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열등감
#1
뭐?
뭘 도와 달라고?
수십 년에 한 번씩 일어난다는 대수림 몬스터들의 대침공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본 바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다름 아닌 ‘익숙함’이었다.
‘던전 브레이크랑 비슷하잖아?’
물론 베헤르디아 대수림의 몬스터들이 광기에 빠져드는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완전히 같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몬스터들의 행동양식만 두고 보자면 90% 이상 유사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나는 그 분야 최고의 전문가였다.
물론 개떼같이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상대로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제우스의 부재가 아쉽긴 하겠지만.
어차피 미사일과 탄약을 보충할 방법이 없는 이상, 기체가 멀쩡했다 한들 그저 엄청나게 빠른 이동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 내게는 기간트가 있었다.
기간트에 탑승한 상태라면 S급 몬스터를 상대로도 이전처럼 들러리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만약 고성능 기간트를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홀로 S급 몬스터를 잡아내는 것도 꿈은 아닐 테지.
‘이건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하지만 브라이드 백작이 내건 보상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와 시선을 맞추며 질문을 던졌다.
“그 대침공이라는 거, 얼마나 남았습니까?”
이 부분에서 백작은 조금 멋쩍은 표정을 지었는데.
그 이유는...
“그건... 아직까진 정확하게 알 수 없네. 한 달 뒤가 될 수도 있고. 반년 뒤가 될 수도 있지. 하지만 1년은 넘기지 않을 것이라는 게 현재 우리가 내린 결론일세.”
결국 그리 멀진 않았지만,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는 소리다.
‘그건 좀 곤란한데...’
1년이나 이곳에 묶여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루페른 왕국, 그중에서도 브라이드 백작가는 기간트를 수집하려는 내겐 매우 좋지 않은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오너를 죽여 기간트를 노획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고는 하지만.
거의 불가능하다는 건 가능한 경우도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쨌든, 분쟁이 잦은 지역일수록 기회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간트 전력이 뛰어난 루페른 왕국과 전쟁을 벌이는 건 엄청난 결심이 필요한 일.
사이가 좋지 않은 몇몇 왕국들조차, 루페른 왕국에 대한 전면적인 도발만큼은 철저하게 피하려 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비슷한 이유로, 대수림으로 인해 기간트 전력이 특출난 브라이드 백작가에 영지전 같은 걸 걸어올 미친 영주가 존재할 리 만무했다.
‘내겐 최악의 환경인 셈이지.’
배부르고 등따습게 대우받으며 살려면 이곳에 눌러앉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런 건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챈 듯, 백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기다려 달라는 말은 아닐세. 그저 때가 오면 한 손 거 들어 주길 바랄 뿐이지.”
“그 말씀은...”
백작은 테이블 한편에 놓여 있던 손바닥 크기의 상자 뚜껑을 열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상자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반지?”
상자 안에 있는 물건은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한 쌍의 빨갛고 파란 반지였다.
브라이드 백작이 그중 하나를 꺼내 들며 말했다.
“‘닥틸로멘시’라는 아틱펙트라네.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어느 고대 제국의 주술사들이 점을 칠 때 사용했던 유물이라더군.”
“이걸 왜?”
“손가락에 껴보겠나?”
나는 그가 건네주는 반지를 순순히 손가락에 끼었다.
‘설마 저주 같은 걸 걸려는 건 아니겠지?’
브라이드 백작이 그런 짓을 벌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런 짓을 벌인다면, 나는 지체없이 기간트를 소환해 그를 한 줌의 핏물로 만들어 줄 용의가 있었다.
나는 반지를 왼손 검지에 꼈고.
스르르르
조금 큰듯했던 그것은 내 손가락에 딱 맞게 줄어들었다.
‘......’
그리고 다행히 내가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내 브라이드 백작이 나머지 한쪽을 자신의 손가락에 끼자.
반지, 그리고 그것을 끼고 있는 백작의 존재감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가 어디에 있든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아...”
“하하하, 느껴지나 보군.”
브라이드 백작이 호탕하게 웃으며 반지를 뺐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의 존재감이 사라졌고, 일종의 허탈감이 밀려들어왔다.
탁
손에 들린 반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백작이 입을 열었다.
“파란색 반지가 붉은색 반지를 찾아낼 수 있다네. 이것은 영혼의 이끌림이라 어떠한 마법으로도 막을 수가 없지.”
“제게 붉은색 반지를 주시려는 겁니까?”
“아니, 자네가 가져갈 건 파란색 반지일세.”
