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19화 (19/169)

19화 후작가의 의뢰(2)

#1

이세계, 그러니까 이곳 오르비스 대륙에 불시착해 처음으로 눈을 뜬 장소.

절반도 남지 않은 제우스의 잔해 위에서 하늘에 떠 있는 3개의 달을 발견 했고.

허탈한 마음이 채 가시기도 전, 바르카 무리와 레비를 처음 만났었던...

그곳으로 돌아왔다.

아론 베리어스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옐로우 ? 그린 ? 블루 ? 레드 ? 블랙으로 나뉘는 대수림의 섹터 중, 대략 그린 지역의 1/2 지점이라고 했다.

여기서 블랙은 대수림의 중심부를 뜻했고, 아래로 갈수록 중심부에서는 멀어진다.

보통 몬스터 사냥꾼이나 용병들이 사냥하는 지역의 한계가 그린 지역의 끝자락이었는데.

그것도 엑스퍼트급 강자가 무리에 한둘 정도는 끼어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대부분은 안전하게 옐로우나 그린 섹터의 초입에서 사냥을 이어간다.

이런 이유로, 대수림에 출입하는 이들에게 각 섹터의 경계는 생명선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곳곳에 숨겨진 표식과 몬스터들의 흔적을 조합해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것 정도는, 대수림을 1년 정도만 드나들어도 대부분 어렵지 않게 해내곤 했다.

‘기간트 오너 주제에, 방향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는 테리 녀석이 덜떨어진 거지.’

나는 오랜만에 만난 레비의 어리광을 잠시 받아준 뒤, 품 안에 있던 종이 한 장을 펼쳐 녀석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잘 봐, 레비.”

나는 오른손 검지로 종이에 펼쳐진 한 송이 붉은색 꽃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 이거, 이것과 똑같이 생긴 걸 본 적이 있어?”

잠시 코를 킁킁대며 종이를 노려보던 레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대수림에 사는 데다 꽤 똑똑한 이 녀석이라면, 이 꽃의 자생지를 알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하지만 레비의 반응을 보니 이 꽃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끼이이이잉...”

내가 실망하는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녀석의 귀가 조금씩 아래로 쳐지기 시작했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레비.”

그저 작은 가능성에 걸어본 것뿐이었다.

아무런 단서도 없이 무작정 대수림을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베른 요새의 수뇌들은 블루 섹터의 초입까지 탐사를 진행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지만.

사실 이 꽃이 레드 섹터에 있는지, 아니면 옐로우 섹터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종이에 그려진 꽃의 이름은 ‘프람엘베르’.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마력이나 오러를 증가시켜주는 영약으로 알려진 전설상의 꽃이라는데.

이 꽃은 영약으로써의 효능만이 아니라, 또 한 가지 매우 중요한 효능을 지니고 있었다.

프람엘베르는 해양몬스터 ‘버바딘’의 독에 의한 중독증상인 ‘석화증’의 거의 유일한 해독제라 할 수 있었는데.

버바딘 자체가 매우 희귀한 몬스터라 시중에 잘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었다.

프람엘베르가 필요한 사람은 백슬리 후작의 막내딸 엘레나 백슬리였다.

그녀는 백작령에서 가장 큰 항구가 있는 벤타시에서 뱃놀이를 즐기던 중, 갑작스럽게 등장한 버바딘 무리에게 습격을 받았고.

엑스퍼트 중급 기사 둘과 40여 병력의 희생으로 목숨은 건졌으나, 혼란한 와중에 버바딘의 독에 노출되어 석화증에 걸리고 말았다.

해군사령부와 인접한 탓에 몬스터를 목격하는 일이 드문 벤타시에서, 그것도 희귀종인 버바딘 무리에게 습격을 당했으니.

정말 어지간히도 운이 없었다.

‘전설’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희귀한 꽃이다 보니, 이것을 구하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나 마찬가지였고.

