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34화 (34/169)

34화 진화

#1

늙은 마법사가 말했다.

“보아하니 마법과는 영 거리가 먼 친구 같은데, 이곳엔 무슨 일인가?”

젊은 손님이 답했다.

“마법을 모르는 사람은 들어오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늙은 마법사가 헛웃음 짓는다.

“허, 말본새가 사납군. 자넨 마법사가 두렵지도 않은가?”

하지만 젊은 손님은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았다.

“왜? 개구리로 만들기라도 하려고?”

늙은 마법사는 젊은 손님의 무지를 바로잡는다.

“인간을 개구리로 만드는 건 최소 7서클은 되어야 가능한 고위 마법이라네.”

그러나 젊은 손님은 늙은 마법사의 지혜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궁금하지 않다.”

늙은 마법사는 이 당돌한 젊은 손님이 궁금해졌다.

“.....요상한 녀석이로군. 분명 마력이나 오러를 수련한 것 같지는 않는데, 기도는 지나칠 정도로 잘 정련되어 있고. 게다가 어지간한 귀족보다 더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기다니... 자네 대체, 정체가 뭔가?”

젊은 손님은 늙은 마법사의 질문이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원래 손님의 신상에 그렇게 관심이 많나?”

늙은 마법사 역시 오랜 세월 단련된 눈치로 그것을 알아차렸다.

“아, 그건 아닐세. 하지만 뭘 얼마나 사느냐에 따라 대접이 달라지긴 하지.”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는 사연 많았던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는, 한 늙은 마법사를 기함시키기에 충분했다.

“금속의 색깔을 바꿀 수 있는 염료가 필요하다.”

“금속이 한두 가지인 줄 알아?”

“기간트의 외부장갑.”

“뭐?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냐? 그런 건 있지도 않지만, 설령 있다 해도 이 나라에서 그런 걸 함부로 팔았다간 명줄대로 살지 못할 거다.”

“없단 말이군.”

“이놈아, 사람이 말을 하면...”

“그럼 많이 팔아라, 마법사.”

“......”

딸랑

펠리체 영지의 세 마법물품점 중 하나인 ‘드락샤르의 황혼’.

타국의 어느 귀족 휘하에서 30여 년을 종사하다 은퇴한 뒤.

고향인 펠리체 영지에서 소일거리 삼아 마법 물품을 만들어 팔고 있는 5서클마법사 안드레아 볼코프.

그는 황혼 무렵 찾아온 황당한 손님이 나가버린 문을...

한동안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2

브라이드 영지를 떠난 나는, 그곳에서 대략 15일 거리(일반적인 상행 기준.

시속 5~6km)에 있는 펠리체 영지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루페른 왕국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피오르강’을 끼고 있는 데다, 남북으로 이어지는 본류 이외에도 상당한 규모의 지류가 동과 서로 뻗어 있어 대륙 중서부 물류의 핵심 역할을 하는 영지였다.

브라이드 영지를 출발해 캘튼 영지(자작)와 백슬리 후작령, 그 외 몇몇 영지를 지나친 뒤 1차 기점으로 이곳을 선택한 이유 역시, 어느 방향으로든 몸을 움직이기 수월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펠리체 영지 인근에서 가장 높은 산인 ‘앙델피오르’.

최상위 포식자가 하급 몬스터인 ‘델루가(붉은 털 거대토끼)’ 무리와 몇몇 맹수가 전부인 산이라 위험도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꽤 험한 산세로 인해 평범한 사람이 오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는 산이었다.

“젠장, 고작 금속에 색을 입힐 염료 하나 못 만들다니. 무슨 마법사가 그 따위야...”

아니, 마법사라서 그런 걸 못 만드는 건가?

이곳에는 엄연히 ‘기간트 엔지니어’라는 직업이 존재하니까.

그쪽도 마법사의 한 갈래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배우고 익히는 마법은 대부분 기간트 제작에 특화된 것들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기간트 엔지니어 중 6써클의 경지에 도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뭐, 그쪽 분야에서도 최고 장인은 6써클 마법사 못지않은 대우를 받는다고 하니까. 그런데 기간트 용품점 같은 건 따로 없겠지?”

