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습격(4)
#1
눈(얼음 결정)에서 태어난 서번트들에게 냉기 계열의 모든 스킬은 강력한 버프나 다름없었다.
중급 엑스퍼트인 파울러 핀치가 정체불명의 약을 들이킨 이후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프랙탈 필드’와 ‘프리징 레인’, ‘글레이즈 아이스’, ‘아이스 포그’ 등의 냉기 계열 버프가 계속해서 중첩되자 서번트들이 파괴되는 속도가 점점 더 느려지기 시작했고.
“제길, 이게 무슨...”
급기야 서번트들의 틈바구니에 갇혀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간간이 서번트들 사이로 파고드는 스노우의 스킬 역시 파울러 핀치에게 큰 피해를 주지는 못할지언정, 그의 동선을 제한하는 데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서번트들이 구성한 둥그런 포위망 안에 완전히 갇혀 버린 파울러 핀치.
그는 순간적인 힘을 끌어모아 서번트 세 기를 일거에 소멸시켜 버린 뒤, 포위망 밖으로 몸을 날리며 스캇 비즐리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크윽, 스캇님!”
그러자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 스캇 비즐리가 큰소리로 ‘시동어’를 외쳤다.
“번플레어!”
파울러 핀치가 시간을 끄는 사이 완성한 화염 계열 마법 ‘번플레어’.
비록 5서클 마법에 불과했지만, 이는 스캇 비즐리가 익힌 것들 중 최강의 위력을 지닌 마법이었고.
현재 그는 무려 6써클에 발을 걸친 상태였기에, 본래보다 훨씬 더 막대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열음으로 뒤덮인 대지의 중심.
그곳의 허공에 엄청난 열기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막대한 열기와 함께 엄청난 빛이 발생하자, 살아남은 침입자들과 용병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저게 뭐지?”
“뭔진 모르지만... 엄청나게 위험해 보이는데.”
“피, 피해! 숨어! 어서!”
고래싸움에 낀 새우 신세인 그들은 마법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반대 방향으로 뛰거나, 가릴 것을 찾아 몸을 숨겼다.
그리고 스노우.
그는 심상치 않은 열기를 감지하는 즉시 소환 가능한 모든 서번트들을 불러들여 자신의 위에 두터운 얼음벽을 쌓았다. 그리고...
“운디네 소환, 아이스 월, 글레이즈 아이스, 실드......”
시간이 허락하는 한계까지, 사용 가능한 모든 방어 스킬을 몸에 두르기 시작했다.
곧이어.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주변을 뒤덮었던 얼음의 대지가 일순간 증발해 버렸고, 대지의 파편과 함께 엄청난 양의 먼지구름이 일대를 장악했다.
“해치웠나?”
“스, 스캇님!”
“헙!”
저도 모르게 금기의 단어를 말하고만 스캇 비즐리가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 막았다.
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그 말을 뱉어버린 탓일까?
적어도 이 순간, 행운의 여신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존재는...
‘죽음의 신’에 가까웠다.
쉬이이이이이이익
“실드!”
콰아아아앙
“실드!”
콰아아아앙
“시, 실드!”
콰아아아아앙
“헉, 헉...”
연속으로 날아드는 바람의 칼날을 완벽하게 방어하는 데 성공한 스캇 비즐 리가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때.
스스스스스스스스스...
지면을 스치듯 다가오는 미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스캇님!”
스캇 비즐리보다 한발 먼저 누군가의 접근을 감지한 파울러 핀치가 민첩하게 몸을 날리며 그의 앞을 막아섰지만.
“일렉트릭 쇼크.”
파지지지지지지지지직
엄청난 속도로 다가온 스노우가 새하얀 백광이 번뜩이는 오른손을 휘둘렀고.
“끄억!”
근거리에서 스킬에 적중당한 파울러 핀치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무너져내렸다.
그는 정신이 혼미해진 와중에도 도무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대체 뭐지, 저 움직임은? 저건 최소 상급 엑스퍼트의...’
충격이 누적된 데다, 엘시드의 약효가 다해가는 터라 더 이상 버틸수 없었던 파울러 핀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전장에 홀로 남겨진 5서클 마법사 스캇 비즐리.
“마, 말도 안 돼! 그 마법을 정통으로 맞고도 멀쩡하다고? 아니, 그보다 대체 그 움직임ㅇ...”
서걱
그의 넋두리를 끝까지 들어줄 생각은 없었는지.
