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후작가의 의뢰(1)
#1
베른 요새 입성 5일 차.
베헤르디아 대수림을 지척에 둔 이곳에서 4번의 밤을 보냈다.
의외였던 건, ‘오르비스 대륙 5대 마경’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요새의 하루하루는 매우 평화롭게 흘러갔다는 사실이다.
요새의 상시주둔군인 5만 병력은 격일로 나누어 훈련을 진행했는데.
이틀에 한 번이라면 꽤 할만한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 온종일 쉬지 않고 이어지는 훈련의 강도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게다가 각 천인대(요새 주둔군은 50개의 천인대로 이루어져 있다) 별로 한 달에 두 번. 대수림 초입에서 이루어지는 몬스터들과의 실전 훈련에서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한 상황마저 빈번하게 발생하곤 했다.
1년에 한 번, 대략 한 달 동안 진행되는 대규모 몬스터 토벌을 위해.
나머지 12달(이곳은 1년이 13개월) 동안 이런 훈련을 반복하는 베른 요새 병사들의 전투력은, 루페른 왕국 전체에서도 감히 견줄 군대가 없는 수준이라고 한다.
하지만 훈련과 작전 시를 제외하면 꽤 수평적인 주둔군의 분위기와 요새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복지 시설, 거기에 백작령과 왕국을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인해 병사들의 만족도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물론 루페른 왕국의 중앙군에 비해서도 훨씬 더 높다는, 요새 상시주둔군의 ‘급여’가 그들이 느끼는 만족감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긴 할 테지만.
아무튼, 그토록 만족도 높은 군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사고를 치는 병사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그런 병사들과 9명의 기간트 오너, 거기에 50명이 넘는 엑스퍼트급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이곳 베른 요새에서. 함부로 문제를 일으킬 만큼 간 큰 용병이나 몬스터 헌터, 상인이 있을 리도 만무했고.
하지만 현재.
요새 내에는 평소완 다르게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는 일단의 무리가 존재했다.
그들은 주로 사령부 건물과 기간트 정비창을 왕복하며 분주히 무언가를 준비하는 모습이었는데...
“뭐야? 무슨 일이라도 있나?”
내 물음에 지면에 대(大)자로 뻗어 있던 조나단 니엘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답했다.
“헉, 헉, 헉... 배, 백슬리 후작가의 의뢰 때문이에요. 헉, 아이고 죽겠다...”
오전 대련(을 빙자한 일방적인 구타)을 마친 조나단 니엘스는 오른쪽 콧구멍에서 흘러내리는 코피를 옷소매로 스윽 닦아낸 뒤,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헤링스경이 실종되는 바람에 중단됐던 탐사를 재개한답니다. 이번에는 어번 경(크로스보우 오너)을 포함한 다섯 명의 오너가, 조금 더 깊숙한 지역까지 들어간다고 하더라고요.”
훈련을 나오는 와중에도 사령부 내의 정보를 소홀히 취급하지 않은 건 칭찬해줄만 했지만.
너덜너덜해진 꼴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녀석의 몰골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쯧... 처음엔 옷이라도 멀쩡하게 입고 다니더니.”
대련 첫날엔 멋들어진 군복에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레더아머까지 차려입고 나왔던 조나단 니엘스였다.
하지만 4일째인 오늘은 어제 입었던 옷을 빨지도 않은 채 그대로 입고 나온게 분명해 보였다.
“아, 아니!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네놈이 더러운 게 내 탓이라는 거냐?”
“새 옷을 입고 나와봤자 금방 너덜너덜해진단 말입니다! 벌써 두벌이나 버렸다고요! 게다가 갑옷! 이 갑옷도 벌써 두 개쨉니다! 이게 돈이 얼마짜린데!”
조나단 니엘스는 군데군데 찢기고 뜯겨나간 레더아머를 벗어들며 버럭버럭 고함을 질러댔다.
어릴 때 워낙 가난하게 살아서 그런지, 금전적인 부분에서는 엄청나게 예민한 녀석이다.
그런데 그건 그거고...
“건방지군.”
나는 검지로 녀석을 가리키며 스킬을 시전했고.
[일렉트릭 쇼크(C) : 최대 3만 볼트의 전류를 발생시킨다. 전류의 양이 높아 질수록 마력의 소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매질을 공유할 경우 시전자 역시 스킬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치지지지지지지지직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수천 개의 ‘공용스킬’ 중 손에 꼽을만한 위력을 지닌 스킬이지만.
자칫 실수하면 시전자마저 감전될 우려가 있어 사용하기 까다로운 스킬이었다.
