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질주
#1
스아아아아아...
안티가의 얼굴과 머리를 뒤덮고 있던 사자 갈기가 녹아내리듯 허공으로 사라진다.
수북한 갈기털(당연히 갈기형태의 금속)이 모두 사라지는 데에는 고작 10여 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갈기가 사라진 기간트의 얼굴은 영락없이 거대한 고양이를 닮아있었다.
지난밤을 뜬 눈으로 보내며 내내 안티가의 성능을 확인했다.
이름 모를 산의 몬스터들 입장에선 말 그대로 재앙의 날이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베헤르디아 대수림과는 다르게 A급 이상의 몬스터를 발견하는 게 매우 힘들었다는 사실이다.
밤새 산을 뒤져 찾아낸 것이 고작 사르가스급(A-) 몬스터 두 마리였고.
그놈들은 각각 안티가의 주먹질과 발길질 한 방에 나란히 상체가 날아가 버렸다.
날이 밝고 더 이상의 실험이 의미 없음을 깨달은 나는, ‘파일럿(S)’ 특성의 고유스킬인 ‘한계돌파(S)’를 안티가를 통해 발현하는 것을 끝으로 테스트를 마쳤다.
고작 최대치의 50%만 적용했을 뿐임에도, 스킬이 적용된 기간트는 말도 안 되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고작(?) 30여 미터에 불과한 나무를 밟으며 고속 이동을 하는데도 나무에 거의 손상을 주지 않았고, 다른 스킬을 사용하지 않은 채로 300미터 정도는 가뿐하게 뛰어오를 수 있었으며, 그 밖에 본신으로는 불가능한 움직임들을 기간 트로 재현해냈다.
이것은 이 세계의 상식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만족할 만큼의 성능 테스트를 마친 이후.
나는 곧바로 안티가의 ‘신분 세탁’을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현재...
“흠, 실제로는 호랑이를 더 닮았던데, 그렇게까지 정교하게 만들지는 못했네.
그나저나...”
그저 갈기만 지웠을 뿐인데도 변형 한계를 1/4 가까이 소모해 버렸다.
[변형(S) : 기체의 외형을 일부분 변화시킬 수 있다. 숙련도가 가득 차면 ‘변신(S)’ 스킬로 진화한다.]
[안티가(B-) : 6.7m, 7.2톤(벨런스형). 출력 800rp. 오르비스 대륙 동부에 위치한 노스럼 왕국의 ‘헤이그 공작가’가 소유한 기간트 제작소 ‘임페르노’에서 제작된 기간트. B-급 마력엔진과 B-급 합금의 조화로 벨런스가 뛰어나다.
임페르노제 기간트의 특색인 무기 보관 슬롯(아공간) 추가가 적용되었다(총 3개). 몬스터 ‘안티가’의 외형을 훌륭하게 재현했다. 고유스킬 ‘변형(S)’가 적용중이다. 현재 변형율/변형 한계 : 6.9%/29%]
“프랙탈필드, 눈사람 소환.”
스르르르르...
기간트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반경 7미터 정도의 대지에 미세한 눈결정들이 빠르게 증식하기 시작했고.
곧 투명한 얼음의 대지가 펼쳐졌다.
나는 얼음의 대지 위에 ‘서리바람(B)’ 특성의 고유스킬 ‘눈사람 소환(B)’을 시전해 서번트를 소환했다.
전투 목적이 아닌지라 서번트의 모양은 단순하기 그지없는 지름 1미터가량의원통.
발밑에서 불쑥 솟아난 서번트는 나를 안티가의 얼굴 높이까지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스륵스륵스르륵스륵스륵...
내 의지에 따라 높낮이를 조절하며 천천히 기간트의 몸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아직은 누가 봐도 안티가로군.”
갈기가 사라졌지만, 얼굴 형태나 특유의 팔길이로 인해 알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다음은 어디를 바꿔야 할지 고민되었다.
다른 기간트들에 비해 유독 긴 팔이 튀어 보이기는 했지만, 활을 사용하는 이상 긴 팔은 엄청난 이점이었기에 더 늘리면 늘렸지 줄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즐기는 맨손 격투에도 똑같이 작용되었다.
“리치는 무조건 길면 길수록 좋은 거니까.”
잠깐의 고민 끝에, 일단은 얼굴부터 완전히 바꾸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날렵한 몸에 긴 팔, 상대적으로 짧은 다리.
이것들을 종합하면 생각나는 건... 역시 그것 이외엔 없었다.
마력을 끌어올리며 의지를 집중시키자 안티가의 얼굴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마구 주물럭거리는 찰흙처럼.