다른 나라라면 몰라도 루페른 왕국에 그런 상점이 있을 확률은 ‘0’이다.

마법용품점 영감의 말대로 명줄대로 살기 힘들 테니까.

나는 속보 정도의 속도로 산을 타며 간간이 덤벼드는 몬스터들을 처리했다.

들었던 대로 고작 E급 수준의 몬스터가 전부였기에.

몇 안 되는 D급 스킬인 ‘일렉트릭 필드(D)’를 켜놓으니 감전되어 죽거나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도착한 산 정상 부근.

나는 ‘탐지(C)’ 스킬과 ‘천리안(C)’ 스킬을 시전해 주변에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뒤.

“안티가.”

[안티가(B-)가 출격합니다.]

근 보름 만에 격납고에 잠들어 있던 안티가를 깨웠다.

얼굴만 따지자면 원래의 모습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 외 부위는 전혀 변한 곳이 없는 기간트.

고작해야 양팔의 색깔이 조금 진해진 것이 전부였는데.

나는 별생각 없이 남은 퍼센티지를 투자한 것을 후회해야만 했다.

“설마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도 변형율을 잡아먹을 줄이야...”

자유자재로 변신과 복원을 반복하려면 아마도 ‘변형(S)’의 다음 단계인 ‘변신(S)’에 이르러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펠리체 영지에 도착하기까지 15일간, 안티가를 어떻게 변형시킬지에 대해 고민했고.

중간에 들른 한 영지의 펍에서 좋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정말 봤다니까.’

‘진짜야? 자네가 정말 동대륙의 기간트를 봤다고?’

‘그래, 켈피 가죽 납품 건 때문에 마인츠 왕국에 갔다가 봤지.’

‘대체 어떻게?’

‘하필이면 가죽을 납품받기로 한 메버릭 백작이 영지전에 휘말렸어.’

‘뭐? 저런, 재수가 없었군.’

‘다행히 영지전이 백작의 승리로 끝나서 거래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지.’

‘재수가 없는 게 아니라, 무척이나 운이 좋은 거였군.’

‘그렇지, 하마터면 어마어마한 손해를 입을 뻔했으니까. 영지전 승리로 기분이 좋았는지 값도 제법 후하게 쳐주더라고.’

‘알았으니까 자랑질은 관두고 그 동대륙 기간트 이야기나 좀......’

그들의 대화 중 내 관심을 끄는 건 딱 한 가지였다.

‘일단 서대륙 기간트들과는 생긴 것부터가 달라. 이쪽 기간트들이 중갑을 착용한 기사라면 저쪽은 마치... 그래, 엄청난 수련을 거친 암살자 같은 느낌이 랄까? 두께만 따지면 거의 두 배는 차이가 나는 것 같았어.’

‘응? 그런 걸 타고 기간트전을 치를 수가 있나? 한 대만 맞아도 부서질 것 같은데.’

‘그건 알 수 없지.’

‘아니, 왜?’

‘그 기간트가 일격을 허용하는 걸 본 적이 없거든.’

‘한 대도 안 맞았단 말이야?’

‘그래, 다른 기간트들에 비해 두 배는 빠른 것 같더라고.’

‘오너가 엄청난 실력자인 모양이군.’

‘여자였어. 메버릭 백작이 양녀로 삼았다던데, 멀리서 보기에는 20대 중반......’

바로 동대륙 기간트의 외형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상인에게 그 기간트의 외양을 그려줄 것을 부탁하며 큰 돈을 제시했고.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화가를 불러 꽤 정교한 그림을 그린 다음, 내게 넘겼다.

‘기간트에 관심이 많은가 보오?’

‘신경 꺼라.’

‘쩝, 거참 까칠한 양반이로군. 뭐, 난 돈만 받으면 그만이지. 아무튼 고맙소.’

상인은 희희낙락하며 떠났고.

펼쳐 본 그림에는 정말로 날렵하게 생긴 기간트의 모습이 들어있었다.