주교급 사제와 고위 마법사들의 노력으로 어떻게든 석화 속도를 늦추고는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

일단 석화가 완전히 진행되어 버리면. 프람엘베르 수백 송이를 구해온다 한들, 엘레나 백슬리를 살리는 건 불가능 했다.

이에 백슬리 후작은 가문의 힘을 총동원해 꽃을 구하기 위해 나섰고. 왕국 전체, 필요하다면 국외까지 기사와 마법사들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리적, 군사적 특성상 가문의 기사들을 파견하기 힘든 베헤르디아 대수림의 탐사를 위해, 브라이드 백작가에 협조 요청을 구한 것이다.

심지어 프람엘베르가 서식할 확률이 가장 높은 곳 중 하나가 베헤르디아 대수림인 것 같다는 전언과 함께.

백작령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후작가와는 수십 년째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브라이드 백작은 그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대수림에 병력을 파견했다.

하지만 테리 헤링스의 삽질로 인해 탐사가 지체되어 버렸기에, 이번에는 두배에 가까운 전력을 투입해 꽃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 기꺼이 힘을 보태기로 자청한 것이고.

물론 후작 영애나 백작가를 위해서가 아닌, 오로지 내 사심을 채우기 위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왕에 나선 일, 대충할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다.

나는 레비의 머리를 몇 차례 쓰다듬어준 뒤, 멍청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두 기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아론 베리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쪽은 안 될 것 같군. 지금부터는 네가 길을...”

그때.

대수림의 나무들 사이에서 수십 개의 시커먼 생명체들이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건...”

“바르카?”

나무 그늘을 완전히 벗어난 그것들의 정체는 레비의 일족인 바르카 무리였다.

녀석들은 슬쩍슬쩍 내 눈치를 보며 천천히 다가오더니, 한 마리씩 차례대로 내 몸에 얼굴을 비비고 물러가기를 반복했다.

“와...”

“스노우님, 설마 테이밍 능력도 있으신 건가?”

“그런 것 같은데? 바르카라면... 인간이 길들일 수 있는 몬스터는 아니니까.”

“아니, 대체 능력이 몇 개야?”

다 들린다, 이놈들아.

아쉽게도 내게는 테이밍 능력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지구에선 동물들이 날 싫어하는 편이었는데...’

테이밍(S) 능력을 각성한 헌터의 말에 따르면, 내 몸에 배인 금속 냄새 때문이라는데.

나는 아무리 킁킁거려 봐도 땀 냄새 외에는 아무것도 맡을 수 없었다.

‘이곳에 불시착하면서 뭔가 달라진 건가?’

뭐, 당장 궁금증을 해결할 방법도 없으니.

그에 대한 생각은 이쯤에서 그치기로 했다.

“끼이이이이이잉...”

내가 또다시 떠나려는 걸 눈치챘는지, 레비가 내 바짓자락을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몸을 낮췄고, 들고 있던 그림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레비의 양쪽 볼을 두 손으로 쭈욱 늘어뜨렸다.

“잠깐 들린 거야. 나중에 다시 데리러 올게. 기다릴 수 있지?”

“끼잉... 끼잉...”

레비의 애처로운 울음이 마음에 걸렸으나, 아직은 이 녀석을 데리고 다닐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녀석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준 뒤, 떨어진 종이를 줍기 위해 시선을 돌렸을 때.

“응?”

바르카 중 한 마리가 가까이 다가와 종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 녀석은...’

무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바르카였다.

몬스터 등급은 ‘D’로 무리 중 가장 약한 개체였지만, 상태창에 무려 ‘장수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녀석이었다.

스으윽

나는 고개를 들어 올린 늙은 바르카의 눈을 마주했을 때 확신 할 수 있었다.

