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습격(2)
#1
“이쪽으로 접근해 오는 놈들이 있다. 숫자는 오십... 이. 거리는 대충 450미터쯤 된다.”
“......?”
플레티넘급 용병 라이언 베이츠는 뜬금없는 마법사의 말에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50? 아니 그보다, 뭔가 마법적인 조치를 취하는 건 보지 못했는데... 450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접근하는 놈들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고?”
“52명이다. 그리고 그새 거리가 30미터 정도 줄어들었군.”
철저하게 준비한다면, 500미터가 아니라 1킬로미터 밖의 상황도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살필 수 있는 존재가 고위 마법사였다.
하지만 그가 알기로, 이 마법사는 지난 3일 동안 각 영지에 들렀을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마차에서 내린 적이 없었다.
‘정말일까? 이 자가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기는 한데...’
사실 라이언 베이츠는 여정 내내 이 마법사를 주의 깊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용병 마법사 자체가 흔치 않은 편인데다, 5써클이라면 사실상 그들 중 최고의 실력자라 할 수 있었기에.
게다가 이미 40대의 외모인(실제 나이는 50 전후) 펠리체의 두 5써클 마법사와는 달리, 이 마법사는 고작 20대 초중반으로 보였다.
정말로 5써클이라면 그 성장 한계를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재능이 아닐 수 없었고, 그런 이유로 이번 여정 동안 그와 친해져 보리라 마음먹고 있던 차였다. 능력 있는 마법사와 가까워져서 손해 볼 것은 없었으니까.
“놈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 설마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머저리는 아니겠지?”
“......”
역시 마법사 놈들은 하나 같이 성격이 개판이라고 생각하며.
라이언 베이츠는 황급히 마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드 경! 이쪽으로 다가오는 놈들이 있다고 합니다! 숫자는 50... 아니, 52!”
주변 정찰을 지시하던 백작가 오너 클레이튼 우드와 막사를 설치하던 용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적이라고?”
“50?”
“정말일까?”
“50이라면 이쪽에 비해 숫자가...”
“멍청아, 이쪽엔 엑스퍼트들과 마법사, 거기에 기간트까지 있다고.”
“아, 그렇군.”
적어도 이때까지는.
기간트의 습격을 받게 되리라 짐작한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2
일행의 리더인 클레이튼 우드는 곧장 마차로 달려와 다시 한번 확답을 받은 뒤, 즉시 용병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적의 숫자가 많지만 겁먹을 필요 없다. 너희는 나와 엑스퍼트들이 녀석들을 모두 처리할 동안 마차로 접근하는 놈들만 막아내면 된다.”
그는 나와 스캇 비즐리(자작가 마법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도 마차를 보호해 주시오. 만약 일개 도적 떼라면 그리 위험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겠지만.”
“알겠습니다. 마차는 제가 잘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드 경.”
스캇 비즐리는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답하며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반면 나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뭐,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그랬다는 거고.
사실 현재 내 시선은 시야 한 편에 떠 있는 미니맵에 집중되어 있었다.
클레이튼 우드가 뭔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리려는 순간.
미니맵 상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잠깐.”
“무슨 일인가?”
“......?”
스캇 비즐리와 클레이튼 우드가 나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적들도 자신들의 습격이 들켰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이제는 빠른 속도로 돌진해오고 있었기에, 대부분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클레이튼 우드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뭐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나중에...”
“기간트다.”
“뭐?”
습격자 무리 중 가장 큰 존재감을 내뿜고 있던 두 개의 빛 중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만약 마력을 완벽하게 감출 수 있는 실력자였다면, 뒤따라오는 내내 마력을 고스란히 드러낼 이유가 없었다.
이런 경우는 딱 한 가지였다.
바로 오너의 기간트 탑승.
차폐 기술이 어찌나 뛰어난지, 기간트 안에 있는 오너의 존재감은 어떤 방식으로도 감지할 수 없었다. 당연히 마력 같은 건 먼지만큼도 흘러나오지 않았고.
금십자 기사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 확인한바, 이런 경우는 100이면 100...
“적이 기간트를 소환했다. 아직은 움직이지 않고 있군. 전투가 시작되면 기습할 생각인 것 같다.”
“......!”
