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20화 (20/169)

20화 후작가의 의뢰(3)

#1

블루 섹터로 진입했다곤 하지만, 나로서는 딱히 달라진 것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상급 엑스퍼트인 아론 베리어스와 중급 엑스퍼트인 밀라 테네시는 무언가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한 듯, 표정을 굳히며 자세를 조금 더 낮췄다.

‘몬스터들의 마력이라도 느낀 건가?’

마력을 몸 안으로 받아들인 뒤.

‘오러 임브레스(오러 수련법)’를 통해 마력을 오러로 변환.

일정한 장소(주로 단전)에 차곡차곡 저장한 다음.

이를 이용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존재가 이 세계의 ‘기사’다.

그들 대부분은 어린 시절부터 각 가문이나 기사단의 ‘오러 임브레스’를 수련해 왔기에, 마력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기감(氣感)’이란 것이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러를 더 오래 수련할수록, 혹은 더 많은 오러를 몸 안에 쌓을수록, 마력이나 오러를 느끼는 감각은 더욱더 발달하기에.

보통은 실력이 좋은 기사일수록 기감이 더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특성’과 ‘스킬’을 이용해 강해지는 ‘헌터’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헌터의 강함은 수련보다는 어떤 특성을 얼마나 좋은 등급으로 각성하느냐로 결정되니까.

각성 이후 강해지는 방법 역시, 고된 훈련을 통한 육체와 정신의 성장보다는.

특성을 강화하거나 스킬의 레벨을 올리는 것이 훨씬 더 효욜적이었다.

때문에 헌터가 주변의 상황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역시 ‘스킬’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탐색(C) : 500미터 이내의 생명체(마력)를 감지할 수 있다.]

시야 한편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미니맵이 생성되었다.

반경 500미터, 지름 1000미터에 이르는 범위를 축소해 놓은 원의 곳곳에 크고 작은 점들이 찍힌다.

마력을 지닌 생명체들이었다.

마력을 완벽하게 갈무리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감지가 불가능하지만.

강력한 몬스터일수록 마력을 감추려 들지 않는 성향이 짙었기에, 나름 쓸모있는 스킬이다.

그리고 기대에 부응하듯, 8개의 크고 흐릿한 붉은 점이 미니맵 상에 찍혀 있었다.

아마 최대한 마력을 감추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완벽하게 갈무리할 수준은 안 되는 녀석들인 듯했다.

나는 발을 멈춘 뒤, 앞서가고 있는 두 기사에게 말했다.

“앞쪽에 매복이 있다.”

“네?”

“매복이요?”

두 사람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턱짓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300미터 앞. 어설프게 마력을 갈무리한 걸로 봐선, 그리 강한 놈들은 아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둘은 입매를 굳히며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폼멜 끝에 백사자의 머리가 장식된 멋들어진 검이었다.

검을 든 두 사람이 천천히 전진하자, 덩달아 긴장한 두 몬스터가 자세를 낮추며 기다란 귀를 계속해서 앞뒤로 움직였다.

“크르르르르르...”

“으르르...”

본능적으로 마력을 갈무리할 줄 아는 녀석들인 만큼, 엑스퍼트의 기감보다는 몬스터의 감각이 적들을 먼저 감지했다.

30여 미터까지 접근한 아론 베리어스 역시 몬스터의 존재를 감지했는지, 밀라 테네시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우리 일행이 일정 거리에 멈춰선 채 다가가지 않자, 기다리다 못한 녀석들이 매복을 포기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음, 왠지 좀 익숙한데?’

4미터 정도의 크기에 거대한 머리와 칼날 같은 이빨.

거기에 근육질의 커다란 뒷다리와 상대적으로 작은 앞다리라면...

“...랩터?”

“네?”

“랩토?”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긴장하고 있던 두 기사가 뒤를 돌아보며 의문을 표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으며 전방의 적을 가리켰다.

“알고 있는 몬스턴가?”

“네, ‘드라가’입니다. 대수림에선 꽤 흔하게 볼 수 있는 녀석들이죠.”

“기간트까진 필요 없는 모양이군.”

“기간트를 소환한다면 밀라 혼자서도 처리가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내가 힘을 뺄 필요는 없었다.

“알아서 처리해.”

““네!”

그들은 내 부하가 아니었지만, 사령관인 콜튼 프리먼을 대하듯 내게 깍듯했고.

나 역시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이래서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지.’

블루 섹터의 초입부터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는지, 두 기사는 기간트를 소환하지 않은 채 일곱 마리의 몬스터를 상대했다.

