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41화 (41/169)

41화 이 녀석을 빌려가겠다

#1

제우스가 주력 기체였던 시절에는 ‘원격조종(S)’ 스킬의 활용도가 매우 낮았다.

제우스의 활약이 필요한 곳은 대부분 이미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한 전장이었고.

터져버린 던전에서 튀어나오는 건 대부분 육상 몬스터들이었기에, 제우스의 정체성은 어디까지나 ‘전폭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원격조종으로 운용되는 제우스의 파괴력으로는 B등급 이상의 몬스터들에게 유효한 타격을 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원격조종 기체는 파일럿이 탑승했을 시의 30%(그 당시)에 달하는 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고, 버프조차 없이 고작 30%의 마력이 담긴 무기들로는 C등급 몬스터를 처리하는 게 한계였던 것이다.

게다가 스킬이 적용되는 최대 범위 역시 600여 미터에 불과했던 터라, 비상시긴급 출동 수단으로 사용하기에도 애매했다.

6km라면 몰라도, 600m 정도면 그냥 달려가서 탑승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기간트는 달랐다.

[원격조종(S) : 탑승물을 원거리에서 운용할 수 있다. 탑승물과의 결속이 공고할수록 스킬 효율이 증가한다. 원격조종 등록 가능 기체(3).

no.1 제우스(C) 최대 980미터

no.2 토마호크 SS7 스피릿(E+) 최대 23.5킬로미터

no.3 안티가(B-) 최대 550미터]

안티가에 탑승했을 때, 나는 (노 버프 상태의)본신과 거의 비슷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이는 대략 평균적인 중급 엑스퍼트 수준이었다.

그리고 원격조종으로 운용하는 안티가는 그것의 40%에 준하는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는데.

막 중급에 발을 들인 엑스퍼트 정도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오너가 탑승해 있는 기간트처럼 순간적인 오러의 집중으로 파괴력을 높이거나, 마력엔진을 오버클럭시켜 짧은 순간 한계 이상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등의 기예를 발휘할 수는 없었기에, 정말로 (기간트로서)중급 엑스퍼트 수준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빠르게 날아다니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우스와는 달리. 팔과 다리가 달려있어, 날아다니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이 가능한 기간트의 효용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뛰어났다.

현재 나는 루페른 왕국 남부 알페스 산맥의 한 이름 모를 산을 넘고 있었다.

바이크를 타고 달리며 보이는 족족 고위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있었는데.

물론 사냥의 주체는 내가 아닌 ‘원격조종(S)’ 스킬을 적용 중인 안티가였다.

이 산에는 베헤르디아 대수림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워낙 높고 험한 산세로 인해 다수의 고위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었는데.

“안티가.”

[안티가(B-)가 출격합니다.]

온몸에 철갑을 두른 12미터 크기의 거대한 곰이 내 앞을 막아섰고.

나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안티가를 소환했다.

파아아아아앗

옅은 빛무리와 함께 등장한 안티가는 곧장 철갑곰을 향해 달려들었고.

몬스터가 휘두른 거대한 앞발을 빠르게 상체를 숙여 피해내고는, 오른손으로 곰의 왼쪽 옆구리를 후려쳤다.

뻐어어어어어엉

“..........!”

원래 너무 아프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법.

철갑곰의 눈과 입이 한계까지 벌어졌고, 벌어진 눈과 입에서는 눈물과 침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후 한동안 매타작이 이어졌고.

퍼어어어어억

꾸에에에에엑

콰아아아아앙

끼에에에에에에엑

대충 A급 상위권 정도로 보이는 몬스터는 단 20여 초 만에 다진 고깃덩이로 변하고 말았다.

“이거... 잘못하면 중독되겠네.”

기간트를 원격조종 스킬로 운용하는 건, 제우스나 바이크 같은 일차원적인 기체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재미가 있었다.

나는 그렇게...

껍데기만 남은 기간트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펠리체 영지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2

펠리체 영지 용병 길드 지부.

콰아아아아앙

별안간 길드 건물의 문이 부서질 듯한 기세로 열리며 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뭐, 뭐야?”

“습격인가?”

“이 멍청아, 어떤 미친놈이 용병 지부를 습격해!”

“대체 어떤 녀석이...”

거친 삶을 살아가는 용병들인 만큼 일상적인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했고, 대부분이 고리눈을 뜨며 소란을 일으킨 장본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

“아...”

“저자는...”

“야, 쳐다보지 마. 눈깔 돌리라고.”

“뭐야? 저 녀석이 누군... 읍! 읍읍읍! 읍읍!”

“닥쳐.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새끼야!”

들어온 사내의 정체는 5써클 마법사로 알려진 스노우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5써클로 알려‘졌었던’ 마법사였다.

로메인 백작령을 떠들썩하게 만든 후계자 습격 사건.

그 일에서 살아 돌아온 용병들에 의해 저 마법사의 활약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고.

소문이란 게 의례 그렇듯이.

스노우는 최초 ‘백작가의 오너를 도와 기간트를 물리친 마법사’에서, 현재는 ‘홀로 기간트를 때려잡은 마검사’로 신분이 격상된 상태였다.

용병 지부 내부를 가득 채웠던 열기는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용병들은 입구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다들 딴청 피우기 바빴다.

하지만 지부의 직원들만은 새로 방문한 고객을 외면할 수 없었고,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최고참 제프 롭슨이 그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 오세요, 스노우님. 금번 임무에서 엄청난 공을 세우셨다는 얘ㄱ... 크억! 왜, 왜 그러십니까, 스노우님!”

제프 롭슨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빛과 같은 속도로 다가온 스노우.

그가 데스크 뒤쪽에 서 있던 제프 롭슨의 멱살을 끌어당기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놈... 잘도 나를 속였더군.”

