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분석이 종료되었습니다
#1
베헤르디아 대수림 동쪽 경계에 위치한 요새 ‘베른’.
이곳은 루페른 왕국과 대수림의 실질적인 경계 역할을 하는 오르비스 대륙 남서부의 ‘알마뉴 산맥’, 그 정중앙에 자리한 폭 1.2km의 거대한 협곡에 세워진 천혜의 요새였다.
대수림을 둘러싸고 있는 알마뉴 산맥 서부는, 대부분이 경사가 90도에 가까운 까마득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몬스터들이 경계를 넘어 인간의 영역으로 침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만 했다.
하지만 베른 요새가 완공된 이후 79년이 흐르는 동안.
모두 4차례의 몬스터 대침공이 발생했으나, 지금껏 단 한 마리의 몬스터조차... 살아서는 베른 요새를 넘어 루페른 왕국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 4차례의 몬스터 대침공을 막아낸 가문이 바로 루페른 왕국 서부의 변경백.
‘브라이드 백작가’였다.
카론 왕국(루페른 왕국의 북부 경계에 맞닿아 있는 국가)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브라이드’라는 성과 왕국 최서부에 위치한 영지를 하사받은 가문의 시초 ‘블레인 브라이드 남작’ 이래로.
이 가문은 무려 1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베헤르디아 대수림의 몬스터들을 막아내기 위해 무수히 많은 피를 흘려왔다.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베른 요새’를 완성한 7대 가주(현 가주는 11대)가 백작으로 승작하며, 왕국 서부의 방비를 총괄하는 변경백이 되었고.
이후 대수림에서 쏟아져나오는 몬스터 부산물로 벌어들이는 막강한 자금력의 대부분을 군사력 증강에 투자.
현재에 이르러서는 무려 루페른 왕국 2대 공작가에 맞먹는 전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이는 타국과의 경계를 지키는 데다 비교적 왕국의 수도에 가까이 위치한 탓에, ‘정치적인 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다른 두 변경백 가문으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는데.
왕국 북동부에 위치한 수도 ‘레니비아’와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대수림의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것 이외에는 관심조차 없는 브라이드 백작가였기에 가능한 특혜였다.
루페른 왕국의 각 가문은 작위에 따라 보유할 수 있는 기간트 수의 한계가 국법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그 제한 내용은 아래와 같았고.
공작가 ? 15기(2)
후작가 ? 10기(4)
백작가 - 5기(9)
자작가 - 2기(23)
남작가 - 1기(46)
그 외 가문의 특성상 예외로 취급되는 세 가문과.
페이튼 백작가 ? 10기(북부 변경백)
자르켄 백작가 ? 10기(동부 변경백)
브라이드 백작가 ? 15기(서부 변경백)
마지막으로 왕실 직속 기간트 전력이 존재했다.
남부 해군사령부 ? 10기
근위기사단(왕성) ? 20기
진격기사단(수도 외곽) - 20기
각 가문이 모두 기간트를 허용 한계까지 보유한다면, 루페른 왕국의 기간트수는 292대가 되어야 하겠지만.
재정적인 이유로 그렇지 못한 가문도 존재했기에, 공식적으로 알려진 왕국의 기간트 보유 대수는 총 276기였고.
이는 오르비스 대륙 17개 국가 중 무려 4위에 해당하는 매우 준수한 전력이었다.
그리고 (공작가와 동등한 수준의)기간트 보유 한계에서 알 수 있듯.
브라이드 백작가를 향한 루페른 왕가의 신뢰는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는데.
혹자는 왕실이 공작가의 체면을 배려해주지 않았다면, 브라이드 가문의 기간 트 보유 한계는 20기까지 늘어났을 것이라 말했고.
혹자는 브라이드 백작가의 기간트 15기를 더해 왕실 직속 기간트가 65기라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백작가 소속 15기의 기간트 중, 무려 10기가 주둔 중인 베른 요새.
건설에 들어간 비용만 왕국의 1년 치 세수를 능가한다는 이 거대한 요새의 성문 안으로.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세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2
“그럼 잠시 뒤에 뵙겠습니다. 편히 쉬시길.”
