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차라리 집에 불을 지르고 말지
#1
카아앙
콰직
카아아앙
콰아아아아앙
브라이드 영지의 영지민 거주지에서 대략 2km 정도 떨어진 지역.
그곳에 마련된 거대한 훈련장에서 두 대의 기간트가 격렬하게 검과 방패를 맞부딪치고 있었다.
나는 칼 알버트 그리고 그의 두 번째 제자가 된 조나단 니엘스와 함께 7미터를 상회하는 두 거체의 싸움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키는 작지만 덩치는 좀 더 큰 흑갈색 기간트.
이 육중한 기체는 베른 요새에서 복귀한 지 4달째인 상급 엑스퍼트 벤 니만의 ‘크로스보우’였고.
[크윽, 좀 살살해 주십쇼, 백작님.]
더 큰 신장에 비교적 날렵한(어디까지나 비교적) 체형의 은빛 기간트는 백작령의 주인인 길리엄 브라이드의 ‘브로드’였다.
[엄살은 그만두고 방패나 똑바로 들게. 지난번처럼 팔이 잘려서 징징대기 싫으면.]
[아니, 애초에 대련에서 팔을 자르는 게......]
통신 마법진을 통해 흘러나오는 두 오너의 대화가 귓가를 때린다.
나는 거리를 벌린 채 서 있는 두 기간트를 바라보며 한쪽 입가를 들어 올렸다.
‘결국 떠나기 전에 기회가 오는군.’
이제나저제나 백작의 기간트를 분석 할 수 있는 기회를 노렸지만.
백작령의 주인씩이나 되는 이의 손목을 10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뚫어지게 바라보는 건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첫 만남에서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겠지만, 계속해서 그런 행동을 한다면 어떤 오해를 받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
게다가 크기로만 따지자면 루페른 왕국에서 네 번째에 해당하는 거대한 영토의 지배자인 브라이드 백작은 너무나도 바빴다.
[......분석 완료까지 2분 26초. 기체에서 시선이 떨어질 시 분석이 초기화됩니다.]
하지만 운이 따랐는지 이곳을 떠나기로 한 예정일을 하루 앞둔 오늘.
합법적으로 ‘분석’을 실행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출력이 무려 2000rp에 달하는 백작의 기간트 ‘브로드’는 실로 어마어마한 위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파일럿 재능은 두 사람 모두 B급으로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오너가 최상급 엑스퍼트인데다 기간트의 스펙 역시 거의 두 배나 차이가 나다 보니, 마치 어른과 아이의 싸움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콰아아아아앙
타앗
브로드의 검격을 방패로 막아낸 크로스보우가 그 힘을 역이용해 뒤쪽으로 뛰어오르며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자세를 낮춘 채 빠르게 달려들며 육중한 무게가 실린 공격을 퍼부었다.
[분석 완료까지 1분 17초. 기체에서 시선이 떨어질 시 분석이 초기화됩니다.]
하지만 브로드의 움직임은 크로스보우에 비해 최소한 2배는 빨리 보였다.
검을 맞대지 않은 채 아홉 번의 검격을 날렵하게 피해낸 브로드.
기준 출력의 두 배에 달하는 이 기간트는, 마지막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자세를 낮추며 크로스보우의 다리를 냅다 걷어차 버렸다.
콰아아아앙
[으악!]
쿠우우우우웅
결국 크로스보우의 하체 외부장갑이 일부 파손되는 것으로 대련은 끝을 맺었다.
애초에 벨런스가 맞지 않는 싸움이었기에, 백작이 휘하 오너를 지도해줬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분석 완료까지 18초. 기체에서 시선이 떨어질 시 분석이 초기화됩니다.]
“그러고 보니 벤도 요새로 복귀할 때가 됐군.”
“오너들의 휴가가 4개월이라고 했나?”
“맞아, 복귀하면 빨라도 1년 반 뒤에나 요새를 벗어날 수 있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근무 조건이 열악해. 그런데도 이탈자가 없다고?”
“그들 대부분은 브라이드 백작령 출신 기사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백작님의 후원을 받으며 성장했지. 충성심이 남다를 수밖에.”
“충성심이라... 나와는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 단어로군.”
“그게 가주의 수호 기사 앞에서 할 소리냐?”
“무슨 상관이지? 난 곧 떠날 사람인데.”