“네? 네에에에? 소, 속이다뇨? 제가 언제 스노우님을...”

스노우가 양쪽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

“마리에스타 아카데미의 정문에 있다는 기간트... 그게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네놈은 알고 있었나?”

무의식적으로 스노우의 손목을 잡은 채 켁켁거리던 제프 롭슨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켁, 그게 무슨? 텅 빈 껍데기라뇨? 켁켁, 저기... 일단 이걸 좀 놓으시고 천천히 대화를...”

제프 롭슨의 멱살을 놓아준 스노우가 말했다.

“이제 말해라. 나를 속인 이유를.”

“아니... 그러니까 저는 스노우님을 속인 적이 없다니까요.”

“거기 있는 건 기간트가 아니었다. 기간트‘였던’ 껍데기였지.”

“......그러니까 그 껍데기라는 게... 마리에스타 아카데미의 정문에 있는 글라디우스와 크로스보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스노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프 롭슨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아니... 그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멀쩡한 기간트를 왜 거기에 세워둬요? 그게 돈이 얼마짜린데. 뼈대랑 외부장갑만 남아있는 장식품인 게 당연하죠.”

“넌 분명 내게 ‘기간트’라고 했다.”

“아니... ‘뼈대랑 외부장갑만 남아있는 장식용 기간트’라고 설명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당연히 기간트라고 해도 알아듣는 게 상식적인...”

빠아아아악

“끄아아악!”

스노우는 내심 제프 롭슨의 말에 틀린 부분이 없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너무나 당당한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머리통을 후려갈겨 버렸다.

순간 눈앞에 별이 번쩍하는 착각이 들 정도의 고통에 발끈하려던 제프 롭슨.

“이, 이게 무슨... 헙!”

하지만 대륙 북부 알카론 산맥의 만년설처럼 차가운 스노우의 눈빛을 마주하자, 더이상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잠시 제프 롭슨을 내려다보며 눈알을 굴리던 스노우가 그의 뒤로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오늘 하루, 이 녀석을 빌려가겠다.”

그러자 제프 롭슨의 뒤에서 무척이나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든지 데리고 가십쇼. 좀 상해도 됩니다. 죽이지만 않으시면. 하하하...”

루페른 용병 길드 펠리체 지부장 릭 헬턴트.

그는 직원 한 명의 안위와 지부의 평화를 맞바꿀 수만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지, 지부장님?”

“어서 모시고 나가게, 제프.”

“어,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시끄러, 마법사님이 기다리시지 않나? 빨리 모시고 가게.”

“제길, 두고 보자!”

원망스러운 눈길로 지부장을 바라보던 제프 롭슨.

결국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비척비척 마법사의 뒤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3

고통스러운 하루가 되리란 제프 롭슨의 예상과는 달리.

펍으로 그를 데려간 스노우는 음식과 술을 잔뜩 시켜준 뒤,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제프 롭슨은 이게 웬 횡재냐는 듯, 음식과 술을 퍼먹으며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다들 놀랐습니다. 그리핀 자작이 그토록 오랜 시간 야망을 불태워 왔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는 정말 철저하게 ‘소탈하고 형을 위하는 동생’을 연기해왔거든요.”

로메인 백작과 그리핀 자작.

어린 시절 둘은 정말로 사이좋은 형제였다.

하지만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단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는 형에 대한 동생의 질투와 미움은 커져만 갔고.

불행하게도 형에 비해 훨씬 더 뛰어난 능력을 지녔던 동생은 도무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냉철한 이성을 지녔던 그는 형을 향해 이를 드러내는 대신, 철저하게 좋은 동생을 연기하며 수십 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왕국의 외무부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며 차근차근 계획을 진행시켰고.

무려 20여 년을 외교관의 신분으로 보내며 타국의 인사들과 인맥을 쌓은 뒤, 마침내 완벽한 기회를 잡아 음모를 진행시킨 것이다.

자신이 아닌 자신의 아들을 백작령의 주인으로 만들려 했다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딸마저 희생시키려 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본 모습은 냉철하고 잔인한 성정의 야심가라 할만했다.

아마 스노우라는 변수가 아니었더라면, 그의 계획은 멋지게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자작은 어떻게 됐지?”

“의외로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았다더군요. 상급 엑스퍼트이자 오너인 그가 저항하고자 했다면 쉽게 제압하긴 힘들었을 텐데 말입니다. 어쩌면 그조차 냉철한 판단을 내린 걸지도 모르죠. 어차피 거사가 들켜버린 이상 모든 건 끝이었으니까요.”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상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다면, 확실히 뛰어난 인물이긴 하군.”

“뭐, 재능이라면... 초급 엑스퍼트에서 더이상 발전이 없는 로메인 백작과는 비교하기 힘들죠. 그래도 이런 대영지의 지배자로는 성품이 온화한 백작이 더 낫다고 봅니다. 물론... 영지민들 입장에서는요. 게다가......”

제프 롭슨이 덧붙인 말에는 관심이 없는지,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스노우가 입을 열었다.

“그쪽 일은 이제 관심 없다.”

“네? 하지만 아직 스노우님이 받으실 보상이...”

“백작이 한 10만 골드쯤 줄 것 같나?”

“네? 아니, 그렇게 많이는...”

“그럼 신경 쓸 것 없다.”

“네...”

“그보다.”

스노우가 상체를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서대륙에서... 용병 오너가 활동하기 가장 좋은 곳이 어디지?”

“......?”

이번 일을 겪으며 더 뛰어난 기간트를 향한 갈망이 한층 강해진 스노우.

그는 브라이드 백작에게 받은 ‘구매권’으로 기간트를 구입하는 즉시.

평화로운(?) 루페른 왕국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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