스노우는 아공간에서 꺼낸 검을 휘둘렀고.
툭
얼음이 녹으며 생긴 수분이 모두 증발해 버린 건조한 대지 위로.
마법사의 머리가 떨어졌다.
#2
스캇 비즐리의 목이 떨어지던 시점.
2대1의 기간트 전투 역시 그 종막에 다다른 상태였다.
출력 1100rp의 크로스보우 VS 1000rp의 테페리와 800rp의 제페토.
출력 면에서 근소하게 앞선다고는 하나, 테페리와는 고작 100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고. 둘 다 기준 출력 이상의 기간트였기에 그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더군다나 활을 소환 해제한 뒤, 거대한 낫으로 무기를 바꾼 제페토의 견제 역시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기본적인 무기의 간격 자체가 크로스보우의 롱소드보다 훨씬 더 길었기에. 빠른 기동을 구사하며 하체와 후방을 노려오는 제페토의 공격은, 근거리에서 검을 맞대고 있는 테페리에 비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누적시키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펜타르크제...”
오르비스 대륙의 두 제국.
그들의 군사력은 당연히 대륙 최강이었고, 기간트 전력 및 생산 능력 역시 다른 국가들과는 비교를 불허했다.
그중 북부의 패자인 이펜타르크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많은 기간트를 수출하는 국가였는데.
‘테페리’와 ‘제페토’는 동급 기간트 중 가장 많이 생산되고 판매된 스테디셀러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별다른 개성이 없는 제국산 기간트들이 스테디셀러가 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고성능.
동화율을 보정 해주는 것도 아니었고, 특별한 힘을 극대화 시켜주는 마법진도 없었으며, 무기 슬롯이 추가되어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동급 대비 성능이 매우 뛰어났다.
한마디로 기간트 설계 및 생산 기술이 엄청나다는 뜻.
물론 비교적 저렴한 가격 역시, 그들의 기간트가 전 대륙적인 인기를 끄는데 한몫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콰아아아아아앙
츠칵
크로스보우가 테페리의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내는 사이.
어느새 뒤를 잡은 제페토가 거대한 낫을 휘둘러 오른쪽 정강이를 베어냈다.
“크윽...”
빠르게 움직이는 와중에 시도한 공격이었기에, 조금 전 화살 공격만큼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으나. 조금씩 누적된 피해로 인해 벌써 기동력의 상당부분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분명 오너들의 실력은 나보다 한참 아래다.’
상급 엑스퍼트에 오른 지 벌써 6년이 지난데다, 백작가의 비전 검술과 오러임브레스까지 익힌 클레이튼 우드의 실력은 로메인 백작령을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였다.
그가 판단하기에 테페리의 오너는 이제 막 상급 엑스퍼트에 오른 듯했고, 제 페토의 오너는 평균적인 중급 엑스퍼트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런데 합격술의 수준이 말도 못 하게 높다. 이건... 1,2년 호흡을 맞춰 본 솜씨가 아니야.’
자작가에서 파견한 마법사와 엑스퍼트가 습격자들 편에 섰을 때부터, 일의 전 말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핀 자작이 야망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기본적인 전력에서 비교가 안 되는 백작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들 정도로 멍청이는 아닐 테니...
‘헨리 공자를 노린 것이겠지. 스텔라 그리핀이 몸이 안 좋다며 일행의 속도를 늦춘 것도 모두 계획된...’
만약 헨리 로메인에게 불행한 일이 닥친다면.
로메인 백작령의 새로운 후계자 자리는, 매우 높은 확률로 올해 11세가 된 그리핀 자작의 아들에게 이어질 확률이 높았다.
콰아아아아앙
끄아악
화르르르르륵
아아아악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마지막에 일행에 합류한 상급 엑스퍼트와 마법사, 두 용병의 활약 덕분에 기간트를 제외한 습격자들을 모조리 제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내가 패해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만.”
츠칵
“크윽...”
또다시 등에 일격을 허용한 클레이튼 우드의 크로스보우.
그는 정면의 적을 강하게 밀어붙인 뒤, 후방의 위협을 우선 제거하기 위해 몸을 틀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데미지를 입힐 생각이 없는 제페토는 얄밉게도 이미 테페리의 등 뒤로 신형을 날린 뒤였고.
오히려 등을 보이는 바람에 테페리의 롱스드에 어깨를 베이고 말았다.
