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24화 (24/169)

24화 더럽게 오래 버티는군

#1

브롤리 영지까지의 남은 여정은 매우 순조로웠다.

베른 요새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에는 마을은커녕 인가(人家)조차 찾아볼 수 없었는데.

예전 방벽이 없던 시절, 몬스터들의 대침공에 의해 브롤리 영지까지 쑥대밭이 되는 참사가 일어난 이후로는.

거의 100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 구간에 터를 잡으려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럼프킨 대로의 양쪽으로 펼쳐진 숲이나 산에는 대침공 당시대수림으로 돌아가지 못한(혹은 원래부터 이곳에 살았던) 몬스터의 후예들이 종종 모습을 드러내고는 했었으니까.

하지만 우리 일행의 경우, 브롤리 영지에 도착하기까지 몬스터라고는 털끝조차 찾아볼 수 없었는데.

사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정신이 돌아버린 몬스터가 아니라면, 이 정도 규모의 상행에 덤벼들 생각은 하지 못할 테지.’

게다가 다른 곳이라면 반드시 고려해야 했을 ‘도적 무리’의 습격도 이곳 럼프킨 대로에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는데.

이에 대한 해답은 테리 헤링스의 입에서 나왔다.

“도적 떼가 없는 이유라... 그야, 여길 오가는 상단의 목적지라곤 베른 요새 외에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베른 요새와 브라이드 영지를 오가는 기간트 오너들이 상단과 함께 이동한다는 건, 루페른 왕국에선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죠.”

한 마디로 기간트를 만날까 무서워, 강도질을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하긴, 기간트라면... 그놈들 입장에선 거의 핵미사일급 재앙일 테지.’

왕국의 그 어느 곳보다 기간트 오너들의 이동이 잦은(베른 요새 순환 근무로 인해) 브라이드 백작령이었기에.

왕도 인근을 제외하면, 루페른 왕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도적들의 영업(?)이 불가능한 곳이라고 한다.

그런 복합적인 이유로 평화로웠던 여정을 마친 우리는.

상행 3일 차의 늦은 오후.

브라이드 백작령의 세 영지 중 하나인 브롤리 영지에 도착했다.

#2

“어서 오시오, 그레고리 단장. 오, 헤링스경. 경은 못 본 새 더 강건해진 것 같군.”

브롤리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이는 올해로 54살이 된 브라이드 백작가의 가신 ‘칼튼 해머슨’ 남작이었다.

전대 브라이드 백작에 의해 등용된 그는, 브라이드 영지에서만 무려 25년간이나 행정 업무를 담당했었고.

여러 가지 좋은 정책을 입안 및 실행한 공으로, 현 브라이드 백작으로부터 남작 위(단승)를 하사받았다.

이곳 브롤리 영지의 영주 대리로 부임한 지는 어느덧 4년 차였는데, 별다른 실정 없이 영지를 잘 이끌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다.

“아, 뒤에 계신 분이 그...”

칼튼 해머슨 남작이 제이미 그레고리의 뒤에 서 있던 내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가 한 발자국 옆으로 비켜서며 나를 소개했다.

“네, 이분이 바로 스노우님이십니다. 백슬리 후작가의 의뢰 해결에 아주 큰 도움을 주신 분이시죠.”

“반갑습니다. 이 영지를 책임지고 있는 칼튼 해머슨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노우입니다.”

사실 브라이드 백작 이외에는 존대를 해줄 생각이 없었으나(어디까지나 컨셉상), 머리칼이 하얗게 센 노인에게까지 함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현재 나는 칼튼 해머슨 남작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입장이었다.

나는 이후 10여 분간 친목 도모를 위해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는 세 사람을 묵묵히 지켜보았고.

대화가 마무리되기 직전 내 용건을 꺼냈다.

“남작님.”

“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스노우님.”

