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31화 (31/169)

31화 거부할 수 없는 제안

#1

브라이드 영지에 도착한 지도 어느덧 4일이 지났다.

그러니까 최상급 엑스퍼트인 칼 알버트 자작과 대련을 벌인 것도 어느새 4일 전이라는 뜻.

호기롭게 내가 탄 대거에 도전 한 그는, 시작부터 민첩 관련 버프를 두르고 달려든 기간트의 움직임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고.

제대로 오러를 퍼트리지도 못한 채 일격을 허용하는 바람에, 수십 개의 뼈가 박살나고 내부 장기까지 손상을 입었다.

피에 장기 조각이 섞여 나왔을 때는, 혹시라도 죽어버릴까봐 어지간한 나조차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을 정도.

다행히 최상급 엑스퍼트의 튼튼한 신체는 쉽게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고.

브라이드 영지에는 대지 교단의 고위 사제가 머물고 있었기에, 곧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와씨, 까딱했으면 진짜 뒈질 뻔했네. 그쪽... 장난 아니더군. 내 평생 대거를 타고 그렇게 움직이는 인간은 처음 봤다.’

황천길에 반 발자국 정도는 걸쳤다 돌아왔음에도, 그의 표정은 10년 묵은 변비라도 해결한 사람처럼 개운해 보였는데.

그 이유는 바로 다음 날 알 수 있었다.

‘한 번 더 부탁한다.’

‘대련이라면 얼마든지.’

‘좋군. 단 그쪽은 기간트에 탑승한 상태로 하자고.’

‘뭐? 그럼 대련이 안 될 텐데?’

‘쩝, 기분이 더럽긴 하지만...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군. 어쨌든 부탁한다.’

‘......’

칼 알버트는 루페른 왕국에 현존하는 21명의 최상급 엑스퍼트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2명의 마스터 제외)였고.

그건 그만큼 오러 마스터에 가까운 인간이란 뜻이기도 했다.

이 세계에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이들은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벽을 깨거나 넘어섰다고 하는데.

칼 알버트는 첫날의 그 (기간트와의)대련에서 벽을 넘을 실마리를 잡은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어떠한 보상이라도 할 테니, 딱 한 달간만 매일 한 차례씩 대련을 해달라는 제안.

사실 본래 내 계획은 이랬다.

1. 오너로서의 재능이 끔찍한 수준이라는 칼 알버트를 환골탈태시키거나, 수재 소리 정도는 듣고도 남을 법한 조나단 니엘스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준 뒤 브라이드 백작가가 보유한 ‘구매권’을 얻는다.

2. 대수림의 몬스터들을 때려잡아 단시간에 돈을 벌어 최대한 좋은 기간트를 산다.

3. 두 대의 기간트를 가지고 용병으로 전장에 참가한다.

4. 적 오너를 죽이고 기간트를 얻는다.

어차피 이곳은 다른 세계인데다, 적을 죽이는 것이기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계약자가 없는 기간트는 동기화에 필요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고.

동기화가 끝난 기간트는 격납고에 얌전히 보관될 테니 의심을 살 여지도 없었다.

실로 완벽한 계획이라 할만했다.

칼 알버트를 피떡으로 만든 첫 대련 이후, 백작과의 대담에서 듣게 된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당시 길리엄 브라이드 백작은 넌지시 가신 제안을 해왔지만, 나는 전가의 보도인 기억상실을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제가 누구인지 기억해 내지 못하는 한, 그리고 본래의 임무가 무엇인지 기억해 내지 못하는 한은... 다른 누군가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는 없습니다.’

이곳은 다른 어디도 아닌 기사의 나라 루페른 왕국이었고.

기사도의 신봉자인 백작은 내 결정을 흔쾌히 이해해 주었다.

문제는 이후에 이어진 대화였다.

나는 구매권을 내준다면 합당한 대가를 치르겠다고 밝혔고.

백작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이야기는 기간트에 대한 것으로 자연히 이어졌는데.

‘하하하, 테리 그 녀석이라면 그렇게 말 할 수도 있지. 하지만 스노우, 그 말은 맞는 말이지만 또한 틀린 말이기도 해.’

나는 테리 헤링스가 내게 해줬던 말을 그들에게 들려주었고.

자리에 함께한 백작과 칼 알버트, 제이미 그래고리는 모두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칼 알버트의 입에서 이어진 말에, 나는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뭐, 기간트가 중요한 전략 물자라는 건 사실이지. 그런데 말이야...’

