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매 토템, 바람의 인도, 가속
#1
프링키? 프랭크?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상단의 호위대장이 날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진즉에 알고 있었다.
내게는 이쪽 세계의 기사들이나 마법사들처럼 ‘기감’을 느끼는 능력 같은 건 없다.
하지만 특성을 각성하며 더욱 예민해진 ‘감각’과 헬조선이라 불리는 나라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쌓아온 ‘눈치’라는 게 있었다.
‘뭐, 사실 그런 게 없더라도. 저렇게 티 나게 노려보는데...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있나.’
아무래도 저 녀석은 정체를 숨기고 있는 아름다운 엘프 상단주에게 마음을 단단히 빼앗긴 것 같았다.
사실 얼굴이 좀 못생기기는 했지만. 30대 초반에 상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데다, 대체 어떤 수완을 발휘한 건지 용병 주제에 기간트까지 소유하고 있다고 하니.
만약 스타니 상단주가 엘프 왕국 국왕의 자식이 아닌, 평범한 상단의 후계자 정도만 되었어도 감지덕지해야 할 스펙이기는 했다.
거기에 더해...
[프랭키 쿠만(A-) : 33세, 헬베디아 왕국 커틀러 영지 출신의 용병 184cm, 85kg 파일럿 재능 ? 72/82(현재/최대치)
훈련 가능 기체
제우스(C) - 숙련도 0/100
토마호크 SS7 스피릿(E+) - 숙련도 0/100
대거(C) - 숙련도 0/100]
여태껏 ‘훈련병 지정(탐색)’으로 확인한 인물 중, A급인 조나단 니엘스를 제외하고는 가장 준수한 파일럿 재능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프로필이 ‘커틀러 출신의 용병’으로 끝인 걸 보니... ‘숲의 여명’에 딱히 소속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로군.‘
뭐, 그런 건 개인의 자유이니 욕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현재 실력으로만 보면, 지금까지 만난 오너들 중 가장 뛰어나단 거지.’
심지어 114년 묵은 엘프 오너인 스타니 상단주보다도 딱 한 발 정도 앞서있는 기량.
하지만 기체의 수준 차이로 인해, 직접 맞붙는다면 그녀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안티가(B-) : 6.7m, 7.2톤(벨런스형). 출력 800rp. 오르비스 대륙 동부에 위치한 노스럼 왕국의 ‘헤이그 공작가’가 소유한 기간트 제작소 ‘임페르노’에서 제작된 기간트. B-급 마력엔진과 B-급 합금의 조화로 벨런스가 뛰어나다. 임페르노제 기간트의 특색인 무기 보관 슬롯(아공간) 추가가 적용되었다(총 3개). 몬스터 ‘안티가’의 외형을 훌륭하게 재현했다.]
기간트에 몬스터의 이름을 붙이는 걸로도 모자라, 외형까지 비슷하게 만들다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만든 건진 모르겠지만.
의외로 ‘임페르노’에서 제작된 기간트들은 인기가 많은 편이라고 한다.
특히 활을 잘 쓰는 오너들이 이곳의 기간트를 선호했는데.
대부분 기간트의 무기 슬롯이 2개인데 반해, 이곳은 최대 4개까지 장착할 수 있는 비전 기술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임페르노’를 창업한 헤이그 공작가의 초대 가주가, 공간 계열 마법의 대가인 7써클 마법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상단에 있는 다른 오너의 기간트는 ‘폴암’과 비슷한 700rp의 중갑형 기간트였기에, ‘안티가’ 만큼 내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대체 어떻게 생긴 녀석인지 궁금하단 말이지. 아마... 활도 가지고 있겠지?’
검기를 외부로 방출할 수 있는 최상급 엑스퍼트 수준(기간트로 이 경지를 재현해 낼 수 있는 이는 대륙 전체에서도 매우 드물다)이 아니고서야, 기간트로 원거리의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활이었다.
물론, 마법이나 정령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이레귤러는 제외.
아무튼 중요한 사실은, 호위대장 놈의 개인 소유인 ‘안티가’는 참으로 탐 나는 기간트라는 것이었는데.
