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17화 (17/169)

17화 예상외의 재능

#1

베른 요새에서의 이틀 차 아침이 밝았다.

지난밤에는 이쪽 세계로 넘어온 이후 처음으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침대에 누운 뒤 얼마간은 기간트를 운용하던 당시의 감각이 아른거리는 바람에, 잠을 설칠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었지만.

마력의 회복 정도로 봤을 때, 대략 8시간 정도는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잠을 잔 것 같았다.

“뭐, 꿈속에서도 내내 기간트를 타고 있긴 했지만.”

이건 ‘파일럿 특성’ 각성자라면 일종의 숙명 같은 거라고나 할까?

이 특성을 각성한 헌터들의 특징이, 새로운 기체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것이었으니까.

하물며, 무려 상상 속에서만 그려왔던 인간형 전투유닛 아니었던가.

“......#$......#%$#......”

“...#%^&......$%#$......”

누군가가 나누는 대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창문이 있었는데.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 사이로 들어온 한 줄기 빛이 방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끄으으으으...”

나는 천천히 침대를 빠져나와 한 차례 기지개를 켠 다음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밖으로 내다본 요새 내부는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로 인해 북적거리고 있었다.

10여 개의 훈련장 중 절반 정도는, 이미 각각 수백에서 수천 병사들의 훈련이 진행 중이었고.

갑옷을 잘 차려입은 몬스터 사냥꾼들과 빈 수레를 끄는 짐꾼들이 무리를 이루어 성문을 통과하고 있었으며.

요새 한편의 ‘몬스터 사체 거래소’에서는 어제의 성과를 거래하는 상인들과 사냥꾼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쿵쿵쿵쿵쿵쿵쿵쿠웅...

묵직한 기동음으로 요새의 아침을 뜨겁게 달구는 기간트의 훈련 장면이었다.

“아침부터 다들 열심히군. 그런데... 대체 저게 다 몇 명이야?”

기간트가 기동 중인 훈련장 주변에는, 누가 봐도 기사로 보이는 인원 십 수명이 열을 맞춰 서 있었다.

내게는 이곳의 기사나 마법사들처럼 상대의 오러나 마력을 감지해 경지를 판단하는 능력 같은 건 없었지만.

특성을 3개나 각성하며 예민해진 감각으로 인해, 어지간한 상대의 기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엔, 저들은 막 엑스퍼트 중급에 오른 테리 헤링스에 비해 한두 단계 정도는 떨어지는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테리 헤링스가 말하길, 기사단에 기간트 오너를 지망하는 엑스퍼트들의 숫자는 총 17명이라고 했었다.

“하나, 둘, 셋...... 열여섯? 아침부터 거의 다 몰려나왔군. 지난밤의 일이 자극이 된 건가?”

대련 내내 두들겨 맞은 캘빈 앤더슨으로서는 후배들 보기가 조금 부끄러울 수도 있을 테지만.

수준 차이도 어느 정도라야지.

녀석과 나 사이에는 도무지 메우지 못할 간극(間隙)이 존재했고.

한밤의 대련을 구경한 사람 중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터였다.

아무튼, 그 대련으로 인해 예비 기간트 오너들의 가슴에 불이 붙어버린 것 같긴 한데...

쿠당탕

아무래도 그 불길은,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듯했다.

“대체 뭐냐, 저 괴상한 스텝은?”

대거에 탑승 중인 이름 모른 엑스퍼트.

아무래도 그는 어제 내가 선보인 권투 스텝을 따라 하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쿠우우우웅

콰당

쿠당탕

매번 채 세 걸음도 옮기지 못한 채 스텝이 꼬였고.

그때마다 지면에 처박히길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대거가 우스꽝스럽게 넘어질 때마다, 이를 구경하고 있던 나머지 예비오너들이 장난스레 야유를 퍼부어대는 것 같았다.

그 꼴을 본 나는 간단하게 세안을 마친 뒤 방을 나섰다.

목적지는 기간트 훈련장.

그곳에 모여 쓸데없는 짓을 벌이고 있는 예비 오너들의 재능을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숙소를 나서 훈련장으로 향하는 도중, 마주치는 이들 중 몇몇이 흠칫 놀라며 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벌써 내 얼굴을 알아본다고? 날 제대로 본 사람은 별로 없을 텐데... 아, 머리카락이랑 피부색 때문이로군.’

