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투기 버리고 기간트 탑니다-42화 (42/169)

42화 그려라

#1

정보 길드만큼은 아니라지만, 용병 길드나 어쌔신 길드 역시 대륙의 정세나 소문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의뢰’를 바탕으로 하는 두 세력 모두 ‘정보’에 어두워서는 제대로 된 활동을 영위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루페른 왕국에서 손에 꼽히는 규모를 지닌 펠리체 영지의 용병 지부, 그곳 지부장의 오른팔임을 자처하는 제프 롭슨 역시 대륙의 정세나 정보에 밝을 수밖에 없었다.

“용병 오너가 활동하기 좋은 곳이라...”

제프 롭슨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동대륙인을 흘깃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게 왜 궁금한 거지? 그는 오너가 아니잖아? 혹시... 기간트 오너가 될 생각인가?’

백작가 후계자의 암살 음모에서 살아돌아온 용병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는 제프롭슨 역시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었다.

지부 건물로 몰려온 녀석들이 대단한 모험담이라도 겪은 것처럼 하루 종일 떠들어 댔으니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뭐, 대단한 일을 겪은 건 사실이긴 하지.’

기간트의 습격을 받고 살아돌아온 용병의 이야기라면 정말 흔치 않은 소재이기는 했으니까.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묘사된 저 스노우라는 동대륙인은 최소 상급 오러 엑스퍼트이자 6서클 마법사였다.

그런 엄청난 실력자가 기간트 오너가 된다?

물론 본신의 무력과 기간트 운용 능력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이긴 했지만, 만약 평범한 정도의 재능만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제법 무시무시한 기간트 오너가 탄생할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대륙에는 마검사로서 오너가 된 인물들이 몇 존재했고, 그중 기간트운용 능력이 평범한 축에 속하는 이들조차 기간트 전투에서 엄청난 능력을 과시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런 오너들 중 6서클에 오른 이는 없었기에, 저 스노우라는 자의 잠재력은 더욱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의문의 기간트...’

마치 한 몸처럼 저 동대륙인과 호흡을 맞춰 적 기간트를 상대했다는 정체불명의 기간트 역시, 로메인 백작령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소문 중 하나였다.

‘정말 그 기간트가 이자와 연관이 있다면, 제법 큰 세력의 비호를 받고 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동대륙 어느 나라의...’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떠올려 본 제프 롭슨이었지만.

이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양 대륙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서로가 서로를 침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두 대륙의 분쟁이 발생했던 곳은 제3의 대륙인 알텐시아가 유일했다.

그렇기에 알텐시아도 아닌 이곳 서대륙으로 스파이 같은 걸 보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고작 스파이로 써먹기엔, 저 동대륙인의 능력은 너무나도 출중했다.

‘뭐, 그런 것까지 내가 신경 쓸 이유는 없지.’

생각을 정리한 제프 롭슨은 스노우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사실 용병 오너가 가장 큰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알텐시아 개척단에 지원하는 겁니다. 대륙의 90% 이상이 마경이나 다름없다는 그곳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 이들은... 사실상 기간트 오너 이외엔 없으니까요.

제가 알기로 개척단 소속 오너들의 한 달 기본급은 최소 1000골드 이상입니다. 거기에 실적에 따라서는 수천 골드의 인센티브를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알텐시아 개척단이라면 베른 요세의 기간트 오너인 테리 헤링스에게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기본급만 1000골드라고?’

1000골드라면 금십자기사단 오너들이 받는 기본급의 서너 배에 달하는 거액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곳까지 무사히 도착하리라 장담할 수도 없을뿐더러, 임무의 대부분은 미개척지에 존재하는 마수들을 사냥하는 것이었기에 내가 원하는 바와는 거리가 멀었다.

잠시 말을 끊고 잔에 남은 맥주를 단번에 들이킨 제프 롭슨이 말을 이었다.

“크... 음, 범위를 서대륙 내부로 좁힌다면... 만약 저라면 나크란 제국이나 카이샨, 그도 아니면 마라몬트 왕국으로 가겠습니다.”

