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22화 (22/169)

22화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법이지

#1

“아무래도 저희 상단은 서대륙 전체를 무대로 하다 보니 위험한 일을 겪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가장 규모가 큰 두 상행에는 항상 둘 이상의 기간트 오너가 함께하는 편이죠.”

“그런가?”

“뭐, 베른 요새에서 브라이드 영지로 가는 길이라면야... 안전하기로는 대륙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니, 오너 셋은 너무 과한 전력이긴 하지만요.”

베른 요새에서 브라이드 영지로 향하는 길.

우리는 요새에서 출발, 브라이드 영지를 경유해 수도로 향한다는 한 상단 행렬에 합류했다.

그런데 이 상단... 도무지 평범한 장사치로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상단 행렬에 포함된 기간트 오너만 무려 셋이었던데다.

세 명의 기간트 오너 중 하나가 ‘스타니’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 상단주본인이었고.

그 상단주이자 기간트 오너는 나보다도 훨씬 더 어려 보이는 여자였다.

백작가의 오너인 테리 헤링스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이 행렬에 존재하는 실질적인 기간트 오너는 모두 네 명인 셈이다.

그녀의 말대로, 고작 상단 행렬을 지키기 위한 전력이라면 과해도 너무 과했다.

하지만 과연 ‘숲의 여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상단 행렬에 ‘고작’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

“병력과 몬스터 사냥꾼들을 빼면. 베른 요새에 있는 인간 중 절반은, 너희 상단의 인원인 것 같더군.”

“브라이드 백작가는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큰손이니까요. 저희는 일 년에 두번, 지금 이 시기와 토벌이 완료되는 11월에 대륙의 끝인 대수림까지 내려오죠. 질 좋은 몬스터 부산물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11월에 내려오는 상단의 인원은 아마 지금보다 두 배는 많을 거예요.”

호위와 상인, 일꾼을 합쳐 무려 500여 명에 이르는 대인원에.

신장 1.8미터, 몸길이 3.5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흑소인 로젠틴(마력엔진의 출력 단위인rozentinpower의 그 로젠틴)이 이끄는 마차가 무려 300대였고.

마차 위에는 몬스터 부산물들이 말 그대로 작은 산처럼 쌓여있었다.

베른 요새와 브라이드 영지를 오가는 백작가의 병력은 대부분의 경우 상단의 행렬과 함께했는데.

그편이 더 안전하기도 하거니와, 합류해주는 것만으로도 꽤 짭짤한 돈벌이가 된다고 했다.

나는 상단주와 단둘이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녀는 이동하는 내내 나와 친분을 쌓기 위해 애썼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상행에 합류한 제이미 그레고리(베른 요새 마법병단장, 5써클)에게, 내 정체(그들의 짐작으로는 최상급 엑스퍼트이자 6써클 전투마법사)에 대해 전해 들은 게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내게도 저 상단주의 ‘정체’에 대해 알려주었으니까.

대륙 7대 거상 중 하나인 ‘숲의 여명’은, 실은 엘프 왕국 직속의 비밀 상단이었고.

상단주 스타니 역시 인간으로 위장한 엘프라고 했다.

엘프?

‘어쩐지 외모가 끝내준다 했지.’

상단에는 그녀를 포함해 모두 다섯 명의 엘프가 존재했고, 그들 모두는 엑스퍼트인 동시에 정령사라고 했다.

‘나머지 넷은... 기억이 나지 않는군.’

사실 그들의 외모 따위는 내 안중에도 없었다.

내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다섯 명의 엘프 중 둘과 용병 출신 호위대장이라는 인간 하나가 소유한 기간트.

오직 그것뿐이었으니까.

#2

베른 요새와 브라이드 영지를 잇는 장대한 도로.

‘럼프킨’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이 대로는, 유사시 베른 요새로 빠르게 병력을 파견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십 년 전 완공되었고.

지금까지도 잘 관리가 되고 있어 병력과 상인, 몬스터 사냥꾼, 그리고 용병들의 이동에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럼프킨 스베노’는 이 대로의 입안부터 완공까지 책임진 브라이드가의 가신이었다.

