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습격(1)
#1
“크흠, 우선 제 방문을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노우님과 얘기조차 나누지 못하고 돌아갔다면... 아마 지부장이 절 가만두지 않았을 거예요.”
“...네 녀석, 방 앞에서 반나절이나 서성거린 주제에 잘도 뻔뻔하게 지껄이는군.”
스노우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하자 제프 롭슨이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조금 전 그건 빈말이 아닙니다. 지부장이 무조건 스노우님께 허락을 받아오라고 했다고요. 그 양반 현역 때 별명이 ‘스베낙(용병대)의 광견’이었는데, 한 번 눈깔이 돌아가면......”
“쓸데없는 소릴 할 거면 그냥 꺼져.”
스노우의 표정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제프 롭슨은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제길, 미간만 조금 찡그렸을 뿐인데 왜 이렇게 무서운 거야? 그리고 이방, 이상하게 추운 것 같은데... 뭐, 그건 그렇고.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않을 거면 대체 용병 등록은 뭣 때문에 한 거냐고!’
그는 스노우의 반응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자신은 철저한 ‘을’의 입장.
치솟아 오르는 울화를 가라앉힌 제프 롭슨이 억지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그리 어려운 의뢰는 아니에요. 마리에스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시몬스 공작령으로 향하는, 귀족 자제들의 호위입니다.”
“귀족 자제?”
“네, 로메인 백작가의 후계자와 그리핀 자작의 딸, 그리고 버지니아 남작의 쌍둥이 남매입니다.”
“로메인 백작이라면 이곳... 펠리체 영지의 주인?”
“네, 참고로 그리핀 자작은 펠리체의 영주 대리이자 로메인 백작의 동생입니다.”
“백작이... 피가 섞인 혈육인데다, 성까지 하사받은 귀족에게 이런 알짜배기 영지를 맡겼다고?”
“흔한 일은 아니죠. 그런데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유독 우애가 돈독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왕실 관료로 재직 중 건강이 악화된 자작을, 로메인 백작이 불러들여 펠리체의 관리를 맡긴 겁니다.”
“아무리 어릴 때 우애가 좋았다 해도,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군.”
“처음엔 대부분의 가신들이 우려를 표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리핀 자작은 벌써 8년째 펠리체 영지를 별탈 없이 운영하고 있죠.”
제프 롭슨의 말을 들은 스노우는 생각에 잠겼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거절한다.”
“네? 대체 왜?”
“애새끼들이라면 질색이다. 게다가 이 일을 맡으면 왠지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군.”
제프 롭슨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는 잠시 멍한 얼굴로 스노우를 바라보더니, 이내 두 손을 휘휘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애새끼라뇨? 백작의 아들은 18살이고 나머지 셋은 17살이에요. 애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15살이 아니라니, 그나마 다행이군.”
“네?”
“어쨌든 내 대답은 같다.”
“제발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십시오!”
스노우는 지나치게 매달리는 제프 롭슨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렇게 거대한 영지에 용병 마법사가 자신밖에 없는 것도 아닐 텐데.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의자에 등을 기대며, 간절한 표정의 제프 롭슨을 바라보았다.
“좋다, 그럼 이 의뢰를 맡아야 하는 이유를 세 가지만 말해봐.”
그에 제프 롭슨은 죽다 살아난 표정을 지으며 호기롭게 입을 열었다.
“첫 번째, 무려 50골드의 일당! 이건 일반적인 골드급 용병이 받는 일당의 10배, 플레티넘급의 3배가 넘는 거금입니다!”
하지만 심드렁한 스노우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제프 롭슨은 재빨리 두 번째 이유를 내뱉었다.
“두 번째, 수수료 무료! 골드급 용병의 수수료는 5%예요. 시몬스 공작령까지는 대충 7,8일 정도 걸릴 겁니다. 그럼 수수료만 해도 최소 17골드 이상 아낄수 있다는 뜻이죠!”
“......”
제프 롭슨은 절망했다.
‘표정이 더 차가워졌어. 젠장, 이런 고급 여관에 방을 잡았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저 스노우란 마법사는 돈이 아쉽지 않은 인간임이 분명했다.