‘이 녀석... 프람엘베르를 본 적이 있어.’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2

베헤르디아 대수림은 말 그대로 거대한 나무들의 연속이었다.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나무의 색이 아주 조금씩 짙어지는 경향을 보이긴 했지만, 그 밖에 크기나 생김새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

츠츠츠츠츠츠츠츠츠츠

우거진 나뭇잎의 그림자와 그 사이로 드문드문 들이치는 햇살 아래로.

세 인간과 두 몬스터가 달리고 있었다.

일정한 소음을 발생시키는 인간들과는 다르게, 네 다리로 달리는 두 몬스터는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어느 순간, 일행의 선두에서 달리던 몬스터의 속도가 천천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프람엘베르’ 탐사를 위해 급조된 파티의 길잡이, 늙은 바르카의 체력이 떨어진 것이다.

레비에 비해 덩치는 조금 더 컸지만, 노쇠화가 심해 1시간 정도를 달리면 반드시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몇 시간이고 달릴 수 있는 젊은 바르카, 레비와는 달랐다.

“헥, 헥, 헥, 헥, 헥......”

나는 혀를 쭉 빼문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녀석에게 물을 준 뒤, 한 가지 스킬을 시전했다.

[리프레쉬(C) : 피로를 회복시킨다. 동급 스킬에 비해 마력 소모량이 극심하다. 한 대상에게 주기적으로 사용할 경우, 내성이 생겨 스킬 효율이 떨어진다.]

말 그대로 피로를 회복시키는 스킬이다.

B급 서리바람과 C급 육체강화 특성을 각성하며 신체 능력과 저항력, 회복력이 대폭 증가했기에, 어지간하면 지칠 일이 없었고.

그런 이유로 사용할 일이 거의 없었던 스킬이었다.

게다가 같은 C급 스킬인 ‘힐’에 비해 마력 소모량이 3배가 넘는지라 효율도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효과만큼은 제법 뛰어났는데.

“커헝.”

금방이라도 죽을 듯 헥헥거리던 늙은 바르카가 금세 기운을 차린 듯, 나를 보며 한 차례 짧은 울음을 토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스킬로 회복할 수 있는 피로의 양은 정해져 있었기에, 그와 더불어 적절한 휴식을 취해 주어야만 했다.

‘자칫 저 녀석이 돌연사라도 해버리면 큰일이니까.’

사실 나이만 놓고 보자면 언제 죽든 이미 ‘자연사’였다.

어쩌면 녀석은 늙은 몸을 이끌고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는 것일지도.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난밤을 공터에서 보낸 우리는 아침 일찍 탐사를 재개했다.

원래는 늙은 바르카만을 데려가려 했지만. 레비가 끈질기게 따라붙는 통에 그냥 데려가기로 해, 현재의 3인2몬(?) 파티가 구성된 것이다.

나는 레비에게도 물을 먹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와 두 바르카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아론 베리어스와 밀라 테네시는 주변의 탐색 겸 정찰을 진행했다.

늙은 바르카를 믿고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이었지만.

대수림의 몬스터들과 수년간 드잡이 해온 그들로서는, 몬스터인 바르카의 안내가 썩 믿음직스럽지 못한 듯했다.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레비와 함께한 시간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몬스터를 잡아도 내가 몇만 배는 더 잡았을 테니까.’

몬스터와 함께하는 모험 파티라니... 꿈에서라도 코웃음 칠 일이었다.

“이만 출발하지.”

내 나직한 목소리에 반응한 두 사람이 곁으로 돌아왔고, 두 바르카도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쉬고 달리길 반복한 지 일곱 시간 째.

우리는 드디어 대수림의 블루 섹터에 도달했다.

블루 섹터는 이전에 본 적 있는 안티가(B-급)부터 사르가스(A-급) 같은 중상급 ~ 상급 몬스터의 서식지였고.

이곳의 최고 포식자는 오우거(A급 추정)라고 했다.

순간 한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나는 지쳐 헥헥거리는 늙은 바르카를 바라보았다.

“근데 넌, 대체 왜 여기까지 왔던 거냐?”

대체 어떤 몬생을 살았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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