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더 이상은 못 참아
#1
오너가 탑승하지 않은 기간트가 스스로 움직인 듣도 보도 못한 기사(奇事).
심지어 구릉을 넘어가기 전, 잠시 멈춘 기간트가 이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광경을 수백 명이 목격하지 않았던가.
마치 ‘안녕’을 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럼프킨 대로에서 조금 떨어진 야영지 주변은, 한밤중임에도 마치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혀 놓은 상태였다.
상단에 소속된 2명의 마법사(4서클과 3서클)가 하늘 위로 여러 개의 광구(光球)를 쏘아 올렸고, 둘로는 모자라 베른 요새의 마법병단장인 제이미 그레고리 역시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불을 밝힌다고 한들, 한밤중의 수색에는 엄연히 한계가 존재했다.
이 어둠 속에서 공터와 구릉 주변으로 펼쳐진 숲속까지 범위를 넓히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기에.
결국 수색의 범위는 야영지와 구릉 주변 500여 미터 정도가 한계일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되는 해괴한 일로 인해, 약속된 휴식을 방해받은 상단 인원들의 입에서 불만이 쏟아져 나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젠장, 그놈의 기간트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그런데 야영지 주변이랑 구릉쪽만 살핀다고 해서 찾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이 밤에 저 숲으로 들어갈 수는 없잖아.”
“에이 설마, 상단주님이 그런 걸 시킬 리가... 만약 해야 한다면 오너들이 하겠지.”
“멍청아, 둘밖에 안 남은 그 오너 중 하나가... 바로 상단주님인 걸 잊었어?”
“아...”
“이건 힘만 빼는 거야, 그렇게 커다란 게 주변에 있다면 안 보일 리가 없잖아. 포기해야 한다고.”
“자네, 미쳤나? 입조심 하게. 쿠만 대장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했다간, 몇 대얻어맞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
“헙!”
연륜이 느껴지는 한 상인의 말에, 호위 병력 중 한 명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험악한 얼굴을 더더욱 일그러뜨리며, 구릉 뒤편의 숲으로 뛰쳐 들어가던 프랭키 쿠만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호위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늙은 상인이 주변을 둘러보며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 그나저나 큰일이군. 그렇지 않아도 늦어졌는데, 이대로 가다간 일정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르겠어.”
이 역시 있는 거라곤 곡식밖에 없는 브롤리 영지에서, 3일 내내 연회에 참가 하는 정신 나간 짓을 벌인 호위대장과 상단주(그나마 상단주에게는 뭔가 이유가 있었으리라 믿고 있었다) 탓이었지만.
이곳 ‘숲의 여명’ 내에서 그 두 사람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기에, 감히 대놓고 그들을 비난할 용자는 없었다.
‘응? 그러고 보니 프랭키 놈은 더이상 오너가 아니잖아?’
그렇다면 그는 상단 소속 세 명의 상급 엑스퍼트 중 하나일 뿐이었다.
물론 그조차도 대단한 위치이기는 했지만, 기간트 오너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심지어 나머지 두 상급 엑스퍼트 중 한 명은 프랭키 쿠만보다 7년이나 먼저 경지에 이른 ‘치로키 왕국’의 기사 출신 호위였는데.
그가 호위대장 자리에서 밀린 이유는, 어디까지나 프랭키 쿠만이 ‘오너’였기 때문이었고.
언제나 거들먹거리는 프랭키 쿠만과 다른 두 상급 엑스퍼트의 사이는 썩 좋지 않은 편이었다.
‘큭, 기간트를 찾지 못하면... 그리 좋은 꼴은 보지 못하겠구나. 쌤통이다, 이 새끼야.’
평소 행실이 좋지 않았던 프랭키 쿠만의 불행에.
속으로는 내심 고소한 마음을 품고 있는 늙은 상인이었다.
#2
새벽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이른 시각.
잠에서 깬 나는 두어 차례 눈을 끔뻑거린 뒤, 곧장 몸을 일으켜 천막 밖으로 나왔다.
밤늦은 시간까지 기간트 수색에 동원되었던 상단의 인원 대부분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는 듯했다.
나는 수십 개의 천막에서 들려오는 앓는 소리를 귓가로 흘려보내며 야영지를 돌아보았다.
‘어디 좀 으슥한 곳이 없나?’
나는 모종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은밀한 곳을 찾고 있었다.
야영지에는 10여 명의 호위가 군데군데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연신 하품을 토해내고 있었고.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황급히 자세를 바로하며 꾸벅 인사를 건네오곤 했다.
나는 호위들의 인사를 대충 받아준 뒤,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로 고민에 잠겼다.
‘은신해서 숲으로 들어갈까? 아니면 구릉 너머?’
호위들이 있었지만, 기껏해야 오러 유저에 불과한 그들의 눈을 피하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잠시 구릉 너머와 야영지 옆 숲을 놓고 고민하고 있던 그때.