녀석이 나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만큼, 나 역시 저딴 자식이 자가(?)기간트를 소유하고 있다는 현실에 미칠 듯이 배가 아프던 참이었다.
그렇게 서로를 아니꼽게 보던 중, 이틀째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나는 호위대장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프를 들고 내게로 다가올 때부터, 이후에 일어날 일을 예감할 수 있었다.
상급 엑스퍼트답게 발을 헛디디며 내 머리 위로 정확하게 스프를 끼얹는 연기는 매우 자연스러웠지만...
‘눈에 그렇게 힘을 주고, 몸만 연기한다고 속겠냐?’
하지만 나는 그의 의도를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프랙탈필드.’
그저 ‘서리바람(B)’ 특성의 고유스킬인 ‘프랙탈필드(B)’를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약하게 시전했을 뿐.
[프랙탈 필드(B) : 시전자를 중심으로 지면 온도를 급하강시키는 미세한 눈결정 문양을 퍼뜨린다. 숙련도가 오를수록 문양이 퍼지는 속도가 빨라진다. 필드 위에 존재하는 객체는 냉기저항력에 따라 움직임에 제약을 받으며, 시전자는 최대 40%의 행동력 보정을 받는다.]
츠츠츠츠츠츠츠...
정수리를 중심으로 작고 얇은 눈결정들이 순식간에 증식하며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그 위로...
퍼억
“꺄악!”
챙그랑
스프가 끼얹어졌고, 동시에 스타니 상단주가 비명을 지르며 들고 있던 접시를 떨어뜨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던 스프는 프랙탈필드의 냉기로 인해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스프로 인해 옷이 더러워지기는 했지만, 극적인 연출을 위해 그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나는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머리와 어깨에 떨어진 스프를 닦아내며 생각했다.
‘네가 틀렸어, 테리.’
녀석은 기간트를 가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돈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 더 쉬운 방법은 진즉에 알고 있었지.’
그것도 꽤나 여러 가지 방법을.
다만 그 방법을 굳이 사용하려 하지 않았을 뿐.
하지만 ‘굳이’ 하지 않았다는 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호위대장을 매섭게 쏘아붙이는 상단주를 만류하며 말했다.
“괜찮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법이지.”
내 안에 남아 있던 일말의 죄책감마저 날아가 버리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훗, 그렇지 않나? 실수잖아, 실. 수.”
몸에 묻은 스프를 대충 닦아낸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벙찐 표정의 호위대장에게 다가가 천천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우린 통성명도 멋... 어.이.쿠!”
그리곤 좀 전의 그가 그랬던 것처럼 비틀거리며...
‘매 토템, 바람의 인도, 가속.’
반응속도를 높여주는 스킬들을 시전한 다음.
쉬이익
턱
빛의 속도로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이거... 실. 수. 했군.”
상급 엑스퍼트의 반응속도로도 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2
[다른 사용자와 계약된 기체입니다. 동기화 가능 여부 판단 중......]
[동기화 가능. ‘안티가’와의 동기화를 시도하시겠습니까? 동기화 완료 시까지 4시간 57분 29초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호위대장, 그러니까 프랭키 쿠만이 손목에 차고 있는 ‘네스트(기간트 보관용 아공간 아이템)’에 손이 닿자마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예상했던 대로다.’
테리 헤링스의 ‘폴암’과 같은 등급의 기간트였지만, 동기화에 필요한 시간은 무려 5시간으로 그보다 훨씬 더 길었다.
아무래도 오너의 기량 차이로 인해 발생한 갭인 듯했다.
‘쩝, 5시간이면 길어도 너무 긴데...’
짧은 고민이 머릿속을 스치던 찰나.
번뜩 정신을 차린 프랭키 쿠만이 팔을 거칠게 뿌리치며 외쳤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미안하군.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실.수. 였다.”
“이......”
험상궂은 얼굴로 자신의 손목과 나를 번갈아 보길 잠시.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눈가의 힘을 풀더니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나도 실수한 게 있으니... 이번 일은 서로 비긴 걸로 하지. 크흠...”
그리곤 그 말을 끝으로 몸을 훽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저런! 죄송해요, 스노우님. 제가 가서 확실하게 사과를...”