베른 요새에서부터 시작해 백작령 소속 세 영지 중 하나인 ‘브롤리’ 영지를 관통하고, 이후 다섯 개의 마을을 지나면 비로소 대로의 종착지인 브라이드영지에 이르는 거대한 역사(役事).

럼프킨 스베노가 47살일 때 첫 삽을 뜬 이후, 사망 1년 전인 55살에 완성된이 대로는.

그의 사후 1년 뒤, 고인의 업적을 기려 ‘럼프킨 대로’라 명명되었다.

그러니까...

“럼프킨 대로가 깔리기 전에는 베른 요새로 가는 길이 적어도 세 배는 험난했었죠. 방벽이 완성된 이후라 주변 몬스터의 수가 꽤 줄어들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오우거나 켈거쉬 같은 상위 몬스터도 종종 튀어나오곤 했던 데다, 이동 시간도 지금보다 두 배는 더 걸렸으니까요.”

그러니까 올해 114살이라는 이 젊은(?) 엘프는... 48년 전 완공된 럼프킨 대로가 첫 삽을 뜨기 훨씬 전부터, 이미 베른 요새를 드나들었다는 소리다.

“이젠 엘프라는 걸 숨기지도 않는군?”

“에이, 스노우님이라면 이미 다 알고 계시잖아요. 조잡한 환상마법 따위 통하지도 않을 텐데.”

잘만 통하는데.

내 눈엔 그냥 엄청 예쁜 인간 여자일 뿐이다.

엘프의 시그니처라는 뾰족한 귀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다.

나에게만 특별한 건지는 몰라도, 그녀는 떠버리 테리 헤링스 만큼이나 말이 많았다.

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신경질이 치솟는 테리 헤링스의 수다와는 달리.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그녀의 옛날(?)이야기들은, 솔직히 꽤나 듣는 재미가 있었다.

여행 이틀째, 해가 중천에 떠오른 오후.

별다른 일이 없다면, 내일 이 시간쯤 브롤리 영지에 도착할 거라고 한다.

지금은 좀 덜하지만. 어제만 하더라도 내 정신은 온통 스타니... 아니, 정확하게는 ‘스타니슬라 르 바라탄’이라는 진명을 지닌 엘프의 손목에 집중되어 있었다.

백작가 사람들은 그녀의 정체를 실력이 뛰어난 엘프 기간트 오너 정도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스타니슬라 르 바라탄(B+) : 114세, 하르세리안 왕국의 국왕 ‘베르세우스 엘바라탄’의 5번째 딸이자, 왕국의 비밀 상단 ‘숲의 여명’의 상단주.

172cm, 46kg

파일럿 재능 ? 71/78(현재/최대치)

훈련 가능 기체

제우스(C) - 숙련도 0/100

토마호크 SS7 스피릿(E+) - 숙련도 0/100

대거(C) - 숙련도 0/100]

엘프 왕국 ‘하르세리안’을 다스리는 현 국왕의 다섯 번째 딸이라는 엄청난 지위를 지닌 엘프였다.

‘뭐, 솔직히 공주건 상단주 건 내 알 바 아니지. 정작 중요한 건...’

[아엘론(B+, A-) : 7.2m, 7.4톤(기동형, 특수형). 출력 1300rp. 오르비스 대륙 북부에 위치한 엘프 왕국 ‘하르세리안’ 산하 왕립 마탑, ‘엘리시안’에서 제작된 기간트다.

A-급 마력엔진을 장착해 동급 대비 최고의 출력을 자랑한다. B-급 합금을 사용한데다 장갑의 두께가 얇아 동급 대비 방어력이 떨어진다. 엘프 왕국 고유의 ‘정령력 증폭 마법진’으로 인해 ‘정령과 계약한 오너’가 탑승할 경우 등급이 한 단계 상승한다. 현 하르세리안 왕국의 주력 기간트.]

루페른에는 없는 기동형(나는 근접전투 시 기동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인데다, 같은 등급의 크로스보우에 비해 무려 200이나 높은 1300rp의 출력.

“......노우님...”

거기에 대체 어떤 기능인지 궁금해 미칠 것 같은 ‘정령력 증폭 마법진’까지...