어슴푸레 밝아오는 하늘 아래, 누군가 옅게 낀 아침 안개를 헤치며 야영지를 향해 빠른 속도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누구ㄴ... 쿠만 대장님?”
“쿠만 대장님이다!”
뒤로 질끈 묶었던 머리띠가 끊어져 산발이 된데다, 군데군데 묻은 핏자국과 갑옷에 난 상처.
그 모습만으로도 그가 간밤에 어떤 개고생을 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살기를 풀풀 풍기며 야영지 안으로 들어온 그는, 호위들의 인사를 무시한 채 그들을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그들 옆에 말없이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이내 화색이 되더니, 빠르게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오, 스노우. 혹시 내가 걱정돼서 나와 있었나?”
“...대체 어디까지 갔다 온 거냐?”
“나도 몰라. 정신없이 달리다가 ‘프록슨’ 무리를 만나는 바람에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프록슨?”
“아, 동대륙에는 없는 몬스터인가? 사람 두 배만 한 덩치에, 뒷다리 힘이 엄청나 단번에 50미터 이상 뛰어오를 수 있는 몬스터다.”
“상급 엑스퍼트인 네가 당해내지 못할 정도인가?”
“그럴 리가, 그딴 놈들은 100마리라도 거뜬하지. 문제는 놈들이 주변 땅들을 온통 늪지대로 만들어 버린다는 거다. 그리고 그 늪에서 흘러나오는 독안개가 꽤 지독하지.”
“그래서, 수색은 포기했나?”
“무슨 소리, 분명 늪지대에서 기간트의 발자국 같은 걸 봤다. 그쪽으로 지나간 게 틀림... 젠장, 말하면서도 믿어지지가 않는군. 기간트도 미칠 수가 있나?”
더이상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사라졌다.
‘꿈이라도 꿨나? 기간트 발자국?’
탁탁
나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작별을 고했다.
“뭐, 한번 잘 찾아봐라.”
“어... 그냥 가면 어떡해?”
“응?”
“친구의 어려움을 모른 척하겠다는 거냐?”
나는 검지를 펴 녀석과 나를 번갈아 가리키며 물었다.
“친구?”
“그래, 친구! 설마 브롤리 성에서의 그 뜨거웠던 밤을 잊은 건 아니겠지?”
“영주 성의 난방 때문에 더웠나 보군.”
“장난칠 기분이 아니다!”
“장난이건 뭐건, 난 곧 브라이드 영지로 떠나야 한다.”
“뭐?”
“백작님과의 약속 시간에 늦을 수는 없지.”
“그런 말은 없었잖아?”
“내가 네게, 일정을 일일이 허락받아야 하나?”
“......”
“기간트는 꼭 찾길 바라지.”
나는 손을 한 차례 흔들어 준 뒤 천막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프랭키 쿠만은 끈질겼다.
녀석은 내 팔을 잡아채며 간절하게 외쳤다.
“도와줘! 독안개를 없애려만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상단에도 마법사는 있잖아.”
“그딴 놈들은 도움이 안 돼! 고위 마법사가 필요하다고. 제발 도와다오!”
“도와... 다오?”
“크윽, 도, 도와주시오.”
“도와... 주시오?”
“으으으... 도와... 도와 주십시오, 제발!”
‘똥줄이 타는 모양이로군.’
험상궂은 얼굴의 건장한 사내가, 무릎까지 꿇고 간절하게 도움을 청하는 모습은 짐짓 처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처절함이 내 가슴까지 와닿았냐고 묻는다면?
‘전혀, 내가 미쳤냐?’
나는 표정을 굳히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싫다.”
#3
프랭키 쿠만이라는 진상으로 인해,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조금만 더 참아야겠군.”
펄럭
내가 홀로 아쉬움을 곱씹고 있을 때.
야영지 중심의 천막에서 스타니 상단주가 걸어나왔다.
밤새 고민을 한 건지, 뽀얗던 피부가 살짝 푸석해 보이는 스타니 상단주.
그녀는 결국 수색을 도와줄 10여 명의 호위를 남겨둔 채.
나와 함께 브라이드 영지로 출발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젠장! 감히 날 이따위로 대해...$%^#@%##...”
여전히 호위대장이란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기실 기간트 없는 프랭키 쿠만이란 인간은, 그저 성격 나쁜 상급 엑스퍼트일 뿐이었다.
상급 엑스퍼트 역시 무시 못 할 실력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매물이 생기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최상급 엑스퍼트(귀족이 될 수 있는데 상단에 들어갈 리가 있나)와는 달리, 상급 엑스퍼트 정도는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엑스퍼트에 이른 기사 중 상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르는 이가 대략 10% 정도라면, 최상급 엑스퍼트는 그 10% 중에서도 고작 1%에 불과했으니까.