검은 머리카락이라면, 드물긴 하지만 베른 요새에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인종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고, 머리카락까지 검으니 더 쉽게 알아볼수 있는 것일 테지.

나는 그들의 인사에 가벼운 목례(目禮)로 답하며 훈련장에 도착했다.

그리곤 조용히 예비 기간트 오너들의 뒤편에 섰다.

‘그래도 제대로 된 녀석이 하나 정도는 있겠지?’

나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그들의 훈련 장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음 녀석도.

그다음 녀석도.

그다음 다음 녀석도.

그다음 다음 다음 녀석도...

그 누구도 내가 보여준 움직임의 1/10조차 재현하지 못한 채 분루를 삼키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도 그럴게...

[타일러 보이드 (D+) : 24세...... 파일럿 재능 ? 40/49(현재/최대치)......]

[체이스 에드먼즈 (C-) : 23세...... 파일럿 재능 ? 42/53(현재/최대치)......]

[데릴 젠트리 (C) : 28세...... 파일럿 재능 ? 45/56(현재/최대치)......]

.

.

.

[헨리 바티스타 (D+) : 27세...... 파일럿 재능 ? 44/49(현재/최대치)......]

고유스킬 ‘호랑이 교관(S)’의 부속 스킬, ‘훈련병 지정(탐색)’으로 확인한 대부분 오너 지망생들의 재능은 처참한 지경이었다.

그나마 16명 중 단 두 명만이 차기 금십자 기사단원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알렉스 그리척 (B-) : 23세...... 파일럿 재능 ? 44/68(현재/최대치)......]

[마일스 크루즈 (C+) : 24세...... 파일럿 재능 ? 45/64(현재/최대치)......]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훤칠한 미남인 알렉스 그리척의 경우, 현 단원들 사이에서도 중간은 갈 만큼 썩 괜찮은 재능을 지니고 있었고.

2미터에 가까운 근육질 흑인 마일스 크루즈 역시, 말단이나마 금십자 기사단에 이름을 올릴 정도는 되었다.

‘그나마 평타가 둘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16번째 예비 오너인 마일스 크루즈를 끝으로 재능 탐색을 마치려던 순간.

갑작스럽게 ‘훈련병 지정’ 스킬의 범위 안으로 들어온 한 인물이 있었고.

나는 무심결에 스킬을 사용하고 나서야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응?”

“네?”

17번째 예비 훈련병(?)의 정체는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조나단 니엘 스였다.

지난밤 기간트 대련을 막지 않았다는 이유(대체 무슨 수로?)로 직속상관에게 엄청나게 깨지는 걸 본 것 같았는데.

과연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와 있는 걸로 보아.

밤새워 시말서라도 작성한 듯했다.

그런데...

“어...”

“네?”

문제는 다크서클이나 시말서 따위가 아니었다.

조나단 니엘스의 머리 옆에 나타난 메시지창.

그걸 확인한 나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조나단 니엘스(A) : 27세, 루페른 왕국 브라이드 백작가 소속 작전참모 188cm, 81kg 파일럿 재능 ? 0/89(현재/최대치)

훈련 가능 기체

제우스(C) - 숙련도 0/100

토마호크 SS7 스피릿(E+) - 숙련도 0/100

대거(C) - 숙련도 0/100]

지구에서 이곳으로 넘어온 이후.

처음으로 발견한 A급 재능의 파일럿.

나는 무심결에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멍청한놈...”

조나단 니엘스의 눈이 퉁방울처럼 커졌다.

“네에에에에에에?”

#2

조나단 니엘스의 재능에 대해서는 딱히 누군가에게 언급하진 않았다.

사실 직접 훈련성과를 보여주지 않는 이상, 재능을 확인시켜 줄 방법 같은 건 없었으니까.

다만 브라이드 영지로 향하는 일행에 조나단 니엘스를 합류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일을 잘하기는 하지만 대체 불가의 인물은 아니었던 만큼, 내 요청은 어렵지 않게 통과되었다.

“어쩌면 백작과의 협상(?)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언제나 그렇듯, 사용 가능한 패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조나단 니엘스를 단시간에 쓸만한 기간트 오너로 키워내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아마 내 가치는 지금보다 몇 배나 뛰어오를 테니까.