“...알았다.”
타악
“젠장, 차라리 테리 녀석이라면 편할 텐데.”
베른 요새의 성문 안으로 진입하자마자, 부상 치료를 핑계로 테리 헤링스를 쫓아버린 밀라 테네시.
그녀는 오로지 실용성만을 목적으로 지어진 듯한 거대한 사각 건물로 나를 데려가더니.
그중 방 하나에 집어넣고는, 잠시 뒤에 보자는 말 만을 남긴 채 매정하게 떠나버렸다.
무려 14일이라는 기간을 열악한 환경의 대수림 내부에서 보냈지만.
‘물의 정령’이나 ‘클린(C)’ 스킬을 이용해 언제나 청결을 유지하고 있었던 탓에 샤워 같은 건 할 필요가 없었기에.
잠시 문가를 서성이던 나는, 곧 침대에 걸터앉아 조금 전 보았던 베른 요새의 전경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베른 요새... 확실히 대단하긴 했지.”
테리 헤링스의 말대로 거대한 협곡에 세워진 이 요새의 방벽은 말 그대로 압도적이었다.
더욱 인상적인 점은, 70m 높이의 방벽 위에 100m 간격으로 배치된 12개의 감시탑을 제외하면.
그 어떤 경비 병력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성문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해가 질 무렵이라 성문으로 드나드는 이는 요새의 병사로 보이는 몇몇이 전부였다.
그들은 테리 헤링스와 밀라 테네시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절도 넘치는 동작으로 왼쪽 주먹을 명치 부근에 붙이며 ‘락센(충)!’이라 큰소리로 외쳤는데.
아무래도 이곳 군인들의 ‘경례’ 방법인 것 같았다.
성문을 지나치자 나타난 요새의 내부 역시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최대 10만 병력의 사열이 가능한 초대형 연병장과 1/10 크기의 소형 훈련장다섯 곳, 그리고...
“기간트...”
그 소형 훈련장 중 한 곳에 ‘폴암’보다는 조금 더 작은 기간트 한 기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대거(C) : 출력 500rp. 오르비스 대륙 남서부에 위치한 기사왕국 ‘루페른’산하의 왕립병기창에서 제작된 기간트다. C급 마력엔진과 C급 합금의 조화로 벨런스가 뛰어나다. 루페른제 기간트의 특색인 ‘동화율 보정’이 적용되지 않은 유일한 기간트이며, 주로 훈련용이나 건설용으로 사용된다.]
아쉽게도 폴암을 목격했을 때처럼 ‘파일럿(S)’의 고유스킬들이 상승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제우스와 같은 등급, 그러니까 폴암에 비해 2등급이나 낮은 기체였기에 그런 듯했다.
밀라 테네시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 딱 한 대 존재하는 대거는 파일럿 오너를 지망하는 기사들을 위한 연습용 기간트라고 했는데.
신장 4.5미터에 장갑의 두께는 폴암의 2/3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날렵하게 생긴 기간트였다.
“아, 당장 몰아보고 싶다.”
마치 금단증상처럼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각인 과정 없이 누구나 탈 수 있는 기체라고 했으니, 동기화까지 걸리는 시간은 아마 길어도 3분 정도면 충분할 터였다.
“뭐, 여차하면 동기화고 뭐고 일단 탑승한 다음 대수림 안으로 튀어도 되고.”
물론 고작 500rp짜리 최하급 기간트(폴암은 800rp) 하나 먹겠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었으니, 그런 일을 저지를 생각은 없었지만.
똑똑
한참을 기간트 ‘대거’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자니 짧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정복으로 갈아입은 밀라 테네시가 서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함께 가시죠. 사령관님께서 스노우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베른 요새의 사령관이자,
금십자 기사단 부단장인.
콜튼 프리먼을 만나기 위해.
#3
“반갑습니다, 스노우님. 이 요새를 책임지고 있는 콜튼 프리먼입니다.”
대략 4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콜튼 프리먼은 잿빛 머리카락에 금테 안경을 걸친 마른 체형의 사내였는데.