‘......’

‘돈이 있어도 기간트를 살 수 없는 건 어디까지나 우리 루페른 왕국의 귀족들 뿐이야.’

‘뭐?’

‘아니, 잘 들어봐. 애초에 루페른 왕실 수입의 90% 이상이 기간트 수출로 벌어들이는 거라고. 1년에 3000만 골드치를 외부에 팔아넘기고 있다는 뜻이지.’

‘그럼 루페른 귀족들에게는 왜...’

‘그야 귀족들을 통제하면 할수록 왕실의 힘이 강해지니까.’

이것은 ‘루페른 왕국’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칼 알버트의 말에 따르면, 서대륙 국가 중 기간트를 국가에서 완벽하게 통제하는 나라는 루페른 왕국과 대륙 동부의 마법 왕국 ‘포인츠’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두 나라의 공통점은 국가 수입의 거의 전부를 기간트 판매로 벌어들인다는 것이었고. 당연히 두 나라 모두 엄청난 기간트 생산 시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기간트 소유를 제한해 왕권의 힘을 강화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전쟁이 벌어질 경우, 곧장 새로운 기간트 수십 대를 전장에 투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야. 어차피 예비 오너들이 널리고 널린 게 우리 루페른이니까. 굳이 귀족들에게 많은 기간트를 허락할 필요가 없는 거지.’

제이미 그레고리의 부연 설명에 따르면.

기간트 생산시설을 갖추지 못한 국가들의 경우, 오히려 귀족들의 기간트 보유를 적극적으로 장려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잠재적인 내부의 위협보다는, 뻔히 드러나는 외부의 위협이 훨씬 더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특히나 요즘처럼 대륙 전체에 흉흉한 기운이 감도는 시기에는 더더욱.

대화의 말미.

다시 한번 쓴웃음을 머금은 칼 알버트가 말했었다.

‘뭐, 왕실의 공인을 받은 정규 아카데미에선 전략 물자니, 보유법을 어기면 안 되느니... 고리타분한 내용을 가르치긴 하지. 그런데 이건, 조금만 시류를 읽을 줄 아는 녀석들이라면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그러니까 문제는...

고리타분한 교육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는 테리 헤링스, 바로 그 녀석이었다.

#2

내가 모르고 있던 사실은 대륙과 루페른 왕국의 내부의 기간트 정세만이 아니었다.

콰아아아아아앙

“커허어어억!”

대거의 발길질에 맞아 세 번의 기절을 달성한 이후 맞이한 휴식 시간.

어차피 우리의 대화 주제는 기간트 아니면 싸움질에 관한 것이었기에, 어쩌다 보니 기간트를 획득하는 방법 쪽으로 이야기가 흐른 참이었다.

고된 치료 행위로 인해 땀을 뻘뻘 흘리는 사제와 비교되는 개운한 얼굴의 칼알버트.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던 그가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푸흡! 뭐? 아니, 여태 그런 생각을 한 거냐? 전장에서 오너를 죽이고 기간트를 뺐겠다고? 물론 그런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행운을 기대 할 바에는 차라리 돈을 모아서 기간트를 사는 게 빠를걸?”

“왜지?”

“왜라니... 아, 하도 잘 싸우다 보니 기억을 잃었다는 걸 자꾸 깜빡하게 되는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쓸데없는... 하아, 알았다. 기간트 오너, 그러니까 계약자의 사망 시 기간트는 지정된 귀환 포인트로 돌아가게 된다.”

“......귀환 포인트?”

“그래, 우리 루페른 왕국 소속 기간트의 경우, 일괄적으로 왕립 병기창을 지정하도록 국법으로 정해져 있지.”

“젠장...”

“뭐?”

“귀환 포인트를 없애는 방법은?”

“간단하다. 오너가 귀환 포인트를 바꾸거나 아예 삭제시키면 된다.”

“그렇게 간단하다고?”

“과정이야 간단하지. 그런데 그걸 실천한 오너는 적어도 최근 10년간은 없었어.”

“이유는?”

“일단 우리 왕국의 경우엔 오너가 귀환 포인트를 해제할 경우, 이유여하를 막 론하고 사형이다.”

“......”

“왕립병기창에 존재하는 귀환 포인트에 불이 꺼지는 즉시, 근위기사가 포함된 추격대가 조직되고, 죽을 때까지 쫓기게 되지. 살 수 있는 방법은 동대륙이나 알텐시아로 넘어가는 것 이외엔 없는데... 내가 알기로,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이는 왕국 역사상 딱 한 명밖에 없었어.”

