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습격(5)
#1
조쉬 케나드와 케빈 하버는 칼루아 왕국 카먼 후작가 소속 기사들이었다.
칼루아 왕국의 실세인 카먼 후작 휘하의 수많은 기사 중에서도 둘의 존재는 매우 특별했는데.
그건 그들의 역할이 후작가가 대놓고 행하지 못하는 음지의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후작가 소속 17명의 오너 중에서도, 두 사람의 향한 카먼 후작의 신뢰는 엄청나게 두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떨어진 새로운 명령.
‘루페른 왕국 로메인 백작가의 후계자를 죽여라.’
더 정확하게는 후계자의 일행을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었다.
음모를 획책한 이가 로메인 백작의 최측근 중 하나였기에, 일의 시작 전부터 적의 전력을 모두 꿰뚫고 있었고. 심지어 제거 대상의 바로 옆에는 적들의 일정을 어느 정도 입맛대로 조절할 수 있는 첩자까지 존재했다.
덕분에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포인트에서 습격을 감행.
적의 기간트를 제압하기 직전의 상황까지 끌고 올 수 있었다.
용병 마법사와 엑스퍼트의 실력이 생각보다 뛰어났던 탓에, 병력 대부분을 잃어버린 건 예상외의 상황이었지만.
임무만 성공시킬 수 있다면, 그 정도 손해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설령 마법사나 엑스퍼트가 도망친다고 한들, 주변 영지까지 최소 한나절은 떨어진 이곳에서 기간트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을 리 없었다.
문제는 적의 기간트였다.
‘과연, 루페른의 오너답군. 나 혼자선 그리 오래 버틸 수 없었겠어.’
루페른의 오너들은 타국의 오너들에 비해 본신의 실력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루페른제 기간트들이 지닌 동화율 보정 기능의 영향으로, 기간트 운용 능력보다는 본신의 실력을 조금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존재했기 때문인데.
그런 이유로 두 제국의 오너들 정도를 제외하고는, 동급의 기간트로 루페른의 오너를 상대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조쉬 케나드 역시 상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라 있었고. 기간트 또한 1100rp의 크로스보우와 비슷한 성능의 테페리를 타고 있었지만, 스스로가 판단하기에도 자신과 적 오너와의 사이에는 적지 않은 기량 차이가 존재했다.
‘하지만 승패가 실력만으로 갈리는 건 아니라서 말이야.’
제페토의 재빠른 견제에 크로스보우 오너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순간.
조쉬 케나드는 동화율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며 마력엔진을 순간적으로 오버클럭시켰다.
동화율 78, 79...... 82%
마력엔진 799rp, 811rp...... 817rp
크로스보우가 제페토의 낫을 방패로 막아낸 뒤 검을 내지르려는 순간.
자세를 낮춘 채, 확연히 빨라진 스피드로 접근한 테페리가 검을 내질렀고.
크로스보우가 기이한 궤적으로 검을 움직여 방어에 성공했지만.
터어어어어어엉
몸을 뒤로 눕히듯 기울인 테페리에게 옆구리를 걷어차이고 말았다.
쿠우우우웅
균형을 잃은 크로스보우가 지면에 주저앉았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접근한 제페토가 크로스보우의 목에 낫을 들이밀었다.
[잘했다, 케빈.]
[수고하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조쉬 케나드는 오른손에 든 검을 늘어뜨린 채 천천히 크로스보우를 향해 접근했다.
조쉬 케나드는 오른팔을 들어 올리며 외부로 이어진 통신 채널을 열었다.
[아깝게 됐군, 나쁘지 않은 실력이었다.]
크로스보우의 오너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여라...]
비록 적이지만 훌륭한 실력을 보여준 것에 대한 예우로, 단칼에 죽여주리라 마음먹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려던 찰나.
피슈우우우우우우웅
피슈우우우우우우웅
갑작스레 바람을 찢어발기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고.
콰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앙
날아드는 화살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조쉬 케나드는 간신히 상체를 기울여 오른쪽 어깨에 타격을 입는데 그쳤지만.
[아악!]
등 뒤에서 날아드는 화살에 재빨리 반응하지 못한 제페토의 오너 케빈 하버는 등 한가운데에 화살을 적중당하고 말았다.
두 기간트는 자연스럽게 크로스보우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틈에 7미터가 조금 안 되어 보이는 기간트가 거대한 나무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든 그 기간트는 이내 공중으로 뛰어오른 뒤.
멍하게 서 있던 제페토의 머리 위로 롱소드를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케빈!]
창졸간에도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창대를 들어 올린 제페토의 오너 케빈 하버.
하지만 20여 미터의 높이가 더해진 기간트의 무게에 한쪽 무릎이 땅에 닿으며, 제페토의 전신에 엄청난 부하가 걸렸다.