이후 약 20여 초의 시간이 지나자 안티가의 얼굴은 서서히 일정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성된 그것은...
인간을 닮았지만 납작한 코와 눈썹 위부터 시작해 얼굴과 머리를 뒤덮은 짧은 털을 지닌 동물.
원숭이였다.
심지어 대충 호랑이 형태에 불과했던 직전과는 달리, 실제 원숭이를 박제해 놓은 것으로 착각할 만큼 잘 재현했다.
[현재 변형율/변형 한계 25.7%/29%]
얼굴의 형태가 완전히 달라진 탓인지 변형 한계에 거의 다다른 상태.
하지만 투자한 보람이 느껴질 정도로 완벽한 변신이었다.
“음, 뭔가 좀 부족한데. 아, 강력한 원숭이라면 역시...”
나는 다시 한번 마력과 정신을 집중해 심상을 구현했다.
그러자 안티가의 머리 위에 찬란한 금빛을 뿌리는 무언가가 생성되었다.
화아아아아아아악
나는 그 경이로운 광경에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빛 줄여.”
눈이 멀어버릴 듯한 빛이 가라앉자 머리 앞부분의 양쪽 끝이 둥글게 말린 머리띠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손오공 머리엔 긴고아지.”
[기체의 이름을 ‘손오공’으로 바꾸시겠습니까?]
“됐어, 넣어둬.”
오늘따라 메시지창이 눈치가 없었다.
[......현재 변형율/변형 한계 27.4%/29%]
나는 안티가의 양팔 색을 조금 바꾸는 것으로 변형을 마무리지었다.
[현재 변형율/변형 한계 29%/29%]
“뭐, 이 정도면 다른 기간트라고 우길만 할 것 같군.”
그럼 이제...
브라이드 영지로 출발할 시간이었다.
#2
브라이드 영지에 마련된 ‘숲의 여명’의 지부.
귀빈실에서 잠을 깬 스타니 상단주는 커튼 사이로 스며든 햇살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커다란 방의 한편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텅 빈 술병과 2/3가량 비워진 술병 두 개가 놓여있었는데.
지난밤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 스타니 상단주가 기어이 70골드짜리 술의 뚜껑을 연 것이다.
그리고 불면증의 원인인 술병의 원주인을 생각하며 폭주.
평범한 주량을 지닌 주제에 오러나 정령을 이용해 술기운을 조절하지도 않았으니, 술에 잔뜩 취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어쨌든 잠에 빠지는 데 성공한 그녀였다.
“나쁜 새끼...”
모종의 이유로 일정이 많이 늦춰진 탓에 오늘 당장 브라이드 영지를 떠나야만 하는 ‘숲의 여명’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에게 따져 묻고 싶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스노우라는 인간이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었다.
브롤리 영지에서 있었던 연회엔 자신과 전 호위대장(이미 그녀의 마음속에서 호위대장은 교체된 상태)을 초대했을 뿐이었고, 그렇다고 참석을 강제한 것도 아니었다.
상단원들이 보기에는 두 사람이 자발적으로 연회를 즐긴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단원들을 일일이 찾아가 해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리고 해명을 한다 한들... 뭐라고 한단 말인가?
‘그 남자를 유혹(물론 숲의 여명으로)하기 위해 억지로 참석했다고?’
오히려 오해만 더 깊어질 것이다.
어쩌면 남자에 눈이 돌아가 상단 일을 내팽개쳤단 소리를 듣게 될지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스타니 상단주가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조금 초췌하지만 매우 아름다운 ‘인간’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름답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무기로 이용할 줄 아는 여성이었다.
그로 인해 타종족, 특히 인간 남성들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114년 인생에서, 스노우처럼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대체 이 인간은 어디로 간 거야?”
브라이드 영지를 코앞에 두고(말로 달리면 20분 정도면 도착할 거리) 갑자기 방향을 틀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니.
스타니 상단주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거대한 펜던트 모양의 마력 시계 뚜껑을 열었다.
“10시 47분... 이렇게 늦잠을 자본 게 대체 얼마 만이지? 그보다, 정오까지는 온다고 했으니 어쩌면 이미 도착했을지도 모르겠군.”
스타니 상단주가 스노우란 사내에게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보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무려 최상급 엑스퍼트에 6써클 마법사, 그것도 전투마법사다.
어딘가의 소설 속에나 있을 법한 완벽한 마검사.
게다가 기간트 운용 능력은 가히 천재적이었다.
그녀 역시 정령과 마법을 다루지만, 기간트로 그만큼 마법을 능숙하게 다루는 존재는 처음이었다.
500rp짜리 대거로 800rp의 폴암을 가지고 놀았다면, 사실 더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했다.