마치 밀가루 같은 새하얀 얼굴과 고집스레 앙다문 입술 탓에 기사보다는 학자나 행정가가 더 어울릴 법한 인상이었다.
사령관실 내부에는 콜튼 프리먼을 제외하고도 4명이 더 존재했는데.
사실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사람들의 면면이 아닌 어지럽게 올라오는 메시지창이었고.
그 메시지창의 진원지는 로브를 깊숙이 눌러 쓴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네 사람의 손목이었다.
파아아아아앗
[폴암(B-) : 출력 800rp. 오르비스 대륙 남서부에 위치한 기사왕국 ‘루페른’산하의 왕립병기창에서 제작된 기간트다. C+급 마력엔진을......]
제일 젊어 보이는 한 사람의 손목에 나타난 메시지창은 테리 헤링스와 밀라 테네시의 기간트와 같은 B-급 기체 ‘폴암’이었다.
문제는 그 이후에 나타난 메시지였는데...
[최초로 B등급 이상의 기체를 발견했습니다. 분석 완료까지 1분 46초. 기체에서 시선이 떨어질 시 분석이 초기화됩니다.]
[최초로 B+등급 이상의 기체를 발견했습니다. 분석 완료까지 3분 29초. 기체에서 시선이 떨어질 시 분석이 초기화됩니다.]
[최초로 A-등급 이상의 기체를 발견했습니다. 분석 완료까지 7분 37초. 기체에서 시선이 떨어질 시 분석이 초기화됩니다.]
‘미친... 대박이다!’
나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평정을 가장했다.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아시리라 생각하지만... 스노우라는 이름을 얻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아, 밀라에게 들어 알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을 겪으셨다는데, 하루 빨리 기억이 돌아오길......”
사실 콜튼 프리먼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내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있었는데.
이는 나로서도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파아아아아앗
[분석이 종료되었습니다.]
[제블린(B) : 출력 900rp. 오르비스 대륙 남서부에 위치한 기사왕국 ‘루페른’산하의 왕립병기창에서 제작된 기간트다. B-급 마력엔진과 B-급 합금의 조화로 벨런스가 뛰어나다. 루페른제 기간트의 특색인 ‘동화율 보정’이 적용되어 등급이 한 단계 상승했다.]
“그런데.... 이곳에 온 목적이 있으십니까?”
“그건 테리 헤링스라는 기사가 먼저 제안을......”
파아아아아앗
[분석이 종료되었습니다.]
[크로스보우(B+) : 출력 1100rp. 오르비스 대륙 남서부에 위치한 기사왕국 ‘루페른’ 산하의 왕립병기창에서 제작된 기간트다.
B급 마력엔진을 탑재하여 동급 기간트 대비 출력이 떨어지지만, A-급 합금으로 이루어진 기체의 견고함은 동급 대비 매우 뛰어난 편. 루페른제 기간트의 특색인 ‘동화율 보정’이 적용되어 등급이 한 단계 상승했다. 루페른 왕국의 2세대 주력 기간트.]
“아무래도 가장 오랜 시간 함께한 테리가 편하실 테니, 녀석의 부상이 완치된 이후에 브라이드 영지로 출발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몸 하나만큼은 튼튼한 녀석이니, 아마 일주일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럼 말씀하신 대로 일주일 후에......”
파아아아아앗
[분석이 종료되었습니다.]
[코페시(A-) : 출력 1400rp. 오르비스 대륙 남서부에 위치한 기사왕국 ‘루페른’ 산하의 왕립병기창에서 제작된 기간트다. A-급 마력엔진과 A-급 합금의 조화로 벨런스가 매우 뛰어나다. 루페른제 기간트의 특색인 ‘동화율 보정’이 적용되었다. 현 루페른 왕국의 주력 기간트.]
[고유스킬 ‘위대한 결속’의 숙련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마력기체’의 숙련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한계돌파’의 숙련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원격조종’의 숙련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수복’의 숙련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호랑이 교관’의 숙련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격납고’의 공간이 소폭 확장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 무슨 수로 대화에 집중할 수 있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