마법사는 돈을 하마처럼 퍼먹는 존재인데다, 용병 노릇을 하려들 정도라면 분명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세 번째 이유를 말했다.
“세 번째는 뭐... 시몬스 공작령... 음, 거기가 경치 좋기로 유명하죠. 그 유명한 시에라 숲이랑도 가깝고. 예, 뭐... 그렇습니다. 마리에스타 아카데미도 마찬가지고요. 거기 정문 양쪽에 세워 놓은 기간트를 구경하겠답시고 왕국 전 역에서 구경꾼들이...”
“잠깐.”
스노우가 제프 롭슨의 말을 멈춰 세웠다.
그의 얼굴에 서려 있던 지루함과 짜증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
스노우는 제프 롭슨과 정확하게 시선을 맞추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다시 한번 말해봐. 아카데미 정문에... 뭐가 서 있다고?”
“예? 그야 기간트...”
“출발이 언제지?”
“......”
#2
의뢰의 시작일은 제프 롭슨이 다녀간 날로부터 3일 뒤였다.
시몬스 공작령에 위치한 ‘마리에스타 아카데미’로 향하는 일행의 집결지는 백작령의 수도 로메인 영지.
나는 의뢰 시작 하루 전, 또다시 늙은 마법사가 있는 마법용품점을 찾았다.
펠리체에는 훨씬 더 크고 휘황찬란한 마법용품점도 존재했지만.
주인인 늙은 마법사가 왠지 범상치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딸랑
“또 왔군.”
“5써클 마법사로 위장할 수 있는 아티팩트가 있나?”
“......”
“5써클 마법사다.”
“...내 평생 5써클 마법사가 자신을 감추기 위해 위장하는 경우는 봤어도, 5써클 마법사로 위장하려는 놈은 처음이다.”
“아직 덜 살았나 보군. 세상엔 나 같은 놈도 있는 법이다.”
“정말이지 마법사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놈이로군.”
“있는지 없는지만 말해라.”
“있으면? 살 돈은 있고?”
나는 말없이 1000골드가 든 주머니를 카운터에 얹었고.
주머니 안을 들여다본 늙은 마법사는 안에서 700골드를 꺼낸 후 주머니를 내게 돌려주었다.
“기다려.”
한참 후에 나타난 그는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무언가를 내게 넘겼다.
물컹
그것은 전신에 징그러운 핏줄이 돋아나 있는 황갈색 덩어리였다.
“안티고네의 심장이다.”
“이거... 아직 뛰고 있는 것 같은데.”
“내부의 마력이 다하지 않는 한, 영원히 멈추지 않는 놈이지.”
“이게 내가 원하던 거라고?”
“안에 남아 있는 마력이 대충 5써클 정도는 된다.”
“이런 걸 왜 가지고 있었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안티고네의 심장은 천고의 영약이다. 다만 그건...
마경 아스펠의 마기에 오염되는 바람에 사람이 먹을 수 없게 되어버렸지.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최소 1만 골드는 받았을 놈이야.”
“사람은?”
“마수라면, 아마 먹어도 상관없을 거다.”
나는 그걸 천으로 감싸 품에 넣은 뒤 늙은 마법사를 바라보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누구도 네가 5써클 마법사임을 의심하지 않을 거다.”
“음, 좋은 거래였다.”
“아, 될 수 있으면 성직자들은 피해 다니는 게 좋을 거야. 마기 때문에 흑마법사로 오해받기 딱 좋으니까.”
‘......’
그나마 다행인 점은.
고위 성직자가 아니라면 안티고네의 심장에 담긴 마기를 쉽사리 감지하지는 못 할 거라고 늙은 마법사가 호언장담했다는 것.
만약 아니라면?
그는 늙은 마법사‘였던’ 존재가 되겠지.
#3
“백작령에 5써클 용병 마법사가 남아 있었나?”
“듣기로는... 얼마 전에 용병패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뭐? 그럼 5써클이 된 이후에 용병이 됐다고?”
“그렇습니다.”
“아니 5써클에 도달한 놈이 뭐가 아쉬워서...”
그리핀 자작가의 가신 스캇 비즐리는 5서클 마법사였다.