칼튼 해머슨 남작은 이곳 기준으론 막내 아들뻘에 불과한 내게 굉장히 공손한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마력을 다루는 능력이 깊어질수록, 외관상으론 더욱 어려 보인다는 이 세계의 상식으로 인한 영향이 컸다.

베른 요새의 인물들 역시, 나를 최소한 40대로 추측하고 있었기에 말을 높이 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었고.

뿐만아니라 최상급 엑스퍼트나 6써클 마법사의 경우, 어지간한 국가라면 최소자작(영지 포함) 위 이상을 약속하며 서로 모셔가려는 인재였기에.

둘 모두에 해당하는(착각이지만) 난 그 이상의 지위에 오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러니 남작의 입장에선, 저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에 3일 정도 머물 생각인데, 그동안 연회를 크게 열어 주셨으면 합니다.”

“연회를요?”

“네, 비용은 제가 부담하도록 하죠.”

내 부탁에 의외라는 표정을 짓던 남작은,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말에는 손사래를 치며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비용이라니요! 스노우 경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라는 백작님의 전언이 있으셨습니다. 오늘은 이미 연회 준비가 되어있으니 편안하게 즐겨주셨으면 합니다. 내일과 모레도 소홀함이 없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연회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데...”

“말씀하시죠.”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숲의 여명’이라는 상단의 스타니 상단주와, 호위대장인 프랭키 쿠만을 연회에 초대해 주십시오.”

#3

“‘아실리스의 눈물’이라는 아티펙트입니다.”

“아실리스?”

“네, 평생을 은신 상태로 살아간다는 전설상의 몬스터죠.”

“평생을? 그거 굉장하군.”

“네, 그런데 사실 ‘아실리스의 눈물’은 조금 문제가 있는 아티펙트입니다.”

“문제?”

브롤리 영주성의 한편에 위치한 마법사의 연구실.

이곳의 주인은 제이미 그레고리의 후배이자, 영지 소속 마법사 중 하나인 라이스 쿠퍼였다.

나는 제이미 그레고리의 소개로 알게 된 그의 연구실에서 내가 부탁한 아티펙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라이스 쿠퍼의 손에는 자그마한 은빛 펜던트가 들려 있었다.

“네, 사실 이 아티펙트에 ‘아실리스’라는 이름이 붙은 건 엄청난 은신 강화능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실리스라는 몬스터의 또다른 특징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다른 특징이라면?”

“아실리스라는 몬스터는 길이만 300여 미터에 가까운 주제에, 하루에 고작 자기 몸길이 정도도 움직이지 못할 만큼 느려 터진 몬스터라고 전해지고 있죠.”

“설마 그 특징이라는 게 그럼?”

“네, 이걸 차고 일정 속도 이상으로 움직이면... 은신이 바로 풀려버립니다.”

“그 일정 속도라는 게 어느 정도지?”

“10초에 대략 50cm 이상 전진하면 풀리는 것 같더군요.”

“혹시 이걸 차고 뭔갈 건드리면?”

“살짝 부딪히는 정도는 괜찮습니다. 은신 유지 능력이 굉장하거든요. 다만 상대의 감각이 예리할 경우 은신이 풀리지 않더라도 존재 자체는 간파당할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아주 살짝, 정말 살짝 스치는 정도로는 은신이 풀리지 않는다는 뜻이로군.”

“그렇죠. 솔직히 스노우님 같은 분께는 크게 도움이 될만한 물건은 아닙니다.”

라이스 쿠퍼는 도움이 되지 못해 매우 송구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품속에 있던 골드주머니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아니, 아주 쓸모있는 아티펙트야. 내가 사도록 하지.”

이로써 준비는 모두 끝났다.

#4

영주성의 연회에 초대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고있는 프랭키 쿠만은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물론 상급 엑스퍼트인데다 기간트 오너인 그에게 이런 연회는 그리 낯선 문화는 아니었다.

실제로 기간트 오너라는 게 알려진 이후, 여러 왕국의 귀족들에게 초대되어 연회에 참석한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토록 들뜬 이유는...