대륙 동부의 사막왕국 카이샨과 마라몬트 왕국이라면 수백 년 동안 철천지원수로 지낸 앙숙이었고, 나크란은 대륙의 유이한 제국으로서 실질적인 대륙 최강의 세력이었다.

나는 제프 롭슨의 빈 잔에 맥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자세히.”

제프 롭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원래 카이샨과 마라몬트는 매년 수십 차례 국지전을 벌이는 앙숙이죠. 그런데 올해 들어 전투의 규모가 국지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양측 모두 이미 국경에 수만 대군을 주둔시킨데다, 대부분의 오너들이 집결을 마쳤다는 소문입니다. 43년 전 끝난 ‘3년 전쟁’ 이후 최초의 전면전이 일어나리라 예상하는 이들이 많더군요. 당연히 양쪽 모두 용병들을 미친 듯이 고용하고 있는데, 용병 오너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고 합니다.”

“음...”

이건 확실히 구미가 당긴다.

일단 전쟁이라는 예측 불가의 상황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고, 수백의 기간트가 집결했다는 말에는 가슴이 떨릴 지경이었다.

제프 롭슨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나크란 제국의 경우에는... 벌써 2년째 내전이 지속되고 있죠. 실력 있는 오너라면, 황제의 자리를 두고 각축을 벌이는 4개 세력 중 어느 곳에 가더라도... 최소한 알텐시아 개척단이나 동부 전선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일단 내전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대륙 최강국의 지배자가 될 수 있으니 돈을 아낄 이유가 없으니까요. 뭐, 어차피 패하면 뒤가 없기도 하고.”

확실히 제국 정도 되는 곳의 지배자라면, 내전에서 패한 경쟁자를 살려 둘 이유가 없겠지.

게다가 나크란 제국은 명실상부한 대륙 최강국.

그 말인즉, 대륙에서 가장 강한 기간트 전력을 지닌 국가라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또다시 맥주를 홀짝이기 시작한 제프 롭슨에게 물었다.

“나크란 제국의 기간트 전력은 어느 정도지?”

제프 롭슨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공식 발표로는 700대 정도라고 하는데... 큭, 그걸 믿는 바보는 없죠.”

옅게 미소 지은 그가 왼손 검지를 곧게 펴며 말을 이었다.

“최소 1천 대.”

제프 롭슨의 입에서 나온 숫자에, 나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고 말았다.

‘그러니까 제국이란 무대 안에서... 1000여 대의 기간트가 난장판을 벌이고 있다는 뜻이로군’

츄르릅...

이건 정말, 군침이 돌지 않을 수 없었다.

#2

비록 귀환 마법의 존재로 인해 기간트를 포획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지만.

기간트전을 치르는 것만으로도 더욱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제국의 두 기간트를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인 이후, ‘파일럿(S)’ 특성의 고유스킬들은 꽤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는데.

최초의 기간트전(비록 탑승하지는 않았지만)이었던 탓인지.

수복 스킬의 수복 한계와 원격조종의 최대 거리, 격납고의 크기, 변형 스킬의 변형 한계가 모두 유의미하게 증가했다.

기간트로 상위 몬스터 수십 마리를 때려잡았을 땐 눈에 띄는 변화가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내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는 명약관화했다.

“기간트 획득이 최우선 목표이긴 하지만... 그걸 위해서라도 일단은 강해져야 해.”

일단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 이상 망설일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이날, 나는 술에 잔뜩 취한 제프 롭슨으로부터.

한가지 매우 유용한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3

“꽤 실력 있는 엔지니어였다고 들었다.”

“끄응... 대체 어느 놈이 지껄인 거냐? 릭은 입이 가벼운 놈이 아니니... 제 프, 그놈이겠군.”

“실력 있는 엔지니어, 맞나?”

안드레아 볼코프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이내 입가를 씰룩거리며 입을 열었다.

“대체 뭐지, 그건? 내 입으로 자화자찬이라도 하라는 소리냐?”

“정말 실력이 있다면 못 할 것도 없지.”

“말이 안 통하는 녀석이로군. 이번엔 또 무슨 일로 온 거지?”

안드레아 볼코프의 물음에 스노우는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물어볼 게 있다. 아니, 의뢰를 하나 하도록 하지.”