최대 출력을 발휘할 경우, 고작 D급 헌터 수준인 조나단 니엘스는 정말로 죽어버릴 수도 있었기에.
스킬의 위력은 최고치의 1/10 이하로 낮춰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녀석은 눈동자가 돌아가며 정신을 잃어버렸고.
털석
또다시 지면에 대(大)자로 뻗어버렸다.
그리고 이내.
다다다다다다다다...
대련 2일 차부터 훈련장 한편에서 대기 중이던, 요새에 파견된 한 신관이 허겁지겁 달려나와 조나단 니엘스에게 신성력을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스, 스노우경. 니엘스씨가 숨을 안 쉽니다!”
“......?”
“호흡이 멈췄다고요!”
“죽으면 안 된다.”
“네?”
“살려라.”
“......”
#2
대지의 신 ‘마가르’의 종이라는 멜빈 그리피스, 그는 정식 사제 서임 11년 차의 베테랑이었고. 경력에 걸맞게 매우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그는 고작 일개 작전참모를 위해 몸소 움직일만한 짬밥은 아니었는데.
베른 요새에는 왕국의 각 교단에서 파견된 47명의 사제(대지 교단 사제 28명)가 존재했고, 35살의 멜빈 그리피스는 그들 중 4번째로 품계가 높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실력은 한 마디로 굉장했다.
얼핏 보기에도 외상에 대한 치유술은 어지간한 A급 힐러 이상이었고, 듣기로는 몸 내부의 질병 역시 웬만한 것은 치료가 가능하다고 했으니까.
처음 멜빈 그리피스가 응급요원(?)을 자청한 이유는 순전히 나에 대한 호기심때문이었다.
‘저는 운이 따라주어 루페른의 헤이스틴 후작과 이펜타르크 제국의 저 이름높은 ‘천공검’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확실히 엄청난 실력을 지닌 마검사였죠. 하지만 그 두 사람조차 기간트를 타고 서는 스노우경 만큼 능숙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이는 각 교단의 성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이고요.’
신성력을 기반으로 하는 성기사들의 경우, 그 능력의 특성상 기간트를 운용하며 (신성)마법을 사용하는 게 훨씬 더 수월하다고 한다.
뭐, 그건 그렇고...
재밌는 사실은,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던 멜빈 그리피스가 은근슬쩍 자신이 속한 ‘대지 교단’으로 나를 스카웃하려 했다는 것이다.
‘성기사?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사제에 비해서는 예외를 좀 많이, 폭넓게 인정하는 편입니다.’
‘예외?’
‘어린 시절부터 성기사 후보로 키워진 아이들의 경우,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이 최우선 사항입니다. 하지만 외부 영입, 특히 그 대상이 뛰어난 기간 트 오너일 경우에는 실력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죠. 물론 본교의 품으로 들어온 이후에는 개종하겠다는 ‘확언’을 해야만 합니다.’
‘확언?’
‘신상 앞에서 ‘마가르님을 따르겠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그건... 뭔가 강제력이라도 있는 건가?’
‘아뇨,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
‘하하하, 당황스러우실 수도 있겠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교단이 외부에서 영입하는 성기사들은 일종의 용병 개념이거든요. 그걸 교단도 알고 영입대상자도 알고 있죠.’
‘왜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하지?’
‘대부분... 아니, 정상적인 교단이라면 어디라도. 돈으로 사람을 사는 행위를 금하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미 ‘교인’이 된 인물에 대한 지원이라면, 얼마를 퍼붓든 상관없으니까요.’
‘교단을 공격하는 미친놈이라도 있나 보군.’
‘네, 대부분의 교단은 가능한 많은 나라에 지부를 두려고 하지만... 본단은 한곳 뿐이니까요.’
‘그게 문제가 되나?’
‘평상시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대륙의 정세가 불안한 시기라면 문제가 되죠.’
멜빈 그리피스는 오르비스 대륙의 남서부 끝자락인 이곳 베른 요새에 파견 나와 있는 상황임에도, 대륙이 돌아가는 정세에 대해 매우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현재 두 제국 중 한 곳과 왕국 두 곳에서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데다.
오랜 원수지간인 대륙 동부의 ‘사막왕국 카이샨’과 ‘마라몬트 왕국’ 간의 전쟁이 1년 넘게 지속되는 등.
오르비스 대륙(서대륙) 전체에 짙은 전운이 감돌고 있다고 한다.
‘전란의 시대가 도래하면 교단 역시 시대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저희 대지 교단의 본단은 루페른 왕국에 있죠. 만약 대지 교단이 국교인 ‘베로나 왕국’이나 ‘칼루아 왕국’과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리 큰 영향은 없을 테지만. 투쟁 교단을 국교로 삼고 있는 ‘바이런 왕국’과 전쟁이 벌어진다면 본교의 교인과 신도들은 엄청나게 탄압받게 될 겁니다.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탄압의 강도는 점점 더 심해지겠죠.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교인과 신도들을 지켜야만 합니다.