[크윽...]
전용 통신 채널로 전해지는 신음소리에 조쉬 케나드가 급히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터엉
어느새 몸을 일으켜 자신의 앞을 막아선 크로스보우로 인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갑작스럽게 난입한 기간트 오너의 기량이 특출나게 뛰어나 보이진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대체 저 기간트는 뭐지? 어떤 미친놈이 기간트 머리를 저렇게 정교하게...”
머리에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테를 두른 인간을 닮은 기간트.
‘하지만 인간이라기엔 생긴 게 조금...’
인간과 유사한 얼굴 형태를 띠고 있기는 했지만, 자세히 보면 납작한 코와 얼굴 전체를 뒤덮은 짧은 털 등... 오히려 몬스터 쪽에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뭐, 생김새야 어찌됐건...”
중요한 것은, 초반 수세에 몰렸던 제페토가 어느새 거대한 낫을 휘두르며 상대 기간트를 몰아붙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문제는 자신.
낭패한 몰골이긴 했지만, 아직은 힘이 남아있는 듯한 크로스보우를 1대1로 상대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마차의 문이 열리며, 조금 전 안으로 들어갔던 마법사가 귀족 자제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중 온몸이 굳은 듯 보이는 한 여자의 뒷덜미를 쥔 채 밖으로 나온 용병 마법사는...
휘이익
철퍼덕
그녀를 차디찬 대지 위에 내동댕이쳐 버렸고.
“.................................!”
얼굴부터 떨어진 그녀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2
온갖 마법으로 좌중의 눈을 가린 채, 시야가 닿지 않는 지점에 안티가를 소환해 놓은 나는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려 마차로 향했다.
내가 가진 스킬로는 기간트에 흠집조차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원격 조종(S)’은 탑승하지 않은 기체를 원하는 데로 제어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본래라면 기체의 조종에 집중하느라 다른 일을 동시에 하는 건 불가능한 게 정상일 테지만.
S급 특성의 고유스킬답게, 스킬이 발동하는 순간 자아가 둘로 분열되기라도한 것처럼 기체와 본신 모두를 자연스럽게 제어할 수 있었다.
나는 안티가로 하여금 크로스보우를 구원하도록 한 뒤.
빠르게 마차에 접근해 문을 열었다.
“......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너만 사라지면 내 동생이 로메인 백작가의 주인이 될 수... 헉!”
마차 안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온갖 물품이 부서져 나뒹구는 가운데, 헨리 로메인과 스텔라 그리핀이 검으로 서로를 겨누고 있었고.
버지니아 남작가의 남매 중 동생 쪽은 복부를 칼에 찔린 듯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미 상당량의 피를 흘린 탓인지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는데, 그의 누나는 쓰러진 동생을 부둥켜안은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중이었다.
스텔라 그리핀의 검과 옷에 묻은 피를 보아하니, 로데릭 버지니아를 저 꼴로 만든 원흉이 누구인지는 명확해 보였다.
나를 발견한 스텔라 그리핀이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내질렀다.
쉬이이이이이이익
어릴 때부터 혹독한 수련을 해온 것인지, 검에 실린 기세가 제법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래봤자 아직 엑스퍼트에도 이르지 못한 애송이일 뿐.
나는 ‘강철피부(C)’와 ‘경화(C)’ 스킬을 발동시킨 뒤, 손으로 그녀의 검을 낚아챘다.
텁
“아...”
“가정교육을 잘 못 받았군. 다짜고짜 검부터 들이밀다니.”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가 뭔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당신, 백작가로부터 얼마를 받았지? 그 금액의 열 배... 아니, 스무 배를 줄테니 지금부터 내 말...”
나는 개소리를 늘어놓으려는 스텔라 그리핀에게 두 가지 스킬을 시전했다.
“나커타이즈(마취 스킬). 사일런트(침묵 스킬).”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입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흘러나 오지 않았다.
고작 오러 유저 상급(그녀의 나이치고는 훌륭한 수준이었지만)에 불과한 스텔라 그리핀이 C등급 스킬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핀 자작가의 헛짓거리로 인해, 마리에스타 아카데미의 정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기간트들과의 만남이 늦어지고 말았다.
내 손속이 거칠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
나는 석상처럼 굳어버린 그녀의 뒷덜미를 낚아채며 말했다.
“이 지경까지 왔으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채지 못한 멍청이는 없겠지?”
눈앞에서 극적인 장면을 목격한 탓인지, 꽤나 거친 말투였음에도 헨리 로메인과 리즈 버지니아는 그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적의 기간트들을 제압하면 다시 마리에스타 아카데미로 향한다.”