적을 베거나 찌른다기보다는, 아예 분쇄시켜 버리는 아론 베리어스의 파괴적인 검술에 드라가들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반면 민첩하게 움직이며 하체를 집요하게 공략, 적의 기동성을 빼앗는 밀라 테네시의 검술은 얼핏 보기에도 꽤나 화려했다.

“드라가라... 대충 B급 정도 되는 녀석들이군.”

지구의 B급 헌터였다면, 어지간히 좋은 특성을 각성하지 않는 이상 1대1로 상대하기 힘든 몬스터였다.

하지만 중급 엑스퍼트인 밀라 테네시는 꽤 여유롭게 한 마리를 상대했고. 아론 베리어스가 다섯 마리의 목을 베는 동안, 무려 두 마리를 전투불능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서걱

서걱

밀라 테네시가 쓰러진 채로 꿈틀대는 드라가 두 마리의 목을 베는 것으로.

블루 섹터에서의 첫 번째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2

프람엘베르는 붉은 꽃이었다.

특이하게도 눈에 보이는 모든 부위가 피처럼 시뻘겠는데, 정작 ‘석화증’의 치료제로 쓰이는 건 땅속에 감추어져 있는 뿌리 부분이었다.

프람엘베르를 찾은 건 ‘드라가’ 무리와 전투를 치른 곳에서 무려 4시간이나 더 안쪽으로 들어간, 블루 섹터의 중간 지점이었다.

대수림이 어둠에 잠기기 직전 발견한 그 꽃은, 대수림의 거대한 나무 중 하나의 아래에서 도도한 자태를 드러냈다.

모두 3송이.

프람엘베르의 영향인지, 꽃들이 피어있는 곳 주변의 나무들은 다른 나무들에 비해 크기가 조금 작았고.

색깔 역시 짙은 갈색이 아닌 보라색에 가까웠다.

늙은 바르카는 오래된 기억 속 장소로 정확하게 우리를 안내했다.

장한 일을 해냈으니 당당하게 어깨를 펴도 될 법하건만.

“끄으으으응...”

지금 녀석은 얼굴을 바닥에 처박은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전방을 주시하던 아론 베리어스가 작은 목소리로 읇조리듯 말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모두 일곱 마리로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면을 응시했다.

키가 7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몬스터들이 프람엘베르가 피어있는 나무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종이를 마구 구겨놓은 듯 못생긴 얼굴에, 터질듯한 근육질의 몸.

블루 섹터의 제왕이라 할 수 있는 ‘오우거’다.

테리 헤링스의 이야기가 귓가를 맴도는 듯했다.

[......스터들의 대침공을 막다가 전사하셨죠. 당시 할아버지는 금십자 기사단의 단장이셨는데, 단장 전용기인 ‘코페시’를 몰고 한 번에 오우거 일곱 마리를......]

마침 눈앞의 오우거 무리도 정확하게 일곱 마리.

코페시(1400rp)에 탑승한 최상급 엑스퍼트가 20여 분간의 전투로 깔끔하게 해치웠다고 했으니.

제블린(900rp)을 탄 상급 엑스퍼트와 폴암(800rp)과 함께 하는 중급 엑스퍼트의 조합이라면 두 마리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론 베리어스의 판단 역시 나와 비슷했다.

“두 마리 정도라면... 어떻게든 시간을 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왼쪽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를 힐끗 바라보았다.

“좋아, 무리하지 말고 시간만 끌도록. 그리고...”

마력을 주입하자 팔찌는 스르르 녹아내리듯 허공으로 증발했고.

이내 신장 4.5미터짜리 기간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탑승 주문을 외우기 전, 미처 못다한 말을 마무리 지었다.

“꽃을 밟지 않도록 주의해.”

#3

“테리마.”

지이이이이이이이이잉

귓가로 이명이 들려옴과 동시에, 나는 어느새 새하얀 알갱이(변환전의 화이트스펀)에 파묻혀 있었다.

기간트의 내부.

벌써 세 번째 탑승인지라, 첫 경험(?) 때처럼 이질감이 들지는 않았다.

마력을 발산하기 전, 나는 잠시 시간을 끌며 숨을 골랐다.

미지의 적에 대한 두려움이나 긴장 따위가 아니었다.

단지 이제야 비로소 ‘파일럿(S)’ 특성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로 인해, 고양감이 들끓어 오른 탓이다.

‘너무 흥분했어.’

냉정한 이성이야말로 파일럿의 첫 번째 덕목.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새하얀 알갱이들이 녹아들며 전신에 기분 좋은 압박감을 선사한다.

이윽고 모든 화이트스펀의 변환이 마무리되었고.