문제는 조나단 니엘스 본신의 실력이 고작 오러 유저 상급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카데미 시절 필수과목으로 이수한 ‘검술’과 ‘기초 오러 트레이닝’ 덕분에, 일반 병사에 비하면 꽤 강력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그의 전공은 어디까지나 ‘군사학’이었기에, 기사를 지망하는 이들에 비해서는 그 경지가 낮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엑스퍼트의 벽을 뚫지 못하면 기간트를 제대로 운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훈련이고 뭐고, 고작 오러 상급 정도의 실력으로는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마력이 바닥나버릴 확률이 높았으니까.

“근데 이건...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는 문제지.”

내 경우엔 오러 유저와 오러 엑스퍼트의 차이가 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이미 오러 엑스퍼트 직전의 단계인 유저 상급(유저 등급에는 최상급이 없다)에 올라 있으니.

고작 한 단계를 넘어서는 게 그렇게 어려울 리 없지 않은가(나중에 이게 얼마나 무식한 생각인지 알게 되었지만)...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녀석은 군인이잖아. 군인이라면 까라면 까고, 엑스퍼트가 되라면 되야지.”

나는 이미 내 수행원 역할을 하기 시작한 조나단 니엘스를 바라보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오러를 좀 더 수련할 생각은 없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뜬금없이 그게 뭔 개소리냐는 표정.

나는 그의 전신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키에 비해 근육이 적다. 군인으로서 좋은 몸은 아니야.”

“아, 그건 아무래도 제가 참모이다 보니...”

“참모가 뭐? 넌 참모니까 적이 쳐들어오면 도망이라도 칠 셈인가? 방벽이 뚫리고, 몬스터들이 요새 내부에 들끓어도 검을 들지 않을 거냔 말이다.”

“그런 말이 아니라...”

“좋아, 어차피 당장 할 일도 없으니 내가 수련을 도와주도록 하지.”

“네?”

수련을 도와주겠다는 말에 녀석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전혀 고맙지 않은데요?”

“시끄럽고, 따라와라.”

나는 조나단 니엘스를 데리고 비어있는 훈련장으로 향했다.

얼떨결에 검을 쥐고 나와 대치한 그를 향해 쏟아지는 것은...

요새 내 병사와 기사들의 부러움 가득한 시선이었다.

“스노우님이 직접 지도해 주시려나 봐!”

“최상급 오러 엑스퍼트의 가르침이라니...”

“기연이로군.”

“저분은 6써클 전투마법사이기도 해. 그러니까 제국의 ‘천공검’보다 더 뛰어난 마검사라고.”

“근데 검을 쓰는 것 같지는 않던데.”

“뭔 상관이야? 검으로 썰든, 주먹으로 패든.”

“마검사라며?”

“보통 그렇게 부르자나. 아니면 마권사라고 하던가.”

“큭, 하긴... 마검사면 어떻고, 마권사면 어때. 중요한 건 조나단 저 녀석이 기연을 얻었다는 사실이지.”

“부럽다...”

하지만 조나단 니엘스는 그런 시선을 즐길 틈이 없었다.

퍼어어억

“커헉!”

콰아아아아앙

“끄악!”

퍼어어어엉

“끄아악! 뜨, 뜨거워! 스노우님 마법을 쓴다는 말은 없었잖습니까!”

“쓰지 않는다고 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젠장!”

나는 조나단 니엘스가 완전히 퍼져버리지 않을 정도로만 힘을 썼고.

덕분에 대련은 장장 30분 동안이나 이어졌다.

“헉, 헉, 헉, 헉... 사, 살려주세요.”

한계까지 힘을 소진한 뒤 바닥에 드러누워 버린 조나단 니엘스가 나를 원망스런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녀석의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안 죽는다. 내 수행인으로 있는 동안은 매일 이 시간에 대련을 할 테니, 늦지 않게 나오도록.”

“네? 매, 매일이요?”

나는 더이상 대꾸하지 않은 채 훈련장을 벗어났다.

파일럿 훈련이라면 몰라도, 오러의 경지를 올리는 수련 같은 건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만고불변의 법칙 두 가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안되면 될 때까지 굴리면 된다.

강철은 두드릴수록 강해진다.

나는 볼을 스치는 산뜻한 바람을 만끽하며 다짐했다.

‘반드시 오러 엑스퍼트로 만들어주마... 조나단 니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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