이것이 대륙의 각 교단들이 교리를 비틀면서까지 강자들을 영입하려는 이유죠. 그리고 직접적으로 전쟁에 휘말리지 않더라도, 이런 시대에 힘을 가지는 것은......’
이틀 차 저녁에 나를 찾아온 그는. 무려 1시간 동안 대륙의 정세를 설파하고 난 뒤, 다시 또 1시간을 대지의 신 마가르를 찬양하는데 할애하며 스카웃을 시도했다.
나는 그의 말을 모두 듣고 난 다음.
딱 세 마디를 던졌다.
‘교단에 가입하면 곧바로 기간트를 내주나? 코페시보다 좋은 걸 준다면 그때부터 난 대지의 신 마가르의 아들이다. 계약기간은 한 5... 3년 정도로 하지.’
당시 멜빈 그리피스는 조용히 자리를 떠났었다.
#3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나는 아론 베리어스와 밀라 테네시, 두 기간트 오너와 함께 대수림 내부를 달리는 중이었다.
아직은 대수림의 중심부까지 1/3조차 나아가지 않은 지점.
당연히 엑스퍼트 중급인 두 기사와 나를 위협할 만한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다.
중간에 하이에나를 2배쯤 키워놓은 듯한 ‘티겔’이라는 몬스터 10여 마리가 우리에게 달려들기는 했지만. 관찰 스킬이 통할 정도(C급 이하, 티겔은 C-급)로 허접한 녀석들이었기에, 두 엑스퍼트의 선에서 정리되었다.
일행을 선두에서 이끄는 것은 나였다
일단 실력에서부터 상대가 안 되는 데다. 대수림에서 꽤 오래(그들이 알기로는) 살았었다는 이유를 들먹이며 길잡이 역할을 자처한 나를 막을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그렇게 이틀째를 맞이한 대수림 탐사.
그동안 말없이 따라오던 두 기사의 인내심이 드디어 바닥을 드러낸 것인지.
속도를 높인 아론 베리어스가 내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스노우경. 이 길은 아무리 봐도 대수림의 남서쪽 방향(이대로 계속 가면 바다가 나온다)인 것 같은데요. 중심부에서 계속 멀어지고 있습니다. 저희 목적지는...”
“알고 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아, 네...”
아론 베리어스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뭐라 반박하지는 못한 채 다시 밀라 테네시의 곁으로 돌아갔다.
‘조금만 기다려봐. 이제 다 왔다고.’
나는 후작가의 의뢰를 위해 길을 나서는 탐사대에 기꺼운 마음으로 자원했다.
이유?
당연히 이를 핑계로 ‘대거’를 타기 위해서지.
게다가 의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백작가에서는 내게 큰 빚을 지는 셈이니 일석이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략 5분여를 더 달리자, 전방에 대수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널찍한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공터의 중간에 처참한 모습으로 처박혀 있는 은빛 기체.
‘제우스...’
뒤따라오던 두 사람 역시 제우스의 잔해(라고 하기엔 너무 크지만)를 발견했는지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 저게 뭐지?”
“기간트... 는 아닌 것 같은데...”
“저렇게 큰 기간트가 있다는 소린 들어보지도 못했어.”
“생긴 것부터가 너무 이상하잖아요.”
“스노우경은 저게 뭔지 알고 있을까?”
“그렇지 않을까요? 그가 우릴 이곳으로 끌고 왔으니.”
두 사람이 뭐라고 하던, 나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제우스의 앞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그 순간.
쉬이이이이이이이이익
어스름에 잠기기 시작한 대수림의 나무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튀어나와 나를 덮쳤다.
“앗! 위험합니다!”
“몬스터!”
엑스퍼트 중급에 이른 기사들답게 두 사람의 대응은 매우 빨랐다.
하지만...
터엉
터엉
두 사람에 검격은 투명한 막에 의해 막혔고.
나는 몬스터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철푸덕
온몸을 내던진 공격에 적중당한 나는 녀석과 함께 땅바닥을 뒹굴고 말았다.
헥, 헥, 헥, 헥, 헥, 끼우웅......
길쭉한 귀를 쫑긋 세운 채 분홍빛 혓바닥으로 연신 내 얼굴을 핥는 3미터 크기의 4족 보행 몬스터.
나는 녀석의 양 볼을 붙잡으며 말했다.
“잘 지냈냐, 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