 입가에 살짝 흐른 침을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5... 아니, 6써클? 저런 광역 마법을 저렇게 딜레이 없이 연달아 구사하려면 최소한 그 정도는 되어야 할 텐데...”

그녀의 말에 한껏 신이 난 테리 헤링스가 맞장구를 쳤다.

“네가 봐도 그렇지? 스노우님은 분명 6서클을 이룬 마법사일 거야.”

여전히 멍한 눈으로 전방을 바라보고 있던 밀라 테네시가 말을 이었다.

“그게 말이 돼? 난 마흔이 되기 전에 6서클에 오른 마법사가 있다는 소리 따윈 들어본 적이 없어. 게다가 저 얼굴을 봐! 아무리 동대륙인이 서대륙인에 비해 어려보인다지만... 저건 아무리 봐도 너나 나보다 아래잖아.”

“쯔쯔... 잊었어, 밀라? 마력이 경지에 오르면 노화는 얼마든지 늦출 수 있다고.”

“그것도 어느 정도지. 저렇게 어려지려면 최소한 소드마스터나 7서클... 헙!”

스스로가 내뱉은 말에 경기를 일으키며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밀라 테네시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테리 헤링스가 어색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설마...”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추락한 아투비들의 잔해 사이로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는 스노우.

그를 바라보는 테리 헤링스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아... 그래, 그 정도는 아닐 거야.”

#3

‘하아아아아... 젠장, 쟤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짜증나는 상황에 직면한 나는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밀라 테네시라는 여기사가 건네준 장검(테리 헤링스의 허리춤에 있던)으로 몬스터들을 도륙하며 길을 뚫길 두 시간.

일반 벌의 수천 배는 될 듯한 몸집의 몬스터 벌떼가 습격해 왔고.

[파이어월(C) : 불로 이루어진 거대한 장막을 생성한다. 장막의 크기에 따라 소모되는 마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불 속성이나 내성을 지닌 상대에게는 효과가 하락한다.]

[윈드커터(C) : 눈에 잘 띄지 않는 바람의 칼날을 생성한다. 칼날의 크기가 커질수록 소모되는 마력이 증가한다. 최대 5개의 칼날을 생성할 수 있다.]

두 가지 스킬을 이용해 어렵지 않게 전멸시킬 수 있었다.

밀라 테네시의 말에 따르면, 대수림으로 들어온 백작가의 세 기사 중 한 명은 이미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베른 요새로 떠난 상황이었다.

대수림 내부에서 소수 정예로 활동할 수 있는 건 엑스퍼트 상급에 오른 기사나 5써클 이상의 마법사, 그도 아니면 기간트 오너 이외엔 없었기에.

그런 고급 전력들이 낭비되는 것을 막고자, 우리는 최단 거리를 주파해 대수림과 백작령의 경계인 베른 요새로 향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깐깐해 보이는 여기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청해서 지난 3년간 잡아본 적 없었던 검을 들었다.

S급 육체계열 헌터들의 경우, 고유스킬로 ‘매화검법’이나 ‘아젠베르크 제국 근위대 검술(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인 줄은 모르지만)’ 같은 고급 검술이 뜨기도 했지만.

고작 ‘C급 육체강화’ 강화 스킬을 지닌 내게는 언감생심일 뿐이었다.

때문에 내가 익힌 것이라곤...

[검술마스터리(C) : 검을 이용한 공격을 강화한다. 숙련도에 따라 기본 검술(베기, 찌르기, 막기)을 보정 받는다. 도검류 무기 착용 시 적용. 숙련도(MAX) ? 공격력 200% 상승.]

이게 전부였다.

뭐, 숙련도 100%를 찍은 이후로는 버프 스킬과 함께 사용하면 꽤 쓸 만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내 본질은 ‘전투기 조종사’였던 만큼, 손에 검 같은 걸 쥘 일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아무튼.

그렇게 검과 마법을 가리지 않고 내 실력을 어필했건만.

‘젠장, 왜 표정이 더 안 좋아진 거야.’

아마 거대 벌떼를 상대로 화려한 마법쇼를 보여준 이후인 것 같았다.

그때부터 두 사람(심지어 그 말 많은 테리 헤링스조차도)의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고.

어쩐지 지나치게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 이러면 완전 나가린데...’

브라이드 백작령에 도착하기 전, 두 사람과의 호감도를 최대한 올려두려는 계획은 실패인 듯 했고.

어느새 우리 일행의 눈앞에는.

요새 ‘베른’의 거대한 방벽이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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