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곰의 탈을 쓴 여우
#1
베른 요새의 내부는 넓어도 지나치게 넓었다.
폭이 1.2km나 되는 방벽 역시 엄청난 규모이긴 했지만.
협곡 안쪽을 깎아내기라도 한 건지, 둥그런 원형태로 지어진 요새 내부는 그 지름이 적어도 방벽의 3배는 될 것 같았다.
이미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쥐 죽은 듯한 정적에 휩싸인 대수림과는 달리.
요새 내부는 곳곳에 달린 마법등으로 인해 여전히 사람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심지어 훈련장 중 한 곳에서는.
야구장의 라이트를 닮은 거대한 마법도구를 이용해, 어둠을 완벽하게 물리친 1000여 명의 병사들이 열띤 훈련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베른 요새의 적은 오로지 대수림의 몬스터들이다 보니, ‘등화관제’같은 건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한 모습.
그리고 소스라칠 듯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내 앞의 군인 역시, 등화관제 같은 건 개나 주라는 듯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중이었다.
“아, 안 됩니다! 기간트 무단 탑승은 중범죄예요. 아무리 스노우님이라 할지라도 감옥에서 몇 년은 썩게 될 겁니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니까요! 저 기간트에 탑승할 수 있는 건 베른 요새 소속 엑스퍼트들 뿐입니다!”
꽤 단정해 보이던 첫인상과는 달리, 기간트와 내 사이를 갈라놓은 채 펄쩍펄쩍 뛰며 양손을 휘휘 젓는 조나단 니엘스.
여기서 좀 더 몰아붙였다간 눈물이라도 찍어낼 기세였다.
‘하긴, 나도 누군가 제우스의 조종석에 앉는 걸 봤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 줬을 테니까.’
기간트 같이 멋들어진 전략 병기라면 더더욱 철저하게 관리하려 할 테지.
뭐, 그런 것 치고는 이렇게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방치되어있는 게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아쉽군... 그럼 이걸 타기 위해선 콜튼 프리먼 사령관에게 허락을 받으면 되는 건가?”
“아, 그럼요! 당연하죠! 그분이 허락하시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흐음, 그럼 아쉽지만 오늘은...”
내가 물러서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조나단 니엘스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쩝... 직무에 충실할 뿐인 이 녀석을 더 괴롭혀 봐야 뭐 하겠어?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 전 출력 1400rp의 ‘코페시’까지 확인한 마당에, 고작 500rp에 불과한 ‘대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킬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분명 ’코페시‘라면 금십자 기사단 단장의 전용기라고 했는데, 부단장이 가지고 있군... 하긴, 3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으니 기간트도 발전을 했겠지.
그럼 브라이드 영지에 있다는 단장은 그보다 더 좋은 걸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어.’
‘코페시’나 ‘크로스보우’, ‘제블린’의 실물을 보지 못한 것 역시 매우 아쉬웠지만.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으니, 그 안에 분명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쉬움을 남긴 채 숙소로 돌아가려는 찰나.
“이봐, 사령관님 대신 내가 허락해주지.”
뒤편에서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이 들려왔다.
나는 몸을 돌려 소리의 진원지를 확인했고.
그곳에는 신장 192cm의 테리 헤링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의 사내가 빙글빙글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에, 이쪽에 호의를 가지고 접근한 것이 아님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앤더슨 경!”
놀란 조나단 니엘스의 입에서 터져 나온 고함으로 인해 녀석의 성이 앤더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앤더슨’이란 성을 가진 브라이드 백작가의 기사라면... 테리 헤링스, 밀라 테네시와 함께 대수림 탐사에 나섰던 나머지 한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나는 시선을 내려 앤더슨의 손목을 확인했다.
파아아아앗
[폴암(B-) : 오르비스 대륙 남서부에 위치한 기사왕국 ‘루페른’ 산하의 왕립병기창에서 제작된 기간트다. C+급 마력엔진을 탑재......]
그리고 이어진 고유스킬 ‘호랑이 교관’의 훈련병 지정(탐색).
파아아아앗
[캘빈 앤더슨 (B-) : 27세, 루페른 왕국 브라이드 백작가 소속 기사 218cm, 115kg 파일럿 재능 ? 56/66(현재/최대치)
훈련 가능 기체
제우스(C) - 숙련도 0/88
토마호크 SS7 스피릿(E+) - 숙련도 0/100]
예상대로 녀석은 금십자 기사단 소속 기간트 오너.
‘캘빈 앤더슨’이었다.
#2
‘젠장,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브라이드 백작령 소속의 작은 마을 중 하나에서 태어난 조나단 니엘스.
가난한 집안의 9남매 중 일곱 번째 자식이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다는 소리를 귀에 달고 살았었다.
그의 나이 16세.
인재를 아끼는 브라이드 백작의 배려로, 남부 공작령에 위치한 ‘베셀도로프아카데미’의 군사학부에 입학할 수 있었고.
5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당당하게 졸업장을 쟁취한 이후, 브라이드 백작령으로 돌아와 백작가의 가신이 되었다.
일반적인 ‘사용인’이 아닌, 소수의 진짜 ‘신하’가 된 것이기에 그의 마을에서는 축제가 열렸을 정도.