700골드였던 월급 역시 끽해야 150골드 정도로 깎일 테니. 자존심 때문에라도, 프랭키 쿠만이 상단에 남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을 것 같았다.
‘스타니 상단주에게 미쳐있는 놈이니, 헐값에 재계약을 해버릴 수도 있을 테지만.’
어쩌면 그 점을 노린 상단주 쪽에서, 싼값에 계약을 제안할 수도 있었고.
아무튼, ‘안티가’가 이미 내 손에 들어온 이상.
녀석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냉정하게 계산을 끝마친 듯한 스타니 상단주가 내게로 다가왔고.
우리는 프랭키 쿠만을 포함한 10여 명을 남겨둔 채, 브라이드 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남겨진 이들은 아마도 꽤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을 ‘안티가’를 찾아 이 근방을 헤매겠지.
‘음, 함께 고생할 상단 호위들에겐 조금 미안하군.’
#4
“잠깐 볼 일이 있으니 먼저 가도록.”
“네? 이제 두 시간만 가면 브라이드 영지인데요? 그리고 기억도 없으신 분이 볼 일은...”
“늦어도 내일 정오까지는 도착하겠다.”
“자, 잠깐만요. 스노우님. 스노우님!!”
나는 당황하는 베른 요새의 인원들을 뒤로하고, 빠르게 달려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스노우님! 야아아아......”
이건 스타니 상단주인가?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제법 얌전한 척하더니... 실상은 인간 세상에서 닳고 닳은 데다, 왈가닥 기질이 다분한 엘프 여전사였다.
하지만 엘프 여전사의 히스테리도 날 막을 수는 없었다.
“더이상은 못 참아.”
사실 지난밤, 격납고로 들어온 ‘안티가’를 꺼내 보고 싶은 마음에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새벽까지 기간트를 찾겠답시고 돌아다니는 인원만 수십.
결국 잘 걸리지도 않는 ‘슬립(C)’ 스킬을 수십 번 남발한 끝에 겨우 잠이 들기는 했지만.
아침에 눈을 뜬 이후로도 여전히, 내 머릿속은 온통 기간트 ‘안티가’에 대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백작령에서 이놈을 꺼내놓는 것도 안 될 일이고.’
그건 기간트를 훔친 사람이 나란 걸 광고하는 짓이다.
다행히 원격조종 이후 3년 만에 얻은 고유스킬 ‘변형(S)’으로 인해, ‘안티가’를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변형(S) : 기체의 외형을 일부분 변화시킬 수 있다. 숙련도가 가득 차면 ‘변신(S)’ 스킬로 진화한다. 현재 변형 한계 ? 29%]
심지어 처음 보는 성장형 스킬 아니던가.
‘빨리 적당한 곳으로 가자.’
‘바람의 인도(B)’와 ‘매 토템(C)’ 스킬을 시전한 채 20여 분을 달리니, 아침에 떠나온 야영지와 조금 전 일행과 헤어진 곳의 중간지점에 이르렀다.
‘천리안(C)’ 스킬을 이용해 시야가 닿는 거리 내에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나는, 곧장 시야 한 편의 메시지창에서 ‘격납고(S)’ 스킬을 선택했다.
그리고는 격납고 안에서 꽤 오랜 기간 잠들어 있던 2미터 남짓한 길이의 바이 크를 호출했다.
[토마호크 SS7 스피릿(E+)을 출격시키시겠습니까?]
“그래.”
대답을 마친 순간.
화아아아아아아앗
은은한 빛과 함께 검은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잘빠진 바이크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구에서도 이용할 일이 별로 없어 격납고의 공간만 차지하고 있던 녀석이다.
하지만 개발에만 수천억이 투입되었었던 만큼, 성능 하나는 정말이지 끝내줬다.
‘뭐, 어디까지나 바이크치고는.’
마정석을 연료로 쓰기에 연비가 무지막지하게 나쁘긴 했지만.
속도만큼은 어지간한 기간트로도 이 녀석을 따라잡을 수 없을 터였다.
‘연료로 쓸 마정석이라면, 이젠 충분하기도 하고.’
최고시속 1120km/h의 괴물.
하지만 이 녀석의 진정한 장점은 속도가 아닌 험로 주행에 있었다.
짧은 시간이라면 경사가 90도인 절벽을 타고 오르는 것도 가능할 정도.
나는 토마호크 SS7 스피릿의 안장에 앉아 계기판 아래 붉은 버튼을 눌렀다.
츠츠츠츠츠츠츠츠츠
계기판에 불이 들어옴과 동시에 미세한 엔진음이 귓가를 간지럽힌다.
마력을 끌어올리자, 채 1초도 걸리지 않아 동화율이 100%까지 치솟았고.
준비가 끝난 나는 쓰로틀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쉬이이이이이이이이잉...
총알처럼 튀어 나간 바이크가.
숲의 전경들을 맹렬하게 뒤로 밀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