“자, 내 술 한 잔 더 받지.”

“크으, 좋지. 그나저나 형씨에 대해선 내가 좀 오해했었던 것 같아. 이렇게 좋은 사람일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친하게 지냈을 텐데 말이야.”

“뭐, 지금부터라도 친해지면 될 일. 자, 그런 의미에서 한 잔 더.”

“좋아, 좋아! 아, 단주. 단주도 한 번 마셔 보시오. 이 술이 진짜 보통 술이 아니란 말이지. 그 유명한 ‘베네디토(대륙 제일의 위스키 생산지)’에서, 일년에 딱 500병만 생산하는 명품 중의 명품이라고. 아마 한 병에...”

“70골드.”

“오... 그새 더 올랐군. 대체 이걸 어떻게 구한 거요?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걸로 유명한 물건인데.”

“음, 친구를 사귀는데 돈이 중요한가?”

“크으, 사나이로구만.”

“그런데 설마, 오러를 이용해 술기운을 날려버리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날 뭘로 보고! 그딴 짓을 하는 놈은 사내새끼가 아니지!”

“그쪽이야말로 진정한 사나이로군.”

“아하하하하하하하!”

첫 만남부터 재수 없었던 데다, 알고 보니 엄청난 실력자였던 인간이 자신의 비위를 이리도 잘 맞춰주고 있으니.

프랭키 쿠만의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니 상단주의 자리를 떡하니 자신의 바로 옆으로 잡아 놓은 것이 아닌가.

‘크흐흐... 날 브라이드 영지로 스카웃이라도 할 셈인가? 멍청한 놈, 이딴 걸 백날 먹여 봐라. 내가 눈이라도 끔뻑하나. 우리 이쁜이를 두고 내가 가긴 어딜 가.’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에 스타니 상단주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져갔지만.

두 사람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어라 마셔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무려 70골드짜리 술의 빈 병이 하나둘 늘어갈수록, 프랭키 쿠만의 눈이 점점 더 풀려갔다.

‘음, 이상하게 평소보다 더 취하는 것 같은데. 워낙 독한 술이어서 그런가...

술기운을 조금 몰아내는 게... 쩝...’

그리고 기어이 9번째 빈 병이 테이블 위를 장식하는 순간.

프랭키 쿠만의 머리가 테이블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술자리가 적당히 무르익었을 무렵부터, 내내 두 가지 스킬을 반복해서 시전중이었던 스노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연 상급 엑스퍼트인가... 더럽게 오래 버티는군.’

끝까지 자리를 지킨 채 두 사람을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던 스타니 상단주.

그녀가 잔뜩 토라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겨서 좋으시겠네요. 아니, 대체 무슨 술을 이렇게 무식하게 마셔요?”

하지만 스노우는 그녀의 투정을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그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늦었으니, 오늘은 영주성에서 자고 가도록.”

그리곤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두 사람에게 성에서 가장 좋은 방을 내주도록 해라. 그럼, 내일 또 보지 상단주.”

“......”

어처구니없는 표정의 스타니 상단주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

몸을 돌린 스노우는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고.

그 냉정한 모습에 그녀가 분통을 터뜨렸다.

“아니, 이럴 거면 대체 난 왜 오라고 한 거야! 아오, 살살 꼬셔서 우리쪽으로 넘어오게 만들어볼까 했더니... 크흠, 이건 제가 방에서 혼자 마실게요.”

그러면서도 탁자 위에 남은 70골드짜리 술 두 병을 슬그머니 챙기는 걸 보면.

그녀 역시 상인은 상인이었다.

연회의 주인공인 스노우가 자리를 떠나자 연회는 금세 마무리 되었고.

이후 3일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5

[인스파이얼(C) : 상대방의 감정을 고취시킨다. 대상의 마력 저항력이 높을수

록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 소모 마력 : 300]

[슬립(C) : 상대방을 잠에 빠져들게 만든다. 대상의 마력 저항력이 높을수록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 소모 마력 :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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