“됐다. 비긴 걸로 하자고 하잖아.”
“그건 쿠만 대장이 일방적으로...”
“신경 쓰지 말고 밥이나 먹어.”
“네...”
스타니 상단주는 조금 시무룩해진 얼굴로 일꾼이 건네준 새 스프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이미 내 관심은 그녀에게서 멀어진 상태였다.
내 머릿속은 현재...
‘동기화에 필요한 5시간의 해결책’
오직 그것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그리고 결론은...
‘귀찮은데, 그냥 확 죽여버릴까...’
인간의 몇 배에 달하는 감각을 지닌 엘프답게 살기라도 감지한 것일까?
뜨거운 스프를 머금고 있던 스타니 상단주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음, 역시 스프 좀 끼얹은 걸로 죽이는 건... 좀 그렇지?
#3
‘씨발, 저 새끼... 진짜로 정체가 뭐야?’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현재 프랭키 쿠만은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경악한 상태였다.
‘반응... 할 수가 없었어.’
만약 저 재수 없는 동대륙인의 손에 칼이라도 들려있었다면?
그리고 손목이 아닌 목이나 심장으로 날아왔더라면?
도무지 대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완전히 잘못 짚었다. 절대 아무것도 아닌 놈이 아니야. 아까 그 움직임은...’
한창 용병으로 날뛰던 시절, 최상급 엑스퍼트의 전투를 지켜본 경험이 있는 프랭키 쿠만이었다.
‘그 정도는 아닌가? 하지만 분명 나보단 강할 거야. 젠장, 이거 잘못 걸린 것 같은데...’
자기애가 충만한 만큼, 스스로의 안위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것이 바로 프랭키 쿠만이라는 남자였다.
사실 그의 진정한 좌우명은 ‘나무를 수십 내려치더라도 주변을 잘 살핀 뒤 내리치자’였다.
혹시 주변에 무서운 맹수나 몬스터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뒤.
일행과 홀로 떨어져 검술 연습을 하고 있던, 한 사내에게 접근했다.
‘조나단 니엘스라고 했었지?’
베른 요새의 일행은 그 동대륙인을 포함해 모두 넷이었는데.
그중 가장 만만한 상대가 바로 2급 작전참모인 조나단 니엘스였다.
후우우우우우웅
후우우우우우웅
마치 검을 처음 배우는 사람마냥, 횡베기만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그에게 다가간 프랭키 쿠만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거참, 검 한번 시원시원하게 휘두르시네.”
그러자 인상을 찡그린 채 검을 휘두르고 있던 조나단 니엘스가 ‘이게 웬 떡이 냐’는 듯, 재빨리 검을 내리며 말을 받았다.
“하아, 하아... 호위 대장님이시군요. 칭찬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게 무슨 볼 일이라도?”
“아, 그게 다름이 아니라...”
약 5분 뒤.
창백해진 얼굴로 본인의 천막으로 돌아온 그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외쳤다.
“미친, 최상급 엑스퍼트에 6써클 전투마법사? 그게 말이 돼? 왜 하필 그런 괴물이 우리 사이(?)에 끼어든 거냐고!”
프랭키 쿠만의 절규는 한참이나 계속되었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4
프랭키 쿠만이 절망에 빠져있던 그 시각.
베른 요새 마법병단장이자 5써클 마법사인 제이미 그레고리의 천막을 찾은 스노우는, 그에게 2가지 물건을 구해 줄 것을 부탁했다.
“네? 술이라면 이해하겠습니다만, 그런 아티펙트가 왜 필요하신 건지...?”
“구할 수 있는지 없는지만 말해. 값은 온전히 치를 테니.”
“...마침 브롤리의 영지 마법사가 특이한 아티펙트를 수집하는 게 취미인 녀석이긴 한데...”
“잘 아는 마법사인가?”
“같은 마탑 출신 후배입니다.”
“잘됐군. 영지에 도착하면 함께 가보도록 하지.”
“네, 그렇게 하죠.”
“그리고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비밀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도록.”
스노우는 그 말을 끝으로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천막을 나가버렸고.
남겨진 제이미 그레고리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신 계열 아이템? 저 인간이 그런 게 왜 필요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