“저기, 스노우님...”

“말해라.”

“말씀드리기 죄송한데...”

“괜찮으니 말해.”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던 스타니... 아니, 엘프 공주 스타니슬라 르 바라탄은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제부터 계속... 제 손을 보시며 치, 침을 흘리셔서... 혹시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

침?

아오, 씨... 혹시 이상한 놈으로 오해하는 거 아냐?

좁은 곳에, 너무 오래 붙어 있다 보니 주체를 못 하겠군.

쓰으읍...

#3

상행은 순조로웠지만, 상단의 모든 인물이 행복한 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상급 엑스퍼트이자 기간트 오너인 프랭키 쿠만의 인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험악해지고 있었다.

“쿠만 님, 혹시 무슨 일이라도...”

“닥치고, 꺼져!”

“죄, 죄송합니다!”

상인 중 하나가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접근했지만, 날카로운 그의 반응에 황급히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베른 요새를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호위 걱정을 완전히 놓아버린 채, 마음 편하게 놀고먹으면 되었기에 그의 마음은 흡족하기 그지없었다.

용병 출신임에도 고작 33세의 나이에 상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데다, 기간 트까지 보유한 입지전적인 인물인 프랭키 쿠만.

그는 대륙 7대 상단인 ‘숲의 여명’으로 스카웃 된 이후, 무려 700골드(비슷한 나이인 베른 요새 소속 상급 엑스퍼트이자 기간트 오너인 아론 베리어스의 경우 수당 포함 500골드)라는 엄청난 월급(연봉이 아닌 월급)을 받고 있었고.

그 실력을 인정받아 상단의 가장 큰 상행 중 한 곳의 호위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렇게 돈과 권력을 모두 가지게 된 그에게 아첨하는 이들이 주위에 가득했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베른 요새를 떠날 때부터 줄곧 상단주와 단둘이 동승하고 있는 웬 동대륙인으로 인해, 그의 기분은 시궁창으로 처박힌 지 오래였다.

‘대체 뭐 하는 놈이지? 분명 뭐 하나 특별할 게 없는 녀석인데. 혹시 왕족...

씨발, 그럴 리가 있나. 저놈은 동대륙인이라고!’

처음 본 순간부터 상단주에게 반해버린 프랭키 쿠만.

그는 이미 두 번이나 고백을 했었지만, 두 번 모두 정중하게 거절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수십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을 신조로 삼고 살아가는 그에게 있어, 두 번의 거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언젠가는 내 매력을 알게 될 거야.’

그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 강한 타입이었기에, 결국에는 상단주가 자신에게 넘어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에 저녁 식사 시간.

단둘이 모닥불가에 오붓하게 앉아, 일꾼들이 가져다준 식사를 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배알이 꼴릴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많이 참았다.’

그는 먹고 있던 스프 접시를 들고 두 사람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사내의 옆을 지나치기 직전.

의도적으로 비틀거리며 그의 머리 위에 뜨거운 스프를 끼얹어 버렸다.

“꺄악!”

챙그랑

깜짝 놀란 상단주가 비명을 지르며 들고 있던 스프 접시를 떨어뜨렸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제이미 그레고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으며.

그의 곁에서 식사 중이던 테리 헤링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 새끼, 이제 죽었다...”

하지만 이런 세 사람의 반응과는 달리.

머리에 뜨거운 스프가 끼얹어지는 횡액을 당한 사내의 반응은 여상스럽기 그 지없었다.

그는 일말의 표정 변화조차 없이, 손수건을 꺼내어 머리로 가져갔고.

오히려 당황하며 안절부절못하던 상단주가 프랭키 쿠만을 매섭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쿠만 대장, 어서 이분께 사과드리세요. 지금 분명 일부러...”

하지만 스프를 닦아내던 사내가 상단주를 만류했다.

“괜찮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법이지.”

머리 위 스프를 모두 닦아낸 뒤, 고개를 들어 프랭키 쿠만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엔 옅은 미소마저 감돌고 있었다.

“훗, 그렇지 않나? 실수잖아, 실. 수.”

어쩐지 후련하게 느껴지는 그 미소에.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낀 프랭키 쿠만이 잘게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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