게다가 상대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금십자 기사단 소속 ‘오너.’
비록 그중 경험이 적은 편에 속하는 오너였다고는 하지만, 루페른 귀족가의 기간트 전력 중 수위를 다툰다고 알려진 곳 아니던가.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최소한의 친분이라도 쌓아두자는 생각에 친근하게 대한 것이었다면, 지금에 와서는 영입 제안이라도 던져봐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며 초췌한 얼굴을 수습하고 있을 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나지막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상단주님, 일어나셨어요?”
“그래. 들어와, 엘리스.”
문을 열고 들어온 여인은 상단의 호위 중 한 명으로, 그녀 역시 스타니 상단 주와 같은 엘프였다.
술병이 올라간 테이블을 힐긋 바라본 엘리스가 입을 열었다.
“스노우씨가 브라이드 영지에 들어섰다고 합니다.”
“그래? 곧 도착하겠네.”
“지금쯤 도착했을지도... 뭔가를 타고 빠르게 달려오고 있다고 하더군요.”
마법 통신구로 알 수 있는 내용은 이것이 전부였다.
엘리스는 스노우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상단주에게 달려왔기에, 그가 타고 있는 게 뭔지는 듣지 못했다.
엘리스의 말을 들은 스타니 상단주는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나가봐야겠어.”
그녀는는 엘리스를 대동한 채 외성의 성문으로 향했다.
어차피 백작을 만나려면 외성을 통과해 백작의 가족들과 몇몇 가신들이 사는 내성으로 가야만 했다.
지부를 나선 그녀가 외성의 성문에 도착했을 때, 마침 저 멀리서 무언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브라이드 영지는 외성 밖에도 수많은 영지민들이 살고 있었지만, 어차피 럼프킨 대로를 따라 달려오고 있었기에 위험한 상황은 연출되지 않았다.
“저게 뭐야?”
“모, 몬스터?”
“상단의 짐마차를 끄는 그 몬스터 아냐?”
“로젠틴? 아니야, 겉모습이 달라. 그리고 로젠틴은 저렇게 흉악하게 생기진 않았다고. 자세히 보면 귀여워.”
“그럼 저건...”
하지만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지 않았다고 해서 소요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됐든 대낮에 거대하고 흉포한 몬스터가 대로를 질주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성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조차 긴장으로 인해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듯 보였다.
점점 성문에 가까워지는 몬스터와 그 위에 올라탄 인간.
스타니 상단주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거... 발로란이지?”
곁에 서 있던 엘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네, 대체 어떻게... 저건 길들이는 게 불가능할 텐데...”
“맞아, 그게 됐다면 로젠틴 대신 저 녀석이 우리 마차를 끌고 있었겠지.”
“테이밍일까요?”
“글쎄, 어쩌면 동대륙의 비전일지도.”
“하지만 그는 기억을...”
“싸움도 잘하고, 마법도 마찬가지야. 다른 능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성문에 가까워지자 광란의 질주를 벌이던 발로란이 급격하게 속도를 줄였다.
타타타타타타타다다다... 다다... 닥
무우우우우우우우우...
걸음을 멈춘 몬스터의 전신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엘리스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달려온 거야?”
곧 죽을 것처럼 혀를 길게 빼문 발로란의 목과 가슴에는 넝쿨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굵은 줄이 매여 있었고.
거대한 덩치 위에 올라탄 사내는 그 줄을 부여잡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스타니 상단주가 그를 향해 다가가려는 찰나.
발로란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린 스노우가 엉덩이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젠장, 살아있는 놈한테도 스킬이 적용되면 얼마나 좋아? 승차감(?)이 뭐 이 따위냐고!”
그리고는 발로란의 앞?摸??냅다 차버렸고.
무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거대한 몬스터는 다시 한번 긴 울음을 토해내고는.
철퍼덕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이내 커다란 눈으로 눈물을 주룩주룩 뽑아내는 발로란.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눈을 끔뻑거리던 스타니 상단주는, 뒤편에서 들려오는 엘리스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와, 인성 진짜...”
#3
[프랙탈 필드(B) : 시전자를 중심으로 지면 온도를 급하강시키는 미세한 눈결정 문양을 퍼뜨린다. 숙련도가 오를수록 문양이 퍼지는 속도가 빨라진다. 필드 위에 존재하는 객체는 냉기저항력에 따라 움직임에 제약을 받으며, 시전자는 최대 40%의 행동력 보정을 받는다.]
[눈사람 소환(B) : 얼음 결정으로 이루어진 서번트를 소환한다. 서번트의 형태와 크기, 숫자는 소환사의 역량에 따라 좌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