서대륙의 기간트에 비하면 한없이 인체에 가까운 외형.

“흐음...”

안티가를 소환한 나는 다시 한번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거... 똑같이 만들려면 변형 한계를 100%까지 채워도 불가능하겠어.”

솔직히 서대륙보다는, 동대륙 쪽 기간트가 내 취향에 훨씬 더 가까웠지만, 골격부터가 달라 완벽하게 복사하는 건 무리였다.

이에 나는 결정을 내렸다.

‘무조건, 최대한 얇게 만든다.’

나는 고유스킬 ‘변형(S)’를 시전하며 심상을 떠올렸다.

얇게.

하지만 갈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

압력을 가해 압축하는 느낌으로...

머릿속의 심상을 구현하기 위해 끙끙대길 10여 분.

불현듯 눈앞에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그것도 번쩍번쩍 빛나는 메시지창이.

파아아아아앗

[‘변형(S)’ 스킬에 의해 안티가(B-)의 ‘중공 장갑’이 ‘압축 장갑’으로 변형됩니다(현재 24% 진행 중). 진화에 가까운 변형을 이루었습니다. 이 작업을 수행하는 경우에 한해, 변형율 소모가 50% 감소합니다. ‘압축 장갑’으로의 변형을 완료할 경우, 안티가(B-)의 등급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안티가(B-) : 6.7m, 7.2톤(벨런스형). 출력 800rp. 오르비스 대륙 동부에 위치한 노스럼 왕국의 ‘헤이그 공작가’가 소유한 기간트 제작소 ‘임페르노’에서 제작된 기간트. B-급 마력엔진과 B-급 합금의 조화로 벨런스가 뛰어나다.

임페르노제 기간트의 특색인 무기 보관 슬롯(아공간) 추가가 적용되었다(총 3개). 몬스터 ‘안티가’의 외형을 훌륭하게 재현했다. 고유스킬 ‘변형(S)’가 적용중이다. ‘중공 장갑’이 ‘압축 장갑’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현재 변형율/변형 한계 : 38%/38%]

“......?”

이런 건 처음 보는데?

물론 진화가 가능한 스킬 자체가 ‘변형(S)’가 처음이긴 하지만.

중공 장갑?

대부분의 기간트의 경우, 외부장갑의 두께가 두껍기도 하지만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장갑 내부에 빈 공간이 존재한다고 한다.

“워낙 단단한 합금이니... 충격 흡수고 뭐고 속까지 채워 놓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어지간한 출력으론 감당 못 하지. 너무 무거워지니까.”

적어도 브라이드 백작의 ‘브로드(2000rp)’ 수준은 되어야 적용해 볼 만한 기술일 터였다.

그런데 압축 장갑이라...

브로드로 인해 상승한 9%(=장갑 변형 24%)의 변형율이 적용된 안티가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티가 나는 것 같은데?”

중갑형 기간트처럼 배불뚝이는 아니었지만, 보디빌딩 대회의 우승자 수준이던 몸뚱이가 조금은 얇아진 것 같았다.

게다가 외부장갑을 구성하고 있는 합금을 압축한다면, 방어력은 변형 이전보다 그리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반면 움직임은 훨씬 민첩해지겠지.”

등급이 오를 정도의 변화라니...

“기대되는군.”

#3

“마법사를 반드시 포함시켜 달라고 했다고?”

“예, 실력이 확실한 마법사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달슨...”

“5써클 이상이면 좋겠답니다.”

“5써클? 5써클이 뉘집 개 이름인 줄 알아?”

“일행에 로메인 백작의 아들과 그리핀 자작의 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뭐? 골치 아프게 됐군.”

“그리고... 상급 엑스퍼트와 5써클 마법사에게는 하루에 50골드를 지급하겠다고 했습니다.”

부하 직원이자 한때 용병 생활을 함께했던 제프 롭슨의 말에, 릭 헬턴트 펠리 체 용병 지부 지부장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돈이 썩어나나? 마리에스타 아카테미라면... 마차를 이용한다 해도 최소 일주일은 걸릴 텐데. 하루에 50골드를 배팅했다고?”