자작의 지원과 뼈를 깎는 노력이 시너지를 발휘해 48세가 된 올해 초, 꿈에 그리던 5서클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외부에는 여전히 4서클 마법사로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스캇 비즐리는 함께 온 중급 엑스퍼트 파울러 핀치에게 물었다.
“그 마법사, 나이는 얼마나 먹었지?”
“그게... 겉보기에는 2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인다고 합니다.”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5써클 마법사라면 답은 둘 중 하나다.
적어도 30대가 되기 전에 5써클에 도달한 희대의 천재이든가.
그도 아니면...
“6써클? 에이, 그건 정말 말도 안 되지. 6써클 마법사가 미쳤다고 용병 짓을...”
대륙 전체를 통틀어 6써클 용병 마법사가 딱 한 명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는 2써클 때부터 용병 일을 시작한 완벽한 고인물이었다.
“그럼 정말로... 20대에 5써클이라고?”
“헬턴트 지부장이 헛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스캇 비즐리의 말투에 짙은 질투심이 서려 있음을 느낀 파울러 핀치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마법사, 동대륙인이라고 하더군요.”
“가지가지 하는군.”
그때.
로메인 영지의 내성 안으로, 발목까지 내려오는 푸른색 로브를 입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천천히 걸어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행색을 본 모든 이가 직감했다.
‘그 용병 마법사다.’
그리고 내성 성문 앞에 모인 일행 중 유일‘했던’ 마법사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저, 정말로 20대잖아?”
#4
늙은 마법사의 말대로.
일행 중 그 누구도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자작의 가신이라는 4서클 마법사의 눈초리가 좀 거슬리기는 했지만.
당장 손을 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새 출발 준비가 끝났고.
나는 백작이 준비했다는 두 대의 마차중 하나에 올라탔다.
마차 한 대는 귀족 자제들의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상급 엑스퍼트들과 마법사들을 위한 것이었다.
일행의 총원은 30명이었는데.
의뢰인인 귀족 자제 4명과 그들의 수행원 겸 마부 둘.
백작가의 오너(폴암)인 상급 엑스퍼트.
자작가 소속 마법사와 중급 엑스퍼트.
그리고 플레티넘 등급 용병(상급 엑스퍼트)과 골드 등급이지만 5써클(?) 마법사인 나.
마지막으로 실버 등급(상급 유저) 용병 19명. ...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프 롭슨의 말에 따르면, 왕국 내에서의 호위라기엔 조금 과한 면이 있다고 했지만.
로메인 백작은 펠리체 영지를 기반으로 엄청난 부를 쌓아 올린 귀족인데다 자식이 아들 하나밖에 없었기에,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수행원 겸 마부 중 하나가 용병들에게 일정을 알려주었다.
시몬스 공작령에 이르기까지는 크고 작은 영지 일곱 개 정도를 지나쳐야 하는데.
일정을 잘 맞춘다면 노숙을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마차 안에서 잘 수 있는 이들은 그나마 나았지만, 일행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하급 용병들의 경우에는 무엇보다 반가운 말이었을 것이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이틀간은 벨라리 영지와 누체른 영지에 제시간에 도착해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이후로 3일 차 아침까지는 편안한 여정이 계속되었다.
내가 이상을 감지한 것은 3일 차의 저녁 무렵이었다.
“스텔라, 좀 괜찮아?”
“네, 조금... 죄송해요, 오빠.”
“몸이 안 좋은 건 네 탓이 아니잖아.”
“그래도...”
자작의 딸인 스텔라 그리핀이 멀미와 배탈을 이유로 마차를 몇 번이나 멈춰세웠고.
그로 인해...
“젠장, 결국 노숙을 하게 되는군.”
“어쩔 수 없잖아. 일부러 우릴 골탕 먹이려는 것도 아닐 테고.”
“그건 그렇지만...”
“어서 막사나 치자고.”
“쳇...”
결국 누체른 영지와 더블린 후작령 사이에 있는 산속에서 밤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리고 ‘탐지(C)’와 ‘천리안(C)’ 스킬을 번갈아 사용하며 주변을 살피던 내시야에...
일행의 뒤로 은밀히 따라붙은.
수십 개의 인영이 포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