“제길, 동화율이...”
너무 많은 데미지를 입은 탓인지, 60% 후반을 유지하고 있던 동화율이 60% 밑으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근근이 버티는 것조차 힘들어질 터.
겉으로 보기에도 이미 왼쪽 팔뚝이 절반가량 잘려 나간데다, 외부 장갑의 50%이상이 파괴되어 내부 장갑에 새겨진 마법진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처참한 상태였다.
“이대로 끝인가? 그렇다면 어떻게든 한 놈이라도...”
기간트의 수를 줄일 수 있다면, 대단한 실력의 용병 중 하나 정도는 살아남아 이 상황을 백작가에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클레이튼 우드가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최후의 공격을 준비하려던 순간.
갑자기 미쳐버리기라도 한 것인지.
상급 엑스퍼트를 위기에서 구해낸 용병 마법사가 기간트들을 향해 달려들며 폭풍처럼 마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륵
파지지지지직
타앙타앙탕탕타앙
퍽퍽퍼억퍽퍽...
불의 장막과 뇌전의 장막이 기간트를 덮치고, 주먹만 한 우박 덩어리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으며, 대지에서 솟구친 날카로운 가시가 그들의 신체를 두들겼다.
그리고 얼음, 불, 뇌전, 바람 등으로 이루어진 칼날과 화살 수십 발이 그 뒤를 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마법 폭격으로 인한 엄청난 먼지구름이 일순간 마법사와 기간트들의 모습을 가렸고.
잠시 뒤.
먼지구름이 거치고 드러난 기간트들의 모습은...
‘피해를 줄 수 있을 리가 없지.’
마법에 직격당하기 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클레이튼 우드는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 천천히 검을 들어올려 정면을 겨누었다.
기간트의 마법 저항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너무나 잘 아는 탓이다.
게다가 용병 마법사는 마력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경악스러운 숫자의 마법을 난사하기는 했지만.
기사인 그가 보기에도 결코 기간트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만한 고위 마법은 아니었다.
기간트에 비해 작디작은 몸집의 마법사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전장의 중심에서 조금 벗어난 공터의 끝자락에 서 있었는데.
마법사의 뒤에는 거대한 나무들 사이로 내려앉은 짙은 어둠이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대로 도망쳐라. 제발!’
클레이튼 우드는 용병 마법사가 어둠 속으로 도주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빌었다.
그렇다면 죽을힘을 다해 그가 도망칠 시간을 벌어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용병 마법사는 그의 기대를 배신했다.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기간트들을 일별한 뒤, 귀족 자제들이 타고 있는 마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어쩌면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를 기회가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
클레이튼 우드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진짜로 미친 건가?”
이후, 마법사의 존재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두 기간트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클레이튼 우드는 최후의 힘까지 쥐어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끝내 2대1의 싸움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터어어어어어엉
제페토의 재빠른 견제에 일순간 신경을 빼앗긴 사이.
테페리의 발이 크로스보우의 옆구리를 가격했고.
“커헉!”
쿠우우우웅
균형을 잃은 크로스보우가 지면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새 다가온 제페토가 크로스보우의 목에 낫을 들이밀었다.
“빌어먹을...”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한 클레이튼 우드는 나직한 욕설을 내뱉으며 자신의 최후를 받아들였다.
천천히 다가온 테페리가 롱소드를 든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마법진을 통한 오너의 음성이 기간트의 머리를 통해 흘러나왔다.
[아깝게 됐군. 나쁘지 않은 실력이었다.]
[죽여라...]
작게 고개를 끄덕인 테페리의 롱스드가 오너가 탑승해 있는 기간트의 흉부를 꿰뚫으려는 찰나.
피슈우우우우우우웅
피슈우우우우우우웅
콰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앙
[아악!]
연달아 날아온 거대한 마력 화살 두 개가 각각 테페리의 오른쪽 어깨와 제페토의 등에 명중했다.
두 기간트는 비틀거리며 크로스보우에게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장내의 시선은 필연적으로 모두 한 방향에 집중되었다.
쿠우웅쿠우웅쿠웅쿠웅쿵쿵쿵쿵...
거대한 화살이 날아온 산 중의 나무들 사이.
쿵쿵쿵쿵쿵쿵...
그 짙은 어둠 속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생소한 생김새의 기간트가.
타앗
20여 미터를 날아오른 뒤.
넋을 잃고 서 있던 제페토를 향해 롱소드를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