나는 기간트 대거와 ‘연결’되었다.

#4

브라이드 가문의 두 기간트 오너는 어느새 움직임을 멈춘 채, 대수림의 어느 한 곳을 멍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기간트인 제블린과 폴암의 발아래로, 7미터에 달하는 거체가 몸통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채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기간트의 협공에 의해 쓰러진 오우거 ‘한 마리’.

두 마리 정도는 맡을 수 있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어찌 된 영문인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가장 외곽에 있던 한 마리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마리가 괴성을 지르며 대거에게 달려가 버린 탓이었다.

오우거가 강력한 몬스터이긴 하지만, 시간을 들인다면 아론 베리어스 혼자서도 충분히 잡아낼 수 있는 수준.

여기에 밀라 테네시의 폴암이 거들었으니 승부가 갈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블루 섹터의 지배자 오우거 여섯 마리를 상대하고 있는 대거는...

[괴, 괴물...]

금십자 기사단의 기간트들 간에만 사용이 가능한 근거리 통신에서 흘러나온 밀라 테네시의 말에, 아론 베리어스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꽃이 상할 것을 염려한 것인지.

수백 미터는 떨어진 거리까지 여섯 마리의 오우거를 유인해간 대거.

어느 정도 안전거리를 확보하자마자 시작된 전투는, 그야말로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일단 움직임부터가 기간트의 그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유려했는데.

이론상 평균 출력 500rp인 ‘대거’로는 동화율 100%를 달성한다 한들, 본신(本身)의 움직임을 최대 50%를 재현하는 게 한계였다.

하지만 최소 상급 엑스퍼트 정도는 될 듯한 움직임으로 오우거들 사이를 헤집으며, 빠르고 정교한 주먹질을 퍼부어대는 대거의 모습은... 도무지 500rp짜리 하급 기간트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애초에... 고작 3번째 탑승으로 동화율 100%를 달성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되지.’

마치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겠다는 양, 한참 동안 오우거들과 몸의 대화만을 나누던 대거가 어느 순간 훌쩍 뛰어올라 거리를 벌렸다.

이미 여섯 마리중 두 마리는 대거의 주먹질에 골통이 박살나고 가슴이 함몰되어 숨이 멎은 상태였고.

나머지 네 마리 역시 상급 몬스터답지 않게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대거가 거리를 벌리자마자 옳다구나 도주를 감행하려는 네 마리 오우거.

하지만...

촤르르르르르르르륵

발밑에서부터 자라난 거대한 넝쿨들이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리더니.

오우거들의 몸을 타고 오르며 움직임을 억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녀석들을 향해 퍼부어지는 온갖 마법의 향연.

퍼어어어어어어엉

케에에에에에에에엑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우어어어어어어어어어

퓨슉

케륵...

서걱

끄르르...

거대한 화염구가 작렬한 뒤.

머리 위로 번개가 내리쳤고.

얼음송곳이 몸통을 꿰뚫었으며.

바람의 칼날이 목을 잘랐다.

온갖 폭음과 비명으로 가득했던 전장.

대거의 마법폭격이 중단되었다.

폭격의 중심에 있었던 오우거 네 마리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고깃덩이로 변해 있었고.

이내...

스르륵

대거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스노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투를 끝까지 지켜본 밀라 테네시는 경외감과 공포가 한꺼번에 밀려들어 몸이 덜덜 떨려올 지경이었다.

“말도 안 돼... 저건 그냥 스노우라는 인간을 거대하게 만들어 놓은 것 같잖아. 저런 건 기간트의 전투가 아니야...”

그간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가 완전히 무너져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때, 통신장비로부터 아론 베리어스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글쎄, 어쩌면 저것이야말로 궁극에 이른 기간트 오너의 모습일지도 모르지.]

“아...”

어쩌면 아론 베리어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도 언젠가는...’

기간트의 소환을 해제한 뒤, 태연한 표정으로 프람엘베르가 피어있는 나무쪽으로 걸어가는 스노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밀라 테네시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그녀는 곧장 폴암을 소환 해제한 뒤, 꽃을 바라보고 있는 스노우를 향해 달려가며 외쳤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3송이를 모두 캐낸 다음, 깨끗한 천에 감싸 스노우에게 건넸다.

“여기...”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받아드는 그의 모습에 잠시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수백 미터 밖, 다진 고깃덩이로 변해 있는 오우거들의 모습을 상기하며 꾹 참아냈다.

프람엘베르를 품 안에 챙긴 스노우가 말했다.

“이만 돌아가지.”

이로써.

백슬리 후작가의 의뢰는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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