올해로 취업 7년 차가 된 그는 진급을 거듭해 동기 중 가장 빠르게 2급 작전 참모(500인대장급)가 되었고.
현재는 브라이드 백작령의 최요충지인 베른 요새, 그중에서도 무려 사령관 직속의 ‘제1군단(금십자 기사단 9인과 엔지니어 다수, 그리고 그들을 서포트 할 2000병력으로 구성)’ 소속으로 활약 중이었다.
말 그대로 탄탄대로인 인생.
2급 작전참모(2년 차)인 그의 월급은 8.3골드(830실버, 83000브론즈)였는데.
베른 요새라는 근무지의 특성상, 각종 수당이 더해지면 보통은 10골드가 훌쩍넘어갔다.
루페른 왕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축에 속하는 브라이드 백작령 내 평민 가정(8인 기준)의 한 달 생활비가 고작 5골드 정도에 불과했으니.
평민 중에서도 가난한 편에 속하는 집안의 아들인 그의 성공은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런 그는 현재...
“젠장, 이젠 나도 몰라. 캘빈 앤더슨 이 나쁜 새끼...”
단정했던 밤색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훈련장 외부에 비치된 광범위 마법등을 켜기 위해 털레털레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이내 점등 장치에 도착한 조나단 니엘스(오러 유저 상급)가 엔진 점화 장치에 얼마간의 마력을 불어넣었고.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악
거대한 마법등이 찬란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낮처럼 밝아진 훈련장의 한 가운데.
두 대의 기간트가 약 100여 미터의 간격을 둔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4.5m vs 6.5m.
4.7톤 vs 8.6톤.
외관상으로 보이는 대거와 폴암의 덩치 차이는 마치 10세 꼬맹이와 헤비급 격투기 챔피언을 방불케 했으나.
“내 눈이 잘못 됐나?”
어쩐 일인지 조나단 니엘스의 눈에는, 자그마한 덩치의 대거가 더욱 더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기간트 ‘대거’에 탑승하는 걸 허락해주는 것에 대한 조건으로 기간트 대련을 제안한 캘빈 앤더슨.
군령에 따르자면 연습용 기간트의 사용 허가는 오로지 요새의 ‘사령관’ 만이 가능하지만.
기간트 오너인 캘빈 앤더슨의 경우, 이를 어기더라도 잔소리 몇 마디를 듣는 선에서 그칠 확률이 높았다.
“쩝... 다른 기간트라면 몰라도, 고작 대거니까. 제대로 된 벌이 내려질 리는 없겠지.”
내심 자신을 골탕 먹인 캘빈 앤더슨에게 엄격한 벌이 내려지길 바라는 조나단 니엘스였지만.
그는 곰처럼 우락부락한 외관과는 달리, 실제 성격은 요새에 주둔 중인 금십자 기사단원 중 제일 약삭빠른 편이었기에.
스스로에게 손해가 갈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인간이란 걸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직접 대련이 아닌, 기간트 대련을 제안한 거겠지.”
테리 헤링스의 실종으로 인해, 베헤르디아 대수림과 베른 요새를 두 번이나 왕복해야 했기에 잔뜩 심통이 났을 테지만.
정작 분풀이 대상자가 되어주어야 할 테리 헤링스는 부상으로 인해 병동에 입원해 버린 상황이었기에.
자신의 개고생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스노우로 타겟을 바꾼 것 같았다.
하지만 상대는 무려 요새 최고 실력자들이 공인한 6써클 전투마법사이자 오러엑스퍼트 최상급에 이르는 전사였고.
캘빈 앤더슨은 복귀한 이후 그 정보를 접한 게 틀림없었다.
“직접 맞붙으면 무조건 개박살 날 테니까. 하여간 잔머리는...”
설령 오러마스터라 하더라도, 기간트 운용 능력이 형편없다면 엑스퍼트 중급의 기사에게도 덜미를 잡힐 수 있었다.
물론 기간트 오너로서의 재능이 밑바닥 중의 밑바닥이 아니고서야 그런 일이 벌어질 확률은 거의 없겠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로.
본신의 힘으로 하급이나 중급 기간트를 상대하는 게 가능한 소드마스터 중에는, 아예 기간트를 터부시하는 인물들도 존재했다.
기간트에 탑승하자마자 신을 내며 훈련장 중앙으로 향한 캘빈 앤더슨과는 달리.
약 3분 정도의 시간을 대거의 오른쪽 다리에 손을 댄 채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던 스노우.
스노우의 본래 기간트 운용 실력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린 데다.
설령 그게 아니라고 한들, 처음 탑승한 기간트를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리 만무했다.
“동화율이 50%라도 나오면 다행이지. 그가 아무리 강자라고 해도, 캘빈 역시 엑스퍼트 중급 끝자락의 강자니까. 게다가 지난 2년간 익숙해진 폴암과 함께 하고 있으니...”
이 승부는 해보나 마나라고 생각했다.
제자리에서 몸을 풀 듯 몇 차례 폴짝폴짝 뛴 대거가.
고작 평균 출력 500rp짜리 기간트라고는 믿기지 않는 스피드를 선보이며.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드롭킥으로 캘빈 앤더슨의 폴암을 날려버리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