“근위기사?”

“최소 상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왕국의 주력 기간트인 코페시와의 동화율 90%를 달성해야만 입단 자격이 주어진다. 테스트를 뚫고 거기 들어간 놈들은 죄다 괴물들이지. 그런 괴물이 근위기간트인 할베르트(2200rp)와 함께 쫓는 거라고. 살아남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

“...그러니까, 오너를 죽여서 기간트를 빼앗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로군.”

“그게 쉬웠다면, 대륙은 지금보다 훨씬 개판이었을 테지. 나 같은 놈은 내내 오너들만 암살하러 다녀야 했을걸?”

“그런데 내가 아는 용병놈은 분명 개인 기간트를 가지고 있었다.”

“제멋대로 도망쳤다는 그 기간트를 말하는 모양이군. 외국의 경우엔 아주 가끔 있는 일이다. 보통은 오너에게 약을 먹여서 계약을 해지시키거나 귀환 포인트를 삭제시킨 다음 죽이지. 정말 아아아아아주 가끔은 빚 때문에 기간트를 팔아먹고 튀는 놈들도 있고.”

“그게 가능하다고?”

“뭐, 어리숙한 오너들의 경우엔? 애초에 그렇게 당할 정도면 영향력 있는 집단 소속이 아닐 확률이 높다. 그런 곳의 오너에게는 접근하기도 힘들뿐더러, 성공한다 해도 뒷감당이 어려울 테니까.”

“이를 테면... 이곳 루페른 같은?”

“맞아.”

그러니까 애초에 오너를 죽여 기간트를 수집한다는 발상은...

전제부터가 잘못이었던 거다.

젠장...

#3

한 달 만에 극적으로 마스터가 탄생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칼 알버트 본인이 꽤나 만족하는 것 같으니 상관은 없겠지.

한 달간의 대련에 대한 값은 브라이드 백작이 대신 치렀는데.

물론 대가는 ‘구매권’이었다.

“종이가 아니군요.”

“이름만 그럴 뿐일세.”

나는 브라이드 백작이 내민 가로세로 5cm가량의 검은색 금속판을 받아들었다.

금속판의 중앙에는 브라이드 백작가를 상징하는 백사자 한 마리가 포효하는 그림이 수놓아져 있었다.

백작은 구매권을 건네며 충고 한마디를 보탰다.

“좋은 기간트를 사고 싶다면 왕실이 인정할 만한 공을 쌓는 게 좋을 걸세. 그냥 이대로 이걸 가져간다면 기껏해야 폴암, 운이 좋다고 해도 제블린 정도가 고작일 테니.”

제블린?

‘그건 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로군.’

안티가가 있는 이상, 고작 출력이 100rp 높다는 것 이외엔 아무런 장점도 없는 제블린은 그닥 끌리는 매물이 아니었다.

그때 백작이 새로운 제안을 던졌다.

“스노우.”

“말씀하십시오.”

“현재 베헤르디아 대수림이 심상치 않네.”

“대수림 말입니까?”

백작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석 달 전부터, 금십자 기사단장과 오너 레이첼 웨이네스가 대수림 중심부의 동태를 살피고 있다네.”

“뭔가 조짐이 있었군요?”

“이상 징후를 발견한 건 해가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지. 대규모 토벌을 행한 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엘로우 섹터의 몬스터들 개체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더군. 그걸 이상하게 여긴 베른 요새에서 조사를 시작......”

요는 이것이었다.

27년 만의 ‘몬스터 대침공’ 징후 포착.

하지만 백작령 최강의 오너인 금십자 기사단장과 잠재력만큼은 그 이상이라는 레이첼 웨이네스가 투입되었음에도, 중심부 조사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만약 몬스터 대침공을 막아내는 데 도움을 준다면, 그 구매권으로 크로스보우(1100rp)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해주겠네. 당연히 대금도 내가 치를 것이고.

베헤르디아 대수림의 몬스터 대침공은 루페른 왕국의 심대한 위기이기에 왕실에서도 공을 인정해 줄걸세.”

하, 그러니까 몬스터 대침공 발생 시 공을 세운다면.

기준 출력 이상의 기간트인 크로스보우를 대가로 치르시겠다?

이건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 대침공이라는 거, 얼마나 남았습니까?”

이런 걸 두고...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라고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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