칼 알버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정했나?”
나는 여전히 브로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그의 물음에 답했다.
“레니비아로 간다.”
“왕도?”
[분석 완료까지 3초. 기체에서 시선이 떨어질 시 분석이 초기화됩니다.]
나는 천천히 칼 알버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래, 백작님이 추천하시더군.”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거대한 은빛 기간트 옆으로 새로운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파아아아아앗
[브로드(A) : 7.8m, 8.2톤(벨런스형). 출력 2000rp. 오르비스 대륙 남서부에 위치한 기사왕국 ‘루페른’ 산하의 왕립병기창에서 제작된 기간트다. A급 마력 엔진과 A급 합금의 조화로 벨런스가 매우 뛰어나다. 루페른제 기간트의 특색인 ‘동화율 보정’이 적용되었다. 루페른 왕국의 2세대 근위기간트.]
[고유스킬 ‘위대한 결속(S)’의 숙련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마력기체(S)’의 숙련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한계돌파(S)’의 숙련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원격조종(S)’의 숙련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수복(S)’의 숙련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호랑이 교관(S)’의 숙련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고유스킬 ‘격납고(S)’의 공간이 소폭 확장됩니다.]
[고유스킬 ‘변형(S)’의 숙련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이로써 왕도로 떠나기 전...
브라이드 영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얻었다.
#2
브라이드 영지를 떠나는 날이 되었다.
백작과 칼 알버트와는 함께 아침 식사를 하며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기에.
내성 문 앞에서 나를 배웅하는 이들은 제이미 그레고리와 테리 헤링스 그리고... 얼굴 군데군데 멍이 든 조나단 니엘스였다.
“제대로 훈련하고 있나 보군.”
“전 그걸 훈련이 아니라 폭행이라 부르고 싶습니다만?”
“스승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
“아니, 애초에 제가 원해서 맺은 사제관계도 아니란 말입니다!”
조나단 니엘스가 억울함 가득한 표정으로 항변했지만.
내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시끄럽다. 오너가 되면 지금 네가 받는 급여의 수십 배는 받을 수 있을 테니 감사하게 여기도록.”
하지만 악밖에 남지 않은 조나단 니엘스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하, 직접 한 번 겪어 보시죠. 있던 돈 욕심도 뚝 떨어질 지경이니까.”
음, 칼 알버트에게 훈련 강도를 좀 더 높이라고 할까?
#3
“네? 마법사시라고요?”
“그렇다.”
루페른 왕국 중서부에 위치한 로메인 백작령의 중심 영지 ‘펠리체’.
54년 전 로메인 백작 가문에 복속된 이곳은, 주변 영지들을 연결하는 관문 역할을 톡톡히 하며 수십 년간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리하여, 현재는 백작령의 수도인 로메인 영지보다 훨씬 더 거대한 규모를 이룬 대영지로 발전한 상황.
제프 롭슨은 펠리체 영지의 용병 지부 직원이었다.
벌써 이 일만 7년 차인 그는 귀찮은 의뢰 배부나 확인은 모조리 후배들에게 미뤄둔 채, 신입 용병들의 가입 신청 업무만을 처리하며 꿀을 빨고 있었는데.
펠리체가 제아무리 규모가 큰 영지라 한들, 길드 가입을 희망하는 애송이들은 기껏해야 하루에 한둘 정도가 전부였고. 운이 좋으면 일주일 내내 단 한 명도 찾아오지 않는 경우마저 있었기에, 지부의 모든 직원이 부러워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아주 가끔, 늘어진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 발생하곤 했다.
이를테면 마법사가 용병이 되겠다고 찾아오는 일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했다.
‘마, 마법사에게 용병패를 발급하면 성과급이...’
마법사 같은 주요 전력을 용병으로 포섭하는 데 성공할 경우, 당사자는 물론 그가 속한 지부의 지부장까지 엄청난 혜택을 받을 수 있었는데.
바로 연봉에 준하는 성과급과 승진 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가산점이었다.
승진에는 관심이 없는 제프 롭슨이었지만, 성과급이라면 달랐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부장님을 모셔오겠습니다.”