“의뢰라면 용병 지부나 찾아가 봐.”

“거기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

스노우는 돌돌 말려 있는 종이를 펼쳤고, 그곳에는 대충 끄적인 인체 모형도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본 안드레아 볼코프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이게 뭐지? 몬스터 시체?”

“기간트다.”

“기간트? 이게?”

얼굴은 대충 찌그러진 동그라미를 그려놓았고, 기간트치고는 꽤 슬림한 몸통에 팔이 길고 다리가 짧았다.

“세상에 이런 기간트가 어디 있단 말이냐?”

“...대충 그린 거다.”

“이걸 네 녀석이 그린 거라고?”

스노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안드레아 볼코프는 종이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이걸 기간트라고 그려 온 거냐?’

...라고 타박하는 듯한 얼굴.

그런 그의 표정을 확인한 스노우는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화가를 고용해 정밀하게 그리거나, 본인 스스로 더 잘 그려 올 수도 있었지만... 안티가의 모습을 목격한 이들이 꽤 있었기에 대충 형태만 갖춘 그림을 그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훨씬 더 잘 그릴 수 있다고.’

지구에서 인간형 병기 개발에 꽤 많이 투자했었던 만큼, 설계 과정에서부터 꽤 적극적으로 개입했었고. 그 과정에서 익힌 스케치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림 실력이 아니었다.

“이런 비율을 지닌 기간트에게 적합한 신체 밸런스를 알고 싶다.”

“비율이라면 팔과 다리의 길이를 말하는 건가?”

“그래.”

“이런 비율이라면 일단... 잠깐, 그런데 내가 이걸 왜 알려줘야 하는 거지?”

촤륵

스노우는 말없이 주머니 하나를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돈으로 뭐든 해결될 거라는 생각...!”

잠시 주머니와 스노우를 번갈아보던 안드레아 볼코프가 미간을 찡그리며 주머니를 열었고, 이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말했다.

“그래, 뭐가 궁금한가? 참고로 내가 알고 있는 비전과 관련된 이야기는 해줄 수 없다.”

은퇴를 원하는 엔지니어들은 ‘마나의 맹세’를 통해 비전을 유출시키지 않겠다는 마법적인 제약을 받아들여야만 병기창을 떠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대단히 양심적인 업체에서나 가능한 일이었고, 어떤 곳은 한 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안드레아 볼코프는 나크란 제국의 오티스 후작가가 운영하는 병기창 소속 엔지니어였고.

제국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은퇴한 뒤 고향인 루페른 왕국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는 중이었다.

“비전 따위는 필요 없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이 기간트에 최적화된 신체 밸런 스일 뿐이니까.”

“그 정도라면야...”

사실 고작 그런 질문을 할 것이었다면, 굳이 엔지니어를 찾아올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고작 그런 걸 이런 거금을 주면서까지 내게 물을 필요가 있나? 그 정도는 기간트에 대해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답 할 수 있는 문제인 것 같은데.”

하지만 이어지는 스노우의 말에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그조차 또다시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이 기간트의 스펙은 6.7미터에 7.2톤이다. 흉부의 두께는 약 1.7미터지. 이걸 1.3미터까지 줄일 경우, 최적의 밸런스를 알고 싶다. 아, 참고로 무게는 그대로다.”

안드레아 볼코프는 어이가 없었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만약 그런 걸 계산해서 알려준다고 치면... 팔다리를 엿가락처럼 늘였다 줄이기라도 할 셈인 건가?

게다가 몸통의 두께가 달라지는데 무게는 그대로?

그리고 무엇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기간트 내부를 오너가 아닌 레카티움(대륙에서 가장 무거운 금속)으로 채우기라도 했다더냐? 저 신장과 몸통 두께로는 절대로 6톤이상의 무게가 나올 수 없다! 어떤 멍청한 엔지니어가 이딴......”

안드레아 볼코프가 길길이 날뛰며 역정을 냈음에도, 스노우는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촤르륵

조금 전과 똑같은 주머니 하나와 새하얀 백지 한 장을 카운터 위에 꺼내놓으며 말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 그러니...”

그의 손가락이 카운터 위에 놓인 백지를 가리켰다.

“그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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