순간 스캇 비즐리의 눈가가 잘게 떨렸고, 클레이튼 우드는 경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기간트? 확실한가? 아니 대체 왜 기간트가...”
“그건 당신들이 알아내야겠지. 물론... 살아남은 다음에.”
그리고 그 순간.
카캉
카아앙
콰앙
“크아아아아앗!”
“개새끼들이!”
“죽어랏!”
“회를 떠버려!”
양측 병력이 격돌했다.
#3
클레이튼 우드가 전열의 선두를 맡지 못한 탓에, 적들의 대다수가 마차 앞을 지키고 있던 용병들에게 들이닥쳤다.
하지만 일행에는 또 다른 상급 엑스퍼트인 라이언 베이츠가 있었다.
적들의 앞을 홀로 가로막은 그는 곧바로 놀라운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뭐, 뭐야 이 자식들. 엑스퍼트? 이거 일개 산적 놈들이 아니잖아!”
적들 중 20여 명이 그를 상대하기 위해 전열에서 떨어져 나왔는데.
그들의 실력이 범상치 않았다.
무려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엑스퍼트였고, 나머지 절반 역시 최소한 소드 유저 상급의 경지에 올라 있는 이들이었다.
라이언 베이츠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이런 미친 새끼들! 네 놈들은 대체 누구냐? 이런 짓을 벌이고도 무사할 줄 알아?”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라이언 베이츠 역시 딱히 답을 바라고 악을 쓰는 건 아니었다.
그저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보려는 수작이었지만, 마치 잘 훈련된 기사들처럼 뛰어난 합격술을 구사하는 적들은 쉽사리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잠깐, 이새끼들... 진짜 기사 출신들인 것 같은데. 그것도 모두 같은 곳 소속이야.’
어쩌면 현역 기사들일 수도 있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이거,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린 것 같군. 살아남는다면 의뢰금을 세 배는 더 올려 받아야겠어.’
라이언 베이츠를 상대로 한 적들의 차륜전은 엄청나게 정교했는데.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지 않고 서서히 그의 힘을 빼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하지만 상급 엑스퍼트 중에서도 강한 편에 속하는 라이언 베이츠 역시 그런 뻔한 수작에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10명의 엑스퍼트를 상대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가 판단하기엔 중급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초급 엑스퍼트에 불과했기에, 자신이 질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준비해라.”
적들의 대장인 듯한 중급 엑스퍼트의 지시에 따라.
나머지 10명의 적이 품속에서 마법 스크롤을 꺼내들기 전까지만 해도.
“이 x같은 새끼들아! 그건 반칙이잖아!”
“공격해!”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앙
콰르르르르릉
퍼어어어어어어엉
스크롤에서 발현된 10여 개의 마법이 전장을 뒤덮었고.
뒤이어 발생한 엄청난 먼지구름이 라이언 베이츠의 모습을 완전히 삼켜버렸다.
#4
적들의 예봉을 꺾을 기회를 놓쳐버린 클레이튼 우드.
하지만 적들의 습격을 정확하게 맞춘 마법사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기간트를 소환했고.
파아아아아앗
곧 옅은 빛무리와 함께 출력 1100rp의 기간트 ‘크로스보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테리마.”
기간트에 탑승한 그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은 채, 마법사가 가리킨 방향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곧 육중한 마찰음과 함께 숲의 어둠 속에서 크로스보우와 비슷한 크기의 기간 트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완전히 전신을 드러낸 그 기간트에게서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참...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습격이 들통 난 거야 그렇다 쳐도, 기간트의 존재는 대체 어떻게 알아챈 거냐?]
클레이튼 우드는 검과 방패를 소환한 뒤 검으로 눈앞의 기간트를 겨누며 입을 열었다.
[테페리? 구린 일을 많이 하는 놈인가 보군, 테페리를 타는 데다 인장이고 뭐고 다 지워버린 걸 보니.]
[누구나 사정이란 게 있는 법이지. 그나저나... 순순히 목을 내놓을 생각은 없겠지?]
[하, 자신감이 대단하군. 대체 뭘 믿고?]
[글쎄,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클레이튼 우드는 초조했다.