“네?”
“원래라면 붉은색 반지가 떠나는 사람의 몫일 테지. 하지만 우린 자네에게 때가 되었다는 신호만 줄 수 있으면 충분하지 않나?”
“아...”
“누군가 붉은색 반지를 끼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 자네는 이곳으로 돌아오면 되네.”
“확실히... 파란색 반지 쪽이 효율적이겠군요.”
“어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나?”
외부인인 내게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 게 조금 의아하기는 했지만.
내 행보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확실히 손해 볼 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었다.
“좋습니다. 백작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죠.”
“잘 선택했네. 보상에 관한 것은 문서로 남겨주지.”
백작 나름의 배려였겠으나, 나는 그깟 종이 쪼가리 따위는 믿지 않았다.
결국 약속을 관철시킬 수 있는 건 스스로가 지닌 힘이다.
신의나 믿음 같은 불확실한 관념이 아닌.
탁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반지를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다만, 보상에 관한 것은 조금 수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수정?”
“저는 확정된 보상이 아닌, 제가 활약한 만큼의 보상을 원합니다. 만약 이를 약속해 주신다면 언제가 되었든 백작령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브라이드 백작은 순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껄껄 웃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하하하하하, 내가 약속한 보상 이상의 활약을 해낼 자신이 있다는 말이로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제 제안을 받아들이신다면... 언젠가는 확인할 수 있으실 겁니다.”
백작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눈에는 호감과 호기심 그리고 약간의 의구심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어쨌든 결론은, 내가 역으로 내민 제안을 썩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
그리고 예상대로...
“좋아, 오늘부터 그 반지는 절대로 빼지 않길 바라네.”
브라이드 백작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2
길리엄 브라이드 백작은 스노우가 나간 이후로도 한동안 상념에 잠겨있었다.
그의 실력은 백작 본인도 확인한 바 있었다.
마스터에 근접했다는 칼 알버트 자작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같은 최상급 엑스퍼트인 자신은 쉽사리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실력이었다.
게다가 기간트를 타고 보여준 그 움직임은...
자신의 수호기사이자 백작령의 2인자인 칼 알버트 자작은 이미 그에게 푹 빠진 상태였다.
‘기간트전이라면, 루페른 왕국 최강의 오너인 루돌프 백작에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아니, 제 솔직한 감정으론 스노우 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군요. 동급의 기간트를 타고 그가 패배하는 그림은 도무지 그려지지 않습니다.’
지독한 기간트 불신론자였던 칼 알버트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확실히 어지 간한 실력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루돌프 백작을 능가하는 실력일지도. 만약 그 정도 실력자라면... 어떠한 보상을 해준다 해도 아깝지 않겠지.”
브라이드 백작.
그는 베헤르디아 대수림의 몬스터 대침공에 관해서는.
그 어떤 대비도, 투자도 절대 과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3
칼 알버트.
새삼 느끼는 거지만, 타고난 전사인 그가 기간트에 미련을 갖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어쩌면 늘상 말하고 다니는 그 예리한 감각을 본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지.
[칼 알버트 (F) : 46세, 루페른 왕국 길리엄 브라이드 백작의 수호 기사.
179cm, 72kg
파일럿 재능 ? 19/28(현재/최대치)
훈련 가능 기체
제우스(C) - 숙련도 0/30
토마호크 SS7 스피릿(E+) - 숙련도 0/48
대거(C) - 숙련도 24/37]
그야말로 처참한 재능.
현재는 물론, 미래 역시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암울한 훈련병 프로필이었다.
지구와 오르비스 대륙을 통틀어 이렇게까지 재능이 없는 인간은 처음 본다.
만약 칼 알버트가 본인의 재능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라면, 기간트 혐오자가 된 이유를 충분히 납득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인 것은, 그는 본인의 부족한 부분보다는 잘할 수 있는 부분에 집착하는 타입이라는 점이었다.
잠깐의 휴식 시간.
이제는 대거와의 대련이 제법 익숙해진 듯, 칼 알버트는 쉽사리 타격을 허용하지 않았고 기절을 하는 일도 거의 사라졌다.
물론 이는 대거의 전력을 첫 대련 때와 똑같이 유지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얼굴과 목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곧 떠난다고 들었다.”
“들은 대로다.”
“이곳에 남을 생각은 없어?”
“글쎄.”
“기억이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머무는 건?”
“여기 있는다고 기억이 더 빨리 돌아올 것 같지는 않군.”