두 사람은 내심 아카데미 따위가 중요한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내가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마지못해 고개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어느새 침착한 표정을 회복한 헨리 로메인이 입을 열었다.
“적의 기간트는 두 기가 아닙니까? 우드경 혼자서 상대하는 건 힘들 텐데요.”
아무래도 마차의 창문을 통해 어느 정도 전황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이쪽도 지원군이 도착한 것 같으니.”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고.
연이어 금속의 마찰음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쓰러져 있는 로데릭 버지니아에게 힐을 퍼부어 응급처치를 마친 뒤 마차 문을 나섰다.
“따라와라. 그리고 전투가 끝날 때까지 잘 감시하도록.”
나는 스텔라 그리핀을 두 사람의 앞으로 들어 보이며 당부한 다음.
휘이익
철퍼덕
들고 있던 그녀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
“헉!”
“앗!”
스텔라 그리핀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대다 정신을 잃었고.
다른 두 사람 역시 적잖이 놀란 듯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터어어어어어엉
카가가강
네 대의 기간트는 숨 막히는 접전을 치르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저것들을 처리할 차례다.
#3
원격조정으로 움직이는 기체는 스노우가 탑승했을 때의 40%가량의 성능을 발휘한다.
물론 각종 버프들을 두르지 않은 순수한 상태를 의미했다.
‘고작 40%?’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무려 S등급 파일럿이 탑승한 기체의 40%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 증거로 원격조종 중인 안티가는 오너가 탑승한 동급 기간트 제페토와 비등 비등한 승부를 펼치고 있었다.
물론 마력 공급원인 오너의 부재로 인해, 파워 면에서는 한참 밀리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속도에서만큼은 오히려 제페토를 상회하는 움직임을 선보이는 중이었다.
스노우는 그런 안티가를 내버려 두고는, 확연하게 밀리고 있는 크로스보우에게로 향했다.
‘어차피 직접적인 타격은 통하지 않아.’
기간트의 마법 저항력은 고작 3,4써클 마법과 비슷한 위력을 지닌 그의 스킬들로는 뚫어낼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스노우가 선택한 방법은 테페리의 움직임을 최대한 방해하는 것이었는데.
이 분야에서만큼은, 엄청난 마력량과 시전 속도를 보유한 스노우가 마법사들에 비해 확연한 우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디그.”
크로스보우의 검을 방패로 막아낸 뒤, 옆으로 돌아나가며 공격을 시도하려던 테페리의 발밑에 돌연 지름 1미터가량의 구덩이가 생성되었고.
그 정도로 기간트의 중심이 완전히 무너지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공세로 전환하려던 타이밍을 살짝 어긋나게 하는 효과 정도는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크로스보우의 오너인 클레이튼 우드는 그런 사소한 이득으로도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노련한 기사였다.
“디그, 바인딩, 블라인드, 아이스 샤클스......”
연이은 스킬 공격에 번번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던 테페리가 스노우를 우선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기회를 엿봤지만, 크로스보우가 쉽사리 틈을 내주지도 않았을뿐더러.
“제길, 저게 마법사라고? 어지간한 엑스퍼트보다 훨씬 빠르잖아!”
애초에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스킬을 연사해대는 스노우를 잡아내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놀란 것은 아군인 클레이튼 우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순한 마법사가 아니었어. 마검사... 마검사가 분명해. 그것도 엄청난 실력을 지닌.’
기간트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활약할 수 있는 마법사라면 최소한 6써클이라고 봐야 했다. 거기에 상급 엑스퍼트 중에서도 상위권인 자신에 버금가는 몸놀림이라니.
콰지직
“커어어억!”
크로스보우를 궁지로 몰아넣었던 테페리는 결국 기간트와 마법사의 합격을 당해 내지 못한 채 가슴을 꿰뚫리고 말았고.
콰드드득
테페리를 처리한 크로스보우에 의해, 안티가를 몰아붙이던 제페토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터엉
마력이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린 클레이튼 우드의 크로스보우가 한쪽 무릎을 꿇은 뒤 외부 통신 채널을 개방했다.
[하아, 하아, 하아...]
한동안 거친 숨소리만 들려오던 크로스보우의 헤드에서 클레이튼 우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사합니다. 혹시 백작님께서 보내신...]
클레이튼 우드가 생명의 은인인 기간트에게 말을 거는 순간.
쿠우웅쿠우웅쿠웅쿠웅쿵쿵쿵쿵......
개성 있는 얼굴을 지닌 그 기간트는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속도로 내달려.
어둠의 장막을 펼치고 있는 거대한 나무들 사이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
그리고 그 모습을.
크로스보우에 탑승한 클레이튼 우드가 할 말을 잃은 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