여유를 가장하고 있긴 했지만, 저놈이 자신을 무시한 채 마차를 공격하기라도 했다간 끝장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그 사태만은 막아야 했기에, 그의 기간트는 적과 마차 사이를 정확하게 가로막고 있는 상태였다.
그때, 이름 모를 오너가 탑승한 ‘테페리’가 손가락으로 그의 뒤편을 가리켰다.
[저쪽이 신경 쓰이나?]
[......]
[큭, 별걸 다 신경 쓰는군. 넌 네 목숨이나 걱정하는 게 어때? 참고로 난 저쪽에 끼고 싶은 생각은 없어. 벌레들의 싸움 따위엔 관심이 없거든. 그리고 굳이 내가 아니어도...]
말꼬리를 길게 늘이던 테페리가 별안간 엄청난 속도로 돌진하며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앙
기간트용 롱소드가 크로스보우의 방패를 가격했고, 순간적으로 두 기체의 사이의 간격이 ‘0’이 되었다.
테페리 안면부에서 또다시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차피 네 부하들은 모두 뒈지게 되어있다고.]
[빌어먹을 자식이!]
쉬이이이이이이이잉
콰아아아아아앙
클레이튼 우드의 크로스보우가 오른손의 검으로 반격을 가했지만, 똑같이 테페리의 왼손에 들린 방패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쿠우웅
방패에 담긴 여력을 역이용해 뒤쪽으로 몸을 날린 테페리가 고개를 양옆으로 까닥이며 기수식을 취했다.
[그러니 저쪽은 신경 쓰지 말고, 나랑 신나게 놀아보자고 친구.]
#5
두 기간트가 맞부딪힌 직후.
나는 두 대의 마차중 앞쪽에 있는 마차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이 마차의 안은 텅 비어있었다.
반면 앞쪽 마차와 용병들에 의해 보호받는 마차 안에는 귀족 자제 넷이 숨을 죽인 채로 탑승해 있는 상태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흠...”
전장은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플레티넘급 용병인 라이언 베이츠는 스크롤 공격에 의한 대폭발에서 살아남은 듯 보였지만, 피해가 없지는 않았는지 처음처럼 완벽한 움직임은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의 실력이 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대단했다는 사실이다.
금십자 기사단의 상급 엑스퍼트인 아론 베리어스보다도 더 뛰어난 실력을 지닌 것 같았는데.
마법 공격으로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도 이미 5명의 적을 쓰러트린 상태였다.
마차를 지키고 있는 20여 명의 용병들은 더 많은 숫자의 적들에 의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긴 했지만, 다행히 그들의 상대는 라이언 베이츠가 상대하고 있는 이들보다는 실력이 확연하게 떨어졌다.
‘양쪽 모두 실버등급 정도...’
게다가 이쪽은 마법으로 강화된 마차와 짐 뒤에 엄폐한 채 싸우고 있으니 어느 정도 시간을 끌 수는 있을 듯했다.
물론 당장 아래쪽으로 마법을 난사한다면 손쉽게 적들을 정리할 수 있겠지만.
나는 주변을 살피며 누군가가 움직이길 기다렸다.
두 기간트의 전투는 꽤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아직까지는 크로스보우쪽이 근소한 우위를 점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이들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들의 움직임을 부추기기 위해 아래쪽을 향해 몇 차례 스킬을 시전했다.
콰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엉
파츠츠츠츠
내 스킬이 작렬할 때마다 한두 명의 적들이 꼬박꼬박 이승과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내가 네 번째 스킬을 시전하려던 순간.
콰창
콰직
콰아앙
엄청난 속도로 접근한 누군가가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고.
그 검격은 상시 발동하고 있던 베리어를 손쉽게 박살 낸 다음.
곧바로 발동한 실드까지 파쇄한 뒤.
두 번째 실드를 절반쯤 파고들고서야 멈추었다.
나는 경악한 눈을 한 채 서 있는 습격자를 향해 한쪽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예상이 빗나가질 않는군. 이건 너무 식상한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파울러 핀치?”
그는 자작가에서 파견한 중급 엑스퍼트.
파울러 핀치였다.
그리고 내가 그를 향해 스킬을 시전하려는 순간.
“메가 라이트닝!”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한 줄기 벼락이 나와 파울러 핀치, 그리고 우리가 밟고 선 마차를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