“말 그대로 돈이 썩어나는 사람들입니다만?”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의 제프 롭슨을 바라보며, 릭 헬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걸 내가 모를 것 같아? 문제는 그들이 돈이 많은 것과 돈을 함부로 쓰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거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합니까? 저희는 의뢰를 받고 지원자를 찾아주기만 하면 됩니다.”

“매번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다간, 언젠가 뒷골목에서 칼 맞고 뒈질 거다.”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우리야 항상 용병들의 안전과 편의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용병 길드원 아니겠습니까.”

“객쩍은 소리 하지 말고, 상급 엑스퍼트라면 놀고 있는 녀석이 하나 있지만... 5써클 마법사는?”

“에드가 라헬론은요?”

“의뢰 해결이 생각보다 늦어질 것 같다더군. 광산 주변에 투랑가 무리가 똬리를 튼 모양이야.”

“그 집채만 한 뱀 말입니까?”

“그래. 광산 주인이 플레티넘 등급 용병을 더 고용하기로 했어. 아마 예정보 다 일주일은 늦어질 거야.”

“그럼 안 되겠네요.”

“안드레아 영감한테 부탁해 볼까?”

“아카데미에 도착하기 전에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현역으로 뛰기엔 너무 늙었죠. 게다가 그는 애초에 용병이 아니에요.”

펠리체에서 활약하는 5써클 용병마법사는 에드가 라헬론을 포함해 고작 둘뿐이었고. 한 사람은 진즉에 장기 의뢰를 맡아 영지를 떠났기에, 남은 5써클 마법사는 없었다.

“쩝... 아깝군. 50골드면 하루에 수수료만 2.5골드씩 떨어질 텐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릭 헬턴트.

하지만 제프 롭슨은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여전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상급 엑스퍼트의 끝자락까지 도달했었던 릭 헬턴트와는 달리.

고작 오러 유저 상급에 불과했지만, 현역 시절부터 꾀가 많기로 유명했던 제 프 롭슨이었다.

릭 헬턴트가 펠리체 지부로 그를 영입한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고.

“그자가 있지 않습니까?”

“그자?”

“3일 전에 토미와 욘샌, 그레이를 박살 내고 골드패를 받아간 마법사요.”

릭 헬턴트가 손가락을 튕기며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맞아, 그자라면 분명...”

“5써클 마법사가 확실하죠.”

“그럴 거야. 내가 현역이었어도 상대하기 벅찰 것 같았으니까.”

‘플래티넘’ 용병패를 받기 위해서는 4써클 또는 중급 엑스퍼트임을 반드시 증명해야만 한다(‘다이아몬드’ 용병패는 최상급 엑스퍼트, 6서클 마법사 혹은 기간트 오너만이 발급받을 수 있다).

하지만 골드 등급까지는 지부장의 시험을 통과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스노우의 실력을 확실히 알지는 못했지만.

초급 엑스퍼트 셋을 순식간에 때려눕힌 실력만 놓고 보더라도, 최소 5써클 이상의 마법사가 확실했다.

잠시 그를 떠올려 본 릭 헬턴트가 미간을 찡그렸다.

“성격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던데... 귀족가 애송이들의 비위를 맞출 수 있을까?”

제프 롭슨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그러니까 저희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다니까요.”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릭 헬턴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가 직접 가서 전달해. 만약 거절하면... 이번 의뢰에 한해서는 수수료를 받지 않겠다고 하고. 어떻게든 수락하게 만들란 말이야.”

어차피 상급 엑스퍼트를 포함한 용병들로부터 떨어지는 수수료가 있으니.

어떻게든 일을 성사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제프 롭슨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맡겨두시죠. 수백 골드를 벌 수 있는 건인데, 제정신이라면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당당하게 지부장실 문을 박차고 나선 다음.

곧바로 스노우라는 이름의 마법사가 묵고 있다는 여관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싫다.”

타악

칼 같은 거절과 함께 문전박대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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