“정 그렇다면야... 뭐, 기억이 없다고 해서 네가 위험에 처할 일은 별로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이 대륙에는 나보다 더한 강자들도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명심하라고. 적어도 기간트를 구할 때까지는 말이야.”
기간트라면 이미 가지고 있긴 하지만.
호의로 하는 말이니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기로 했다.
“명심하지.”
나이는 나보다 무려 스무 살이나 많았지만, 평생 검만 휘두르고 살아서인지 순수한 면이 있는 사내였다.
무엇보다 ‘강함’에 대한 집착이 나와 무서울 정도로 닯았다.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인간이다.
길리엄 브라이드 백작 역시 내 역제안을 받아들이고는.
알아서 사용하라며 ‘구매권’을 내어주는 통 큰 결정을 내렸다.
‘이게 없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큰 공을 세우길 기대하지.’
나는 백작령을 떠나기 전, 이 두 사람에게 한 가지 선물을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잠시 갈 곳이 있다.”
“이제 대련은 이걸로 끝인가? 아쉽군...”
나는 정말로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을 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쉬움을 달래는 데 도움이 될 거다.”
“......?”
#4
츠으으으으... 텅
츠으으으으으으... 텅
[으윽, 배, 배가...]
“엄살 부리지 말고 한 발자국만 더 움직여 봐.”
[지, 진짜 아프다구요...]
“해내지 못하면, 오늘은 하루종일 화이트스펀 안에 파묻혀 있게 될 거야.”
[하, 합니다. 하면 되잖아욧!]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위태롭게 서 있던 대거가 조금씩 오른쪽 발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으으으으... 으아아아아앗!]
츠으으으으... 터어엉
[해냈... 으아악!]
쿠우우우우우우웅
들어 올린 발을 지면에 내딛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기어이 모든 힘을 다 소진해 버린 것인지 균형을 잡지 못한 대거가 지면에 엉덩방아를 찍었다.
대거에 탑승해 있던 조나단 니엘스의 새된 비명이 근거리 통신 마법진을 통해 흘러나왔다.
[으악! 엉덩이!]
브라이드 영지의 외곽에 위치한 기간트 훈련장.
그곳에서는 일견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다섯 걸음을 떼는 것조차 완벽하게 마무리하지 못한 채, 주저앉아버린 기간트.
하지만 이 장면을 목격한 이들 중 웃음기를 머금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입을 쩍 벌리고 선 브라이드 백작과 칼 알버트 자작의 곁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5서클 마법사 제이미 그래고리.
그가 경악한 표정으로 외쳤다.
“대, 대단합니다. 고작 상급 오러 유저가 한 달 만에 대거의 동화율 50%를 돌파하다니요!”
여전히 멍한 표정의 백작이 흐릿한 어조로 물었다.
“레이첼의 기록이... 어느 정도였지?”
“레이첼 웨이네스가 47%, 브록슨 단장님이 45%였습니다.”
“오늘부로 현역 최고 기록이 바뀌었군. 저 안에 있는 친구... 원래는 베른 요새의 작전관이라고?”
“네, 2급 작전참모 조나단 니엘스입니다.”
“상급 유저라...”
이제부터는 내가 나설 차례였다.
“처음 대거에 탔을 때만 해도, 마력 부족으로 채 두 걸음을 나아가지 못했었습니다.”
“처음부터 두 걸음이나?”
“물론 그것도 훌륭하지만, 오러에도 재능이 있더군요. 꽤 빠르게 실력이 늘고 있습니다.”
백작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저런 인재를 어떻게 알아본 건가?”
“그것에 대해선 딱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냥... 알게 되더군요.”
“그래,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보시다시피 썩 괜찮은 재능입니다.”
“썩 괜찮은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너무 허약하죠. 훈련이 필요합니다. 엑스퍼트 중급 수준에만 올라서도... 백작령의 오너들 중에는 적수가 없을 겁니다.”
“아직 상급 유저에 불과하네만?”
“마침 여기 적임자가 있지 않습니까?”
“적임자?”
백작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좌중의 시선이 한 사내에게로 향했다.
시선을 끌어모은 사내, 칼 알버트 자작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잘 알았다. 그러니까 저 녀석을 굴릴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잖아? 걱정 마.
내 아주 열과 성을 다해 저 녀석을 그럴듯한 엑스퍼트로 만들어 놓을 테니까.
까드득...”
칼 알버트.
그의 가슴 속 깊숙한 곳에 감춰두었던.
열등감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