후다닥 용병 지부의 안쪽으로 달려간 그는 잠시 뒤 키가 190은 넘어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중년인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중년인은 사내의 이색적인 외모에 흠칫 놀랐지만, 빠르게 신색을 회복하고는 그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반갑소. 펠리체 용병 지부의 지부장 릭 헬턴트요.”
“스노우.”
예의를 밥 말아 먹은 태도였지만, 현역 은퇴 후 지부장 생활만 10년째인 릭헬턴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용병의 가치란 다른 무엇도 아닌 실력으로 매겨지는 법.
더군다나 마법사란 족속 중 괴짜가 어디 한 둘이던가?
“마법사의 길드 가입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오. 다만, 등급을 결정하기 위해서라도 테스트는 치러줘야겠소.”
“지금 바로 하면 되나?”
“시원시원해서 좋구려. 그럼 날 따라 오시오.”
잠시 뒤.
콰아아아아앙
퍼어어어엉
콰아아아아아앙
끄아아아아악
펠리체 지부에 방문했던 용병과 의뢰인들은, 짧은 시간 건물의 후원 쪽에서 뭔가가 터지고 깨져나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살펴 가십시오!”
“저희 지부의 문은 언제나 스노우님을 위해 열려 있습니다!”
지부장과 제프 롭슨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지부 건물을 떠나는 스노우의 손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용병패가 쥐어져 있었다.
#4
용병 지부를 나선 뒤 손에 들린 용병패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길드 가입 시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등급인 ‘골드’ 등급의 용병패였다.
등급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의뢰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실력을 테스트하겠답시고 나선 골드 등급 용병 셋을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았고.
황급히 테스트를 중단시킨 지부장은 두말없이 골드 등급 용병패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곧바로 최고 등급인 ‘다이아몬드’ 등급 용병패를 받을 수 있는 방법도 하나 있긴 했는데.
그건 예전의 프랭키 쿠만처럼 기간트의 오너가 용병이 되는 것이었다.
브라이드 영지를 떠나기 전.
왕도로 향하는 상단을 소개해 주겠다는 백작의 배려가 있었지만,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한 마당에 굳이 내 행보를 백작가에 알릴 필요는 없었다.
구매권을 획득한 이상 언젠가는 왕도 ‘레니비아’에 들릴 생각이기는 했다.
하지만 칼 알버트의 말에 따르면 구매권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기간트를 구매하는 과정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거라고 했는데.
‘왕도의 너구리들은 죄다 지독한 수전노야. 특히 기간트 판매에 관련된 놈들은 더 지독하지.’
‘하지만 백작가에는 제작 원가에 가깝게 판매한다고 하지 않았나?’
‘하, 너 기간트의 마력엔진을 만들 때 필요한 마정석의 공급처가 어디라고 생각하냐?’
‘대수림?’
‘맞아, 브라이드 백작가는 변경백이라 왕실에 세금을 내지는 않지만. 매년 엄청난 양의 마정석을 왕실에 공짜로 바치고 있다고.’
‘공짜라고?’
‘요새와 방벽을 세울 때 왕실이 엄청난 돈을 투자했어. 명목상으로는 당시의 은혜를 갚는다는 건데... 젠장, 생각해 보라고. 베른 요새의 방벽은 결국 루페른 왕국의 국경을 지키기 위해 세운 거란 말이지. 그런데 그걸 빌미로 수십년 동안 매년 수백만 골드치 마정석을 뜯어 간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뭐가 옳은지 내가 판단할 문제는 아닌 것 같군.’
‘쳇, 냉정한 놈...’
‘하지만 하나는 알 것 같다.’
‘......?’
‘넌 확실히 루페른 왕국의 기사가 아니라, 브라이드 백작가의 기사로군.’
‘난 또 뭐라고... 뭔 당연한 소리를 똥폼까지 잡으면서 하는 거냐?’
‘......’
아무튼, 그의 말에 따르면 왕도의 관리들은 갖은 수를 써 기간트를 내주지 않으려 하거나.
그도 아니면 최대한 비싼 값에 팔아먹으려고 할 거라나?
‘왕실이 브라이드 백작가를 위해 갖은 편의를 봐주는 건...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백작가가 집 지키는 개의 역할에만 충실했기 때문이야.’
씁쓸한 현실이지만, 백작가의 가신인 이상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말하던 칼 알버트.
하지만 난 집 지키는 개 같은 역할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차라리 집에 불을 지르고 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